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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으로서의 계보학

<정치신학2>관련해서 뭔가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저 책을 읽은지 시간이 좀 되기도 했고, 저 책을 좀 급하게 후다닥 읽기도 해서 상세한 것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정치신학2>의 핵심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분명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문제를 제 마음대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정치신학2>는 구실에 불과할 수 있겠네요.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얘기니까요.

사실 계보학을 말하고 싶거든요.

단지 <정치신학2>를 통해서 말해질 수 있는 “정치신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계보학을 말하고 싶은 것이죠.

정치신학으로 계보학을, 다시 말해 계보학을 일종의 정치신학으로 보는 관점을 제시하려 합니다.

이게 계보학의 “역사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죠.

 

 

일단 정치신학을 <정치신학2>를 통해 소개하자면 이러합니다.

<정치신학2>에서 슈미트는 1930년대에 자신의 정치신학을 비판한 페터스존의 저작을 분석합니다.

페터스존의 저작은 정치신학을 끝장낸 것으로 기억되고 있으니, 그 신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슈미트에 따르면 페터스존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치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2) 정치신학은 정치학으로 세속화되어야만 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페터스존의 이런 테제는 페터스존의 정교 분리적인 신학론의 연장입니다.

페터스존이 <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제시한 정교분리적인 신학론을, 정치신학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페터스존의 정치신학 비판의 정당성은 페터스존의 정교분리적인 신학론의 정당성에 달려 있었습니다.

만약 페터스존의 신학이 옳다면, 그의 정치신학 비판도 옳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페터스존의 신학론이 순전히 이론적으로 정당화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페터스존의 논증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었기 때문이죠.

페터스존이 역사적인 논증을 통해 자신의 신학론을 정당화한 것이 문제의 원인인 것이죠.

슈미트는 이 문제를 공략합니다.

그런데 슈미트는 이 문제를 근거로 페터스존을 반박하지 않습니다.

슈미트에 따르면 페터스존이 “역사적인 논증”을 사용한 것은 페터스존 개인의 오류, 실수, 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역사적인 논증은 이런 문제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당화는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논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슈미트는 진단합니다.

때문에 역사적인 논증은 강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페터스존의 오류는 그가 역사적인 논증을 했다는 사실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역사적 논증은 당연한 것이거든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슈미트가 이렇게 진단한 이유입니다.

 

정치신학과 신학에 대해 페터스존은 어떠한 정의를 내렸겠죠.

하지만 그 정의가 자의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의가 규범적이어먄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의는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어만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정통일 수 있겠어요?

정통이 무슨 무슨 명제들로 확정되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물론 전통 신앙을 가톨릭에서는 명제로 확정하기도 했지만, 그게 정통인지는 그걸 정통으로 확정했다는 사실에 근거할 수 없거든요.

사실에 근거하여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특수한 입장일 수밖에 없고요.(악명 높은 교황무오류설 등이 이런 문제 때문에 주장된 겁니다. 사실에 근거하여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을 명제로 확정하다보니 저런 악명 높은 주장마저 정통적인 명제로 확정해야만 했던 것이죠)

게다가 중세에 이루어진 논쟁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정통 신앙이 명제들로 확정되어 있어도 문제는 여전합니다.

정통으로 받아들여진 명제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긴장들을 해소시킬 해석을 결정하기 위해 박터지게 싸우게 되기 때문이죠.

이러한 갈등의 원인이 중요합니다.

해석의 문제는 해석을 정당화해주는 관점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 자체는 궁극적으로 명제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물론 명제로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도 명제로 정당화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구별되어만 하죠.

문제의 핵심은 “궁극적으로는” 명제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제로 정당화되지 않는 해석들은 배제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배제됩니다.

그러니 논쟁은 명제로 정당화되는 해석들, 일관적이고 합당한 해석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되죠.

일관적이고 합당한 해석들 사이에서의 논쟁에서 명제적인 정당화는 공약불가능합니다.

