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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철학이란?

최근 데리다 철학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나 들었는데요, 그걸 듣다보니 좀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강연 내내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데카르트 철학’이란 것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데리다 강연에서 하필 데카르트가 생각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질문 자체는 연관 있긴 했습니다.

제가 강연을 들으며 빠져든 의문이 같은 물음이었거든요.

“도대체 ‘데리다 철학’이란 것은 어떤 것일 수 있는 거지?”

제가 이러한 의문에 빠져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날 제가 들은 모든 데리다 철학은 제게 데리다 철학일 수 없었습니다.

그 강연에서 주장된 데리다 철학이 오류라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날 들은 데리다 철학은 모두 제가 다른 철학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철학이었기 때문이죠.

분명 그건 “철학”일 수 있을 겁니다.

철학은 언제나 반시대적이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이 시대적인 것이라면 굳이 철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받아들이는 진리라면 철학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말이죠.

하지만 철학이 선언하는 진리는 그렇기에 그저 영원한 것일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그저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철학적으로 선언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철학의 가능 조건은 그렇기에 역설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철학에서 시간의 딸이면서도, 철학에서 추구하는 진리는 다른 시간의 딸이기 때문이죠.

철학은 그렇기에 반시대적이어야만 합니다.

이건 인정할 수 있고, 저 또한 선언하는 철학입니다.

하지만 이건 철학일 수 있어도 데리다 철학일 수는 없습니다.

이건 철학 자체이기에 ‘데리다’라는 상표가 각인될 수 없거든요.

여기서 상표를 세기는 일은 선을 긋고 그 땅이 자신의 소유라고 선언하는 일보다 파렴치한 일이 될 겁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선을 그은 사람조차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선을 그은 것은 적어도 니체에게 소급되거든요.(솔직히 전 플라톤에게까지 소급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요구될 모든 개념어를 완비한 것은 니체이긴 할 겁니다)

데리다 본인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고요.(적어도 <비밀의 취향>에서는 데리다 본인이 자신이 파렴치한이 아님을 몇 번이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그런 얘기들, 진리와 시간의 이율배반과 반시대적 투쟁으로서의 철학을 선언하는 것은 데리다의 철학일 수 없습니다.

말해진 것은 “철학”뿐이지 “데리다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에 ‘데리다’라는 이름이 각인될 수 있을지 모르겠기 때문이죠.

 

저 문제에서 막혔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데리다 철학”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물론 데리다표 용어들이 있습니다.

해체니 글쓰기니 그라마톨로지니 유령이니 하는 것 따위들이 그것이죠.

그런데 저런 걸로 개성을 인정해주기 시작한다면, 도대체 안 달라질 사람이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냥 용어만 다르면 다 다른 거고, 그럼 도대체 같은 철학이 어디 있겠냐는 거죠.

결국 모든 언어가 다르고, 모든 사람이 다르게 말하고 있는데 말이죠.

철학에 종차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이지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니 단어로 종차를 말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철학에 종차를 부여할 수 있는 정신의 차이가 무엇일 수 있는가입니다.

데리다로는 이 문제를 더 발전시킬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비밀의 취향>을 통해 데리다 본인이 자신은 그런 것들을 감당할 철학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고백했거든요.

그냥 닥쳐 온 일을 그때그때 적당히 해치운 것이지 기획 같은 건 못 했고, 그것이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것 하나 없었다고, 그러니 너무 자기를 비난하지 말라고, 자긴 정말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썼을 뿐이라고 데리다가 말하더군요.

그러니 데리다 철학으론 저런 걸 평가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본인도 부정하는데 남이 나설 이유도 없고, 종차를 발견할 수 있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사례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다른 인물로 데카르트를 생각했습니다.

데리다와 달리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글을 쓰지 않은 인물, 자신이 나아갈 “가면”을 확인하고 나아갔던 인물이기 때문이죠.(왜 하필 데카르트가 떠올랐는진 잘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데카르트보다 나은 인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데카르트 철학’이란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물어야합니다.

 

저 물음은 쉽게 답해질 수 없습니다.

다들 데카르트가 당연히 철학자인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정말로 철학을 했는지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죠.

데카르트가 수행한 “철학”이 오늘날의 “과학”이라고 몇몇 주석가들이 주장한 것은 헛소리가 아닙니다.

당대에 “철학”으로 말해진 것은 오늘날의 “철학”과 다릅니다.

오늘날 절대로 철학으로 말해지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주술과 마법 따위도 철학으로 말해졌던 시대니까요.

‘철학’이란 용어를 공유한다고 모두가 철학을 했다면, 개똥철학도 철학이 될 겁니다.

