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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대상 관련한 쪽글 (1): 프랑코 모레티에 반하며

적절한 의문을 제기해주셨군요.
안 그래도 제가 준비하는 후속 글에서 이를 다루려고 했습니다.
저번 글이 마무리된 지점에서부터 어떻게 나아갈지 잘 모르겠어서, 제 마음대로 한 사람을 붙잡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재출발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 제물이 될 사람은 모레티입니다.
그리고 모레티와 제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저는 지금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간단하죠: "사회학적인 문학 연구는 사회학보다 지루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전 최근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를 다시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지나가면서 얘기했듯이, 전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좀 충격 받았습니다.
전 『세상의 이치』와 『근대의 서사시』로 대표될 수 있을 모레티의 초기 저작들은 좋아하지만, 『멀리서 읽기』와 『그래프, 지도, 나무』로 대표될 수 있을 모레티의 후기 저작들은 정말이지 싫어합니다.
전 원래 모레티의 저러한 변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똑똑한 양반(우창 샘 말마따나 모레티의 글은 읽어보면 “아 이사람 정말 명민하구나!”란 생각이 들게 됩니다. 학식과 별도로 저자가 두뇌 회전 속도가 빠르고 센스가 좋은 사람인 걸 금방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거든요)이 왜 저딴 뻘짓에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모레티의 초기 저작을 다시 읽어보니, 모레티는 처음부터 그런 작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게 저에게 엄청 충격을 주었죠.
전 분명히 그 책을 읽었지만,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 책에서 서술되는 재미난 이야깃거리에만 주목하고, 도대체 모레티가 왜 이런 책을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모레티가 어떤 작업을 하고 싶어 했는지, 어째서 그게 앞서 언급한 “사회학적인 문학 연구”에  해당되는지, 그리고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를 설명하며 저를 개별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이치』 출간 20년 후에 모레티가 덧붙인 서문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싶습니다.
 

  브리콜라주, 그리고 타협
문학비평의 고유한 대상은 테크닉, 장치, 그리고 문학의 형식이다(발자크를 이해하고 싶은가? 『인간희극』의 플롯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라). 그러나 그 형식들은 또한 역사적인 구축물이며 사회적·문화적 갈등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발자크의 서사 논리는 근대의 자본주의를 매력적인 시나리오로 바꿔놓는다).

젊은 시절의 루카치가 건방지게 표현했듯이(물론 자라서 잊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문학의 가장 심오한 사회적 측면은 그 형식이다. 좋다. 그렇지만 책을 써나가면서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와 계속 부딪치게 되었다. 우선 이 소설들은 형태론적으로 매우 혼성적인 것이었다. 다양한 형식적 요소들이 내부에서 항상 서로 ‘불화하고’ 있었고(예를 들어 발자크의 플롯은 그의 서사 스타일과 완전히 모순된다), 그래서 텍스트들은 고통스러운 브리콜라주의 과정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교양소설은 나름의 사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상사나 정치이론의 역사에서 알게 된 그런 것들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들 교양소설에는 늘 뭔가 이상하고 ‘잡다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유를 알았다. 이 소설들은 일관된 세계관을 현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분되는 세계관들을 화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마치 발자크의 보수적-진보적 잡종처럼, 혹은 영국 소설에서 보이는 불관용과 정의의 부조리한 혼합물처럼.

형태론적 브리콜라주와 이데올로기적인 화해는 물론 공통점이 많다. 그들은 모두 실용적이고 우발적이며 불완전한(보통은 아주 잘 작동된다 하더라도) 적응인 것이다. 그러나……어떻게 불완전함을 개념화한단 말인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이미 힘들다(아마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넘어가거나, 텍스트가 실제보다 훨씬 말이 잘 된다는 듯 여길 것이다). 특히 어려운 것은 그러한 현상이 문화사에서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자면—『세상의 이치』의 서론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는 했으나 대답의 단서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그러곤 다행스럽게도 나는 진화론에서의 형태론적 브리콜라주에 관한 아주 세련된 설명을 발견했다(『세상의 이치』가 나온 지 5년 뒤에 쓴 한 편의 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일단 개념적인 모델을 찾아내자. 브리콜라주의 형태론은 다음 저서(1994년에 완성한 『근대의 서사시』)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다른 반쪽, 즉 이데올로기적인 부분은 거의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해체론이 초래한 형이상학적인 반발 때문이기도 하고, 형태론적 브리콜라주에 대한 다윈적인 설명에 비견할 만한 이데올로기 이론을 지성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몇 훌륭한 사례 연구가 있긴 하지만—바흐친의 라블레 연구, 긴즈부르그의 메노키오 연구, 블루멘베르크의 『근대의 정당성』, 프랑스 역사학계에서 쓰이는 심성사의 개념 등—이 이슈에 대한 진정한 개념화는 없다. 올랜도는 문학을 하나의 ‘화해 구성체’로 보는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을 구축했으나, 이것 역시 엄격하게 문학적인 이론으로서 있는 그대로 문화사에 적용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지성사가와 문학사가를 한데 묶어줄 수 있는 듯 보이는 이데올로기적인 화해의 문제틀은 도중에 유실되어버렸다.

