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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 쪽글 - 0. 화두 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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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을 스콜라 전통의 개념들을 뒤집은 것으로서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실체”일 테니, 실체를 중심으로 얘기해보죠.

 

일단 수의 차이로 시작하고 싶네요.

근대 철학에서는 실체가 몇 개인가요?

데카르트의 경우 둘이겠죠.(셋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스피노자의 경우 하나일 겁니다.

근대 철학에서 실체는 하나일 수도, 둘일 수도, 셋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스콜라 전통과 비교할 때는 말이죠.

그렇다면 스콜라 전통에서는 실체가 몇 개인가요?

답은 간단합니다. 여러 개.

스콜라 전통에서 실체는 일단 자연종들입니다.

구체적인 개별자들에 해당될 질료-형상 복합물을 가능케 하는 담지자로서의 자연종들이 실체입니다.

때문에 자연종의 수만큼 실체가 있어야합니다.(이게 “영혼”의 존재 지위 문제 때문에 “이단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퀴나스가 “단순실체” 등을 주장한 것이라는 중요한 논의거리들은 일단 여기서 빼겠습니다)

적어도 말이죠.

스콜라 전통에서 실체는 여럿입니다.

무한히 많지는 않겠지만, 정확히 몇인지를 말하기 애매하죠. 하여간 여럿입니다.

반면 근대 철학에서는 (둘이나 셋도 여럿이긴 하지만) 실체의 수를 정확히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여럿이 아닙니다.

“물질”, “정신” 따위의 방식으로 실체를 정확히 세죠.

뿐만 아니라 이런 수를 “자연종” 같은 것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영혼”은 인간의 수만큼 여럿일 수 있거든요.(데카르트도 사실 이런 입장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여럿”인 것은 스콜라 전통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다르죠.

이 차이에 주목해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근대 철학에서는 자연종 개념을 배제하고, 자연종에 해당될 무엇인가를, 물질이든 자연이든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설명하려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근대 철학에서 주장된 “실체” 개념의 독특성입니다.

문제는 이런 새로운 개념이 제시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죠.

 

저런 개념의 탄생은 당연히 여러 배경을 갖습니다.

아마도 신학적으로 제가 무시하겠다고 말한 영혼의 개별성 문제가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을 겁니다.

다만 여기서 전 철학적인 배경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철학적인 배경이 무엇일 수 있냐는 것이죠.

전 여기서 “학문적인 기준”을, 다시 말해 논리적 정합성과 경험적 타당성을 “철학적”인 배경으로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논리적 정합성으로부터 시작해보죠.

실체는 여럿입니다. 이는 상식적으로 타당합니다.(현대 언어철학에서 본질주의가 중요시되는 걸 생각하면 여기서의 “상식”은 피상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서 별 고민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논박이 별로 중요치 않은 주장은 검토의 가치가 없거든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종 분류에 있어 “상식”이 오류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국소적인 검토였습니다.

종일반의 분류원리로 해당 문제를 검토한 것이 아니라, “고래는 물고기인가?”의 경우처럼 논박이 중요한 주장에 한해서 검토한 것이라는 얘기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해당 문제에 국한해서 합당할 수 있는 검토 결과를 제시했을 뿐이지, 일반 원리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원리의 부재는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적인 문제가 먼저 문제될 수 있죠.

대항해 시대와 지리상의 발견으로 “새로운 종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치 않을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체계는 서유럽 지역의 자생종에 대해서도 말한 게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이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왜냐? 약간의 오류 정도야 수정하면 되었고, 자생종도 아리스토텔레스 종체계에 끼워 맞춰서 분류되었거든요.(애초에 “자생종”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요. 이에 대한 관심이 등장한 것은 특정 시기부터입니다)

그런데 대항해 시대와 지리상의 발견은 좀 다른 급이었죠.

적당히 끼워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다르고, 그런 이질적인 것들이 폭발적으로 발견되었으니 말이죠.

당연히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체계의 권위를 실추시켰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건 모두 경험적인 문제에요.

제가 여기서 주목하려는 것은 논리적인 문제입니다.

논리적 문제는 수의 문제로 표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종이 몇 개인지의 문제가 아니었단 얘기입니다.

문제가 되는 물음은 도대체 여러 종이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입니다.

종들은 모두 고유한 실체입니다.

각각의 종들은 각각의 종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종 일반”으로 분류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물론 단어 상으로 하나로 말해집니다.

그런데 먹는 배와 타는 배도 단어 상으로는 하나죠.

‘종’이라는 표현이 각각의 종들에 대해서는 말해지겠지만, 그것이 “개”와 “고양이”처럼 다른 것을 가리키듯이, 동음이의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게 논리적인 문제에요.

종이 몇 개인지를 묻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근거, 즉, 종들을 일반적으로 셀 수 있을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에 대한 답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단일성을 부여하기는 매우 어렵고, 동음이의어들로 말하자니 이상합니다.(후자의 경우 셀 수 없다는 결론이 귀결되기도 하죠)

결국 가장 나아보이는 답은 유비[유의어]일 겁니다.

문제는 유비로는 아무 것도 설명을 못한다는 것이죠.

이게 논리적 문제입니다.

 

경험적 문제는 앞 서 언급된 사례로는 설명하기 좀 그렇습니다.

