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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 쪽글 - 1. 일반론

어제 글에 이어서


0.일반론

 

자연종을 부정하고 물질 일반을 실체로 보는 것이 바로 근대 철학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게 저번 썰의 핵심이었죠. 저번에 전 저런 관점의 등장만을 다뤘는데, 이에 따른 귀결을 다루고 싶네요. 그래야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구체적으로 다뤄질 수 있거든요. 일단 저 관점을 일반적으로 풀어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핵심은 등질성입니다. 물질이란 것을 등질적인 단일계로 보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퀴나스에게서도 자연계는 단일계입니다. 제일질료를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이니까요. 아퀴나스는 그럼에도 자연종 중심으로 세계를 보았고, 그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마땅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따른 것이기도 했겠지만, 우리가 본질주의적 직관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아퀴나스가 제일질료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꽤나 당연합니다. 제일질료는 정의상 무규정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그 어떤 규정성/긍정성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규정적으로 긍정적으로 진술될 수 없죠. 때문에 제일질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쓸 만한 얘기도 할 수 없습니다. 원리적으로 말이죠. 그러니 제일질료가 저런 것이라고만 언급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던 것이죠. 

 

근대 철학에서 물질을 하나의 실체로 규정하는 것은 제일질료로 보는 것과 완벽히 구별됩니다. 일단 단어에서부터 차이가 있죠. 질료가 아니라 실체라고 말하니까요. 다시 말해 물질에도 규정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 규정성이 바로 “연장성”입니다. 여기서 연장성이라는 요상한 단어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게 “기하학적”인 방법에서 활용되는 요소들을 포함하는 단일계를 함축한다는 사실입니다. 표현이 좀 어려운데 풀어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물질이 연장적인 실체라는 주장은 물질이란 것은 모두 기하학적으로 말해질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이 근대 철학하면 수학, 즉 산술(방정식)을 떠올리지만, 근대 철학은 일단 기하학이었어요. 그 유명한 갈릴레이의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으로 쓰여있다”는 말 다음에 “그 책의 철자는 기하학적 도형들이다”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착각일 뿐이죠. 다시 말해 물질이 연장적인 실체라는 주장은 물질이 형태적인 구성물이고, 기하학적으로 분석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기하학으로, 혹은 기하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될 수 있었던 것이고요.

 

자연은 기하학적이다. 그런데 이건 문제를 다른 문제로 돌린 것에 불과합니다. 기하학적이라는 게 뭔지 물어봐야죠. 기하학적 방법의 핵심은 분해-결합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단순한 요소들로 완전히 분해하고, 분해를 통해 얻어진 단순한 요소들을 토대로 대상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 때, 앎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입장이 바로 분해-결합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 자체는 역설적이게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부활시키려는 조류에서 발전한 것인데,(자바렐라의 Regression 방법인데, SEP 항목에도 있으니 참고하십셔) 이런 방법 자체가 색다른 것은 아니라서 기원을 하나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파라켈수스에게서 발견되는 환원reduction의 방법도 분해-결합 방법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식의 접근은 12세기에도 발견되거든요. 게다가 분해-결합 자체는 분석-종합에 해당되니 스콜라 전통과 다르다고 하기도 뭐해요.(그러니 자바렐라가 복고적인 개념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때문에 분해-결합 방법에서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방법 자체라기보다 방법의 토대가 되는 “단순한 요소들”이었습니다. 스콜라 전통에서 분석-종합의 토대가 되는 단위들(토포스, 쉴로기스모스 등)을 무시하고 물질이란 단일한 차원에서 분해-결합을 수행하려 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어떤 것들을 단순한 것들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른 체계가 성립될 수 있거든요. 결국 근대 철학의 방법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한걸음은 단순한 요소들을, 단일한 종류의 물질적인 단위들로, 즉 기하학적 도형으로 한정한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뭐 근데 기하학적인 것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하학적인 것만으로는 세상이 잘 설명되지 않거든요. 주의해야할 점은 분해-결합 방법은 존재론적 도그마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기하학적 도형들로 세상이 환원된다는 주장은, 세상을 재구성하는 일을 성공시켜야지 가능한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에요. 그러니 기하학적인 도형만으로 환원하려고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설사 궁극적으로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환원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일단 우리의 심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심리적인 요소들로 환원하려고 했죠. 바로 여기서 근대적 감각론이 탄생합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qualia’로 불릴 감각적 질들이 기하학적 도형처럼 결합을 통해 “특정한 무엇”을 이루는 요소로 전제되고, 우리의 믿음 내용들을 저러한 감각들의 구성물로 보기 시작한 것이죠. 기하학적 도형들이 임의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듯, 저런 감각들도 임의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기하학에서의 작도에 해당될 구성 원리로, 관념 연합 원리가 제시되었죠. 기하학의 원리와 관념 연합 원리, 이 둘이 근대 철학의 “방법”을 이루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로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설명을 들으면 모든 게 합리적이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속성 형이상학도 이해하고 나면 합리적이죠. 때문에 근대 철학의 방법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꽤나 합리적인 그 이전의 철학들을 부정하고 굳이 근대 철학을 제창한 이유가 중요하죠. 문제는 이런 이유가 일방적이라는, 공약불가능하다는 데 있습니다.