애초부터 근거하는 명제들이 달라지고, 주요 명제들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바로 해석 차이의 근거가 되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정통성을 담지해줄 정의는 “역사적인 논증”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역사적인 논증이 어떻게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페터스존의 “역사적인 논증”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슈미트에 따르면 페터스존은 다음과 같은 유비를 사용하여 역사적 논증을 전개합니다.

에우세비우스:아우구스티누스=슈미트:페터스존

페터스존은 이러한 유비에서 에우세비우스=이단, 아우구스티누스=정통이란 구도를 “역사에 근거하여” 규정합니다.

“역사적으로” 에우세비우스는 이단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정통이며, 그 역은 성립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에 호소하는 것이죠.(예컨대 그리스도교이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교부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정통으로 보고, 문제적인 에우세비우스를 이단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저 구도만으로는 아무 것도 논증되지 않죠.

그렇기에 페터스존은 저 구도의 성립 근거가 “정교 분리”에 놓여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와 에우세비우스를 가른 차이는 정교 분리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는 것이죠.

페터스존은 이를 <신국론>에 근거하여 해석해냅니다.(간단히 요약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복잡합니다. 이는 “아리우스파”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해,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저작이 가진 정치성에 의거해 그를 “정치신학”의 기원으로 보는 해석적 입장, 에우세비우스의 삶에 대한 역사적 평가, 니케아 공의회의 의의 등이 모두 포함된 싸움입니다. 지금 구도는 제가 단순화한 겁니다)

 

슈미트는 페터스존이 주장한 구도의 “근거reason”를 공략합니다.

페터스존이 근거로 내세운 <신국론>의 구절을 통해서 유비 가능한 것은

키케로:아우구스티누스=이교도 철학자:그리스도교 신학자

라는 유비이며, 이 유비의 의의인 “우월성”은 정교 분리라는 신학적인 입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말이죠.

결국 에우세비우스:아우구스티누스=슈미트:페터스존

이란 유비로부터 정통과 이단의 구별, 정교분리의 정통성, 정치신학의 반-신학성 따위를 도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당연히도 이런 문제는 도식적인 구도를 적용해서 발생한 것인데, 슈미트는 이것이 단순히 외적인 실수 때문이 아니라, 페터스존 신학론의 본질적인 결함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진단함으로써 “정치신학”이라는 문제를 심화시킵니다.

페터스존이 <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전개한 정교분리의 신학은 정치신학의 가능성 자체를 폐쇄시킵니다. 정치신학과 신학의 경계를 이론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의 이론은 그 자체로는 정당화되지 않고 역사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의 이론이 정치신학을 배제하고, 내적 폐쇄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역사 해석에서 그의 이론은 원리적으로 정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해석이 “정치신학”에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이죠. 

슈미트에 따르면 페터스존의 오류는, 그가 자신의 신학에서 정치신학을 원리적으로 배제한 결정에 있습니다.

바로 그 결정에 의해 “정치신학”을 통해서 성취될 수밖에 없는 정통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실 되었기 때문이죠.

페터스존은 역설에 빠집니다. 자신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정치신학을 활용해야하는데, 정치신학을 활용하는 것이 자신의 신학에 위배되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신학을 부정해야만 하는 역설에 빠집니다.

슈미트에 따르면 애초부터 에우세비우스에 대한 평가는 특정 신학으로 환원될 수 없고 환원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단과 정통의 기준, 에우세비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 정치신학과 신학의 경계, 종교와 세속 따위의 경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내세우는 정의에 호소할 수 없기 때문이죠.(슈미트는 페테스존이 자신을 그토록 위대한 에우세비우스에 빗대주어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ㅋㅋ)

누구의 말에 권위를 부여해야하는가라는 정치신학의 문제를 부정해버리니,(슈미트는 <정치신학 2>에서 정치신학을 이와 같이 정의/요약합니다) 문제 해결이 원천 봉쇄된 것이죠.