분류의 과학은 근대 철학에 앞서지 않았거든요.(시도는 되었는데, 성공이 18세기에 이루어졌죠. 성공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분류학도 동근원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전형으로 여겨지는 천문학 사례가 적합합니다.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지만, 이는 당연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주선 타고 나가서 본 것도 아닌데, 도대체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우주선을 타고 나간다고 해도, 정확히 무엇이 도는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구에서도 지구 공전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연주시차가 있지만, 당대에는 관측 불가능했죠.(19세기에서나 관측 성공)

게다가 문제는 애초에 천문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대체 천문학적인 계산을 가지고 행성 체계라는 존재론/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이었거든요.

계산이 잘 된다는 것과 그게 실재를 반영한다가 뭔 상관인지가 문제였다는 것이죠.

애초에 천문학에서 현상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은 존재론/형이상학적으로 근거가 없었고, 그것의 존재를 승인하자면 매우 기이한 존재자를 승인하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 본인이 그래서 자신의 입장의 장점으로, 도저히 존재론/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기이한 존재자 상정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든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죠.

코페르니쿠스는 본인이 상정하는 존재자들은 그런 기이한 고안물이 아님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이 존재론/형이상학적일 수 있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코페르니쿠스가 불가지론이었다는 해석에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 별개로 이런 걸 따져야합니다.

도대체 계산 가능한 게 뭐 길래 존재를 말할 수 있지?

앞서 논의한 논리적 문제를 통해서만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이 실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존재론/형이상학으로 말해질 수 있는지는 불명확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이 유비였죠.

그런데 유비는 단순히 유사하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유사한 것들을 고려하는 것과 유비적인 것들을 고려하는 것은 전혀 다르거든요.

전자는 유적인 관계를 맺는 대상들 사이에서 고려되는 것이기도 했고, 활동 자체도 구별됩니다.

후자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그것들을 유비적이게 하는 특별한 공통관계였습니다.

보통 이게 “비례”로 여겨졌죠.

근데 비례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개념이고, 당연히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유비’란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기하학적 맥락에서나 도움이 될 관계죠.

구체적인 사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대-중세의 유비 분석은 목적의 일치 따위의 유비란 용어와 거의 상관없는 근거들이 제시되었던 것이고요.(고대-중세의 전형적인 사례는 ‘건강한 오줌’, ‘건강한 음식’, ‘건강한 신체’ 사이에서의 유비였습니다. 갠적으로 아퀴나스가 ‘일치conventia’를 ‘비교’, ‘비례’와 함께 ‘유비’의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저런 목적의 일치는 비교도 비례도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다룬 문헌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머리가 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생각합니다)

근데 저런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화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죠. 기하학에서 말이죠.

여기서 기하학은 바로 물리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투시도법을 비롯한 공간-기학의 발전을 얘기하는 겁니다.

동일한 공간이 관찰자에 의해 왜곡되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에 따른 변환에 해당되고, 이것이 객관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역사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죠.(솔직히 이런 발견이 앞섰는지, 신학적 동기가 앞섰는지는 모호합니다. 제가 간접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의 미술사 연구를 보면, 투시도법은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탐구되고 주문된 기법인데, 그들의 동기는 신학적이었습니다)

저런 발견을 근거로 역의 논리가 개발됩니다.(그러니 비례가 답이란 주장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니콜라스 쿠사누스가 이런 논리를 개발한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결국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관계는 “종” 같은 인위적인 기준이 아니라, 단 하나의 보편적 기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서의 관계일 수밖에 없고, 피조물이기에 갖게 되는 “상대성”이 비례의 관계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호 비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이죠.

물론 그것들 사이에서의 비례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들 자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대칭적”이라는 점에서 유일신을 표현하는 것이 되고요.

바로 이게 실재를 기하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정당성의 원천이었던 것이죠.

 

다시 문제로 돌아와 근대 철학의 “실체”를 검토해보죠.

왜 물질이 단일 실체인가요? 자연종들은 어디가고 말이죠.

자연종의 실체로서의 지위는 박탈되어야만 했습니다.

실체로서의 자연종은 인위적인, 이교도의 독단에 불과한 범주이며, 신이 창조한 단일한 세계를 분열시키는 이단적 교의의 흔적에 불과하니까요.

모든 것은 창조자의 단일한 창조 원리로부터 설명되어야했습니다.

그것들의 제작/작동은 기하학이어야만 했죠. 그래서 물질은 하나여만 했습니다.

그런데 왜 물질만 실체가 아니고 다른 게 등장하는지 의문이 들겁니다.

간단하죠.

물질만으로 설명하면 이게 유일신이긴 해도 인격신은 아니게 됩니다.

“가치”를 담지하는, “도덕”, “정신”, “규범”, “구원” 따위는 기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중의 원리, 하나는 기하학의 원리, 다른 하나는 성서의 원리가 됩니다.

전자가 자연, 후자가 계시로 표현되는 것이고요.

나머지 것들은 이 둘 사이의 결합을 매개함으로써 이 두 원리를 하나의 단일체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문제들이 있고, 그것들을 해결하는 기교로서 도입된 것이라는 얘기죠.

단순합니다.

 

 

일케 보면 근대 철학은 매우 상시적인 입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면 통일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자연적인 것이라면 모두 하나의 원리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따위의 규범을 표현하는 입장이거든요.

상식으로 적당히 분할된 세상에서는 절대로 따르지 못할 규범이고 말이죠.

 

 

하여간 그렇습니다.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