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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 쪽글 - 2. 데카르트

데카르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써가지고... 뭔가 얘기를 꺼내려니 벌써부터 좀 지겨운데ㅋㅋ

그래도 지금 하는 얘기는 처음 하는 얘기이긴 합니다.

 

어제 언급했듯이, 제가 사용하는 중심 테마는 “회의와 확신”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회의와 확신”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회의와 어떤 확신이냐입니다.

이걸 좀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싶으니, 데카르트 시대의 한 사례를 비교항으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내세울 비교항은 예수회의 결의론casuistry입니다.

결의론은 다양한 경우들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검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이게 어떤 것이었고, 어떤 장점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지동설이 진리이니 지동설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심해야할 것은 지동설이 상식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천동설이 상식이라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 모두 상식임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죠.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규탄한 가톨릭 쪽 인물들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그들이 갈릴레이의 주장을 탄압한 것은 그들의 천동설에 대한 믿음과 독립적이었습니다.

갈릴레이의 죄명은 “추기경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었고, 추기경과 약속한 내용은 “결정적인 증거 없이 공연히 사회에 혼란을 끼칠 수 있는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이런 약속에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이 사회에 혼란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고, 갈릴레이도 이에 동의했죠.

그리고 갈릴레이가 <대화>를 썼을 때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지동설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근거 없이 지동설을 옹호해서였습니다.

“근거가 왜 없어?”라고 물을 수 있는데, 사실 당대에는 근거가 없었습니다.

수성의 위상 변화가 지동설의 증거인가요?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건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었고, 원리적으로 결정적인 증거일 수도 없습니다.

해당 현상을 설명할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해당 현상은 애초부터 지동설과 상관없거든요.

그니까 당대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러합니다.

천동설 지동설 둘 중 하나가 참이지, 둘 다 참일 수는 없다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동설이 참인지 지동설이 참인지 인간이 알 수 있는지였죠.

게다가 부수적인 문제들도 있습니다.

알 수 있다고 쳐요. 그걸 왜 굳이 알아야하고, 그걸 왜 굳이 사람들에게 알려야하나요?

딱히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도 될 문제일 수 있죠.

무엇이 참이라는 사실이, 그 사실을 굳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이유는 되지 않거든요.

당대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톨릭의 공식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문제에 대한 예수회 결의론적인 방식의 처리는 이러합니다.

학문적으로 가능한 입장이라면 모두 이론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지동설과 천동설의 경우 모두 학문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론이기에 둘 모두 다뤄져야합니다.(다른 경우라면 가능한 입장들이 둘 이상일 수도 있고, 하나의 입장만 학문적이라고 해도, 다른 가능성이 원리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만 합니다) 

다만 이처럼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는 것은 학술적인 총서 형태로만 정당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가능한 입장이라고 해도, 그걸 공공연히 떠들어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특정 문제에 대해 취해야할 태도의 정당성은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죠.

즉, 결의론에서는 가능한 입장들을 모두 이론적으로 허용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은 규제합니다.

떠들고 다닐 곳과 떠들지 말아야할 곳을 분별할 기준을 제공하면서 말이죠.

이 기준 자체는 이론적인 것은 아닙니다. 상급 기관의 지침에 의해 임시적으로 결정되죠.

이게 결의론적인 태도입니다.(오늘날 학문적 태도와 꽤나 유사하죠)

갈릴레이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지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갈릴레이는 이미 당국과 대화를 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도 제멋대로 행동했죠.(추기경과의 약속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면 고의성이 없는 건데, 갈릴레이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거든요. 약속할 때 갈릴레이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동의하여 약속을 했으니 빠져나갈 구석이 없습니다)

 

결의론적 사고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면 이러합니다.

일단 진리 자체에 대해서 결의론은 회의적입니다.

다만 결의론에서의 회의는 인간의 지성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알 수 있는 것도 있죠.

문제는 아는지 불명확한 것들입니다.

결의론은 이런 것들의 경계를 원리적으로 긋지 않습니다.

지동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하진 않거든요.

게다가 결의론에서는 지성 능력의 적극적 활용도 옹호하죠.

결의론에서 허용되는 가능한 입장은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말이 되어야하고 정교해야합니다.

천동설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전 시대에도 충분히 증명되었지만, 대안이 되는 지동설이 어떻게, 얼마나 정교화될지는 불분명하죠.

결의론에서는 정교화를 중요시하고, 대안으로서 다뤄질 만큼 정교한 것, 즉 지성 능력에 의해 정교하게 구성된 가능한 이론적 입장만을 옹호합니다.

그러니 밑도끝도 없는 회의랑은 다르다고 할 수 있죠.

다만 “확신”에 대해서 결의론은 매우 실용적-제도적 입장을 취합니다.

어떤 것에 대해 주장할 때, 그것을 개인의 신념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결의론에서는 확신을 위험한 것으로 봅니다.