결국 페터스존의 신학에 담겨 있는 “정통”이란 것은 자의적으로 선택된 역사적 원형에 불과하고, 해당 사례를 원형으로 선택하는 근거는 일관성 있게 주장될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죠.

 

일단 슈미트가 <정치신학2>에서 논의한 것들을 대충 이런 식으로 정리했는데요, 이걸 “페터스존의 슈미트 비판에 대한 슈미트의 반박” 정도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일반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신학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끝날 수 없다는 주장이 어떤 것인지를, 페터스존과 슈미트의 논쟁이라는 하나의 사례로 만들지 않을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저 사례로부터 일반성을 추출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성을 추출해내기 위해서는 “침전”이라던가 “증류” 같은 기술이 필요합니다.

저는 계보학이 그런 기술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를 계보학을 통해 설명해보려 합니다.

 

니체 또한 슈미트처럼 정통을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합니다. 니체는 역사가 없는 것만이 정의될 수 있고, 역사를 갖는 용어들은 정의될 수 없다고 진단합니다. 니체의 진단 또한 슈미트의 진단과 비슷한 문제에 근거하여 내려진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역사를 갖는 용어들을 정의내릴 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특정 용어의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해당 용어의 올바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갖는 용어의 올바른 의미는 현재적으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있는 용어이니, 역사를 확인해보아야죠.

때문에 역사가 있는 용어의 올바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당 용어가 과거에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해당 용어에 대한 용례가 넘쳐나기 때문이죠.

무수히 많은 용례들이 확인될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되는 용례들과 현재의 관점에서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용례들도 확인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용례들을 구별해야 합니다.

올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을 구별해야하죠.

그런데 올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을 올바른 의미로 구별한다면 이런 작업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애초부터 용례 확인을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그러니 이런 문제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을 올바른 의미에 전제하지 않고 기준을 확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불가능해보이지만, 이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확인 가능한 용례들을 최대하면 검토하며, 그것들의 사용 패턴을 일반화하고, 중요한 용례들을 확립할 수 있으면 기준 확립이 가능하거든요.

바로 이러한 기술에 근거하여 고전학이 학문으로 확립된 것이고요.

근데 니체는 이런 기교가 불완전하다고 진단합니다.

니체는 단순히 저런 기교를 추상적으로 비방하지 않습니다.(실제로 고전학의 엄격한 기술은 대단한 것이고 니체도 그런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고전학의 기술도 모르고 문헌 검토하는 현대 철학자들은 평가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고요)

니체는 해당 기교의 조건이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무슨 소리냐? 바로 그러한 용례 중 어떤 것이 남겨지고 어떤 것이 남겨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부재하다는 것이죠.

 

니체의 진단을 단순화하면 이러합니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다.”

역사는 모든 것을 보전하지 않고, 정말 극소수의 것들만을 전수합니다.

현재 남은 것들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선별된 극소수의 것들이죠.

니체는 이런 “조건”을 문제 삼습니다.

다만 니체가 문제 제기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불가능하다는 멍청한 소리와 구별됩니다.

역사학은 애초부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문제 상황을 토대로 등장한 것이거든요.

만약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 아니고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보전된다면 역사학이 왜 필요하겠어요.

그냥 그 보전된 것을 보면 되는데 말이죠.

역사학은 고대 때부터 “승자의 기록”이란 “편향”을 기술적으로 극복하는 학문으로서 탄생했습니다.

가능한 편향들을 변수로 삼고, 그러한 변수들을 통제할 기술들을 개발함으로써 학문으로 성립한 것이죠.

역사학은 애초부터 승자의 기록이라는 문제 상황에 근거하여 탄생했고, 이에 대한 극복이 역사학의 성취였으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조건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니체는 이걸 비판하죠.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니체는 오히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태를 단순한 편향으로,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진단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편향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학문일 수 없기 때문이죠.

