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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적인 철학이란?

어제 올린 "역사학적인 철학이란?"에 대한 보충



어제 얘기한 것 관련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나서 추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전 요즘 역사책을 거의 안 읽고 있습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딱히 읽고 싶은 역사책이 안 보여서 그런 거일 겁니다.
다만 저 사소한 사실을 좀 과장해서 정당화하자면, 여태까지 제가 ‘역사’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고,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적 철학함”에서 이른바 “인류학적 철학함”으로 이행 중이라는 그렇고 그런 식의 헛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요즘 인류학 책을 좀 읽었고, 지금 느끼기에는 전 “인류학적 철학함”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는 부차적입니다)
저야 뭐 예나 지금이나 철학바라기니까요.

역사든 민족지든 저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주목하게 강제하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인식은 꽤나 직관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전 예전에 아감벤은 좀 병신 같고, 단언컨대 역사를 전혀 모르는 놈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 진단은 올바른 것이었고,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저런 진단이 과도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아감벤의 사료 활용이나 해석들을 보면 “역사를 잘 안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 보이거든요.(영진 샘이 아감벤을 “충실한 주석가”로 묘사했던 게 기억나는군요)
그런데 전 저런 “기교”가 기만적이고, 그래서 아감벤이 “병신 같다”고 판단한 거였습니다.
헛소리면 그냥 헛소리로 내뱉으면 될 것을, “역사”인 것처럼 속이려고 든다는 게 맘에 안 든 것이죠.
실제로 아감벤은 수작을 많이 부립니다.
민철 샘도 경멸과 함께 역사학적인 비판을 수행한 적이 있죠.
아감벤이 어떻게 사료를 왜곡하고 있는지를 철저히 해부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꼭 사료에 기반해서 분개를 느끼지 않더라도 아감벤의 짓거리가 역사적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들었을 때, “아!”하면서 “정말 그렇군!”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있고, 바로 심드렁하게 “뭔 개소리야”라는 생각이 드는 게 있다는 것이죠.
제가 “역사를 잘 안다”고 할 때는, 보통 이 차이를 잘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번에 얘기했듯이 전 최근 기어츠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를 읽었는데, 이 책에 대한 인상과 비슷합니다.
기어츠가 긴 글을 쓴 것도 아니고, 해당 인류학자에 대해 조사할 때 요구될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그런데 기어츠의 분석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레비스트로스는 제가 어느 정도 아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 모르는 말리노프스키에 대한 분석에서도 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자료의 양, 논증의 치밀함이랑 이런 설득력은 좀 다릅니다.
이상길 샘의 <아틀라스의 발>을 읽으면서 전 정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부르디외에 대한 이런 저런 자료들, 사실들, 증언들을 다루는데 지루하고, 설득력도 별로 없다고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제가 사회학에서는 전기적 사실과 사상을 이렇게밖에 연결하지 못하는 것인지 반쯤은 순수한 의문이, 반쯤은 냉담한 조소가 담긴 말을 했던 것이죠.
물론 전 전기적 사실과 사상을 연결하는 이상적인 방식으로 스타로뱅스키의 테마 비평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테마 비평이든 아니든, 방법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설득력이 있는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설득력이 있는 말을 내던지는 겁니다.

니체도 이런 케이스에 속하죠.
니체는 뻔뻔하게 본인이 역사를 좀 안다고 말하는데,(정확히는 철판 깔고 “잘 안다”고 말합니다) 정작 역사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습니다.
본인은 역사 서술을 수행하고 있다고 선언하지만, 도대체 뭐가 역사 서술인지 알 수 없는 얘깃거리들만 적어 두었죠.
니체는 역사 자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역사 속 사례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이 얘기하지 않습니다.
얘기하더라도 뜬금없이 한번 언급하고 지나가버립니다.
예컨대 이런 거죠.
아무 맥락 없이(사실 단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들을 썼으니 “맥락 없음”이 근본이긴 합니다) 니체는 스스로를 무신앙자라고 말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속는 흑우 없제?라고 말하죠.
이와 함께 신랄한 진단을 합니다. 프랑스놈들에게 신앙은 애국이고, 프랑스에서 무신앙자를 찾고 싶다면 매국노를 찾아야할 거라고, 근데 그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 갔거나 숨어 살테니 프랑스에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말하죠.
니체의 말은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애초에 근거 없는 얘기죠.
근데 프랑스의 역사를 잘 알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할 말이기도 합니다.
라블레가 무신앙자라는 멍청이들의 순진한 주장들에 조소를 보내며, 생트-뵈브와 미슐레도 결국 제수이트였고 가톨릭이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냥 아는 겁니다. 뭔 말을 하는지 아는 거고, “이 새낀 뭘 좀 아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저런 “진단”은 베네딕트의 “뇌피셜”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기어츠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베네딕트는 애초부터 “일본”이나 “일본 문화” 같은 총체에 대한 “올바른 기술”로서 뇌피셜을 쏟아낸 게 아닙니다.
산책하듯이 유람하며 한 번씩 조소를 표하고 다음 코스를 밟는 스위프트식 여행기죠.
베네딕트의 글은 문체만 스위프트의 글과 비슷한 게 아닙니다.
현장에 가지 않았다는 것과, 사실상 옆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썼다는 점에서 더욱 비슷하죠.
그럼에도 뭐가 되었든 일단 말이 되어야 효과가 있습니다.
베네딕트의 “뇌피셜”을 이론이나 방법으로 안 보면 꽤나 재미나고, 풍자적이고, 위트 있는 얘깃거리들이죠.
기어츠의 지적처럼 이 또한 “인류학의 근본”이라고 말할 서술 중 하나고요.

