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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적인 철학이란?

언제나 그렇듯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 전에 리오타르가 예상 외로 역사적인 것 제가 얘기했습니다.

미독이 어떤 의미냐고 물으시며 랑시에르 언급하셨죠. 랑시에르를 비교항으로 얘기해달라고 요청하면서요.

그때 전 랑시에르는 역사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다지 역사적이지 않다고 얘기하며 비교의 어려움을 고백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말한 이유를 설명하려 합니다.

 

많은 경우 역사 속 사례를 언급하는 책들을 역사적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설명의 편리함을 위해 역사 속 사례를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역사적일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역사 활용은 설명을 위한 장식에 불과한 거거든요.

역사가 설명을 위해 부차적으로 활용되는 것으로는 역사적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설명을 위해 역사가 아니라 다른 걸 활용해도 차이가 없을 테니까요.

때문에 “역사적”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단 얘기입니다.

굳이 “역사”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정말로 역사적이기 위해서는 역사가 부차적이지 않아야만 합니다.

역사가 부차적이지 않아야한다는 주장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인류학을 말하고 싶군요.

얼마 전에 언급된 이상길 선생의 저작을 가지고 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상길 선생의 저작에 관심이 생긴 저에게 미독은 이래저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발언이 있었습니다.

이상길 선생이 문화를 너무 부르디외식으로만 보는 듯하다는 미독의 말이 그것입니다.

전 그 얘기를 듣고 잠깐 ???했습니다.

부르디외식으로 보면 안 되나? 뭐 이런 생각을 한 것이죠.

물론 저도 무지성 부르디외식 문화 분석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도 반대합니다.

다만 부르디외식의 접근의 장점과 단점을 잘 이해하고, 성취될 수 있는 의의와 성취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활용한다면 문제될 게 없죠.

전 이런 “부르디외 원툴”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굳이” 반대하는 일 없는) 미독이 이에 대해서 반대하니 약간 놀랐던 것이죠.

그러다 이것이 “인류학적”인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물론 부르디외의 사회학이 인류학과 대립된다는 그런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도 인류학에서도 부르디외식으로 문화를 분석할 수 있겠죠.

문제는 부르디외식이냐 아니냐가 아니란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르디외식이냐 아니냐는 문제 자체는 인류학적으로 부차적인 물음이란 것이죠.

인류학에서도 이론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류학에서 이론이 중요한 것은 사례를 이해하는 데 이론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에서 중요한 것은 사례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이론들이지 일반 이론이 아닙니다.

설사 99가지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지라도 1가지 사례를 분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인류학에서 중요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어떤 이론이 일반적으로 잘 설명하는지는 인류학에서 중요한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특정 사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이론이 무엇인지가 인류학에서 중요한 지식이죠.

그러니 하나의 이론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인류학의 미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물론 이것도 미덕일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못하는 멍청이보단 나을 테니까요. 다만 그것은 학자로서의 미덕을 갖췄다는 것이지, 인류학자로서의 미덕을 갖췄다는 의미는 아니란 얘기입니다)

인류학에서는 하나의 이론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보다, 다양한 이론들을 완벽하진 않더라도 각각의 문제에 적합하게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약간 의문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학은 사례 중심이죠.

사례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미덕인 학문입니다.

때문에 인류학에서 사례는 장식일 수가 없습니다.

문제이자 답이거든요.

적당히 사례들을 언급하고, 설명한다고 해서 인류학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전형적인 인류학의 사례일지라도 말이죠.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속 사례를 활용한다고 해서 역사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어떨 때 “역사적”인 것일 수 있는 것인지입니다.

이 또한 인류학을 비교항으로 삼아 설명하면 좋을 듯하군요.

 

아무 사례나 설명한다고 해서 인류학적인 설명인 것은 아닙니다.

설혹 그것이 제대로 설명하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인류학적인 사례들을 인류학적으로 설명할 때에만 인류학적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인류학이라고 해서 일반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런 일반성을 제대로 활용할 때에만 인류학적일 수 있죠.

예전에 저희 둘이 헌익 샘의 책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헌익 샘의 책은 매우 민족지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민족지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그런 얘기를 나눴었죠.

헌익 샘의 저작들은 당연히 민족지입니다. 헌익 샘 또한 자신을 민족지 작가로 생각하시고 계시고요.

