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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vs문화"라는 이분법?

데스콜라는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본인 연구의 테마로 삼습니다.
뭐 기본적인 주장은 뻔합니다.
자연은 하나가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죠.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구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콜라의 작업에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일단 데스콜라를 위해 변호해주자면, 데스콜라는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부정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데스콜라가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비교를 위해서는 차이점뿐만 아니라 공통점도 가져야만 하고, “주어진 자연”이 공통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죠.
데스콜라가 비판하려는 것은 “주어진 자연”을 당연시 하는 작태입니다.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자연이 똑같다고 전제하는데, 비교를 위한 공통 장소로서의 자연이 당연히도 “우리”의 자연과학적인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죠.(게다가 보통은 자연과학적인 자연도 아닙니다. 뇌피셜일 뿐이죠...)
데스콜라는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며,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있을 대안적인 도식도 제공하려고 합니다.
뭐 이렇게 보면 다 맞는 애기죠.
문제는 다 맞는 얘기를 자꾸 틀린 얘기로 한다는 것이지만요.
데스콜라는 모호하게 서술하면서 자꾸 옛날 인류학자들을 “비판”합니다.
데스콜라가 비판하는 꼴을 보다가 짜증이 났던 명단을 대자면 이러합니다.
레비-스트로스, 메리 더글라스, 로이 라파포트, 스콧 아트란, 마셜 살린스, 팀 잉골드.(사실 로이 와그너도 제가 읽었다면 여기 포함되었을 겁니다)
아 그래, 레비-스트로스는 빼줄 수 있습니다.
진짜 메리 더글라스, 로이 라파포트, 스콧 아트란, 마셜 살린스, 팀 잉골드에 대한 데스콜라의 비판은 정말이지 한심합니다.
제가 욕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저들이 데스콜라와 비슷한 작업을 했기 때문이죠.
저들은 자연을 단순화하는 도식을 극복하려 했어요.
심지어 메리 더글라스의 <자연상징>은 (솔직히 말하자면) 데스콜라 책보다 더 정밀하고 통찰력 있거든요.
도대체 뭘 안다고 까부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데스콜라가 가진 장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인류학 일반”의 문제로 삼는다는 점이 그것이죠.
데스콜라의 도식적인 논쟁 구도가 멍청한 것과 별개로 데스콜라는 매우 폭넓은 관점에서 문제를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인류학 일반”의 문제로 삼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인류학은 하나가 아니죠.
문제는 인류학이 하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정말이지 하나가 되지 않을 것만 같은 학문이라는 현실입니다.
데스콜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을 하나로 말할 수 있게 할 무엇인가를 저 문제에 근거하여 제시하려고 합니다.
데스콜라의 전략을 데스콜라의 4원 도식을 참고하여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데스콜라 본인이 항변하듯 그의 4원 도식은 “사회분류체계”가 아닙니다.
데스콜라는 사회들을 네 가지 짬통으로 쳐박으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것이죠.
데스콜라가 지적하듯, 저런 4원 도식은 분석틀이지 분류틀리 아니고, 해당 분석은 넷 중 하나를 강요하지도 않고, 사회 안에서도 다시 분석될 수 있습니다.
즉, 넷이 혼재되기도 하고, 사회의 어느 부분은 이렇고 다른 부분은 저렇다는 식의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게다가 사회 전체에 저런 분석이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런 분석을 적용하기 위한 대상이 모호하면 당연히 안 되는 거죠.
애초부터 데스콜라는 분류하기 위해 저런 도식을 만든 게 아닙니다.
해당 도식의 가장 큰 장점은 같은 분류에 속해도, 그 안에서 차이들을 저 도식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 결국 분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비교가 중요한 것이죠.
네, 여기까지만 해도 꽤나 좋은 작업을 수행한 것이죠.