니체에 따르면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그 편향이고, 그 편향들 속에서 확인해야만 할 가치 기준이란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무엇이 중요한 용례이고 무엇이 중요한 용례가 아닌지가 객관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역사 속에서 “승자”가 결정되는 덕분입니다.

어떤 용례가 중요한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 용례들 중 특정한 용례가 지배적인 용례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특정한 용례가 지배적 용례가 된 것은, 해당 용어를 둘러싼 투쟁에서 특정 세력이 승리한 덕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학은 무엇이 지배적인 용례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지배적인 용례가 어떤 용례로 변경되었는지를 탐구합니다. 정밀한 기술로 말이죠.

용례들을 유형화하고, 그러한 용례의 유형들을 시점별로 분류하고 변화를 확인합니다.

니체는 바로 이것을 비판합니다. 유형화와 변천 확인은 그 자체로는 원인 탐구일 수도 없고, 그 자체로는 학문적 의의를 가질 수 없다는 이우에서 말이죠.

애초부터 그러한 용어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용어가 매우 중요한 의미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어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니체는 바로 이 사실을, 바로 이 조건을 학자들이 주목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해당 용어에 대한 탐구를 추동하는 근거 자체가, 바로 그러한 승리의 귀결이며, 바로 그러한 승리 덕분이라는 것을 학자들이 무시한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말인지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 2권에서 양심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적은 니체 철학에서 매우 기이한 것일 수 있습니다.

니체는 기원은 중요치 않다고 단언한 적 있기 때문이죠. 또한 이런 단언은 전 시기에 걸쳐 일관적으로 발견됩니다.

니체는 기원 자체는 미약하고, 우발적이고, 사소하기에, 중요치 않다고 지적합니다.

기원 자체를 발견하면 오히려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죠.

때문에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니체에게 있어 중요치 않은 일이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기원이 중요치 않다면, 중요치 않은 것을 탐구하는 일 또한 중요치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니체는 기원을 추적하죠. 그 근거가 중요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기원 자체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원을 추적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기원으로부터 비롯된 이후의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죠.

기원 자체는 사소할 지라도, 바로 그 사소한 기원으로부터 중대한 업적이 이룩될 수 있습니다.

주목해야할 것은 그러한 업적과 기원의 관계입니다.

설혹 중대한 업적이 특정한 기원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기원 자체가 사소한 것이라면, 별로 중요치 않을 수 있거든요.

니체는 이들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기원을 추적하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의 관계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이죠.

바로 양심이 그것입니다.

 

니체가 양심을 분석하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업적과 기원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원 자체는 사소함에도, 기원의 신화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기원이 정당성의 원천이 되고, 해당 업적의 본질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심지어 꾸며진 것일지라도 말이죠.

니체는 이 사태 자체를 이해하려고 분석하려고 하는 겁니다.

기원이 신화로 작동할 수 있는 근거, 사람들이 기원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근거를 말이죠.

니체에 따르면 이는 선조 숭배와 동형적입니다.

바로 그러한 업적이 선조 덕분이라는 것이죠.

도대체 이런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효력을 갖는지가 중요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사건의 역사성 때문입니다.

특정한 업적은 단 시간의 사건이 아닙니다.

비록 해당 업적이 가시화되고, 큰 유용함을 발생시킨 시점을 특정 순간으로 국한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 사건은 단 시간의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업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 자체는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역사적으로 축적된 것일 수밖에 없거든요.

따지고 보면 놀라운 성공은 업적이 이룩된 시점의 사람들의 노력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게 한 선조들의 활약 덕분에 그러한 노력이 의미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니체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권리”를 개념화합니다.

해당 업적이 가져다주는 효용에 대한 권리를 말이죠.

특정 시점에 놀라운 업적을 이룩해낸 이들이 바로 그러한 업적에 근거하여 그 업적으로부터 비롯되는 특혜를 누리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상속”되냐는 다른 얘기죠.