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무관하게, 실천에 있어 존중되어야할 것은 제도와 권위라는 거죠.

사회적 파급력이 있는 주장은 개인적 확신에 의해 발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로 인한 결과를 개인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죠.

책임질 수 있는 기관, 좀 더 일반적으로는 공동체의 책임 아래에서만 발화가 결정됩니다.

 

결의론은 합리적입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결의론을 부정했습니다.

결의론과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결의론을 적극적으로 공격했죠.

데카르트는 회의와 확신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는 거죠.

바로 그 중심에 그 유명한 cogito ergo sum이 있고요.

 

저 문장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하곤 하지만, 이는 좀 문제적입니다.

한 주석가가 언급했듯이 저 문장을 굳이 라틴어로 쓰고, 주어를 생략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거든요.(저 구절은 <방법서설>에도, <성찰>에도 없고, 사실 문헌적으로 따지면 제 얘기는 좀 근거가 없어지는데, 설명을 위한 가상으로 채택하겠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를 적극적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기억도 감각도 배제하면, “나”로 얘기되던 모든 것이 부정되는데, “나”를 강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cogito가 it rains처럼 비인칭주어에 의한 현상일 수도 있다는 거죠.(이런 비판은 18세기에도 제기되었습니다... 유서 깊은 비방인 것이죠)

데카르트는 “나”를 강조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1인칭으로 이를 말했습니다.

라틴어의 주어 생략이 1인칭 화법을 비인칭적이게 하진 않거든요.

때문에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분명 “나”를 전제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데카르트”나 의식의 통일성을 상저하고 꾸며낸 “영혼”이 아닐 뿐이죠.(참고로 니체는 데카르트가 종교적인 실체로서의 영혼을 자신의 철학으로 해체해낸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문헌 근거가 있어요. <선악의 저편> 종교 파트에서 나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코기토를 수행하는 것이 관점 의존적이라는 것을, 그것이 1인칭적인 관점 속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보존하는 담지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점 의존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데카르트는 사유 자체를 얘기한 게 아니라 특정한 관점 속에서 수행되는 사유함을 말했다는 것이죠.

사유 다음에 검토될 것은 존재입니다.

데카르트는 “존재”를 말할 때 exist가 아니라 sum을 말합니다.(사실 <성찰>에선 existo라고 말합니다ㅋㅋ)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데카르트는 정말로 공허한 주장을 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유(?)라고 할 만한 게 있다는 것만을 얘기한 거거든요.

이런 공허한 얘기의 맥락을 따져보면 그 의도가 보입니다.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쫓다가 코기토에 이르렀습니다.(편의상 <성찰>로...)

그리고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코기토에서 발견하죠.

이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별거고 매우 급진적일 수 있을 입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확실성을 사실상 부정했기 때문이죠.

확실성이란 것은 대상에 귀속되는 겁니다. 감각이든, 지각이든, 인식이든 어떤 무엇에 대한 것이고, 바로 그것이 확실성을 담지하는 무엇인가죠.

데카르트는 그런 것들을 모두 부정한 겁니다.

데카르트에게 확실한 것은 대상에 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판단 활동에 귀속되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활동에 의해 대상에 부여된 것이죠.

확실성이란 것은 사실상 확신과 다를 게 없고, 결국 그 원천은 대상에 속하지 않는 순수하게 수행적인 활동이란 게 데카르트의 결론이란 얘깁니다.

여기에 전제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무엇인가에 대해 참거짓을 부여하는 [판단] 활동 말고는 남는 게 없거든요.

이 상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거짓을 부여하는 활동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활동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수행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데카르트는 사유의 존재를 옹호한 것입니다.

이런 존재를 실재나 현존이란 짬통에 바로 던져 넣어도 안 되요.

데카르트는 말 그대로 그것이 규정하고 규정되는 무엇인가를 담지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얘기하지 않거든요.

이게 “실재”라고 말해질지, “현존”이라고 말해질지는 그 자체로는 미결정이란 얘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규정”이 “발생”하고, 그것에 “참거짓”이 “할당”된다는 사태 자체입니다.

데카르트는 해당 주장을 통해 이런 영역, 후설이 초월론적 현상학이라고 부른 영역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확실성은 확신이란 구체적인 수행 속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죠.

 

데카르트는 확신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확신을 수행으로 파악했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확신을 긍정할 이유도 없고요.

데카르트는 자신의 방법을 통해 확신을 통제하는 기술을 제안합니다.

확신이란 것을 코기토 수준에서 “분석”함으로써 확신이 순수하게 수행될 경우 필수적으로 요구될 요건들을 통해서 “요소들”을 제시하죠.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데카르트가 이미지와 개념을 구별하고, 이미지로 결정되지 않는 현상들에 결정권을 줬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저번에 언급했듯이 데카르트는 이미지가 진리를 매개할지라도, 결정하진 않는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삼각형은 이미지로서는 둔각이거나, 예각이거나, 직각이죠.