그런데 데스콜라는 그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데스콜라는 저 분석틀을 가지고 분석만 할 게 아니라, 분석의 유의미성을 구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니까 단순히 이건 이렇다는 식이 아니라, 이러한 차이로 분석될 수 있다고 할 때, 그러한 분석의 “의미”를 유형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데스콜라의 핵심은 저 분석틀을 열심히 쓰라는 그런 게 아니었다는 얘기죠.
인류학적인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한정해보자는 게 핵심이었거든요.
비교의 근거로 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말해질 수 있는 방식이 한정될 테고, 그에 따라 주목 가능해지는 유의미성도 한정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데스콜라는 이를 구체적으로 유형화하진 않는데, 이전 인류학자들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얘기들은 모두 제가 지적한 저런 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니까 비방의 근거가 뇌피셜이 아니라, 가능한 분석 접근법에 입각한 비판이었다는 얘깁니다.(대상에 대한 사실 파악에 오류가 있어 분석 결과가 비방이 된 것이죠)
즉, 데스콜라의 물음은 “애니미즘이 뭔데?”, “애니미즘이 뭔지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애니미즘의 장점이 뭔데?”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애니미즘을 관찰할 수 있는 관점들은 무엇들이고, 그러한 관찰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애니미즘 관찰의 인지적 유의미성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가 데스콜라의 물음이었다는 겁니다.
즉, “왜 애니미즘인가?”라는 물음과 이에 대한 답을 메타적 차원에서 정교화했다는 겁니다.
이게 데스콜라의 기여라고 전 생각합니다.
물론 자꾸 이걸로 객관적인 학문성에 집착하고, 평가나 판단에 대해서 너무 적극적으로 가는 걸 경계하는 걸 보면 이 새낀 자기가 하는 얘기가 뭔지 모르나 싶긴 했는데, 하여간 데스콜라의 “정신”은 인류학적 이성 비판 같은 걸 기획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4원 도식은 “비판의 근거”로 확립하는데 도움이 될 분석론에 해당되고, 이에 기반하여 결합 가능한 인지적으로 유의미한 관찰 장소들은 요소론에 해당될 거고 말이죠.
일단 이게 한 꼭지입니다.

데스콜라의 일반적 전략 이론 구축은 물론 찬탄하고 싶지만, 적어도 그의 분석이 사실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좀 교정하고 싶습니다.
관련해서 재미난 정보들도 많이 누적했으니... 부족하진 않을 거고요.

일단 자연과 문화라는 대립이 어떻게 성립한 것인지에 대해서 썰풀 것들이 좀 생겼습니다.
얼마전에 얘기한 것 같기도 한데, 로레인 데스턴 같이 과학사가가 “자연” 자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기를 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현명하닊까 피하는 거죠.
애초부터 자연 그 자체는 말해질 수 없습니다. 비규정자니까요.
자연은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가리키는 바가 규정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체적인 대립 도식 속에서 자연으로서 의미 있는 것들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도 자연과 문화라는 이원 대립구도가 생겨났습니다.
데스콜라가 지적하는 것처럼, 비교할 때면 으레 자연을 공통 기반으로 두고 문화적 차이들을 설명하려고 하죠.
물론 이러한 접근은 분석 대상을 한정하기 위한 전략 때문인 것이기도 합니다.
환경 결정론을 주장할 거면 인류학이 왜 필요하겠어요.
그러니 환경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들을 독립적인 연구 대상으로 상정한 것이고, 그러니 자연을 공통 조건으로 두고 가능할 수 있는 차이에 주목하게 된 것이죠.(멜라네시아인들과 폴리네시아인들의 차이가 발견되었을 때 게오르그 포르스터가 제시한 “인류학다운” 전략이죠)
여기까진 좋습니다.
그런데 자연 고정은 왜 생겼을까요?