그러고는 1980년경, 신역사주의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것들과, 탈식민주의 연구에 의해 유도된 문학 현장의 확대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비평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연구 대상은 매우 참신하고 흥미진진한 것이어서, 그 세대 전체가 역사적인 자료들에 직접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비평의 초점을 (저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유용한 용어를 쓰자면) 형식에서 내용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형식주의적’ 버전의 정치적 비평을 넘어서는 진정한 방법론적 발전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좀 의심스러워하는 편이다. 형식적 패턴이란 문학이 역사적 현실을 감당해내고 그 재료들을 선택된 이데올로기적 기조로 다시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형식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그 전체 과정의 복잡성(따라서 흥미)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엄밀한 정치적 의의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그렇게 보인다.

 
모레티는 저처럼 형식을 중요시합니다.
인용된 글 마지막 문장에서처럼 형식을 무시하고서는 흥미로움과 정치성 모두를 잃게 된다고 진단하는 것도 저와 같고요.
그럼에도 저랑 모레티는 다릅니다.
전 저번에 이런 차이가 “주목하는 형식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주목하는 형식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플롯, 넓은 의미에서 “서사 형식”으로 말해질 것에 관심을 갖거든요.
저랑 모레티가 다른 것은 형식 자체가 달라서가 아니라, 형식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달라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차이마저도 매우 애매모호한, 미묘하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기 모레티의 다른 글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초상』의 미덕은 바로 이 문제를 풀지 않은 데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상』의 미덕은 그것이 틀림없이 실패했다는 데 있다.

브리콜라주로서의 『초상』. 혹은 되다만 브리콜라주. 구조적인 실패. 그러나 다행이다. 그것이 다르게 되었더라면—즉 『초상』이 『토니오 크뢰거』만큼 좋았더라면—우리는 『율리시스』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브리콜라주—사실주의 소설과 독일 비극 사상 사이의 에세이적인 중재—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그는 그 공식을 반세기 동안 유지했고, 그럼으로써 서사의 진화에 그리 커다란 새로움을 도입하지 못했다. 관성은 문학의 영역에서조차도 지배적인 힘이어서, 한 형식이 잘 작동하는 한 그것을 수정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실패할 때에야만 변화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후기 교양소설의 내적인 발화를 생각해보라. 한쪽 극단에는 『청춘』과 『토니오 크뢰거』의 매끄러운 형식적 성취가 있고, 다른 쪽 극단에는 『말테』, 『초상』, 『아메리카』라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미완성인 모자이크들이 있다. 역사적 진화의 견지에서 보면 한편에 잘 기능하는 교양소설과, 콘래드와 만의 기나긴 19세기가 있다. 반대편에는 릴케, 카프카, 조이스라는 산만하고 불안정한 구조와 모더니즘의 맹아가 있다. 그러나 후자 세 사람이 그전 형식의 실패로 인해 문자 그대로 모더니즘으로 떠밀려 들어갔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주장하건대, 실패가 없으면 문화적인 진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아마도 우리는 실패가 사실은 위장된 걸작이라는 식으로 우기지 말고, 그들을 실패로서 받아들이고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역할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정확하게 무엇이 문학적 실패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이다. 이에 대해 나는 개략적이나마, 그것은 한 형식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룰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정의는 또 거꾸로 상징적 형식이 근본적으로는 문제 해결의 장치라는, 즉 그 형식들을 통해서 사회 갈등과 역사적 변화에 의해 발생한 문화적 긴장을 푼다는(혹은 최소한 줄인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 소위 미학적 쾌락과 더불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있다. 문제를 푸는 것은 유용하고도 달콤하다. 나의 개인적 신념은 이정도로 하자.