 

분석철학을 공부하면 자주 겪게 되는 문제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립하는 두 입장이 결국 답 없는 소리를 하게 되는 상황은 이런 상황이죠. 양 쪽 모두 p→q이다에는 동의를 해요. 문제는 한 쪽은 “p이다. 그러므로 q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q이다. 그러므로 -p이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죠. 결국 똑같은 현상을 두고 딴 소리만 하게 되죠. 중세 전통과 근대 철학 사이도 비슷합니다. 중세 전통은 바보가 아니에요. 우리가 본질주의적 직관을 갖게 되는 대상/사태를 중심으로 문제를 전개합니다. 그러니 그 자체로 문제적인 건 아니에요. 근대 철학은 그런데도 굳이 저런 전통을 비판하죠. 물론 근거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근거가 근대 철학을 받아들였을 때에만 합당한 근거라는 거죠.(설명력과 예측력 따위로 근대 과학을 옹호하는 것은 그래서 문제적입니다. 과학철학적으로 설명력과 예측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규정하기도 어렵지만, 설명력과 예측력으로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이건 분해-결합 방법을 진리의 올바른 기준으로 받아들여야만 정당화되거든요) 게다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을 수밖에 없죠. 근대 철학이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상식“이었습니다. 이게 설명이 필요하죠.

 

근대 철학에서 자연종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양이’라는 단어를 본질주의적으로 이해할지라도, 그리고 현실 속 고양이들이 매우 흡사해보일지라도 그것 자체는 실체가 아닙니다. 다른 자연 속 기계들과 원리적으로는 구별될 게 없는 사물들을 묶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죠. 실체로서의 자연종을 부정하면 바로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도대체 그럼 ‘고양이’는 무엇이냐는 거죠. 하여간 실체는 아니니 본질-동일성은 없다고 선언되고, 감각적으로 “유사”해서 한 묶음이 된다고 주장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 됩니다. 어째서 항상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지가 설명되지 않거든요. 고양이는 사물들의 임의적인 묶음이 아닙니다. 고양이는 개나 소랑 교잡되지 않고, 오직 고양이랑만 교잡하죠. 그러니 고양이라는 묶음은 단순히 ‘고양이’라는 단어 아래에서 감각적으로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묶은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전문 철학 언어로 말하자면, 고양이라는 일반 범주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라는 얘기죠. 고양이라는 일반 개념이 개개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패턴’ 따위의 모호한 말이 도입되는데, 당연히 이걸로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해괴한 주장과 함께 우리의 상식을 부정하게 되죠.

 

우리의 상식은 개개의 고양이들을 통해 고양이라는 일반 개념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상식에서 철학을 시작했고, 문제적일 때에만 상식을 검토했습니다. 그것이 상식처럼 보이기만 하는 것인지 진짜 상식인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만 검토했다는 얘기입니다. 감각과 상식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근대 철학은 분해-결합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것들을 지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감각과 상식에 대해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에 대한 신뢰를 적극 부정합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죠. 천동설처럼 감각과 상식이 오류를 야기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동설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고 근대 철학적 방법을 옹호하기 위해 이를 일반화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모든 것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이해가 위기에 처하니까요. 감각과 상식을 신뢰할 경우 우리가 무지해도 불안해할 것은 없습니다. 모르는 게 많은 것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이지, 그 자체로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게 전제되니까요. 모르는 것도 아는 게 있는 덕이라고 여겨지고, 무지가 회의나 절망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각과 상식을 부정하면 이게 위기에 처하는 거죠.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기계가 작동하여 산출해낸 결과물처럼 나의 심리 기전들이 작동하여 산출해낸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라면, 도대체 불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아렌트는 데카르트가 우리를 이런 종류의 절망으로 이끌고 갔다고 비판하곤 하는데, 전 이런 해석이 데카르트에 대한 정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바로 이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근대 철학의 문제, 제가 “회의와 확신의 문제”라고 부르는 문제입니다. 근대 철학은 단순히 이 문제의 원인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죠. 근대 철학은 분해-결합 방법에서 비롯되는, 다시 말해 기계론적인 지식관으로부터 발생하는 “회의”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개개의 철학자들의 철학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근대 철학“들”을 비교해야한다는 소리죠.

 

납득이 되는지 모르겠네요ㅋㅋ

일단 저 문제를 중심으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라이프니츠를 비교하는 것을 생각 중인데... 힘들어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갠적으론 이 문제를 통해 루소의 학문적 방법을 분석하는 게 지금 제가 고민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정작 루소 책은 안 읽고 있지만, 하여간 그렇습니다.

 

관심 있음 말씀하시죠... 일단 데카르트까진 금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