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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형 아이템의 효능에 대하여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확률형 아이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셨다고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듣고 저도 좀 생각해보니 흥미로운 면들이 보이더라고요... 생각난 것들을 좀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게임의 재화 분배 원리들을 좀 열거해보겠습니다.

아마도 피지컬, 시간, 돈, 운 이렇게 네 가지일 겁니다.

이 네 가지 재화 분배 원리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필연성과 정당성이 그 자체로 확보되는 건 아니거든요.

예컨대 돈이 그렇죠.

지금이야 캐시 아이템에 스탯이 달려 있는 게 당연해졌지만, 김실장이 강조하듯 스탯 달린 캐시 아이템은 도입 초창기에는 엄청나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개인 간의 거래도 있었지만, 일종의 치팅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요.(얼마나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속한 그룹에서는 돈 써서 게임하는 걸 아니꼽게 여겼습니다 좀)

그러니 돈은 분배에 있어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반드시 정당한 것일 이유도 없습니다.

일단 네 가지를 열거했지만, 다른 원리도 있을 수 있죠.

게임에 대한 이해도 같은 게 그럴 겁니다.

게임에 대한 이해도는 보통 뇌지컬로 취급되며 피지컬의 한 종류로 여겨집니다만, 이해도 자체가 피지컬로 환원되진 않습니다.

일단 피지컬과 분배 상황이 달라집니다.

손이 빠른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피지컬이 좋은 사람”이 되니 외연적인 차이가 있는 거죠.

또한 이런 차이를 가능케 하는 과정도 달라지니 게임을 즐기는 양상도 많이 달라집니다.

뇌지컬이 피지컬에 속할지라도, 피지컬 중 뇌지컬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냐에 따라서 게임의 전반적인 재화 분배 상황 및 재화 분배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재화 분배의 네 가지 원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특정 원리가 수행하는 기능이 결정론적인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원리가 도입될 수도 있고, 원리들이 결합하는 방식이나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니 말이죠.

이런 얘기를 길게 꺼낸 이유는 확률형 아이템이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좀 더 포괄적으로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냥 운이라는 재화 분배 원리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서죠.

확률형 아이템은 당연히 운적 요소를 갖고, 이는 재화 분배 원리 중 운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지만 운에 달린 일이라도 적용 대상이나 적용 방식에 따라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보스 몬스터에서 드랍되는 아이템을 파티원 전원을 대상으로 제비뽑기하는 운적인 분배 방식과, 확률형 아이템을 현금으로 결재하여 뽑기를 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니까요.

 

일단 확률형 아이템이 구조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을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확률형 아이템은 복잡성을 감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게임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아이템,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가 있죠.

그 중 무엇이 좋고, 무엇이 자기와 잘 맞는지를 공부하자면 한 세월이 걸립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 즉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무엇인가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 자체가 게이머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로자가 “소외”로 진단한 상황이니 말이죠.

때문에 확률형 아이템은 이러한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좋은 수단일 수 있습니다.

일단 뽑으면 무엇인가가 나오고, 그것들 중에서 선택하면 되니까요.

게다가 이런 식으로 재화들을 사용케 하면 게임의 다양성이 증진될 수 있습니다.

확률을 경유하지 않고, 특정 아이템을 현금으로 구입하게 될 경우 다양성은 저해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최고, 혹은 최적의 아이템만을 사려고 하겠죠.

해당 아이템보다 낮은 단계의 아이템들은 사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더 좋은 아이템으로 갈아타야하고, 갈아탈 때 이전 아이템의 가치는 떨어지니 살 일이 없거든요.

그러니 아이템 단계가 올라갈수록 효율 자체는 떨어지게 설계하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가격으로든 아이템 성능으로든 보정하지 않으면 중간 아이템들이 무의미해지거든요.

뽑기는 이런 점에서 다양성을 증진시키죠.

중간 아이템들을 굳이 구매하지 않을 게이머라도, 뽑기로 나온 중간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을 게이머는 없을 겁니다.