 
어찌보면 저랑 비슷합니다.
형식은 문제를 위한 것이고, 실패를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오히려 형식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진단 또한 같죠.
하지만 무엇인가가 다릅니다. 정말 미묘하게 말이죠.
모레티는 문학의 형식을 “적응”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기에 모레티는 문학의 변형을 “진화”로 유비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저 또한 문학의 형식이 문제와 문제에 대한 답을 위해 “필요”하다고 얘기할 겁니다.
그리고 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발전”을 인정하죠.
그럼에도 제가 모레티와 다른 것은, 문학의 문제가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입니다.
모레티는 문학의 문제를 시대의 문제로 여깁니다.
모레티는 문학을 기능적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조건부로 인정하긴 하지만, 모레티는 루카치의 “초월론적 고향상실로서의 문학”을 말하기도 하죠.
모레티에게 있어 소설은 사회화를 위한 것, 성장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 교양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모레티는 이를 “형식”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처럼 주장하곤 하지만, 이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교양소설이 소설 일반일 수도 없기 때문이죠.
모레티는 이러한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서사시』에서 모더니즘 소설을 교양소설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모레티는 채트먼의 비판을 언급하며 자신의 방식으로는 모더니즘 소설들 중 절반만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모레티는 이런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런 한계 안에서의 설명적 유의미성을 주장하죠.
“한계 안에서의 설명적 유의미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전 이 경우에는 좀 문제적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애초부터, 설정부터가 문제였던 것 아니냐는 것이죠.
모레티는 형식에서부터 저러한 기능이 도출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저러한 기능을 상정할 이유 자체는 문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문학 외부의, 사회적인 역사적인 맥락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죠.(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은 이런 “사회적인 기능”을 보여주는 연구였습니다)
물론 모레티가 “외부”를 가져온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을 주창하며 문학의 의의를 내적으로만 정당화하려고 했던 치들은 분명 문제적이니까요.
하지만 전 모레티가 외부를 가져오는 방식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합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는 분명 세상과의 화해를 이야기합니다.
소란스럽게 분주하지만 무의미해보이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각”을 통해 화해시켜주죠.
그리고 괴테가 화해를 시도하는 세상이 “자본주의적”인 것도 사실일 겁니다.
모레티가 보여주듯, 괴테는 부단히 움직이며 가치를 증대시키는 상품들의 움직임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괴테는 모레티가 진단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와의 화해를 “성장”으로 정당화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빌헬름 마이스터』의 의미는 자본주의 사회와의 화해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괴테의 문제의식을 당대로 국한시키지 않고서도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문학은 역사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문학 형식의 변천은 역사적 변천에 대한 대응일 수 있죠.(사실 모레티의 진단과 달리 필요 없이도 변화는 가능합니다. 이는 고고학 쪽에서는 상식인데, 인간은 특별한 이유 없이도 양식style 변화를 시도하곤 합니다. 기능적으로 새로운 토기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멀쩡한 토기들을 묻고 새로운 양식의 토기를 만들기도 한다는 겁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런 “변덕”과 “유행”을 중요시합니다. 오늘날 발굴되는 멀쩡한 토기들은 이런 변덕 덕분에 온전한 상태로 땅에 묻혔기 때문이죠)
하지만 변천 이후에도 어떤 문학들은 잔존합니다. 고전으로서든 사료로서든 말이죠.
이런 잔존물들의 의미는 모레티가 아니라 바흐친으로 얘기하고 싶군요.
『바흐친의 산문학』 저자들은 바흐친을 모레티와 같은 진화론자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흐친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가며 연구한 “형식”이 역사적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든요.
전 저러한 해석이 바흐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인지와 별개로 저런 주장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흐친은 특정한 형식에 우월성을 부여했습니다.
다성적이고 이질시간적인 형식에 주목했고, 그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죠.
그리고 그 형식이 19세기에, 소설이란 장르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19세기의 소설이 이전의 문학들보다 형식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월성이 특수한 맥락에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 로맨스는 다성적이지도 않고 이질시간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건들이 일어남에도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남자는 영원히 젊은 청년이고, 여자는 영원히 꽃다운 처녀이죠.
이런 진행 없는 진행이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유아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당장 현대의 작품들, 특히 대중문화 작품들이 이렇거든요.
『짱구는 못말려』나 『명탕점 코난』의 사건들이 벌어짐에도 나이는 바뀌지 않는 “형식”은 현대적이기 때문이죠.(여기서 전 의도적으로 멈춰진 시간을 “나이”로 국한했습니다. 저 두 작품에는 과거에는 등장하지 않던 스마트폰이 등장하며 “시대적 배경”은 변하고 있거든요)
이런 작품들이야 그냥 허접하고 조악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작품들 중 다성성과 이질시간성이 “결여”된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죠.
『일리아드』, 『오뒷세이아』 같은 작품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바흐친이 주목한 라블레의 작품도 다성성과 이질시간성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성성과 이질시간성이라는 형식이 우월하다면 라블레의 카니발을 찬양하는 바흐친의 입장은 모순에 빠질 거고요.(실제로 『바흐친의 산문학』 저자들은 이를 모순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모순으로의 귀결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정확히 어떤 “필요”에서 저러한 형식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바흐친의 문제의식은 바흐친 고유의 문제의식일 수 있거든요.
물론 바흐친이 그러한 형식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것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대한 진단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담론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조건인 다원성과 이질시간성을 반영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진단에서 저런 형식에 주목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진단마저도 바흐친 고유의 진단일 수 있습니다.
바흐친의 문제의식, 문학이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는 바흐친 고유의 결정에 입각했을 때만 저런 진단은 정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흐친은 반시대적 투쟁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진단 아래에서만 저런 형식의 우월성은 정당화되죠.
만약 흥미를 끄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고, 저런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라고—아리스토텔레스처럼—진단했다면 저러한 형식이 우월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바흐친은 본인의 문제의식 속에서 한편으로는 저런 형식의 필수적이라고 진단하여 이를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그 형식을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런 형식을 통해 표현되어야만 할 내용이 라블레적인 카니발이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라블레적인 카니발이 어떻게 저런 형식에 담길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를 남겨둔 채로 말이죠.
때문에 과거 문학 형식들은 도태된 것도, 시대착오적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흐친의 이질시간성은 이러한 시대착오로부터 의미 있는 활동을 추출할 수 있게 하는 형식이었고요.(『바흐친의 산문학』 저자들도 이를 주장합니다)
때문에 형식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과 별개로, 문학 연구는 초시간적일 수 있습니다.
 