그런데 우리는 삼각형의 성질을 파악할 때, 저런 이미지들을 넘어서서 삼각형의 성질을 파악합니다.

삼각형의 내각이 180도라는 것을 증명할 때, 시각적으로든 상상적으로든 우리는 특정한 삼각형의 이미지를 통해 이를 인식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증명은 해당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증명할 때, 다른 경우들을 직접 증명하지 않고서도, 이것이 삼각형의 일반 성질임을 파악하거든요.

이런 현상에 데카르트는 주목합니다.(한 가지 지적하자면, 데카르트가 방법에 있어 가능한 경우들을 열거하는 것을 중시한 것 또한 이런 현상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항상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데카르트는 우리가 인식할 때, 구체적인 이미지 이상의 것을, 이미지를 직관하듯이 직관한다는 것에 주목한 것입니다.(후설은 이를 “본질 직관”이라고 부르며 일반적인 감각적 직관과 구별하는데, 데카르트는 이것만을 “직관”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자연의 빛”이라고 부르죠)

이게 왜 중요한지가 더 중요합니다.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방법은 제작적입니다.

때문에 증명이 개별적이죠.

데카르트는 이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일한 공리를 전제하고, 동일한 작업 절차에서 수행되는 활동들로부터 다른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즉, 개별적인 기하학들이 어떻게 하나의 단일 기하학일 수 있는지, 혹은 단일한 평면, 단일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일 수 있는지가 확실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죠.

데카르트는 이것이 해당 활동들로는 파악되지 않고, 직관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근거를 발견했습니다.

삼각형의 성질에 대해 모두가 똑같은 결론을 얻지 않냐는 그런 경험적인 주장과는 구별되는 증거를 말이죠.

데카르트는 위상상수를 발견했고, 그것이 기하학적 구성을 지탱하는 공통적인 규제원리의 흔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체로는 직관되지 않고, 지성에 의해 파악되지도 않지만, 직관과 지성의 내적 일관성에 따라 앎이 생산될 때, 그 생산물에서 발견되는 공통성의 흔적에 의해 추론될 수 있는 “무엇”을 말이죠.

이게 데카르트의 신이죠.

데카르트는 코기토 수행이 바로 저 무엇과 맞닿아 있는 것이 확신의 선험적 조건임을 코기토 증명을 통해 보인 것이고, 이를 규제 원리로 삼아 경험을 재분석하는 것을 보입니다.

각각이 그의 인식론적 형이상학과 구체적인 과학연구들에 해당되죠.

이게 데카르트 철학입니다.

 

데카르트는 결의론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신이 아니라, 진리가 아니라, 제도와 습관을 숭상하고 있기 때문이죠.(이거 자세히 설명하며 그때나 지금에나 융성하고 있는 역겨운 학자연함을 욕하고 싶군요ㅋㅋ)

겸손한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부정하면서 겸손한 것은 역설에 빠지거나 위선입니다.

데카르트는 확신도 충분히 정교한 방법에 의해 규제될 경우 그 자체로 정당한 진리 주장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자신의 철학으로 옹호한 것이죠.

도대체 이런 확신 없이 어떻게 진리란 게 가능할 수 있냐는 의심에서 말이죠.

데카르트는 진리든 학문이든 결국 확신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옳게 진단해낸 것이고,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확신을 엄격한 방법 아래에서 통제했습니다.

데카르트야말로 진정한 확신의 수호자인 것이죠.(데카르트에게 회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거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적인” 학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위가 부여된 제도, 단체, 문장 따위에 의해 보장되는 학문이 아니라, 진리를 체험하는 인간들에 의해, 바로 그들의 체험을 통해 실현되는 학문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죠.

관습이란 명분 아래에서 습관화된 복종과 존경을 구별 못하는 치들의 학문과는 정말 다릅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1인칭적입니다.

그런데 그가 코기토에 1인칭성을 부여한 것은 의식의 폭압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솔직히 말하자면 1인칭적이라 1인칭적이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까들은 신의 관점에서 보나? 왜 1인칭성을 가지고 지랄하는지 모르겠어요)

학문을 “인간적인 것”으로 확립하기 위해 부여한 것이었죠.

이건 틀릴 수 없는 주장,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계속해도 반복되는 주장입니다.

 

 

이번 건 좀 추상적이라 제대로 설명이 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ㅋㅋ

하여간 회의와 확신을 공통 테마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 경우 어떤 회의, 어떤 확신인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는 이런 테마를 중심 테마로 삼은 철학을 제시한 거의 첫 철학자다.

데카르트는 수행적 확신을 앎의 근거로 삼았다.

때문에 데카르트는 특정 교리에 기초한 게 학문, 특정 제도의 권위와 습관적인 복종에 따라 유지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활동에 근거하여 내적 확신을 생산하고 교환하며 발전하는 학문을 제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데카르트 짱짱맨...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