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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회담론으로서의 미학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알레비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누스바움의 <연약한 선>에 대한 서평이기도 함



<분해의 철학>으로는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게 된 것들이 많아 다른 책으로 한번 다시 정리를 시도해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둘입니다.
하나는 알레비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이고, 다른 하나는 누스바움의 <연약한 선>입니다.

알레비의 책은 다음과 같이 당대 풍조를 비판하며 시작합니다.
‘공리주의’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도덕만을 떠올리지만, 공리주의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죠.
알레비 시대는 지금보다 덜 타락한 시대기 때문에, 알레비는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들이라면” 공리주의로부터 ‘연상심리학’까지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공리주의로부터 개혁 법학을 떠올리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는, —오늘 날의 관점에서는 정말로 배부른 소리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하여간— 1900년의 세태를 알레비는 지적합니다.
알레비는 공리주의가 그런 것이 아니며, 공리주의로 여겨지는 조류의 올바른 이름은 “철학적 급진주의”라고 정정하려 합니다.
“사상”의 “형성”을 말함으로써 말이죠.
알레비는 이곳저곳에서 발생한 여러 생각들이 어떻게 우연히 하나의 종합적 구조물로 구축되는 “기원”을, 그러한 우연적인 종합물을 “하나의 사상”으로 여길 수 있게 할 “역사”를, 그것들을 하나로 엮어 “하나의 이론”으로 말할 수 있게 하는 이념형으로서 벤담이란 기념비로 세웁니다.
당연히도 알레비는 벤담을 흠이 없는 신적인 존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흠도 많고, 허점도 많죠.
단지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던 생각들을 하나로 종합해내고, 그 사상에 걸맞은 실천을 평생에 걸쳐 헌신한 인물로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생애사보다는 그런 실천의 중요한 성과물인 텍스트들에 더욱 집중하고요.
이런 작업에서는 당연히도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던 생각들”이 다뤄져야합니다.
정확히는 그것들이 종합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것의 종합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던 생각들”로 여길 이유가 없을 여러 생각들을 다뤄야하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들을 다루는 작업이 매우 짧게 수행되었음에도, 그 결과물은 오늘날에도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18세기의 “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고취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알레비는 정확히 핵심만을 짚어줍니다.
도대체 공리주의가 “연상심리학”이랑 무슨 상관이고, 그것이 “개혁 법학”으로 “나아가는” 벤담의 “성취”가 어떤 것일 수 있었는지를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이죠.

알레비가 정확히 지적하듯, 미학은 연상심리학으로부터 발전한 겁니다.
근대 과학, 근대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반대에서 태동하였습니다.
그들이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자연상species”을 통해 “감각기관”의 “지각”으로부터 규범적인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상식론”이었습니다.
기계론을 통해 이런 상식론은 비판되었고, 자연상은 환영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이미지로 추락하게 되죠.
자연상의 추락, 규범적인 형상의 몰락으로 생겨난 공백에서 기호론과 연상심리학이 태동합니다.
감각이 당연하게 특정 관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면서, 도대체 어떻게 감각이 관념으로 이어지는지를 다루는 지식 분야가 등장한 것이죠.
소위 영국 경험론 전통의 핵심은 “관념 연합 원리”였습니다.
경험의 규칙성에 의해 특정한 감각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감각기관에 반복적으로 자극되고, 관념 연합 원리에 의해 그러한 규칙성을 내재화하여 질서 있는 경험을 구축해낸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형성된 “질서”가 통상적으로 상식으로 승인되는 관념들의 원천이 되는 것이고요.
이게 바로 기호론과 연상심리학입니다.
한편으로는 상식에 의해 공고하게 권위를 승인 받고 있는 “형상”으로 여겨지는 “관념”을 감각-기호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감각-기호의 형성을 역사심리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지요.