모레티는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없습니다.
모레티는 형식과 내용을 긴밀하게 연결할 뿐, 분리하지 않기 때문이죠.
괴테의 작업은 내용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내용”은 모레티가 보여주듯 형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하지만 괴테의 작업을 오롯이 형식으로만 분석할 수도 있죠.
이 경우에는 모레티의 분석에서와 달리 “자본주의” 같은 것들은 말해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토도로프가 “자본주의”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모레티는 역사적 변화, 문학사적 변화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마치 자신의 서사 형식 연구가 문학사의 서사 형식으로 직결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죠.
모레티는 언제나 분류상의 난점을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와 함께 문학사적 분류를 성공하는 것이 문학 연구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굽니다.(『근대의 서사시』 서문은 이런 모레티의 기이한 태도를 방증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물론 문학, 특히 소설의 형식이 여럿이란 진실은 부정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다양성을 무시하면,—토도로프의 말마따나—자신이 연구하는 작품의 특징과 장르적 특징을 구별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분류”가 다양성에 대한 유일한 답변일 이유는 없습니다.
토도로프처럼, 다양한 형식들의 이질적인 부분들을 들여다보며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로 조직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이 더 흥미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다종다양한 작품들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는 “부분적인 형식들”을 재조합해보며 실현되지 않은 소설 형식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운 일일 테니 말이죠.
다시 말해, 문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하는 것보다, 문학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문학을 볼 때, 그리고 형식적 다양성을 볼 때, 모레티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변화들은 더 이상 “진화”가 아닐 겁니다.
변화가 아니라 차이로 보이겠죠.
그리고 이러한 차이들로부터 “실험”이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사라진 형식들이 도태된 것이 아니라 잔존하는 것으로 본다면, 소설의 역사는 잠재적인 형식들의 아카이브가 될 겁니다.
그곳에서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현실화될 수 있을 조합을 실험해볼 수 있겠죠.(이런 실험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계보학”일 겁니다)
전 이렇게 문학의 형식을 보고 싶습니다.
“세상의 이치”에 적응하는 것 또한 가치 있겠지만,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려고 하는 것 또한 가치 있을 테니 말이죠.
 
저의 이러한 불만은 그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모레티의 분석은 바로 제가 진단한 문제 때문에 한계에 다다르거든요.
이런 한계, 모레티의 몰이해가 발자크 『인간희극』에 대한 분석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모레티는 발자크를 해석하면서 (당연히도) 바르트의 『S/Z』를 참조하죠.
모레티의 작업은 바르트의 작업을 기초로 수행되지만, 모레티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바르트의 해석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모레티의 말을 들어보죠.
 

