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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론"의 귀환?

이른바 ‘생태주의’를 표방하며 환경보호를 외치는 멍청이들은 이런 도식을 상식으로 여깁니다.
근대=과학지상주의=기계론=기술만능주의=자아중심주의=이기주의=자본주의=제국주의=환경파괴
그러니 이런 쪽에서는 베이컨과 뉴턴 이래 서구 자연관이 다 기계론적으로 바뀌어서 대충 “서구” “근대” “자본주의-제국주의”가 등장했고, 이런 자연관을 극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물론 저런 도식과 저런 해법은 너무나도 멍청한 것이라 평가할 가치가 없긴 합니다.
책임 회피와 지적 게으름을 통해 꾸며지는 “악마화”의 전형이거든요.
저런 나쁜 속성들을 모아둔 악의 짬통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고, 존재하지 않는 악의 짬통은 극복의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단순 무식한 세상 편한 도식이 참일 수 있는 “역사”를 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원시적인” 야노마뫼인들도 저런 단순 무식한 도식은 사용하지 않거든요.
다만 저런 도식이 유통되는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저들처럼 단순 무식한 세상 편한 도식을 활용해서 말하자면 ‘자칭 지성인’에 해당될, 그래도 좀 배운 사람들이 저런 도식을 상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거든요.
그러니 저런 류의 흰소리하는 책들이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의 ‘인류세’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바꿔서 계속해서 나올 수 있는 거죠.
뭐 이런 현실에 대해 투덜거리려는 건 아니고요, 저런 도식에서 나온 멍청한 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좀 떠들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어제 주어들은 사람은 저런 도식에 입각해 이런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기계론이 문제니 기계론이 말살시킨 “생기론”을 되살리면 된다는 거죠.
사실 도식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이 이런 겁니다.
저런 주장이 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추론 덕분입니다.

기계론은 생기론과 대립되는 사고방식이다.
기계론과 생기론은 대립하므로 (배중률에 따라?) 양자택일이 성립한다.
기계론 아니면 생기론이므로, 기계론 이전에는 생기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론은 생기론을 말살시켰을 것이다.
기계론이 문제라면 생기론은 문제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론이 말살시킨 생기론을 되살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정말 놀라운 추론인데요;;;(저도 사고함에 있어 도약이 심한 편이지만, 이딴 멍청한 도약은 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저런 대립 도식과 이분법적 사고가 결합하면 이렇게 놀라운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추론이 놀라운 것과 별개로, 저런 추론이 생각보다 많이 유통되고 있는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어제 읽은 학술적인 백과사전의 생기론 항목을 보니 더더욱 실감이 나더라고요.
해당 항목 저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관도 ‘생기론’으로 여겨지곤 한다더라고요.
전 좀 놀랐거든요. 생기론은 고대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근대적인 사고고 기계론의 등장 이후 기계론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사고에요.
해당 용어 자체도 딱 그 시점에 등장했고 말이죠.
그러니 생기론이 기계론과 반드시 대립한다고 볼 이유도 없습니다.(대립하곤 했지만, 이는 특수한 맥락 아래에서의 대립이고, 보통 기계론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신학적인 동기 아래에서 생기론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기계론이 아니면 모두 생기론인 식으로 말이죠. 역사적 기원까지 소급시켜서!

제 진단이 믿기지 않을 테니 사례를 들어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때론 하비에도 생기론 딱지가 붙곤 하는데, 이는 정말이지 잘못된 해석입니다.(하비에 생기론 딱지가 붙는 것은 하비가 데카르트와 대립해서입니다. 데카르트가 기계론자이니 하비가 데카르트와 대립했다면 하비는 생기론자라는 식의 추론이죠. 도식적 사고의 위대함...)
둘의 대립을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논제는 “심장이 펌프에 불과한가?”였습니다.