요즘 자유롭게 읽고 있지만, 제 유람에도 나름 일관된 목표가 있습니다.
저런 말이 되는 얘깃거리를 찾고 있는 거죠.
다만 대상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것들이지만요.(심지어는 주체에 “대한”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해 열심히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들로부터 제가 “주체”를 구상하는 것이지만요)
아마도 이게 제 바깥일 듯하고... 아마도 이게 철학에 대한 저만의 특유의 태도랑 연관 있을 듯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전 철학의 선조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혐오합니다.
비방을 쏟아 내는 놈들의 책은 일단 보기 싫어지더군요.
뭐 이것도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철학이 뭔지도 제대로 고민 안 하고, 철학이란 걸 가능케 만든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으니, 염치가 없고, 은혜를 모르는 금수만도 못한 것이란 것도 중요한 이유겠죠. 실제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게 철학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역설 그 자체죠.
그럼에도 철학을 하게 만드는 것은 선조들의 작업이 저에게 “빛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다면, 내가 의식하고 있진 못하지만, 내가 저것들에 주목하게 만들고, 도저히 관심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진 무엇인가에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게 선조들은 중요한 겁니다.
모범 같은 거랑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고, 되도 않는 비방에 참을 수 없는 겁니다.
“철학”의 존재 이유를 파괴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재미나게도 이런 의미부여가 절 역사학적 투쟁으로 몰아 세우는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물론 전 플라톤에 대해서 말이 되는 얘기만 합니다.
제가 내놓는 “플라톤 해석”은 또한 알고 보니 대가들의 해석과 공명하는 근본 있는 해석이죠.
그럼에도 문제를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플라톤”의 “철학”이란 보장은 없거든요.
때문에 제 해석과 상충하는 구절들, 제 해석에 위협이 되는 해석들에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을 느끼거든요.
뭐 사실 저런 위협들에 대한 제 위기 의식을 거짓 위험이라고 말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중요한 게 정말 철학이라면, 인간 플라톤의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요즘 기독교 신학자들처럼 실증성과 실정성을 구별하며, 인간 예수에 대한 물음에 함구해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 정신”이고 이는 어차피 “실증”의 문제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제겐 둘 다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말이 되기 위해서 지불해야할 대가처럼 느껴지거든요.
애초에 철학을 실정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이고, 마주했을 때 “이게 바로 진짜 철학이다!”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들 사이에 확정 가능한 교의dogma는 없을 겁니다.
때문에 인간과 철학은 분리가 안 되고, 마음대로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에 합당함을 못 느끼는 것이죠.
철학의 진실함은 “말해진 철학들”로, 형식적 보편성으로 체계화될 수 있는 것들로, 명제들의 집합의 참 할당 여부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저 또한 헌익 샘과 마찬가지란 얘기입니다.
제 철학을 진실하게 하는 것은 이론이나 방법이 아니라 제 사례들입니다.
그 사례들의 진실함이고, 그것이 꾸며낸 것일 때 훼손될 수밖에 없는 순결함이 신뢰를 가능케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게 제가 요즘 “인류학적 철학함”과 “역사학적 철학함”을 교차 가능한 것처럼 말하게 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역사는 애초부터 총체적인 것도, 연속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역사의 교훈은 역사가 총체적인 것도 연속적인 것도 아니란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니부어가 옳다는 얘깁니다)
전 역사학자들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역사의 총체성, 거대 서사 따위를 말하는 사람들은 역사학자가 아니거든요.
역사학자들은 그냥 듣자마자 헛소리라고 느낍니다.
역사학자들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그러한 주장들이 실증 근거를 결여하고 있어서도, 그런 거창한 주장들이 전제하는 보편적 타당성이 학문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워서도 아닙니다.
그냥 느끼는 거죠.(역사학자들은 입증하기 어려운 주장들에 대해서도 꽤나 자주 신뢰를 보입니다. 아닐 수 없는 얘기들에는 입증과 무관하게 동의하곤 한다는 얘깁니다)
제게 역사가 소중한 것은 그것만으로 말해질 고결함이 있어섭니다.
제게 달린 것이 아닌 타자이면서도, 신뢰를 갖게 되고, 확신을 얻게 되는 고결한 것들이죠.
전 역사학자들이 이유도 모른 채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인류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규범 때문이 아니라,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들에 대한 호기심, 혹은 매혹 때문인 것이죠.
아마도 제 바깥은 이것들인 것 같습니다.
뭐 결론은 역사의 옷을 입고선 연기하는 호로새끼들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건 정상 아니겠느냐는 얘기인데ㅋㅋㅋㅋ
험담만이 담긴 게 아니라, 하나의 진실 또한 담겨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제가 자주 사료는 놀라운 것이라고, 예상을 뛰어넘는다고 얘기하는데, 그게 민족지의 힘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첨언하고 싶네요.
근데 저런 기대를 넘어서는 힘은 기대를 배신하는 거랑 다릅니다.
아감벤의 헛소리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사료의 놀라움은 말이 안 되는 게 사실이라는 식의 반전이 아닙니다.
말이 되는 것과 말이 되지 않는 것의 기준과 무관합니다.
단 한번도 창안된 적 없는 “말이 되는 것”의 출현인 것이죠.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죠.
가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종류의 말이 아니란 얘깁니다.
보고 나면 너무나도 말이 됩니다.
하지만 보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떠올리지 못할 무엇인가죠.
하여간 사료의 놀라움과 민족지의 놀라움은 이런 것이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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