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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역사서술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떠든 것


 

요즘 전 논문 수정을 위해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 한심하게도, 구체적인 본문 수정을 고민하지 않고 “역사성”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죠...

그러던 중 루소의 역사서술이 가진 진실성은 이런 것 아닌가 싶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전문가이신 선생님께서 두들겨 패주시길 기대합니다...(어차피 논문에는 들어갈 일 없는...)

 

선생님께서 주목시켜주신 구절에서부터 생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회계약론>에 등장하는, 인간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모른다”라고 루소가 말하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저 구절은 이상합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것처럼, 바로 저 문제, 인간이 어떻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를 루소 본인이 <불평등 기원론>에서 다루고 있고, <불평등 기원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루소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해보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저 구절을 근거로 루소가 <불평등 기원론>을 <사회계약론>에서 부정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고, 하지만 저 구절을 근거로 그런 해석을 취하는 것은 과도한 것일 수 있다고 선생님께서 지적해주셨습니다.

해당 표현이 관용적으로 “무시하자”라는 의미일 수 있기에, 루소가 정말로 모른다고 말한 것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죠.

제게 문득 떠오른 생각은, 저 구절을 저렇게 완화해서 해석하지 않고서도 루소의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이 일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불평등 기원론>이 인간이 어떻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를 밝히는 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루소는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실”을 배제합니다.

예전에 전 저 구절을 통해 배제되는 사실이 오늘날의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보고”인 것 같다고 얘기한 적 있습니다.

전 지금도 저 구절에서 배제되는 사실이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사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보고”에 불과한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루소가 자신의 작업이 “역사적 진리”가 아니라,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이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읽히기 때문이죠.

 

루소는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의 기원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로 이 “설명”은 단순히 역사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것일 수 없는 것 같고, 루소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루소는 자연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루소는 두 불평등을 구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두 불평등을 원리적으로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의 관계에 대해서는 물어질 수 없습니다. 심지어 물어져서는 안 되는 논의이기도 합니다.

물론 루소의 이러한 부정은 수사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논하는 게 사실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니, 그런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하지만 루소의 부정은 수사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원리적으로 강제되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죠.

루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주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루소의 부정은 원리적인 것이죠.

자연적 불평등은 사실은 차이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들 자체로서는 “불평등”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만약 루소가 저렇게 주장했다면, 루소의 논의 자체가 위태롭게 됩니다.

그 어떤 자연적 사실을 가져올지라도, 정치적 불평등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자연적 과정을 통해 설명할지라도, 자연적 차이들은 불평등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두 영역이 원리적으로 구별되기에 그 어떤 간섭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에서 루소는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실”을 배제하는 것이고, 자신의 설명이 “역사적 진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일 수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불평등의 발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불평등’이라고 불리는 자연적 사실에 대한 그 어떠한 설명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로 루소는 실제로 저렇게 주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루소는 이전에 주장된 자연상태에 대한 설명이 불만족스럽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루소의 불만족은 그 이전의 논의자들이 자연상태를 편견으로 왜곡했다는 것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루소는 자연상태라는 것이 역설적인 개념인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루소는 성경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태초부터 신의 명령을 받았기에, 자연상태란 게 있을 수 없다는 그런 지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외려 이런 지적이 신의 관점에서도, 혹은 신의 관점이기에 “자연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처럼 들립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자연상태는 역설적인 개념입니다.

그 어떤 자연상태도 그것이 제시되었을 때, “자연상태”의 올바른 의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상태를 제시해도, 그것이 자연상태라고 말해질 근거/이유/권위가 없기 때문이죠.

신이 말해주지 않는한, 그것은 자연상태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말해준다면, 애초부터 자연상태일 수 없습니다.

자연상태로부터 절대로 설명되지 않을 자연적이지 않은 “불평등”이 제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설혹 신이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을 지라도, 신의 우월함이 자연상태를 자연상태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신과 인간의 차이는 “자연적 불평등”일 수 없기 때문이죠.

 

제가 보기에 루소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역설을 제기하는 것 같습니다.

오직 이 역설 속에서만 문제가 제대로 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고요.

루소에 따르면 정말로 설명되어야할 것은 이미 인식되는 “정치적 불평등”이 아닙니다.

폭력이 권력으로 변신하는 사태, 자연 대신 법을 따르게 되는 변혁,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자 결심하고, 사람들이 실질적인 행복을 버리고 상상적인 안녕을 얻으려고 결심하는 기이한 변혁이라고 루소는 말합니다.

루소의 이러한 나열은 의미심장합니다.

루소에게 문제는 존재가 규범이 되는 신비이고, 단순히 정치적 불평등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허위라고 고발할 수 있는 근원을 밝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규범이 없다면, 정치적 불평등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만약 올바름의 기준이 없다면 정치적 불평등은 자연적 불평등과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럴 경우 불평등은 허위가 아니라 사실이 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함의 문제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죠.