그런데 헌익 샘의 책이 일반적인 민족지랑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헌익 샘의 책이 일반적인 민족지랑 다른 것은 헌익 샘의 논의 근거 때문입니다.

헌익 샘은 단순히 현장을 제대로 그리려는 것만을 연구 과제로 삼지 않습니다.

현장을 특정한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그리려는 것이 헌익 샘의 연구 과제죠.

이건 현장을 인류학적 관점에 맞게 왜곡시킨다는 그런 헛소리랑 다릅니다.

헌익 샘은 인류학적으로 유의미한 논의거리들을 현장에서 발견해내는 것이지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런 헌익 샘의 “발견”에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다른 민족지들도 인류학적으로 유의미한 논의거리들을 현장에서 발견해내거든요.

헌익 샘의 특별함은 발견이 임의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헌익 샘은 인류학에 대한 헌익 샘 특유의 이해가 있습니다.(특이하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헌익 샘은 인류학에 대한 헌익 샘 특유에 이해에 기초하여 “진정한 인류학”과 “인류학적 문제의식”을 갖고 계시죠.

헌익 샘 민족지의 특별함은 바로 저 고유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됩니다.

헌익 샘은 현장에 모든 것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현장에 자신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맞는 현장을 찾아내고 거기서 문제를 찾는 것이죠.

그러니 헌익 샘의 현장이 초국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이든 한국이든 어디든 헌익 샘은 본인의 문제의식에 공명하는 현장이라면 달려갈 테니까요.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헌익 샘 연구의 “일반성”이 반-인류학적이지 않고, 진정으로 인류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헌익 샘의 일반성이 인류학적일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인류학적인 사례와 인류학적인 설명에 대한 탄탄한 근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인류학이었고, 인류학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사례와 설명을 수행하니까요.

하지만 전 이것만으로 인류학적인 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의문을 가져야할 것은 사례를 가져오는 이유여야만 하니까요.

만약 헌익 샘이 본인의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에 대한 답일 수 있는 것을 그저 겉옷만 바꿔 입히며 연구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연구는 인류학적일 수 없습니다.

어차피 뻔한 소리고, 그 뻔한 소리는 “일반이론”에 근거하여 그 의의를 갖는 것이지 사례에 근거하여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닐테니까요.(헌익 샘의 인류학이 기승전-토테미즘+뒤르켐 강조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헌익 샘에게 이론은 본인의 내놓을 거리입니다.

헌익 샘의 주장은 이론으로 합리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론으로 합리화되는 것도 있죠.

헌익 샘의 인류학 이해는 매우 이론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헌익 샘의 연구 자체는 이론으로 합리화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헌익 샘은 자신의 인류학 이해, 일반적인 주장, 특정한 이론을 내놓으려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사례들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례들이 가지고 있는 힘—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이 중요한 것이죠.

헌익 샘의 확신은 헌익 샘의 인류학사에 대한 이해의 올바름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인류학사에 집착하셨겠죠.(헌익 샘은 인류학사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헌익 샘의 확신은 자신이 발견한 사례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본인이 목격한 사례들이 갖고 있는 힘에 대한 신뢰 덕분에 확신할 수 있다는 얘기죠.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헌익 샘의 연구는 “인류학적”일 수 있는 겁니다.

일반성마저도 바로 그 사례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또한 사례들의 차이에 주목할 이유가 생기는 거고요.

때문에 이론과 현실 사이의, 모델과 실제 사이의 불일치friction가 그렇게 중요치 않게 되는 겁니다.

불일치가 있죠. 근데 그게 나쁜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애초에 이론은 “일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일치는 주목할 이유를 상실시키죠.

애초에 인류학에서는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가 중요합니다.

“인류학적인 문제”라는 것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을 요구한다는 얘기죠.

 

이런 “설명”은 단순히 인류학을 위한 변론이 아닙니다.

역사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류학을 비교항으로 삼은 것일 뿐이죠.

모든 학문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지만요.

학문은 끊임없이 문제를 생산해내야 합니다.

“정보”의 “가치”는 “기대”와 “가능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죠.

영원히 해결될 수 없어도 문제겠지만, 언제나 해결되어도 문제입니다.

두 극단 사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해내는 게 학문의 가능조건이란 것이죠.

“문제들”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이지만,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원되면 뭐... 말할 거리가 없어지죠.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례들의 고유함이 문제들의 가치를 창출하죠.