이런 사고 자체는 꽤나 이른 시기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일관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주의가 권위를 가지는 한 이런 사고는 일관성을 가질 수 없거든요.
그러니 기호론-연상심리학은 근대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이론적인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밀어붙인 것은 근대와 함께 등장합니다.
홉스가 대표적이죠.
홉스는 저런 식으로 형성된다고 이론적으로 선언하고, 바로 저 “형성”의 우발성에 근거하여 초월신학을 주창한 것이었습니다.
홉스의 주장은 매우 일관적이죠.
하지만 기호론-연상심리학이 반드시 홉스의 방식으로 종합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또한 양가적이니까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통을 정당화하는 담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허구성을 촉로하는 담론이죠.
이런 양가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형성”의 “이론”과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바로 여기서 “미학”과 “역사학”이 등장하는 것이죠.

미학은 저런 형성을 추동하는 심리학적 원리와 형성 추동하는 구체적인 감성화의 계기들을 다룹니다.
단순히 감각되는 감각내용들은 그 자체로는 어떤 관념도 지시하지 않습니다.
감각들은 그 자체로 고양될 필요가 있고, 감각들이 다양한 심리적 내용을 갖춘 방식으로 조직될 때에만 “관념”이 형성됩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런 형성이 단순 심리적 원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양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엇비슷하게 느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런 형성을 순전히 임의적/자의적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엇비슷함을 담보해줄 사전확률 및 지도원리가 필요했습니다.
사전확률은 본성으로 설명되죠.
지도원리는 쾌락 극대화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쾌락 극대화만을 통해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 많다는 겁니다.
심층적으로 볼 때 인류사적으로 이익을 가져오는 행위일지라도, 개인적으로는 그것들은 명백히 반-이기적인 행위들이 많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생존조차하지 못했을 것이고요.
때문에 설명을 요하는 이러한 기이한 행위들, 통상적으로 “도덕”이라 불리는 것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가 설명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연히도 이는 본성과 쾌락 원리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설혹 본성과 쾌락 원리로 설명하려고 해도, 서로 다른 쾌락들 중 왜 “도덕”에 이바지하는 “쾌락”이 우선시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죠.
바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미학이었습니다.
미학은 쾌락을 다룹니다.
하지만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유발되는 쾌락과는 다른 종류의 쾌락을 다룹니다.
즉각적이지 않고,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쾌락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오랜 기간의 훈련을 감당하게 하는, 즉각적인 것 이상을 추구하게 하는 쾌락이자, 그러한 노력의 보상이 될 질적으로 우월한 쾌락이 바로 미적 체험인 것이죠.