『S/Z』에서 롤랑 바르트는 발자크의 리얼리즘이 단일하고 결정적인 ‘의미’의 드러냄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미스터리 소설인 『사라진』에 대해서는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희극』 대부분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왜 바르트가 그렇게 비전형적인 텍스트를 가지고 서사적 리얼리즘의 이론을 구축하려고 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겠다.

 
물론 이런 고백은 하찮은 것일 수 있습니다. 바르트야 재미로 비평하는 사람이었고, 바르트가 하필 『사라진』을 선택한 것은 정말이지 우연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바르트의 평소 행실과 별개로 바르트가 『사라진』을 선택한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바르트가 『사라진』을 통해 “발자크의 리얼리즘”을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레티와 정반대의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발자크는 『인간희극』을 『사라진』처럼 쓸 수 없었습니다.
발자크 또한 바흐친처럼 문학을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발자크에게 있어 문학은 투쟁 수단이었죠.(생계 수단이기도 했고요ㅋㅋ)
파리와 한 바탕 대결하려한 이 작가는 파리와 대결하기 위해서라도 당대 파리를 충실하게 그려내야 했습니다.(『고리오 영감』에는 “파리, 이제 너와 나 둘의 대결만이 남았다!”는 구절이 있죠)
그렇기에 발자크의 작품은 미스터리 소설처럼 쉽게 이념을 말할 수 없게 되었죠.
그럼에도 발자크의 작품은 『사라진』과 같은 방식으로 의미가 부여될 수 있고, 바로 그것이 발자크의 의도였을 겁니다.
모레티의 분석들과 진단들은 물론 틀리지 않았습니다.
발자크 작품에는 총체성이 부재하며, 총체성이 부재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면면들이 발자크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합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들, 주관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의미가 불명확한 사건들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들이고, 그러한 사건들이 가진 타자성과 이질성이 사실성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적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정의 없이도, 우리는 그렇게 현실을 인식하곤 하죠.
발자크는 이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죠.
하지만 발자크는—발자크뿐만 아니라 발자크가 그려내는 인물들, 그리고 발자크 소설을 읽는 우리들은—저러한 현실 관념을 사용하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비애나 애수에 심취하지 않습니다.
저 사건들이 분명 주인공이지만, 저들만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야 사건들만이 주인공이기에, 인물들은 비애와 애수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그 사건들로부터 소외된다는 진실로부터만 가능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발자크의 작품은 다릅니다.
발자크가 그려내는 저 사건들이 사건들로 다뤄지는 것이 인물들에 의존적이기 때문이죠.
저 사건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주목되지 않고, 그냥 무시되어도 이상할 게 없죠.
저것들이 발자크 작품 속에서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은, 저러한 것들을 “사건”으로 주목하며, 자신의 기대를, 자신의 돈을, 자신의 삶을 투기하는 인물들 덕분입니다.
모레티의 지적처럼 인물들의 이러한 기대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플로베르처럼 이러한 환상을 냉소로, 지나간 과거로 그려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플로베르는 낭만주의 비판은 자기혐오입니다. 그가 낭만주의적인 소설을 쓴 것은 그 자신이 낭만주의자여서고, 그가 낭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가 낭만주의를 혐오하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는 구시대의 전유물이며, 역사에 의해 틀린 것이 증명된 어리석은 입장이죠. 플로베르가 “지나간 과거”를 찾고, 그 속에서 얻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감정수업”인 것이죠. 이건 플로베르 본인 피셜인데,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문학자들이 있다는 게 전 좀 신기합니다. 도대체 그럼 뭐라는 건지... 플로베르 본인이 졸라게 일관적으로 일케 말하며 그런 소설을 썼는데 말이죠) 
하지만 발자크는 플로베르와 다릅니다..
브룩스가 발자크와 플로베르를 대립시키며 소설과 반소설을 규정한 것은 바보짓이 아니었습니다.
발자크는 플로베르의 저런 식의 회한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고, 정반대의 소설을 썼습니다.
발자크는 환상이 오류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환상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발자크는 환상이 오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인간 메스머주의 같은 거 신봉하며 과학적 마법에 심취한 적이 있고, 이런 광신으로부터 결별했음을 명시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모레티는 이를 비극이라고 여기며 인간의 불행한 조건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환상이 환상에 불과한 것은 문제일 게 없습니다.
정답이란 것이 정해져 있지 않고, 정답일 수 있게 실천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니 말이죠.
발자크 소설에서는 플롯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러한 플롯들이 중요한 이유는 플롯들을 통해서 서사가 성취되어서입니다.
각 인물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깃든 사건들을 움켜쥡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과 대결을 펼치며 자신의 삶을 전개시켜가죠.
결국 남은 것은 빚뿐일 수 있고, 발자크 본인의 인생처럼 부랑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저러한 시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유의미한 결단이라고 발자크는 본 겁니다.
이념이 불확실한 시대에는 사건 없이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습니다.(정치에서 “사건”이 어째서 중요성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저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환상을 입증하려면 자신의 환상을 사건을 통해 증명해내야 하죠.
이런 시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이것들이야말로 “실험”에 해당됩니다.
흥미롭게도 모레티는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을 “희극”으로 형식화한 이유가 희극이 이러한 “실험”을 가능케 하는 형식이기 때문이었다고 옳게 진단하면서도, 이러한 시도의 가치를 부정합니다.
이러한 실험을 요구하는 일이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긍정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가혹함 자체는 중요치 않습니다.
가혹한 선택지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답변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답이라 생각할 테니 말이죠.
발자크가 그러했고, 니체가 그러했듯이, 누군가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충분한 답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발자크가 제공하는 관점은 의미 있을 겁니다. 
영원할 것만 같고, 모든 것이 의미 없어 보이는 이 닫힌 세상을 열고 모험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관점이니 말이죠.
발자크는 자신과 같은 젊은 투기꾼들을 위해 눈을 제공한 것이지, 모레티나 플로베르 같은 회한에 찬 늙은이를 위해 눈을 제공한 게 아닙니다.
모레티는 발자크를 오류로, 그리고 시대에 의해 도태된 것으로 여기며 “진화된 형식”을 이어지는 장에서 다룹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에서 모레티는 영국만을 다루고 프랑스는 다루지 않습니다.
바로 그 시대에, 영국이 아닌 프랑스의 한 젊은 작가를 “분류”하려 시도하지 않죠.
발자크에게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러부터 미래를 위한 “실험소설”을 창안해낸 졸라를.
다른 판단은 가능합니다. 같은 형식을 연구할지라도 말이죠.
 