이는 단순히 해결하기 어렵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것을 해결해내는 일은 꽤나 빛을 발하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애초에 “해결”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애초에 “문제”가 아닐 수도 있죠.

주목할 것들, 정확히 말하자면, 주목을 끄는 것들(혹은 주목을 강제하는 것들!); “고유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하나로 묶게 만드는 어떤 무엇인가”일 수 있거든요.

역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속 사례를 역사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주목을 끄는 힘”입니다.

그런 힘들 중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어떤 것들(혹은 어떤 힘?)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 제가 얘기하려는 것은 역사학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철학입니다.

철학이 어떻게 “역사적”일 수 있냐는 물음에 답하면서요.

 

철학은 철학이지 역사학이 아닙니다.

저 또한 역사를 연구하고 있지만, 전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당연히 제 분석은 역사학자의 분석과 다릅니다.

또한 역사는 역사학자들이 더 잘 알 거고요.(전 프랑스 혁명사로 민철 샘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코뱅 입장 변화를 분단위의 수준에서 장악하고 있는 역사학자들과 “자코뱅다움”을 놓고 역사학적으로 싸우는 것은 멍청한 일이거든요)  

전 철학자죠. 리오타르나 랑시에르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역사적”이라는 말의 의미 또한 역사학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역사학이 역사적이라는 것과 철학이 역사적이라는 것은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말하고 나니, 굳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냥 그럴 수밖에!”라고 말하고 싶네요ㅋㅋㅋ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긴 합니다. 같을 이유가 없으면 설명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때문에 철학이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일 수 있느냐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관건은 철학이 역사와 맞닿을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역사적인/역사학적인 철학함”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애초에 철학이 역사적일 이유가 없거든요.

때문에 정확한 이유가 있어야합니다.

적당히 사례를 가져와서 자신의 철학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적 철학함”이 아닙니다.

설혹 역사를 많이 동원해서 자신의 철학을 정당화하더라도 “역사적 철학함”일 수 없고요.

애초에 철학과 무관한 “역사”를 말해야만 할 필연적 이유를 철학적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유가 없으면 “역사적”인지와 무관하게 철학일 수 없는 것이고요.

 

리오타르는 역사적 사례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학의 진리-권위에 대항해서 열심히 투쟁했죠.

때문에 겉보기에 리오타르는 매우 반역사적이고 반역사학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리오타르의 저러한 투쟁은 리오타르 철학에서 역사가 갖는 중요성 때문에 수행된 것이었습니다. 

리오타르는 철학이 근거하고 있지만, 철학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바깥을 발견했습니다.

그 바깥을 리오타르는 “역사”라고 부릅니다.

다만 리오타르의 “역사”는 역사학의 역사랑 다릅니다.

그래서 투쟁을 벌이는 것이죠.

리오타르가 발견한 역사가 역사학의 역사로 매몰되면 안 되니까요.(그 자신의 철학의 근거이기도 하거든요)

리오타르는 역사 속 사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리오타르는 역사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며 그것을 자신의 한계로 남겨둡니다.

언젠가는 역사로 말해야만 하겠지만, 당장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로 말이죠.

 

리오타르의 철학은 매우 초월론적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반역사적, 혹은 초역사적이죠.

하지만 리오타르가 무지성 초역사를 주창하는 건 아닙니다.

자기가 발 뻗을 곳을 미리 살피고 있단 얘기죠.

리오타르는 단순히 언어를 통해 성취 가능한 형식적 보편성에 근거하여 철학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철학은 저런 형식적 보편성에 근거해야합니다.

하지만 형식적 보편성만으로 철학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죠.

철학이 성취되기 위해, 형식적 보편성이 작동해야할 틈이 필요합니다.

산술의 형식체계가 2+2=4를 형식적으로 타당하게 결정짓고, 해석체계가 2+2=4에 참 할당을 부여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적어도 설명해야만 할 무엇인가로서 받아들여야할 현상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입니다.

형식/해석체계의 미결정성과 무관하게 말이죠.

철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적이기 위해서는 형식적 보편성을 내세울 틈이 있습니다.

윤리학이면 적어도 무지성 살인은 거부해야겠죠.

모든 살인을 동등하게 만들거나, 살인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은 윤리학일 수 없습니다.