상속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런 특혜를 자신들의 자손에게도 상속하고, 그러한 상속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심지어 그러한 특혜를 위해 착취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죠.

니체에 따르면 이는 놀라운 사태가 아닙니다. 일관성 있는 사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죠.

애초에 그러한 업적의 수혜자들은 자신들의 특혜의 원천이 되는 성취가 오로지 자신들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이는 선조들 덕분인 것이죠.

선조들이 죽었음에도, 그것이 선조들 덕분일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삶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러한 업적, 업적으로 인한 특혜 또한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물려주는 것은 문제일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니체는 이러한 사태를 추동하는 심리가 “양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니체가 양심으로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특권은 이익이 되는 것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권리는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성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특권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이 선조들로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유산이라고 여겨지는 덕분입니다.

살아있음이 선조들 덕분인 것처럼, 그러한 권리도 선조들 덕분이란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단순히 누릴 수 있는 이익들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특권은 특정한 집안에만 상속되죠. 그러한 집안들에 공통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의 선조를 공유하는 덕분이라고 여겨지죠.

때문에 이는 특정한 집단의식 속에서만 성립될 수 있고, 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공통의 선조를 공유하는 것으로는 권리 의식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공통의 선조를 공유함에도 해당 집단으로부터 이탈한 집안에는 권리가 부여되지 않거든요.

이들의 권리 의식은 공통의 선조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선조를 공유한다는 믿음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공통의 선조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통의 선조를 공유하지 않는 집안이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될 경우, 사후적으로 그들의 선조와 자신들의 선조를 공통의 선조로 여길 수도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그런 믿음과 그런 믿음을 객관화하는 징표죠.

 

니체는 저런 믿음을 객관화하는 징표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논의를 시작할 때 기억술을 얘기하며, 기억이 특정한 사물을 통해 객관화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모호하고,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특정한 사물과 연결할 경우 의식은 명확해지고,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됩니다.

사물들이 보존되는 것처럼 의식과 기억 또한 보존될 수 있으니까요.(덕분에 “예측 가능한 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겁니다)

양심은 이러한 힘이 집단적 정체성으로 결정화된 사태를 가리킵니다.

집단의 구성원을 한정하고, 집단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양심입니다.

특수한 맥락 속에서 집단적 체험이, 집단적 활동이, 집단적 기억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형성될 경우 집단에는 동질성이 형성되죠.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형성된 동질성이 사실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질성을 성취해낸 집단은 이러한 동질성 덕분에 집단 행위가 용이해지고, 집단 행위가 용이한 덕에 집단적인 이익이 증대되죠.

이 경우 동질성은 단순히 사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질성을 훼손하는, 말과 생각이 통하지 않고, 집단 행위를 저해하는 이질적인 존재는 배제되어야만 하죠.

다시 말해 일종의 집단 정체성이 형성되고, 집단 정체성에 근거한 배척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배척은 유용하기에 사회적 형성을 촉진하고, 이러한 배척이 없는 집단을 도태되게 되죠.

바로 이 집단 정체성, 집단 정체성에 의거한 배척, 집단 정체성을 이룩하는 징표들이 바로 “양심”입니다.

누가 “우리”에 속하고, 누가 “우리”에 속하지 않는지, 누가 “우리다움”을 잘 갖추고 있고, 누가 “우리다움”을 결여하고 있는지가 인식됩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다움”이 규범화가 되죠.

“우리”가 사실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규범으로서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양심”입니다.

현재의 나를 현재의 나로 방치시키지 않게 하는, 되어야만 하는 “나”를 제공하는 원천이죠.

니체는 이게 양심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심은 특정 정체성과 연동하여 발생합니다.

양심이 규범성을 갖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를 위배할 경우 심리적 고통을 느끼게 하고, 이에 잘 부합할 경우 심리적 만족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의 역사 때문이란 것이죠.