그런데 저런 쾌감을 상정할 경우, 아무거나 주장될 위험이 있습니다.
당연히도 “미”를 중요한 개념으로 개념화한 사람들은 이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죠.
(알레비에게서 본 것인지 다른 책에서 본 것인지 헷갈리는데;;;) “미”가 개념화되자 정말 개병신 같은 것들에도 “미”가 부여되곤 했습니다.
현대의 미학자들은 “미”의 국소화, 미학의 권위주의 따위를 근대 미학 탓으로 돌리고, 그것들을 비판함으로써 미의 범위를 민주화하려고 하는데, 이는 정말 반만 알아야할 수 있는 멍청한 짓입니다.
근대 미학의 태동기부터 “요리의 미학” 따위가 주창되었거든요.
근대 미학의 경전으로 남은 책들이 저런 책들이 아닐 뿐이지 당대에는 별의 별 것에 모두 미학을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들이 고전적 저작이 되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고요.
개인적이고, 국소적인 활동들에 그런 가치를 부여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공통 가치의 결여는 미학 자체의 쇠퇴를 야기했을 것이기에 미학의 수호자들은 그런 헛소리를 “비판”했죠.
덕분에 그것들이 사라졌고 미학이 남은 것이고요.(반대였다면 둘다 안 남았을 겁니다ㅋㅋ)
하여간 근대에 미의 개념화는 이런 문제 상황 속에서, 정당화해야할 전통과, 비판해야할 인습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기준criteria을 제시하려 했고, 바로 이런 실천이 비평critique이었습니다.(물론 영국놈들답게 이론적으로 정교하지 않은, 학식erudition을 뽐내기 위해 일단 두껍고 길고 방대한, 하여간 적당히 비판적이면서도 적당히 보수적인, 제가 극혐하는 학자연함의 결정체 같은 책을 내놓았습니다. 궁금하시면 케임즈 경의 위대한 저작들을 보시면 됩니다ㅋㅋㅋ)
그러니 예술 작품에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미학자의 본업이 아니었단 얘기입니다.
작품은 공적인 화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뤄진 것이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평가 차이는 올바른 기준의 차이를 의미했고, 그러니 이를 발판으로 “투쟁”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투쟁은 원리적으로 수행될 수 없습니다.
결국 저런 논쟁에서 결정적인 것은 일반적인 원리가 구체화되는 “역사”가 되거든요.
심지어 “역사”를 통해 확보될 수 있는 규범성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인다움”의 문제, 즉 내집단과 외부자의 문제, “우리”의 “유구한” “헌정체”에 대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문제가 되거든요.(전 버크의 미적인 보수주의가 저 조류의 진정한 적자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알레비는 이런 조건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왜 18세기의 개혁 담론들이 미학과 역사를 매개로 주창되었는지, 왜 미학과 역사의 담론장에서 “연상심리학”이 중요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다루는 ‘크기’, ‘강도’, ‘안정성’, ‘확실성’ 따위의 주요 용어들이 어떤 효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죠,
알레비는 이를 단 한 개 장에서 잘 풀어줍니다.
저런 담론장에서 특정 개념의 이해 차이가 어떤 지형도를 그리게 했는지 따위를 정말 압축적으로 잘 설명해주죠.
이런 설명을 통해 벤담이 활용할 수 있었던 “개개 자원들”을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생각들”로서 제시하는 것이죠.
매우 훌륭합니다.
벤담이 당대 담론장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벤담이 저런 담론장을 어떻게 “역사학”의 영역으로부터 이탈시켜 “정치경제학”의 영역으로 이전시켰는지, 다시 말해 “헌정론”의 문제가 정치경제학적 “법학” 개선의 문제가 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물론 이것들이 1장 이후에 나오는 얘기들이죠)
서두에 언급했듯이, 알레비의 시대 진단은 지금에도 유의미합니다.
심지어 이제 사람들은 공리주의와 연상심리학도 연상하지 못하게 되었죠.
이런 상황을 타계하는 작업으로서도 훌륭하고,(물론 이 책이 1901년에 나온 걸 생각하면, 이런 훌륭한 작업조차도 아무 소용없었다는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실천을 위해 알레비가 깔아두는 전제들도 유용합니다.
그저 그런 역사의 골동품들로 치부될 수 있는 것들을 알레비가 종합적 관점을 통해 가치 있는 전통으로 변신시키고 있으니 말이죠.
전 이 책이 너무나도 오래 되었고, 너무나도 특정 관점 지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이 책이 20세기 초반 특유의 학술성과 진정성의 결실이라 의미를 갖는 것도 있습니다.(솔직히 말하자면, 현대 연구서들이 이 책보다 “충실히” 연구했다고 할 수 있을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포브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 말이죠)
하지만 전 오히려 이 책이 가진 편파성과 고전성이 의미를 산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론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론이 무엇일 수 있었고, 무엇이어만 할 수 있었는지는, 경험론을 그 자체로 보려할 때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체”라고 할 수 있을 무엇인가를 표상할 수 있게 하는 포괄적인 관점, 비록 특정한 관점이고 그 관점을 통해서 마주하는 전체는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부분이 “부분적인 총체”로 여길 무엇이기에 전체를 통괄할 수 있게 하는 관점 속에서만 그게 보이거든요.(참고로 <분해의 철학> 2장에서는 “부분적인 총체”라는 개념을 제시한 인물로서 프뢰벨이 다뤄집니다. 잡다함이 갖는 유용함을 잘 보여주는...)
그렇기에 알레비 책은 지금도 유의미하고, 18세기 미학 담론을 이해하는 오래되고 낡은 길임에도,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평하고 싶네요.