“윤리학”으로 불릴 형식적 보편성이 출현할 틈을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철학 일반도 그런 것이죠.

리오타르는 바로 이 틈을 철학적으로 성찰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초월론적 철학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죠.

때문에 리오타르의 초역사적인 철학이 역사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리오타르 철학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 바로 역사니까요.

 

이런 철학 실천이 어떤 의미에서는 비철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철학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일테니까요.

하지만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더 철학적입니다.

어떤 철학을 진정으로 철학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저 틈이기 때문이죠.

리오타르의 “초월론적 철학”은 충분히 체계적이지 못하거나, 몇몇 오류가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리오타르의 틈에 동의한다면 저런 불완전성은 중요치 않을 테니까요.(사실 칸트 또한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에 이 얘기를 했죠. 당연히 <순수이성비판>에는 오류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런 오류들이 “철학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철학을 가능케 하는 무엇인가—제가 지금 ‘틈’이라고 말하는—입니다)

리오타르의 저작에서 단 한 단어도 전용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철학이 계승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철학의 정체성은 때문에 문자적인 양식과 무관합니다.

철학을 철학답게 하는 것은 쓰여지지 않은 무엇이며, 철학이 아닌 무엇인가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철학을 철학으로 만들고, 진정으로 철학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닙니다.

플라톤도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전 확신합니다.

또한 진정으로 “철학적인” 저작들을 하나로 부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무엇인가고요.

철학은 예상과 달리 매우 개방적입니다.

폐쇄적인 철학은 반철학이죠.

철학은 생각보다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열려 있다는 게 유동적이고, 이것도 저것도 좋다는 우유부단함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철학의 가능성을 결정짓는 바깥에 대한 치열한 고찰이 반드시 우유부단함을 의미할 이유는 없거든요.

“철학적 차이”라고 부를 것들에 해당될 것이지 그게 본질인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이든, 데카르트든, 칸트든, 니체든, 하이데거든, 아렌트든 결국에는 바깥을, 타자를, 실재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철학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 내부가 아니라 저 바깥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깥을 무책임하게 방임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이 관건이란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다루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철학 바깥인 것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역설을 야기하거든요.

때문에 철학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들로 끊임없이 말해야만 할 무엇이죠.

말할 수 없지만 말하려고 하는 무엇, 그 무엇이가를 말하는 방식에서 철학의 가능성, 철학적 정체성, 철학적 개성이 태동하죠.

때문에 이는 철학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자율성은 순전한 독립성을, 간섭성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화계가 “자율적”이기 위해서 수많은 조건들을 유지보수해야만 하듯이, 자율성은 수많은 간접성 속에서 성취해내야만 하는 무엇인가입니다.

이 진실을 망각한 덕분에 무지성은 불간섭주의가 유행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철학은 자율성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타율성의 타율성으로, 타율성을 극복하고 자율성을 성취해낸 것이죠.

철학은 기원부터 철학의 바깥과의 진지한 마주함, 치열한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게 더 철학적인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랑시에르와 푸코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역사적 분석들은 많아요.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분석들을 총괄하는, 역사를 향해 열려 있는 철학이 없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역사를 향해 열려 있지 않거나, 역사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방법이 철학이라면, 그들은 초역사적인 철학을 주장한 것이고,

그들의 내용이 철학이라면, 그들은 그 어떤 철학도 주장한 게 아니게 됩니다.

변천하는 역사들만 가득하기 때문이죠.(발리바르가 푸코에 대해서 제가 하고 싶은 종류의 비판을 해두었더군요. 그래서 뭐 어쩌란 건데?가 비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철학은 충분히 철학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이 철학적이 못한 것은 외려 충분히 역사적이지 않아서라고 전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과, 진정으로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역사를 말해야만 할 때와, 철학을 말해야만 할 때를 잘 구별해야만 합니다.

역사가 철학으로 정당화될 수 없듯이, 철학 또한 역사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외관을 얼마나 모방하는지는 역사적인 것도, 철학적인 것도 정당화해줄 수 없습니다. 

전 오히려 역사와 철학의 경계를 제대로 의식하는 것이 진정으로 “역사적/역사학적인 철학함”의 종차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니체, 하이데거, 아렌트, 그리고 저는 그렇게 철학을 해왔으니 제 판단기준은 충분히 역사적이고, 철학적이고, 역사적/역사학적으로 철학적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납득이 될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그렇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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