환경결정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풍토론”이라고 불렸던 고전 담론은 매우 다양한 변수를 가진 일반 이론이었고, 19세기 초반 지리학은 저런 고전 담론을 세련스럽게 체계화했죠.(데스콜라 책에 보면 “외쿠메네” 개념을 제안한 오귀스탱 베르크가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일본의 풍토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게 언급되던데... 퐁토론은 식상한 얘기입니다. 일본 가서 배울 게 아니었단 얘기죠. 오히려 그 사람이 발굴한 일본의 풍토론 사상가는 서양의 고전 풍토론에 기반해서 풍토론을 전개했을 겁니다)
물론 저런 담론 자체를 하나로, ‘지리학’으로 불렀으니 단일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리학은 기본적으로 공간적인 상호 관계 가능성에 근거하여 단일성을 주창했으니, 저걸 하나로 말하는 건 무리가 있어요. 지리학은 스스로를 복수의 집합, 현재의 성과들을 통해서 관찰 가능한 상호작용들의 총람이었거든요.(사실 이게 현대의 지리학이랑 얼마나 연결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문지리학이 이런 전통을 어느 정도 이어받긴 했는데 뭔가 다릅니다...)
그래서 명칭도 문법적으로 저런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지구연구Erdkunde’를 채택했던 것이죠.
암튼 원래 얘기로 돌아와 자연을 하나로 일반화하게 된 계기를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신칸트주의의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대립 도식에 의해 가능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자연vs문화의 일반적인 대립 구도 자체가 저쪽 조류의 최후의 대가인 리케르트의 자연과학과 문화과학 대립 구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저기서는 존재론적인 주장을 한 게 아니긴 했습니다.
명칭부터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이었고, 여기서 자연과학이 “자연” 자체를 가리키는 건 아니었어요.
근데 저 대립 구도에서 주목되는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사실과 가치라는 차이소에 의해 발생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사실을 탐구함으로써 자연과학의 특성을 갖게 되는 거고, 문화과학은 가치를 탐구함으로써 문화과학의 특성을 갖게 되는 거죠.
즉,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학문론적인 탐구 형식의 차이가 연구 대상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는 거에요.(사실 리케르트는 이런 입장은 아니었습니다만...)
게다가 미국 쪽에서는 사실과 가치의 대립 구도가 매우 도식적으로, 도그마적으로, 이념적으로 이해되었으니 오해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한 거죠.
저런 학문론 구도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모두가, 사실vs가치로, 존재에 대한 것과 마음에 대한 것, 자연에 대한 것과 인간에 대한 것으로 구도화했을 거라는 겁니다.

물론 저런 식의 도식화는 원래 취지랑 어긋나는 거긴 합니다만 저런 대립 구도가 저런 식의 문제를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리쾨르가 저 대립 공격하는 것도 거의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거든요.
그니까 저쪽으로 보자면 해석은 심리에 대한 것처럼 보이게 되고, 해석학을 통해서 진술될 수 있는 주장들이 마치 인간 심리에 대한 주장으로 국한되곤 한다는 것이죠.
리쾨르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매우 근본 있는(?) 겁니다.
보편 해석학을 일반 이론으로 제시하는 걸 성공시킨 슐라이어마허가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이라는 대립 구도를 사용했을 때부터 시작된 문제거든요.
리쾨르에 따르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것과 구별되는 뭔가를 정확히 규명할 수 있었어야하는데, 이걸 규명하는 데 실패해서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 모두 심리주의의 늪에 빠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심리주의의 늪이란, 해석학을 통해 성취된 진리 주장이, 해석학이라는 기술을 통해 체험 가능한 심리적 상태가 되어버렸고, 그러니 “보편성” 주장이 불가능해진다는 그런 문제입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후설이 이를 극복했다고 합니다.
후설이 초기에는 거의 심리주의와 현상학을 구별하는 문제에만 집중한 게 헛짓이 아니었다는 거죠.
결국 후설 덕분에 해석학은 심리 이론 이상일 가능성이 열린 것이죠.
리쾨르는 저 바탕 위에서 열심히 해석학의 객관성을 확보할 개념들과 연구 방법들을 정교화하는데, 전 좀 다른 조류를 얘기하려 합니다.