집단에 속하길 원하는 마음과 집단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배척감이 결정화되어 그 자체로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이죠.

정체성으로 말입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이러합니다.

니체는 권리가 정당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집단의 유산인 덕분이라고 진단합니다.

유산이 정당한 것은 그것이 집단의식 속에 결정화된 양심 덕분이죠.

양심이 유산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의 정체성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덕분입니다.

현재의 정체성이 유산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정체성이 현재적 상태를 넘어서 집단의 역사와 긴밀히 엮여 있는 덕분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이미 죽어 사라진 “우리”와 특별히 엮여 있습니다.

덕분에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그렇기에 특정한 권리가 얻어질 수 있기만 한다면, 과거의 “우리”의 권리는 현재의 “우리”의 권리이기도 하고, 미래의 “우리”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 모두가 “우리”이기 때문이죠.

니체에 따르면 양심, 민족, 정체성, 규범, 상속 등이 긴밀히 엮여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원” 덕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원에 의해 “기원”이 중요해집니다.

기원이 유산의 원천이 되고, 그 유산을 상속 받으려는 이들 사이에서의 투쟁이 벌어지게 되니까요.

 

먼 길을 돌아 왔는데, 요약하자면 매우 간단합니다.

슈미트는 정치신학이 궁극적으로는 역사 해석 다툼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슈미트는 이를 특수한 논쟁을 염두에 두고 주장한 것이지만, 슈미트의 진단은 일반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비록 슈미트가 그 이유를 정확히 밝히지 않지만요.

제 생각으로, 슈미트가 별도로 밝히지는 않았던 근거는 니체의 계보학을 통해 밝혀질 수 있습니다.

슈미트가 말한 역사 해석은 단순한 연대기적 서술과 구별됩니다.

슈미트는 인물들을 매개로 한 “유비”만을 역사 해석으로 다뤘습니다.

역사 해석은 저런 유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정치신학과 역사 해석이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슈미트의 주장 또한 저런 유비로 국한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 이는 저런 유비로 국한되어야만 합니다.

결국 특정 신학을 정통으로 만드는 해석은 저러한 유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슈미트가 “정통성”으로 말한 것은 니체가 “양심”으로 말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그리스도교인가는 물음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추론이 아닙니다.

지금 그리스도교 안에서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들”을 구별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정통”은 “양심”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정통은 언제나 선조들을 놓고 벌어지는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지금 이 순간에 갑자기 탄생한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 무엇인가입니다.

이러한 형성은 인공물의 제작에서처럼 설계도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어떠한 양심을 공유한 인간들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한 무엇인가이기 때문이죠.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실로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산에 대한 믿음과 상속에 대한 믿음 속에서 허구적으로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니까요.

그리스도교 자체는, 그리고 그것의 단일성은 허구일지라도 그것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활동은 효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언제나 역사적이고, 유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단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단일성에 근거하여 현재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들이 그것을 정통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 그것은 규범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성은 양심, 즉 정체성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신이 이미 받아들인 정체성의 일부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코스가드는 <규범성의 원천>에서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코스가드는 이후 구체적인 규범성이 “자아”에 대한 믿음을 매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하고 있죠)

특정한 입장, 특정한 교리, 특정한 신학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테제가 정체성과 결부되어 있음을 보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계보”죠.

단일성이 없는 그리스도교의 무수한 역사들 속에서 “진정한 선조들”을 가려내고, 이에 대한 정당한 상속을 두고 싸워야만 신학에 “정체성”이 부여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학의 정당성은 역사 해석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이런 역사 해석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신학”은 계보 투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니체의 계보학은 같은 진단 아래에서, 이러한 투쟁을 위한 전략으로 개발된 것이고요.

그렇기에 계보학은 정치신학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정치신학은 계보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계보학이야말로 정치신학의 보편방법일 테니까요.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