확률형 아이템은 이런 역할만 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템 유포량(통화량에 해당되는 무엇...)을 게임사가 조절할 수 있게 해주죠.

나오는 확률을 통제하면 쉽게 개입 가능하니까요.

게임사 입장에서는 확률형 아이템을 통해 아이템들이 유통의 다양성과 다양성 비율을 쉽게 통제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게 확률형 아이템의 구조적 기능일 것이고요.

 

그런데 이런 건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아마 궁금했던 것은 저런 구조적 기능이 아닐 거에요.

왜 게이머들이 뽑기를 좋아하는가가 중요하죠.

전 이게 더 흥미로운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사에서 저런 아이템을 만들고 싶더라도, 게이머들이 거부하면 만들 수 없죠.

또한 게이머들이 저런 아이템을 열심히 구매하는 것은 확률형 아이템의 구조적 기능이나 게임사의 전략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게임은 누가 칼 들고 협박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요.

결국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은 효용을 느껴서죠.

제가 저 질문에 대해 가장 먼저 대답한 것도 이런 효용이었습니다.

뽑기가 즐길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얘깃거리를 제공한다는 게 그것이었죠.

중요한 것은 뽑기가 어케 저런 걸 제공하냐는 겁니다.

 

저 대화 직후 전 불확실성에 기반해서 뽑기의 재미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예측 가능하면서도 확신이 어려운 것들로부터 기대와 실망이 가능해지고, 기대가 실현될 때 재미를 느낀다는 식으로 설명했죠.

전 이게 반만 맞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둔 불확실한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특정한 것들에만 관심을 갖죠.

또한 불확실한 것들로부터 발생한 결과들이 언제나 흥미로운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흥미를 자아내는 불확실성은 어떤 것인지라는 뻔한 진단을 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건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불확실성이 흥미로움을 자아내는 불확실성 중 하나 아니겠냐?”라는 답이에요.

바로 주술/의례가 그것입니다.

소위 기도 메타라는 게 있죠.

재미난 것은 기도 메타도 진지한 의미에서 선택 가능한 메타 중 하나라는 겁니다.

어차피 게임이고 확률은 중립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사고하지 않습니다.

기도 메타를 할 때는 정성스럽게 주술/의례를 수행하죠ㅋㅋ

저만 해도 그랬습니다. 강화할 때는 나름 터부들을 지켜가며 강화의 대의명분과 적기(카이로스)를 선택하죠.

어제 레비스트로스를 얘기하면서 언급했지만, 무의미한 패턴들도 반복될 경우 일정한 패턴을 형성합니다.

그런 일정한 패턴들을 기반으로 사람들은 법칙을 추상하고, 해당 법칙에 따른 유용한 실천 전략을 형성하죠.

대표적인 게 로또가 있죠.

로또 마니아들의 로또 연구를 보면 장난아닙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주술/의례를 과학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로또 당첨 전략 가지고 싸움도 나는 거고요.

이런 현상은 예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술/의례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죠.

주술/의례는 다른 게 아닙니다.

중요하면서도 불확실한 수행이 있을 때, 그러한 수행을 성공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매우 정형화된 실천들이죠.(모든 주술/의례가 이에 해당된다는 그런 멍청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것도 주술/의례의 중요한 한 면모죠)

중요한 것은 저런 실천들이 실제로 성공을 도울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저것들이 실제로 성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죠.

하지만 반드시 실용적인 이득이 있을 때에만 저런 주술/의례가 수행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또한 저런 주술/의례 수행의 효용은 해당 실천의 성취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에 국한될 필요가 없습니다.

심리적/사회적 기능도 수행할 수 있거든요.

불확실한 상황에서 얻어지는 스트레스를 극복하게 하는 기능 같은 게 있죠.

주술/의례는 스트레스 상황을 의미 있게 전유시킬 수 있게 돕습니다.

그 자체로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를 수행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도 있거든요.

