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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유추란 무엇이고 철학에서 왜 중요한가?

이 또한 편지


예전에 보낸 글을 다시 보니 제가 보기에도 문제가 심각하군요;;;

당장 말이 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변명을 하기 위해서 새로 적어보았습니다.

 

  <플라톤과 예시 논증>에서 다루어진 <이온>의 사례와 거의 비슷해 보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설명에서 시작하고 싶네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규정되었으므로, 이제 문답을 통한 변증술적 논의(로고스)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를 구별해야만 한다. 하나는 귀납(에파고게)이고 다른 하는 추론(쉴로기스모스)이다. 추론이 무엇인지는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귀납은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자에 이르는 통로이다. 예를 들면 지식을 가진 키잡이가 최고의 키잡이라면 또 전차를 모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각각의 일에 대해 지식을 가진 사람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귀납은 [추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며 더 명료하고, 감각에 의해 더 잘 알려지는 것으로 많은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추론은 더 강제적인 것으로 쟁론에 능한 사람에게 더 효과적이다.” <토피카> 1권 12장 (김재홍 역)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에파고게에 엄격한 형식적 완전성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흥미롭지만,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개별자”와 “보편자”에 대한 서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 개별자와 보편자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내가 말하는 보편적이라는 것은 하나 이상의 것들에 자연적으로 술어가 되는 것들이고, 개별적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보편자이고, 칼리아스는 개별자이다.” <명제론> 7장 17a39 (김재홍의 <토피카>의 주석 p.63)

아리스토텔레스가 <토피카>에서 제시한 귀납의 예가 “개별자적인 것들이 분명하다는 것을 통해서 보편적인 것을 증명”한(<분석론 후서> 71a8-9) 것이었다면 “지식을 가진 키잡이”나 “지식을 가진 전차를 모는 사람”을 개별자로, “각각의 일에 대해 지식을 가진 사람”을 보편자로 말한 것일 겁니다. 그런데 “지식을 가진 키잡이”, “지식을 가진 전차를 모는 사람”은 <명제론>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종류의 개별자, 즉 “칼리아스”와 같은 종류의 개별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을 가진 키잡이”, “지식을 가진 전차를 모는 사람”은 개별적인 특수한 개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문제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아마도 이게 학부 <고대철학> 수업에서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인간의 경우 실체 개념의 대상이 무엇인지 모호해진다는 문제랑 관련 있겠죠... 전 그때도 지금도 뭔 소린지 잘 모르고 있지만요) 해석을 통해 저러한 차이를 입장 변화로 소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역자 해설을 보니 <명제론>과 <수사학> 모두 초기 저작으로 간주하는 것 같고, 그렇다면 시기 변화로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문제가 되는 12장은 “추론이 무엇인지 앞에서 말한 바 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분석론> 이후 삽입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니 시기 구별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저 차이에 주목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문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세나 근대에 해결하려고 한 문제와 비교하기 위해서니까요.

 

  <토피카>라는 텍스트 자체는 중세 성기에 많이 참고되지 않았지만, <토피카>에 수록된 내용과 매우 흡사해보이는 내용은 잘 알려져 있었고, 그러한 내용에 맞춰 중세 학문 제도는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위 “스콜라적 방법(론)”이라고 불리는 교수법은 12세기 무렵 법학과 신학 모두에서 성숙한 형태로 등장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수행되었습니다. 스콜라 전통에서는 학문의 토대로 불변의 권위를 가진 텍스트의 존재를 전제하였습니다. 당연히 저러한 텍스트들은 통일성이 있고 일관적인, 다시 말해 모순이 없는 것으로 전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러한 텍스트들에는 당연히도 모순이 있었고, 스콜라적 방법론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저 모순에 근거하여 학문적 기획으로 탄생하였습니다. 겉보기에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의 일관성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모순의 해소, 불일치하는 것들을 일치시키는 방법이 변증(술?/론?)이라고 여겨졌고, 그래서 중세에는 토론이 중요시되었습니다. 토론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고, 특정한 “문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해 토의함으로써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입장들을 변화시키는 활동이기도 했거든요.(루터의 95개조도 이런 활동이었습니다) 스콜라 전통의 “변증술”은 일련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 질문들과 대답들의 연속 속에서 모순들을 발견하고, 2) 특정한 사례들에 대한 일련의 명제들로부터 일반화된 공식을 추출한 후, 3) 개념의 의미들을 유genus, 종species, 아종subspecies 등으로 분석한 후 종합하는 것이죠. 여기서 유, 종, 아종 등으로 개념들을 분석할 때, 문제가 되는 개념들의 다의성을 포착하는 <토피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토포스”를 통해 수행하는 작업들이 수행되었고,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 규칙과 예외 등으로 모순들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종합”은 찬반 정리 후 한 쪽이 올바르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의미 구별을 통해 찬반 근거들을 일관성 있게 조화시키는 활동이었죠.