바로 앞서 언급한 메리 더글라스를 말이죠.

더글라스는 자토공인 뒤르켐빠입니다.
그런 더글라스 누님에게도 뒤르켐에게서 발견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뒤르켐은 사회 연구에 있어 광신, 정념, 감정, 열정 등을 적극 활용했어요.
뒤르켐의 사회=종교는 저런 정념 공동체이기도 했죠.
근데 더글라스 누님에게 이런 진단은 매우 문제적인, 모순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뒤르켐은 심리주의를 비판하며 사회학은 사회적 사실에 기초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죠.
사회학은 심리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 아닙니다.
심리 현상을 다룰 때조차 사회학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즉, 사회적 사실로서의 심리 현상을 다루는 것이죠.
그런데 더글라스 누님이 보기에 뒤르켐은 일단 정념부터 전제하고, 그게 왜 사회적 사실로 다뤄지는지도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광신의 공동체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거죠.(이건 실제로 모순입니다)
더글라스 누님은 뒤르켐의 저런 문제를 해결, 혹은 긴장을 완화하려고 하는데, 요런 작업에 깔려 있는 선-이해가 매우 매혹적입니다.
그리고 이게 지금 애기하는 “자연”과 “문화”의 대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요.

더글라스 누님은 뒤르켐의 심리주의 극복에 주목하는데, 이건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니까 이런 거죠.
18세기 감각론적으로 관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관념 형성은 심리적인 게 되죠.
왜냐하면 저쪽 논의에서 관념이란 것은 감각들의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해 감각들이 뭉쳐진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관념을 구성하는 원리가 감각의 질적 특징에 의존적이라는 겁니다.
아마도 이게 뭐가 문제인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 들 텐데, 이는 문제를 통해 말해져야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비슷한 관념을 얻게 되냐는 문제가 말이죠.
저런 조류에서는 그냥 감각이 비슷해서 비슷한 관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인간 신체의 동형성과 환경의 일관성에 호소하죠.
더글라스에 따르면 뒤르켐은 이런 식의 설명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설처럼 말이죠.(전략도 후설과 비슷하고요)
저런 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관념을 확인해내는 겁니다.
재미나게도 뒤르켐은 저런 식의 설명에서 당연시되는 전제를 공략했어요.
어떤 관념은 인간들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에 의존적이라는 거죠.
인간들 사이에서의 상호작용을 경험할 때만 형성될 수 있는 관념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상호작용에 대한 관념이 있으니까요.
다만 저런 관념을 “사회적”으로 설명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죠.
저것도 결국 심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사회적인 상호작용이 저런 심리작용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며, 그렇게 유발된 상호작용에 대해 관념이 형성되며 정-피드백을 일으키며 복잡한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거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뒤르켐은 이런 식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저걸로 설명될 수 없는 사태를 제시합니다.
상호작용에서 유래된 특정한 관념을 추상화하고, 이렇게 추상화된 개념을 사회적 상호작용이 아닌 영역에 투영해서 형성된 관념체제를 제시한 것이죠.
이 경우 심리주의적 설명은 어려워집니다.
저런 사태를 가능케 하는 “투영”은 심리적인 경향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죠.
실제로 뒤르켐은 바로 저 투영에서 문제적인 사례를 선정했어요.
투영을 추동하는 게 개인의 심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추상물의 (상징적) 내용일 수밖에 없는 것을 선택한 거죠.
이런 게 뭐냐? 바로 분류였습니다.
뒤르켐-모스 분류 체계의 혁신은 여기 있었던 거죠.
그냥 심리적 경향성, 감각들의 유사성과 인접성이 “사고 경제”에 기반하여 알아서 조직된 게 분류가 아니라고 주장한 게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설명”은 저런 분류 체계의 조직에 있어서 “사고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적용 “모델”로만 설명될 수 있는 분류 정교화 사례를 포착하고, 저 “모델”이 “사회”에 대한 상징적 효상이었음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 심리주의적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심리적 원리보다 주어진 사회 상태와 이에 대한 표상이 결정적이게 되니 말이죠.