하비는 심장은 펌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데카르트는 심장이 펌프에 불과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둘이 동의하는 것은 일단 심장이 펌프질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심해야할 것은 고대에도 심장이 혈액을 내보낸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비의 경험연구는 단순히 심장이 혈액을 내보낸다는 주장과 결별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장이 내보내는 혈액양을 계산해보면 그 양이 막대하기에, 심장을 통해 내보내지는 혈액은 실시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순환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하비 특유의 주장이었죠.
아마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하비의 주장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려서, 그 이전 사람들이 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 들테니 이를 좀 설명하겠습니다.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이 순환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동맥과 정맥의 연결이 확인되지 않아서입니다.
둘은 모세혈관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연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비도 연결 자체는 확인할 수 없었고요.
그러니 그 이전 시대에는 심장이 펌프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주장을 할 이유가 없었어요.
이전의 의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심장이 펌프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심장을 통해 순환하는 혈액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죠
반면 하비는 양적 사고를 중시했고 혈액순환을 양적으로 측정했습니다.
측정 결과를 보니 펌프설이 주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각설하고 데카르트가 하비의 주장에 반대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데카르트도 순환 자체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모세혈관 등으로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순환설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죠.
데카르트가 문제 삼은 것은 심장이 펌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동맥과 정맥은 해부학적으로 구별됩니다.
게다가 동맥과 정맥의 혈액은 관찰시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맥과 정맥은 기능적으로도 구별될 것이라고 데카르트는 추측했죠.
데카르트는 동맥과 정맥이 기능적으로 구별되기 위해서는 심장으로 들어가는 혈액과,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혈액이 효력적인 차이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니까 기능적 차이를 가져올 차이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데카르트는 신비한 힘을 설명에서 추론에서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두 혈액의 물질적인 차이에 기반할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그러니 동맥의 피와, 정맥의 피는 물질적으로 차이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펌프질만으로는 물질적인 차이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하비의 펌프설을 비판한 것이었어요.
두 혈액의 상태를 다르게 할 차이가 심장을 기점으로 생성되기 위해서는 단순 펌프질 이상이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죠.(참고로 데카르트는 이러한 차이가 화학적인 차이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심장에서의 작용을 일종의 “발효”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비는 심장이 펌프질에 불과하다고 전제했으니 다른 이유를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비는 심장이 생명을 지속시킨다는 전통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혈액 자체가 생명력을 품고 있고, 이를 순환시킴으로써 생명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둘은 놓고 비교해보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누가 “기계론자”인가요?
데카르트인가요?
데카르트는 기계론자라는 악평과 달리 생명활동을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생명활동을 지속시키는 신체 기관의 기능에 주목하고 있고, 이를 기하학적인 도형이 아니라 화학적 변성 등을 통해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니까요. 이는 소위 17세기 기계론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18세기에 유행한 “화학혁명”의 사고처럼 보입니다.
데카르트가 기계론자가 아니라면 하비가 기계론자인가요?
하비도 좀 이상합니다.
분명 신체 기관을 기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긴 한데, 뜬금없이 생명의 힘이 순환하는 힘이라고 하질 않나, 혈액이 그런 힘을 품는 매체고, 심장이 이를 돌리니까 생명이 지속되는 거라는 등 비과학적인 사고를 남발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론자이지만, 기계론자가 아닌 거죠.
하비를 생기론자로 보는 멍청이들은 하비가 물질에 생명의 힘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완벽하게 멍청한 추촌입니다.
살아 있는 신체에 생명의 힘이 부여되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상식이거든요.
데카르트도 그런 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물과 죽은 동물이 구별되는데 도대체 이걸 왜 부정하겠어요.
단지 그 생명의 힘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한 것이죠.
생기론은 정확히 이런 문제에서 발전한 겁니다.
생명의 힘을 어떤 종류의 힘으로 볼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며,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 가능하게 체계화하려고 했던 것이죠.
생기론자들을 기계론자와 대립시키곤 하지만, 사실 생기론자들이 기계론에 대립될 이유가 없었어요.
대립은 기계론을 표방하는 신학무새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죠.
생기론자들은 일단은 기계론적 접근을 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다시 말해 기계적인 구조 차이를 일단 연구했죠.