 
P.S. 수용 연구와 공명할 수 있는 얘깃거리가 있어 덧붙입니다.
(모레티 말마따나) 루카치 말마따나 문학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형식입니다.
모레티가 지적하는 것처럼, 교양소설의 주인공들이 “젊은” “부르주아 계급” “남성”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탈이 필요하고, 일탈하기 위해선 “자유”가 필요합니다.
지리적, 사회적 유동성을 경험할 수 있는, 그리고 그 격한 움직임으로부터 성장할 수 있는 인물은 19세기엔 “젊은” “부르주아 계급” “남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인공이죠.
하지만 전 이것이 형식으로부터 추출 가능한 진정으로 흥미로운 사회학적인 교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저 책을 가장 많이 읽은, 그리고 평생토록 마음에 품은 독자들은 “젊은” “부르주아 계급”이지만, “여성”인 독자들이었거든요.
전 저 시대 여성들이 저런 “남성”의 이야기에서 어떤 것을 읽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런 이야기 속 “남성”에 감정이입했을 것이고, 다른 어떤 이들은 저런 이야기 속 “남성”을 타자화하며 관람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그 이야기들이 갖는 의미이지, 그들이 실제로 저 인물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지, “남성”이 아닌 “여성”을 위한 교양소설은 왜 그토록 드물었는지가 아닙니다.
요즘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여성 주인공, 여성 작가 작품만을 숭상하는 자칭 여성주의자들이 많지만, 당대 여성들은 이런 오늘날의 멍청이들과 달리 자유로웠기에 남성 작가 작품 속 남성 주인공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하곤 했죠.
그리고 전 그들이 저런 자신들과 무관한, 심지어는 사실도 아닌 이야기들에서 얻은 “의미”는 동경이나 질투가 아니라, 형식 자체에서 마주할 수 있는 “다른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바버 말마따나 우리가 텍스트에서 타자를 마주치는 것과 같은 당혹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형식이 가진 힘 덕분입니다)
전 문학의 형식에서 발견해야할 “사회적인 것” 또한 이런 것에 기초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주인공이 남자인지보다는, 왜 그런 종류의 다른 삶에서 (남자든 여자든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찾았는지를 물어야합니다.
소설의 형식이 정말로 사회적 기능에 충실할 수 있을 조건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일 테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