이게 뒤르켐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충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 중시와 “분류”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는데, 원래의 문제로 돌아와 이게 자연과 문화 대립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를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문화과학적인 관점에서 분류를 다루면 역설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현지민들의 분류체계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어 있죠.
그런데 이들의 자연에 대한 지식을 문화과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해야만 합니다.
자연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해야만 함에도 말이죠.
물론 이런 모순은 쉽게 해소될 수 있습니다.
현지민들의 자연에 대한 지식은 자연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과학적인 것이고, 그러니 그들의 지식을 문화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죠.
뒤르켐의 중요한 성취는 이런 회피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뒤르켐은 모든 분류체계가 “사회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이걸 반박해야 저런 회피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반박이 안 된다는 거였어요.
콘퍼드는 저명한 고대철학자이고, 당연 철학 빠였죠.
콘퍽드에게 있어 철학과 종교는 당연히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철학은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탐구고, 종교, 즉 신화에서의 자연은 합리적 탐구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근데 뒤르켐-모스 연구를 보니 대충 “합리적”이라고 해서는 저런 구도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콘퍼드는 깨닫습니다.
그래서 반박을 준비하죠.
콘퍼드는 반박을 준비하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뒤르켐-모스의 주장은 단순 사례 논증이 아니에요.
범주 체계의 구조, 즉, 구성 논리에 대한 논증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례로 뒤집기 위해서도 저런 논리에서 벗어난 사례가 필요합니다.
콘퍼드가 깨달은 것은 그런 사례는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게 원리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고 콘퍼드는 고백하죠.
뒤르켐-모스의 범주 연구는 그만큼 대단한 거였습니다.
데스콜라는 아트란을 굉장히 평가절하하던데, 아트란의 작업은 저런 뒤르켐-모스 작업을 현대적으로 개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트란은 부족들의 분류체계가 구조적인 관점에서 린네의 분류체계와 동등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물론 린네 체계가 그 자체로는 더 방대하고 정밀하죠.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닙니다.
분류체계 안에서 부분들을 연결하는 구조적 관계 형식들이 중요하고, 아트란이 보인 것은 바로 이런 구조적 관계 형식들은 범인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연구가 전제되면 앞서의 회피는 정말로 불가능해집니다.
현지인들의 자연 분류는 “문화과학”일 수 없는 거죠.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는 그럼 자연과학에 대한 문과학적 연구 따위로 변형되어야만 하고, 이렇게 되면 쉽게 “자연”의 동일성이 주장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이든 “문화” 사회적 실재로서 구성되는 거라고 보는 게 상식적인 입장이 되는 거고요.

일단 더글라스의 뒤르켐 주목은 데스콜라의 진단과 달리 데스콜라의 분석 수준과 동일한 수준에 놓입니다.
물론 제가 앞서 강조했듯이 데스콜라는 분석 수준을 넘어 분석에 대한 평가를 가능케 하는 관점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더글라스 누님이 하위의 수준일 수 있죠.
하지만 더글라스 누님이 저런 분석들에 대한 평가 차원에서 데스콜라보다 못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글라스 누님의 평가 수준이 범-인류학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종교라는 매우 일반적이고 종합적인 사태에 대한 평가적 관점은 데스콜라와 동등합니다.
“일반성”이 약하다고 해서 평가절하될 이유도 없고요.(사실 “일반성”이 떨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글라스 누님의 평가적 관점은 종교라는 종합적인, 일반적인 개념을 다루기에, 종교를 다루는 모든 연구들에 걸쳐 있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선 연구들에 대한 데스콜라의 비방은 허접하다고 제가 진단한 거죠....
역시 선조들을 욕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P.S. 생각해보니 저런 도식에 대한 문제보다는 더글라스 누님의 뒤르켐 모순 해소가 더 흥미로울 것 같군요... 다음엔 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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