그리고 해당 구조 아래에서 관찰 가능한 생명 현상들을 특정한 운동력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고요.
그들이 감각반응성sensibility, 자극반응성irritability 따위로 연구한 것들은, “생명의 힘”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운동으로 연구하려는 시도였고 말이죠.
해부를 통해 파악된 신체적인 구조물의 운동을 관찰하니 자극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반응이며, 이게 바로 생명활동을 수행하는 생명의 힘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상할 게 없고, 기계론과 대립할 이유도 없어요.
저런 활동도 결국 궁극적으로 기계론적이라고 생각해도 문제가 없거든요.
“기계론자” 데카르트의 화학적 생물학이 바로 이런 입장이었고 말이죠.
그러니 데카르트가 기계론적 의학과 의화학적 의학 모두의 선조가 된 것은 딱히 미스터리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거고요.
결국 생기론은 기계론 이후에, 기계론적 설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등장한 발견법적 개념이었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기계론 극복 운운하는 건 멍청한 소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말이죠.

멍청한 소리라는 것은 보여줄 만큼 보여준 것 같으니 좀 생산적인 논의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저런 멍청한 소리로부터 말이 되는 얘기를 어떻게 추출할 것인지를 말이죠.
저들이 말하는 ‘생기론’은 역사 속 생기론이 아니라 본인들의 뇌피셜로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반박이 무의미하기도 하고, 저들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역사 랑도 무관하죠.
저들이 생기론으로 말하려고 하고 싶은 사고는 생명이 없는 물질에 대해 특정한 사고 방식일 겁니다.
생명 없는 것을 생명 없는 것 이상으로 보자는 뭐 그런 거죠.(도대체 그래서 그게 뭔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는데 어차피 그 양반들이 이를 구체화하지 않았을 테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게 뭔 소용이냐는 겁니다.
보통 그들의 상상 세계에서는 그렇게 보면 환경파괴가 멈추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도대체 저런 사고가 환경보호와 세상의 평화랑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죠.
저런 치들은 이항 대립 도식을 통해, 기계론은 환경보호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추론하고, 그러니 기계론이 아닌 사고방식에서는 환경보호가 주장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근데 둘 모두 근거가 없죠.
저런 사람들은 한번도 베이컨을 읽지 않고 베이컨을 욕하고 있는 거라 모르겠지만, 베이컨이야말로 환경보호를 학문적으로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었습니다.
베이컨은 자신의 과학에 근거하여(사실 베이컨의 방법은 기계론과 무관한데, 베이컨이 당연히 기계론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게 전 좀 신기합니다ㅋㅋ) 전 과도한 벌목이 숲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막화를 유발한다고 진단하였습니다.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 대안도 내놓았죠.(가끔 좀 더 똑똑한 사람들은 이걸로 베이컨을 공격합니다. 베이컨은 과도한 벌목이 숲의 소유권이 불분명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오늘날로 치면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진단하고, 숲에 대한 적극적인 소유권 행사를 가능할 수 있게 제도를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베이컨 까들은 이걸 자본주의=제국주의 옹호로 해석하며 “숲 보호”라는 명분을 은폐하려 듭니다)
베이컨이 기계론자는 아니었지만, 기계론에서도 환경보호는 주장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환경보호 담론은 기계론적인, 즉 물리적인 인과관계에 근거하여 주장될 수밖에 없으니 너무 당연한 얘기겠죠.
사실 저런 자칭 생태주의자들은 생태학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존재고, 과학 그 자체인 생태학의 학문성에 먹칠을 하고 다녀 사람들이 생태학자들의 발언을 무시하게 되는 원흉이니 당연한 것일 수 있겠지만, 실로 그러합니다.
그래도 선해하자면, 저런 생태주의자들의 담론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환경을 보호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는 이유가 되는 특정한 자연관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스콜라 같은 사람의 작업이 큰 도움이 됩니다.
아, 쓰다보니 이걸로 너무 길어졌네요. 데스콜라부터는 완전히 다르게, 새롭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