  이게 그냥 추상적으로 얘기하면 모호하니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교회법을 사실상 가능케 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라티아누스의 <불일치하는 교령들을 일치시키기Concordantia Discordantium Canonum>에 있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논제는 “이교도의 책을 읽는 것은 금지되는가?”입니다. 이 논제에 대한 찬반의 근거는 모두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문서/증언이어야만 했습니다. 이교도의 책을 읽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카르타고 공의회의 포고에 포함된 금지였습니다. 해당 포고에는 이교도 책에 대해 일반적으로 읽지 말라고 서술되어 있었죠.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금지였고, 그라티아누스는 저러한 금지를 축소 해석하는 기교를 선보입니다. 교부들 또한 이교도의 책을 읽었으며, 교부들은 그러한 독서의 “필요성necessity”을 언급하며 그러한 활동을 정당화하였습니다. 카르타고 공의회의 포고는 일반적인 금지를 포고하였기에, 모든 경우를 배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카르타고 공의회의 포고는 특별한 경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필요성이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반면 교부들은 필요성이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였습니다. 그라티아누스는 이러한 경우 차이를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이교도 서적 독서를 정당화합니다. 일반법이 특수한 경우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금지하지 아니한 경우, 특수한 경우에 국한하여 이를 허용하는 특별법은 일반법의 위반으로 볼 수 없고, 일반법이 그러한 경우들을 제외한 다른 경우들을 금지한 것으로 해석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라티아누스의 이러한 해석은 자의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라티아누스의 해석은 자의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그라티아누스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법학의 일반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특별법 우선의 원리에 해당되는 작업이고, 로마법학에서는 저러한 구체적인 원리들에 근거하여 적용의 모순을 해소하고 있었거든요. 불일치의 해소가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해결된다면 그러한 활동은 “학문적”이지 않겠지만, 특정 가능한 제한된 일반원리에 입각하여 체계적으로 다루어진다면 충분히 “학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라티아누스의 저작이 당대에 중요했던 것은, 로마법에서처럼 고대의 권위가 부여되어 있고, 물질적으로 통일체로 여겨질 텍스트가 부재했기 때문에 학문의 가능성이 부정되곤 했던 교회법에도 “체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거든요.(당대 법학자들은 교회법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령들에는 로마법과 같은 체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으로부터 질서를 발견해낼 수 없을 거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로마법도 딱히 체계적인 것은 아니라... 로마법의 체계성 또한 텍스트의 단일성에 기초해 꿈꾸어진 환상이었습니다...)

  당연히도 이런 작업은 위계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상위법과 하위법 등의 위계적 구별을 통해서만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주목해야할 것은 이러한 위계적인 구별들이 추상적으로 제안되고 존중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불일치에 근거하여 제안되고 존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일치”라는 부정 개념도 그냥 방치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토론해보니 문제적인 것들을 불일치로 퉁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토피카>에서 여러 토포스“들”을 제공해주었듯이, 중세 전통에서는 포착해야할 불일치를 발견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대립 구도들을 제공했습니다.(객체vs주체, 규칙vs예외, 명령vs협의, 상대적인 경우vs절대적인 경우, 정의vs자비, 신성법vs세속법 등등) “불일치”는 학문적으로 확립된 대립 구도와 이전의 논의들을 토대로 파악될 때에만 유의미한 것일 수 있었다는 것이죠.