루소가 저러한 변혁에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자 결심”하는 사태를 넣은 것은 우연이 아니란 것이죠.

저러한 결심이 부재한다면, 폭로도, 고발도, 자연상태에 대한 가치부여도 불가능하게 될테니까요.

 

루소는 이러한 변혁의 근거는 일종의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루소는 심리적 사실로 문제를 환원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루소는 자연상태를 다룬 이전의 논의자들이 심리적인 사실들을 남용해서 틀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죠.

심리적 사실이라고 해서 그것 자체로 자연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규범력을 가진 심리적 사실이 존재한다면 자연상태는 역설에 빠집니다.

애초에 인간은 자연적으로 그러한 심리를 타고나기에, 자연상태란 것이 부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루소가 자신의 가설을 “인류가 오직 홀로 남겨진 채였다면, 어떤 모습을 하게 되었을지”에 대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홀로 남겨진 인류는 신으로부터, 종교로부터 분리된 인류입니다.

그런데 루소가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킨 종교는 현존 종교가 아닙니다.

루소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은 그 어떤 규범력을 가진 심리적 상태 등에서 의도적으로 분리시킨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현존하지 않는 “인간 일반”을 말하게 되는 것이죠.(오직 개별적인 것만 “현존”하니까요)

루소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말하는 것 또한 단순히 청자의 문제가 아니라, 주제가 가진 성격이 가진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요.

 

루소는 문제를 의도적으로 역설에 빠뜨립니다.

혹은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역설에 처한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루소는 폭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소는 원리적으로 모든 규범성을 인간으로부터 배제시킵니다.

자연인은 집단을 이루지 않고 개개로 살았다는 루소의 언급은 자연사적인 주장이 아니라고 전 생각합니다.

모든 규범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저 전제가 필요합니다.

집단을 이루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규범으로 승격되기 십상인 자연스러움, 다시 말해 본성을 배제하기 위한 전제였다는 것이죠.

집단을 전제하는 순간부터 집단 존속의 필요에 인간의 “본성”은 끼워맞춰 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때문에 루소의 저런 주장은, 주장이라기보다는 원리적으로 요구되는 상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루소는 저런 조건 속에서, 정말로 자신이 묻는 질문, “법”으로 여겨질 것을 알게 되고 그걸 따르게 되는 “결심”이 승인될 수 있는 조건을 가설적으로 따지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의 선악 여부를 차치하고, 현실에서 목격되는 규범성의 원천이 될 도약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따져보자는 것이죠.

 

이러한 따져물음은 역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따져물어지는 기원은 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화적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신화는 신화에 불과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부를 만한 방법에 의해 다른 것들을 다 배제하고서, 그것의 사실 유무와 상관없이 승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루소가 제공하는 설명이 허구fiction라고 해도, 사실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이를 고려해보았을 때 승인“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이 포착된다면, 루소의 작업은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루소는 기원을 사실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원이 역사적 사실로 밝혀져도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그 진리로부터는 그 어떤 규범도 정당하게 발생하지 않습니다.

숭배의 대상이 역사적 사실로 전도되는 것일 뿐 그것은 “정당화”가 아닙니다.

루소는 애초부터 문제는 역사가 아니고, 우리가 정말로 포착해볼 것은 “역사적 가능성”이라고 본 것 같다는 것이죠.

 

루소의 작업이 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원리적일 때,(물론 루소에게 이런 극단적인 두 선택지를 내미는 것은 오류입니다만 설명의 편의상 도입하자면) 루소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현실이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루소는 실제로 모릅니다.

그리고 몰라도 됩니다.

애초부터 문제는 그러한 사실에 달려 있지 않고, 이는 <사회계약론>에서 중요치 않은 것만큼 <불평등 기원론>에서도 중요치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 역사적 과정에 대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지 따위의 현실적인 문제를 제쳐두고서도, 루소에게 그것은 문제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규범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그 사실로부터 비롯될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지만, 루소의 작업이 “현상학적”, “원리적”, 혹은 “초월적”인 것이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이게 루소 나름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루소 본인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실제로 루소는 책이 아니라 자연에서 끌어낸 “인간의 역사”라고 말하죠...)

다만 이게 실증적 역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루소에게 있어 이것이 “역사”인 것은, 이것이 허구fiction일지라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연결해줄 공통 근거로서, 그들이 “우리”로 함께할 수 있는 공유되는 근거로서, 변덕스러운 심리상태가 아니라, 변하지 않을 바깥의 무엇인가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라고 전 생각합니다.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루소는 원리적으로, 개별적인 인간들이 아니라 인간 일반을 다룸으로써 역사의 형식을 제시한 것이고, 그것의 “적용”(여기서 “적용”은, 성서의 오류들은 신께서 인간의 수준에 맞춰 진리를 “적용”하였기에 발생했다는 그런 용례/의미로 얘기하고 싶군요...)은 제네바나 폴란드, 코르시카 등, “우리”를 이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실제의 역사 속에서만 구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번 읽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