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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의 <피투자자의 시간> 후일담

네네 말씀해주신 의도로 작성한 게 맞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비난보다는 해당 작업을 통해서만 관찰 가능한 현상들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미독의 반박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페어는 애초에 주체화 가능성은 따지려하지 않았고, 특정한 영역에 대해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게 저술 목표였을 테니 제 비판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죠.

페어에게 중요한 것, 그리고 그의 저작에서 중요한 것은 “또 다른 투기가 가능하다”라는 통찰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겁니다.

아마도 제가 페어 책을 너무 진지하게, 정치철학서로 읽어서 생긴 문제인 거 같아요.

언급하신 것처럼 저의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도 묘하게 긴장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의 취지는 페어의 저런 구호 만들기에 동의한 채로, 그런 구호를 외치기 위해서는 그래도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그니까 해당 영역의 가능성이 잠재성일 수 있기 위해 디테일을 채우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반면 두 번째 글의 취지는 페어의 실천 영역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구성의 영역에 대한 이론이 어떤 것일 수 있을지 제시하는 것이죠. 선제 이론에 해당될 그런 논의를 제시함으로써 말이죠. 이건 이전 단계다보니 결국 별도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페어가 모른다거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알아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사실 두 글은 딴 소리고, 두 번째 글이 첫 번째 글의 비판에 대한 대안일 수는 없습니다.

제 비판부터가 모순인 것이죠.

뭐 철학책은 원래 찬양하거나 박살내는 방식으로 소비해야하는 법이라...(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ㅋㅋ)

제가 좀 과도하게 반응한 것은 맞지만 변명하고 싶진 않군요ㅋㅋㅋ

 

다만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페어 책에서 민족지 기술에 도움이 될 통찰 같은 걸 찾을 수 있을지는 좀 의문이긴 합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현상 자체를 다시 보게 하는... 그런 관점을 제공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분명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긴 하는데... 그게 관찰을 위한 게 아닌...?

다시 말해 페어의 연구는 인류학적인 연구가 아니란 얘기고, 이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란 겁니다.

그냥 다른 것이죠.

아마 이건 인류학적인 연구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야만 제대로 말해질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일루즈의 작업은 구체적인 것들을 일반적일 수 있는 것일 수 있는 한계 안에서 다룹니다.

실제로 사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이는데, 이 때 “사람들”은 좀 추상적입니다.

일루즈가 추상적인 사람들을 다룬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뤘다는 그런 주장은 아니고요, 일루즈는 사람들에게서 일반화될 수 있을 만한 면모만을 다룬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일루즈가 연구를 하면서 정말 인상적인 한 인물을 만났다고 해도, 일루즈는 그 사람에게서 받은 인상을 책에 쓸 수 없을 거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건 개인적인 특성이지 사회적인 특성일 수 없을 테니까요.

일루즈가 “개인적인 특성”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루즈가 다룰 수 있는 것은 그러저러한 개인적인 특성이 어떻게 개인적인 것으로서 형성되고 인식될 수 있는가입니다.

그것이 흥미로울지라도, 왜 그것이 흥미로울 수 있는지를 형성과 인식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뤄야만 하는 거죠.

심지어 연구가 가능할지라도 일루즈가 하는 연구 맥락에서 이질적인 얘기가 되기 쉽고요.

 

페어로 말하자면, 페어는 구체적인 것들을 일반적인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으로서 다루죠.

페어는 구체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서 말합니다.

특정한 실천들을 일반적인 것으로서, 일반적일 수 있고 일반적이어야만 하는 무엇인가로 다룹니다.(제 불만은 어쩌면 이런 일반화가 위험한 것임에도, 페어가 그 위험성을 무시한 채 무책임하게 말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페어 책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그 특수한 것이 어떻게 일반성을 담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진단이고요.

 

인류학적인 연구는 둘과 다릅니다.

물론 인류학도 일반성을 추구합니다.

일루즈나 페어처럼 일반적인 것을 추구하진 않아요.

아마도 일루즈와 갈라지는 지점은 이런 거일 겁니다.

일루즈에게 일반성은 현대사회에요.

다른 사회란 게 없습니다.(있어도 아마 전근대 사회일 겁니다)

일루즈도 물론 역사적 과정을 다루지만, 일루즈가 제시한 역사적 과정은 역사학에 익숙한 저에게는 매우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변동 없는 변동, 단절로서의 변동으로 그려내거든요.

일루즈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현대 사회 일반이고, 현대 사회 일반을 담지할 일반성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인류학은 이런 일반성을 추구하지 않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담지할 일반성을 말하죠.

그런데 이런 일반성을 얘기하는 이유가 페어랑도 다릅니다.

페어는 저런 특수성의 일반성을 현대사회란 맥락 속에서 의미 있을 수 있는 방식으로만 그려내거든요.

그니까 대안인 한에서 그려내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인류학은 그런 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발견하려는 일반성이 다르다는 것이죠....

 

아마 인류학의 이런 특성 때문에 제가 인류학 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코멘트를 내놓게 되는 거 같습니다.

기획 의도가 이러한데 비난할 게 뭐가 있겠냐는 그런 거죠...

유르착 책의 모순과 페어 책의 모순을 비교하면 페어는 선녀거든요.

근데 유르착에게는 별 불만을 안 느끼고, 페어에게는 느낍니다.

이게 재미난 거죠.

어떤 점에서 유르착 책이 더 노답이에요.

제가 말했듯이, 유르착이 그려내고 있는 스보이의 삶은 군대생활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읽으면서 전 군대의 풍습을 제일 자주 떠올렸고요.

유르착이 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면 진짜 냉소했을 겁니다.

애초에 대안이라고 느낄 수가 없었을 거에요. 대안으로 말하는 것조차 모르는 거죠ㅋㅋ

페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페어의 대안은 대안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래서 페어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거죠.

그리고 유르착에게서는 다른 걸 배우는 거고요.

대안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일반적으로 다루는 방식을 배우는 거죠.

제가 유르착 책을 읽지 않고 일루즈 책을 읽었다면 일루즈 책을 지금처럼 읽지 못했을 겁니다.

일루즈가 하층민들의 삶을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맞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잘 못 보여주고 있어요.

제 서술은 유르착으로 보충한 일루즈였던 것이죠.

유르착 책은 이런 종류의 일반성이 있습니다.(아마 이게 스트래썬의 “유비”일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어떻게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일반성을 확보하느냐가 문제란 것이고, 이를 확보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연구라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장소를 정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런 “일반화 방식의 차이”를 좀 더 유형화할 필요가 있고, 일반성/구체성 같은 도식을 좀 더 엄격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전 아직 잘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떤 일반성인지를 매번 서술할 게 아니라 명사적으로 다루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ㅋㅋㅋ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