 

  아마 여기까지 읽으시고서는 이게 도대체 개별자와 보편자 문제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 드실 겁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지금부터 할 얘기를 꺼내기 위한 전제였거든요... 저런 기교를 통해 불일치의 해소하는 활동이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랑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죠. 앞서 언급했지만, 사실 로마법도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유스티아누스 법전”, 이후 ‘로마법 대전’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텍스트들도 그다지 체계적이지 않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판결하기 위해 규칙들은 모호했습니다. 특정한 사례에 적합한 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해당 사례에 적용해야할 규칙이 무엇인지 매우매우매우 모호했거든요.(법학사에서는 보통 키케로가 이걸 비판했지만 당대 로마법학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고,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여겨지더군요. 제가 본 책에 따르면 당대 법학자들은 체계화할 경우 문제 해결이 어려워질 뿐 실질적인 실용성에는 기여하지 않거나 저해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한 비판을 무시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재미난 사실은 키케로가 로마법의 비체계성을 비판할 때 “유비적”이라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ㅋㅋ) 때문에 <로마법 대전>에 수록된 텍스트들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효력을 가질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해당 텍스트에 수록되어 있는 사례들과 사례들에 대한 판단 결과들을 통해 일반적인 법 개념을 확립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사례들을 선별하여 그것들을 (종으로든 유로든) 분류하면서 법과 법에 적용해야할 규칙rule을 확립해야만 했던 것이죠. 즉, “유사한” 개별적인 사례들을 비교하고 검토하고, 그것들에 단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반 개념을 제시하는 활동이 필요했단 것입니다. 바로 이 활동의 중심에 보편자/개별자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문제는 쉽게 예상될 수 있습니다. 여러 분류가 난립하고, 어떤 분류가 올바른지가 모호해지기 때문이죠. 게다가 법학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난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사례들이 매우매우매우 복잡하고, 그것을 어떤 문제로 귀속시켜야하는지부터 까다로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실제로 법조계에서는 어떤 법으로 주어진 사건을 끌고 갈 것인지를 잘 판단하는 사람들이 높이 평가 받습니다. 성패가 사실상 귀속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분류들이 난립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류들 모두 설득력을 갖고 있고, 그러한 구별 방식들 모두에 권위를 부여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구별들을 결정하는 원리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분류 논쟁의 (학문적) 관권은 사례들과 일반 개념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례들의 “유사성”, 그러한 사례들의 유사성에 근거한 분류, 해당 분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 개념 제시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규명할 수 있어야했고, 보편자/개별자 문제 중 하나에 속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자/개별자 문제는 아퀴나스의 <존재자와 본질> 2장과 3장에서 다뤄집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복합 실체”라는 개별자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본질”로서의 보편자를 다루는 문제이고, “본질의 유, 종, 종차에 대한 관계”를 통해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였습니다.(각각은 장 제목입니다) 당연히도 이를 위해서는 “유사한 것들”을 “비교”해서 “검토”해야 한다고 여겨졌고요.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이러한 활동을 제안했습니다.(“많은 유사한 것들을 바탕으로 무언가가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거기[<토피카>]에서는 귀납”이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1356b13-15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러한 활동은 유비analogia랑 무관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사’를 ‘homoios’로 말하지 유비로 말하진 않았거든요. 아퀴나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퀴나스 또한 ‘유사’를 ‘similitudo’로 말하지 유비는 말하지 않습니다.(일단 색인 상 <존재자와 본질>에 ‘analogia’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퀴나스의 논의를 “유비”로 말할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아퀴나스는 제공하고 있습니다. 박승찬 선생의 논문 <유비 개념의 발전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서 언급되듯이, 아퀴나스는 유비analogia를 비례proportio와 연결시킵니다. 박승찬 선생은 슈발의 연구에 근거해, 이러한 연결은 이시도르의 오류에 의해 전파된 오해라고 해석합니다. 이시도르가 유비analogia를 ‘비례에 따른 비교comparatio pro portione’가 아니라 ‘비교 혹은 비례comparatio proportione’라고 읽으면서 생긴 오해라는 것이고, 이로 인해 라틴 세계에서는 비교 내지 비례가 유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아퀴나스 또한 <자연의 원리들>에서 같은 방식으로 서술했다는 것입니다.