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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 쪽글 보론 - 회의와 확신이라는 테마의 적용

근대 철학 “시리즈”와는 좀 무관할 수 있는 얘기긴 한데...
그냥 썰풀고 싶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비코에 대한 글로 기획되었지만, 비코 철학에 대한 설명은 정작 없는 그런 글이 되었네요.
하여간 다 도움 되는 얘기니 들으십쇼.

일단 화두는 이러합니다.
“회의와 확신”이라는 테마는 하나지만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회의인지, 어떤 확신인지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런 테마 자체는 매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근대 철학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철학을 “확신을 생산하는 기술”로 정의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정말?”이라고 물을 것 같아서 사례도 준비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확신을 제작하는 기술로 분석하는 것을 말이죠.

“플라톤 철학=이데아론”이란 도식이 교과서적인 상식으로 유통되고 있지만, 이는 많은 난점이 있는 해석입니다.
일단 “이데아론”에 부합할 만한 서술은 플라톤이 썼다고 알려진 33편의 대화편 중 겨우 둘 혹은 셋에서만 발견되거든요.
겨우 두세 개를 가지고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저 대화편들 안에서 “이데아론”에 해당될 대화가 차지하는 의의, 그리고 그 대화편들이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확보해야만 뭔가를 제대로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큰 난점이 있어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단순하게 보자면 손쉬운 해석도 가능해지거든요.
“이데아론”의 배경이 될 만한, 플라톤이 주목하고 있는 현상은 “유의어”입니다.
노예의 덕, 자유인의 덕, 남편의 덕, 아내의 덕 등은 규범 그 자체로 보자면 모두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되는 덕목이 다르기 때문이죠.
흥미로운 것은 저런 덕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저런 “덕들”이 동음이의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우리의 직관에 주목하고, 공통 의미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소위 “이데아론”이라는 것은 추측된 공통 의미를 담보해줄 형이상학적 관점이 되고 말이죠.
그런데 조심해야할 것은 바로 저런 “형이상학적 관점”은 딱히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엘리아데가 열심히 그리고 잘 보여주듯, 저런 초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은 꽤나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믿음이거든요.
게다가 에릭 도즈의 연구에 따르면 플라톤 시대에는 저런 믿음이 그리스에도 유행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란 것은 플라톤의 독창적인 철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그냥 당대에 유행했던 사상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죠.
보통 여기까지 얘기하면 멍청한 철학자들은 그냥 현실부정하고 부들거리기만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철학이란 건 저딴 상스러운 믿음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다행히도 이런 “설명”은 플라톤 철학과 무관합니다.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아론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이데아론인지였거든요.
플라톤이 상기를 말하며 그냥 신화를 읊는 것 같지만, 제가 학부 졸업논문에서 열심히 밝혔듯이, 플라톤은 신화를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본인이 설명하려는 앎의 획득이라는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앎의 구조”에 부합하는 신화들을 선택하고 결합시키고 있어요.
구체적인 조건이 명시되고,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앎이 조직되어 있어야만 “앎의 획득”이란 사태가 가능해진다는 것이죠.(발생이든 이해든)
이데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굴과 동굴 밖이라는 대립 자체는 졸라게 흔한 도식이죠.
중요한 것은 동굴로부터 동굴 밖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 그리고 동굴 밖 세상에 대한 비유들이에요.
구조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짜여있을 때, 플라톤이 설명하려는 사태들이 일관적으로 설명되는지를 명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경험과 지성을 대립시키는 구도가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지성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지성을 따르는 추론들의 형식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란 것이죠.
플라톤은 분명 “설명”을 합니다. 상기나 이데아로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의 “설명”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입니다.
멍청한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플라톤은 <폴리테이아>에서 저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꽤나 중요한 “변명들”을 늘어놓거든요.
때문에 결국 관건은 플라톤이 제작/제공하려는 “확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냐는 것이 됩니다.
내적인 것인지, 외적인 것인지, 어떤 사태들에 대한 것인지, 사태 배후에 대한 것인지, 지금 나열된 기준들이 올바른지 아닌지,(그니까 다른 방식으로 확신을 검토해야하는 게 아닌지) 만약 어느 쪽이라고 했을 때, 올바른 확신과 올바르지 않은 확신을 구별한 기준은 무엇인지 따위가 사실상 플라톤 이데아론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데아론인지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고요.

이런 문제적인 상황은 근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모두가 확신을 제공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작/제공하려는 확신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입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에 기초한 확신을 제작/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데카르트의 확신은 “의식적”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멍청한 사람들의 헛소리들의 주장과 비교했을 때, 데카르트의 확신은 의식적이지 않습니다.
감정, 경험, 체험에 심취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더 의식적이죠.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자신의 근거로 삼는 이성-신은 그 자체로 직관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직관하는 것은 이성의 결과물로 삼게 될 “규칙적인 추론들”에 불과하죠.
이성이 무엇인지 “알고”, “의식하는” 이들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지 데카르트가 아니란 것이죠.(사실 전자가 실제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전제되고 있죠ㅋㅋ)
다만 그럼에도 데카르트의 “확신”은 (형식적 조건으로 제약된) 특정한 질적 체험을 가리키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는 “의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얘기를 왜 하는지 감이 잘 안 올 수 있지만, 이것들 모두가 꼭 필요한 얘기들입니다.
‘확신’이라 하면 특정한 심리적/의식적인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거죠.
예컨대 확신은 오히려 비의식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로 확신하는 것은 의식조차 하지 않으며, 그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그게 추락하지 않고 멀쩡히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일 겁니다.
그런데 전 그것이 문제적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죠.
이거야말로 확신 아닌가요?
제가 데카르트와 비교하기 위해 언급한 예수회의 결의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확신을 더 존중했다고 할 수 있겠고요.

물론 근대 철학들은 대체로 저런 비의식적인 확신보다는 의식되는, 특수한, 강렬한 체험을 동반하는 확신을 선호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확신”은 그러한 확신을 통해 도달하고, 정당화하는 질서 자체랑은 구별됩니다.
그러니 “강렬함”에만 주목하면 암 것도 안 보이게 되는 거죠.
종교 체험을 연구할 때 강렬한 체험을 수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의례들”이 도외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의례들은 이른바 “의례적인”, “죽은”, “그저 형식일 뿐인”, “비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종교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의례는 규칙적인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삶의 공통성의 원천이 되죠.
그런데 의례는 단순히 행위로서 뿐만 아니라 체험으로서도 중요해요.
저런 의례들이 바로 종교적인 “일상”을 체험하게 하고, 일상의 지속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거든요.
저런 의례들이 중단되면, “일상”의 붕괴, 위기, 비상사태가 경험됩니다.
그러니 의례를 통한 체험도 강렬한 신비 체험만큼 중요한 체험일 수 있는 것이죠.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회의 결의론적 확신이 강렬한 진리 체험적 확신보다 약한 확신이라고 보아선 안 됩니다.
강렬한 진리 체험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러한 체험이 진리 영역 전체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데카르트는 진리 전체를 언제나 직관 불가능한 것으로서, 부정신학저으로 서술했습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부정적인 것 이상을 말했죠.
이런 차이들은 저런 체험이 가리키는 사태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목되는 진리 체험이 정확히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가 중요하고, 그러한 사태를 기반해서 진리 영역을 어디까지 넓히는지가 중요합니다.
“회의와 확신”이라는 테마는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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