문제는 17세기의 철학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도적으로 철학과가 운영되고 있고, 그에 근거해 철학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철학의 의미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뭐 당연히도 제도적 정의가 충분히 합당한 정의를 제공할 수 없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이상입니다.(누군가가 제도적 정의가 충분한 정의라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이랑 대화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사실로서도 정박아고 철학적으로도 자신을 정박아로 규정하고 있으니 그 사람이랑은 사실로서도 이론적으로도 대화란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런 입장은 반박조차 무의미합니다... 뭐 다행히도 철학에서 저런 입장을 “공식적으로” 취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본인이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만요)

일단 제도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들이 있거든요.

게다가 하나의 입장이라고 불릴 만한 입장 안에서도 규정은 의식되지 않습니다.

분석철학에서는 분석철학을 정의내리지 않거든요.(못하기도 하지만 안 하는 거기도 합니다. 사회학적으로 원래 내 집단 안에서는 명확한 동질성이 의식되지 않습니다. 내 집단 안에서는 모두가 고유한 개체로 인식되거든요. 동질적인 것은 외집단입니다)

오늘날의 철학이나 17세기의 철학이나 규정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란 것이죠.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철학”이란 것을 주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길래 데카르트가 하는 짓거리가 철학에 속할 수 있는지를 주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저는 철학의 조건으로서 “반시대적 투쟁”을 말했는데, 이런 조건으론 설명이 안 됩니다.

일단 이 조건은 저에게는 속합니다.

제가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고, 저에게는 숨쉬듯 당연한 거긴 하지만 그것이 데카르트에게도 당연한 것일 수는 없거든요.

게다가 저 기준이 올바를지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저 기준에 부합하는지가 문제될 수 있거든요.

데카르트가 저런 반시대적 투쟁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사실 이것도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저에게는 분명하니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데카르트가 이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아니거든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데카르트 본인의 철학에 대한 규정일 텐데, 데카르트는 그런 걸 표명한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 문제가 되는 거죠.

이런 문제를 제쳐놓고 고민해도 문제는 여전합니다.

데카르트가 반시대적 투쟁을 수행하려 의식했으나, 그것을 표명은 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가 없죠.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는 문제적입니다.

이 경우 데카르트의 반시대적 투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수단에 불과한 것일 수 있죠.

실제로 데카르트=과학자 주장을 채택하는 주석가들이 이런 입장을 취합니다.

데카르트의 철학 저작은 과학을 이 세계에 이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데카르트 철학은 철학일 수 있는지 애매해집니다.

뭐 당대로서는 철학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미 과학지상주의의 시대가 된 오늘날에는 그건 철학일 수 없거든요.

실현된 예언은 더 이상 예언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리고 문제는 저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인정하고 나서도 이렇게 물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게 왜 ‘데카르트’의 것이어야만 하는데?”

결국 데카르트 철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철학”과 “데카르트” 철학 모두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개성적일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는 거죠.

신 존재증명? 코기토 증명?

그런 걸로는 증명이 안 됩니다.

일단 그 증명들 자체가 다른 책에서 빌려온 거거든요.

그럼 그런 것들을 모아둔 무엇이가 데카르트 철학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증명, 논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들을 배열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배열 순서를 조금 바꾼다고 데카르트 철학이 더 이상 데카르트 철학이지 않게 되나요?

일단 제 정신 속 데카르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의식적으로든 비의식적으로든—기억하는 데카르트의 순서는 텍스트에 고정되어 있는 순서와 다릅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닙니다.

그것들의 변경을 견디지 못할 만큼 데카르트의 정신은 약하지 않거든요.

결혼을 했다면 아르노가 아르노가 되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 철학자도 있었고, 그 논리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조금 다르게 배열했다면 데카르트이지 않게 되었을 거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 논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 논리가 문제인 것은 저 논리가 단순히 신학적이어서가 아니에요.

저 논리는 데카르트의 배열로 정확히 데카르트의 완전개체개념[데카르트의 정신]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만 설득력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제적입니다.

도대체 저 배열들이 뭐길래 데카르트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게 진짜 어려운 문제라는 겁니다.

 

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재구성은 단순히 쪼개고 붙이는 일을 이래저래 해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데카르트의 배열이든, 데카르트의 삶이든, 그것을 다시 밟으며 그 필연성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철학을 연구하는 일은 그 철학자의 전기를 기획하는 일과 같다고 제가 말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습니다.

결국 그 철학의 정신은 전기를 쓸 수 있을 때서야 그 철학을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그 전기는 “철학적 전기”여야만 하겠고요.(철학적이지 않게 전기를 쓸 수도 있으니까요. 예컨대 그들이 저술한 철학책들을 모두 백인 남성 기득권들의 자기 정당화로 보면 철학 없이도 전기를 쓸 수 있겠죠)

그리고 이때 물어봐야합니다.

이게 도대체 플라톤 철학, 칸트 철학, 니체 철학, 루소 철학 따위와 무엇이 다르냐고.

전 아직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철학은 같은 영혼을 가진 이들의 영원히 반복되는 다른 종류의 삶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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