(“유비, 즉 비례 혹은 비교 혹은 일치convenientia에 의하여”) 이러한 용어/개념 연관을 확대해석하면, 아퀴나스는 <존재자와 본질>에서 유사한 것들의 관계를 말하면서 사실상 유비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퀴나스는 “유사한 것들”을 “비교”하여, “비례”를 포착하는 작업으로 해당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죠.(“비교”는 2장 11절, “비례”는 2장 9절에서 말해집니다) 그러니 이게 “유비”에 대한 “유추”라고 말해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후의 역사는 제가 잘 모릅니다. 법학사에서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서사에 따르면, 중세 전통은 딱히 “토포스”를 말하지 않았고, (김재홍 선생이 해제에서 언급하듯이) 16세기에 <토피카>가 중요시된 이후에서야 법학에서도 “법소재topik학”이란 조류가 등장하고, 수사학이 근대 철학에 박살나듯이 저 조류도 근대 방법론에 박살납니다. 법소재학을 박살내고 대체하는 조류가 “보편해석학” 조류였는데, 이 쪽에서 결정적인 해석원리를 확정하지 못하고, 결국 사례들을 분류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유추론analogia”이 18세기 초반에 되돌아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보통 법학사에서는 법적인 “토포스”란 것을 사례들을 “주제”라는 명목 아래에서 자의적으로 분류했던 조류로 여기고 있지만,(오늘날 법소재를 중시하는 조류에서 말하는 “법소재”는 오늘날 “주제”라고 말할 그런 범례들입니다) 아마도 16세기 시절에는 “토포스”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전통으로 퉁치는 것을 비판하며, 작위적인 전통적 도식들을 철폐하고 인간적인 도식으로 제시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결국 대체한 도식이 기존에 사용되던 것과 다른 도식일 뿐, 결국 고전 고대의 권위에 근거하여 표준성을 호소했기에 문제적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를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에 근거하여 재구성하려는 게 법적 유추론이었을 겁니다.(이는 16세기 휴머니즘 조류의 논의 도식과 “자연법”을 둘러싼 논의 구도와 발전 양상을 근거로 유추한 겁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를 직접 읽어보니 “토포스”란 것이 매우 추상적(?)이고,(말하기 좀 까다롭네요;;;;) 오늘날 “토포스”로 말해지는 범례적 도식과는 구별되어야겠지만, 하여간 저렇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여기서 칸트를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칸트에게 있어 “판단”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판단은 좁은 의미에서는 개별적인 것들을 특정한 법칙에 귀속시키는 사고 활동을 의미하고, 이 경우에는 지성의 활동과 구별됩니다.(<비판> A133=B172) 그런데 칸트는 넓은 의미에서 판단은 서로 다른 표상들을 통일 활동을 의미하며, 이 경우 지성의 모든 활동이 판단으로 환원된다고 말합니다.(<비판> A68=B93) 칸트에 따르면 “개념”은 (유사하든 유사하지 않든) 그 자체로는 구별되어야만 할 개별적인 표상들을 특정한 표상 아래에서 정돈/통일한 것이며, 이는 잠재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그 자체로 구별되어야만 할 경험되지 않은 개별적인 표상들을 특정한 표상 아래에 귀속시키는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같은 곳)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념화는 서로 다른 표상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개별적인 표상들은 모두 그 자체로는 구별되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별적인 표상들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표상 또한 그러한 개별적인 표상들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즉, 개별적인 표상들과 그것을 묶는 일반적인/공통의 표상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앞에서 서술하진 않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아퀴나스 또한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당시에는 이러한 간극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기에 다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뭐 중세 철학에서 종은 (imago나 phantasia와 구별되지만 결국) “상像”이었고 아퀴나스의 논증도 결국 종의 그 자체로서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라 어쩌면 당연한 입장이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칸트는 모든 개별 사례를 경험한 것도 아니며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해당 표상들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어떻게 정당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결국 이게 유추랑 연결되니 중요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판단의 근거가 될 공통성은 감각적 유사성과는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당연히 주목해야할 유사성은 관계에서의 유사성이어야만 하죠. 칸트는 유추를 이러한 유사성을 다루는 사고 활동으로 제시합니다. 비교의 공통분모가 되는 근거의 동일성(칸트는 “근거의 동일성(par ratio)”이라고 표현합니다. “비례”를 언급하는 것이죠)에 근거한 확장 추론이 유추거든요.(<논리학> 일반요소론 84단락) 칸트는 <논리학>에서 유추의 인식적 지위를 (경험적 일반화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제한하지만, 이게 <순수이성비판>의 논의와 불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칸트는 바로 저러한 이유에서 현상들의 현존을 규칙들 아래 종속시키는 활동의 경우, 그러한 활동이 설사 순수하게 선험적인 것으로 상정될지라도 규제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진단하는 거거든요.(<비판> A179=B222) 이러한 진단에 이어 세 종류의 “유추”가 규제 원리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히도 우연일 수 없는 것이고요.