쓰다보니 알레비의 독무대가 되었군요...
그럴 수밖에 없는게... 누스바움의 <연약한 선>을 추천하지만, 전 이 책을 읽으면서 누스바움과 화해하기는커녕 그에 대한 혐오감만 더 늘었습니다.
이제는 인식적 근거까지 갖춘 혐오감이라 누스바움도 비난하지 못할 것이 되었고요.(제가 가진 적개심은 누스바움의 윤리학으로 정당화되니 누스바움이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이 또한 누스바움 알량한 관대함 덕분이죠ㅎㅎ)
그래도 이 책은 추천하고 싶습니다. 유용한 게 많거든요.(다만 책은 절대 사지 마십쇼. 이 책은 백퍼 개정판이 나올 것이고, 나와야만 합니다. 저자들이 고생한 걸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것은 완성된 번역본이 아닙니다. 내돈내산... 피같은 돈을 내고 얻은 교훈이니 이렇게 얘기해도 됩니다)

일단 이 책의 장점은 대체로 맞는 얘기를 열심히 정당화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게 왜 장점이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정당화가 자주 필요하기에 이건 장점입니다.
단점이라고 하면 역시 고전 고대에 대한 천박한 이해, 제가 좀 더 좋아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신의 박약함이라고 할 무엇인데... 뭐 그게 중요한가요.
애초에 고전 고대에 주목조차 안 하는 시대이니, 정신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박약한 정신마저도 오늘날에는 정신의 그림자로 유용하거든요.
누스바움은 대표적인 미국 엘리트답게 정말로 미국 엘리트다운 "좋음"을 잘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런 감수성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는 담론을 잘 꾸며냈거든요.
아시다시피 저런 감수성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통용되니 이 책은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습니다.
누스바움이 비판하는 윌리엄스처럼 반시대적이면 구시대적인 게 되는 시대이니까요.(버나드 윌리엄스도 정신이 박약한 사람인데... 세상은 역시 상대적입니다... 윌리엄스가 선녀로 보이니 말이죠...)