이런 만족은 정신승리 같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주술/의례는 무력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행위자가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실천을 더 나은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게 도울 수 있거든요.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이를 다시 수행할 수 있게 돕는다는 거죠.(이러저러한 터부를 제대로 못 지켜서 그런 것이니 다음에 잘 지키면 성공 가능하다는 식의 행복회로 돌리기가 가능하니까요)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저런 주술/의례 행위는 집단의 결속을 증대시킵니다.

터부 지키기는 집단적이고, 이를 통해 집단 구성원의 집단에 대한 충성도가 드러나죠.

평소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것이 금기시되지 않는 부족일지라도, 특정한 시기에는 성적인 방종이 금기시 됩니다.

예컨대 남편이 전쟁에 나갔을 때가 그런 상황이죠.

이 시기에 성적인 충동을 참지 못한다면 그 부인은 진정으로 부정한 여인이 됩니다.

적어도 저 시기에는 충동을 참고 정결함을 지키는 게 남편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의무니까요.

평소의 문란함과 구별되는 이러한 통제는 아내의 정결함을 검증하는 일종의 시련 역할을 수행하고, 이러한 시련을 통해 타인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저런 시련을 잘 극복할 경우, “문란한 아내”가 실제로는 “정숙한 아내”일 수 있다는 거죠.

이는 단순 부부관계에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공적인 주술/의례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의 신뢰 가능성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수행해야하는 과업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기회 역할을 수행합니다.

전 <미드소마>를 보면서도 계속 이런 류의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 정도로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의례를 수행하는 집단이면 얼마나 결속력이 강한 거지?”란 의문이 들었어요.

근데 반대로 생각하게 되더군요.

저런 의례를 수행하니까 결속력이 강해지는 겁니다.

회피하는 구성원들은 축출될 것이고, 일단 저런 의례를 수행한 이들은 공유하는 특별한(경이든 경악이든) 책임(자격이든 죄의식이든)으로 결속될 수 있죠.

주술/의례는 이런 효능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게임으로 다시 돌아와보죠.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뽑기는 특정한 아이템을 획득하기의 과정을 견딜 수 있게 해줍니다.

저기가 정말 원하는 아이템이 그냥 1500만원이라면, 1500만원을 모으는 일을 견뎌야합니다.

반면 뽑기는 본래의 아이템 가격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아이템을 획득을 시도할 수 있게 해주죠.

최종적으로는 1500만원이 들었고, 1500만원을 모으는 시간과 실질적으로 같은 시간이 요구될지라도, 뽑기는 그 과정을 완전히 다르게 바꿉니다.

뽑기는 획득까지의 과정을 무의미한 인내의 시간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실험 과정으로 변신시키죠.

어차피 모든 시도들은 독립시행이라 같을지라도, 뽑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연속 네 번 실패니 이제는 될 때가 되었다는지, 저번에 9번 실패 직후 시도하니 성공했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시도하면 성공할 것이라는지 자신만의 주술/의례로 그 시도들에 의미를 부여하죠.

이런 의미 부여는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 이런 걸 가지고 얘깃거리를 만들어가죠.

성공한 사람은 “첫 시도에 이게 나왔는데 이거 좋은 건가요?” 이지랄을 하며 비틱질을 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천하제일 흑우대회를 열며 자신이 최고(?)의 흑우라는 것을 입증하며 영광으로 삼죠.

다시 말해, 뽑기는 주술/의례란 것이고, 그 자체로 컨텐츠라는 겁니다.

심지어 게임사에서 특별하게 돈 들여가며 공간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컨텐츠죠.

게임 안에서 제공되는 컨텐츠가 아니라, 게임이 제공하는 무의미한 확률들에 게이머들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해가면 만들어내는 컨텐츠거든요.

그러니 확률형 아이템이 인기가 있는 것은 우연일 수가 없습니다.

게이머들 자신들이 능동적으로 수행(참여/제작)하는 컨텐츠라 가장 자발적인 컨텐츠일테고, 가장 자발적인 컨텐츠이니 가장 재밌을 수 있을 컨텐츠기 때문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습니다.

확률형 아이템도 다시 생각해보니 흥미롭네요...

역시 주술/의례가 짱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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