  칸트는 개별적인 표상들 자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를 분류하고 있다면, 분류 원리가 있을 것이라고 당대인들처럼 생각했고,(사실 “관념 연합 원리” 따위가 이런 역할을 하는 걸로 여겨졌고, 이는 흄만의 주장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기본 전제이자 18세기에 영프독 모두에서 유행한 최신 학술 담론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이러한 원리들이 임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즉 적용에 있어서 규칙을 부여하는 원리 또한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개별 사례들을 특정한 법에 귀속시키는 기준이 ‘rule’, ‘regulae’로 말해졌으니, 이것이 “규칙”과 “규제적 원리”로 말해지는 것은 이상할 게 없죠.(독일어 표현 자체가 이에 부합합니다...) 다만 이는 한정된 개별 사례들에서 발견 가능한 관계를 통해 확장 해석하는 유추일 수밖에 없고, 그러니 원리상으로는 보편적일 수 있어도, 구체적인 적용에서는 언제나 보편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동형성과 지리적 공통성에 의해 비슷하게 적용하고, 덕분에 일반적인 판단들이 통용되는 것이죠. 반대로, 지리적 공통성이 부재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그래서 판단 자체가 구별되는, 애초부터 분류부터가 차이가 나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 것이고요. 하여간 칸트에게 있어 유추는 인식적인 지위는 한정적이라도, 인식적으로 필수적이며, 인식의 한계 지점에서 실천적으로 필수적인 추론 활동이었습니다. 이걸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기에 더욱 중요한 무엇일 수 있었다는 것이죠.

 

뭐 간단히 요약하자면, 개별자들을 하나의 단위체로 통일시키는 비교와 판단이 “유추”가 되었다는 겁니다. 갠적으론 논증/설명, 연역/귀납, 추론/검토 식의 대립 구도를 너무 강하게 채택하면 이런 변화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복잡해서 뺐는데... 애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는 어케 하나로 말해질 수 있는지, 그게 여럿이라면 어케 구별되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또한 아퀴나스의 “종적 본질=서술가능성”을 유로 제시하는 구도가 어케 하나의 “유”일 수 있는지, 존재는 유가 아니라 유비듯 이것도 유비인 거 아닌지 따위의 물음으로 칸트까지 끌고 올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여간 이런 구별 가능성 문제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의 차이에 근거한 쉴로기스모스 분류들이나, 토포스에 근거한 쉴로기스모스 분류들을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이 위험한 사고인지 따위를 말할 수 있고, 현대적인 대립 구도들은 형식적 단일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차이들을 무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건 좀 나을 거라 기대했는데, 막상 꺼내놓으니 더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노력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