누스바움이 저 책에서 열심히 잘 정당화하는 입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윤리는 단순 행위가 아니라 행위자 중심으로 이해되고 교육되어야만 한다.
2) 윤리적 행위의 진정한 가치는 윤리가 추구하는 “좋음”이 가진 “연약함”에 기초한다.
사실 누스바움은 2를 제대로 주장하고 있진 못합니다.
명시적으로 주장하긴 하지만, 좋음이 가진 연약함이, 단순히 불가피하다는 주장인 것인지, 아니면 불가피함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인지는 그때그때 본인 유리한 대로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뭐 근데 일단 본인이 남 욕할 때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니 핵심 테제라고 할 만합니다.
누스바움의 1) 주장에 디테일과 유의미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2)이니 이걸 부정해서 좋을 것도 없고요.(누스바움을 다른 덕윤리가들과 구별케 하는 종차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2)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마도 여기서 <분해의 철학>을 비교항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겁니다.
구성 중심이 아니라 탈구성(분해) 중심으로 볼 때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듯이, 윤리에서도 좋음의 연약함을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 볼 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모범이 바로 비극이고요.
정말로 맞는 얘기입니다. 니체와 윌리엄스 모두 박수칠 얘기죠.
물론 여기서부터 누스바움은 다 틀린 소리만 하지만요.
하지만 그 오류에도 의미는 있습니다.
비극은 “슬픈” 이야기 따위가 아닙니다.
한국어에서 비극은 단어부터 비애悲를 품고 있고, 현대어들에서 ‘비극’은 관용적으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만 어원상으로 비극은 비애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비극을 보면서 “공감”하며, 눈물을 질질 “배출”하며 “주인공이 불쌍해!”라고 통탄하며 “연민”을 품는 것은 비극에 대한 정상적인 관람 방식도 아니었고요.
그런 건 멜로드라마에 속할 신파극에 불과합니다.
은근히 맞는 얘기만 하는 니체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말이죠.
하여간 비극은 그런 게 아니었고, 누스바움은 근본부터 문제적이지만, 누스바움의 접근은 활용할 가치가 많습니다.
비극이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는 중요치 않거든요.
어차피 현대인들은 비극의 진정한 면모를 이해도 못합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겨우 가늠만 할 수 있는 것이죠.(이건 니체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와닿는 설득을 위해서는 현대적인 접근이 더 유용하죠.
인식과 정념으로 영혼을 쪼개고, 딜레마적인 상황 속에서 결단하는 인물, 결단 속에서 진정으로 공감과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인물이 오늘날에는 더 와닿을 겁니다.(또다시 빡쳐 반박하자면 비극은 딜레마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음악이 “딜레마”에 의존적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누구나 그게 헛소리라는 것을 알겁니다. 비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설혹 음악과 비극이 대립을 활용하고 그게 필수적일지라도 그게 “딜레마”일 이유는 없습니다)
저런 식의 분해 속에서 꽤나 구체적인 문제 상황이 그려지죠.
인식과 정념의 결합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못하게 만들고요.
이런 작업으로 그럴싸한 유의미성을 잘 꾸며낼 수 있습니다.
여러 보이는 것“들”과 여러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현대적으로 세련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방법을 잘 보여줍니다.
모범 그 자체죠.
누스바움이 이 책을 쓰고 출세한 게 우연이 아니란 소리입니다.
특정한 사례를 이런 식으로 분석하고, 그거 가지고 허수아비 때리기 순회공연을 어떻게 해야 출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출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줄 수준으로 말이죠.

뭐 맞는 얘기가 맞아서 복잡한 심정이 듭니다.
또한 멍청하지만 자신이 다른 멍청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본인이 이해 못하고 있는 사태를 잘 언급해줍니다.
예컨대 현대의 공리주의 비판자들이 밀이나 시즈윅 같은 원조 공리주의자들이 그들이 비판하는 공리주의와 무관하고, 오히려 모범적인 윤리학을 주창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사태 같은 것을 성실하게 언급해주죠.
뭐 공리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딜레마 같은 선택을 종용하는 문제 상황을 통해 인식과 정념의 결합을 주창하면 바로 저 원조 공리주의 국밥의 짭퉁이 되는 것을 모르고서, 배은망덕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좋은 일입니다.
“철학적 급진주의”와 같은 위대한 조류의 —무의식적인— 모조품일지라도, 위대함의 그림자는 담고 있어서 적어도 말은 되거든요.
현대적인 세련스러움을 가지고 저런 접근을 가능케 해주니 얼마나 좋은 책입니까!
반드시 활용해야할 책입니다.(비꼬는 게 아닙니다ㅋㅋㅋ)

하여간 정념의 문제를... 다수적인 맥락에서 “정신”(‘moral’은 원래 정신이란 의미를 갖고 있어서 잠깐 용어를 바꿨습니다)의 발현 속에서 얘기할 수 있게 하고, 이게 “감각의 정치”라고 불릴 사례들을 포섭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방식으로 가치 부여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작업이 고대에 대한 배신이고, 고전에 대한 배신이고, 고전 고대에 대한 모욕이란 것과 별개로, 이런 작업은 가치를 가지고 있죠.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둘이 궁합이 잘 맞고, 어느 스코틀랜드 지식인이 이런 책을 썼으면 “고전”으로 남겨졌을 거란 확신이 들어 둘을 엮었습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꽤나 업그레이드된 버전을 누스바움이 20세기에 내놓았다...고 평가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