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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을 발표하다

석사논문을 발표했다. 발표 중에 비문이 밟혀 부끄러웠는데, 막상 고치려니 너무 귀찮아서 수정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그냥 올리는 것도 의의가 있을 테니 양해를...
나의 논문은 니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주창한다. 전통적으로 중요시된 "철학적" 개념들, "힘에의 의지"나 "영원회귀"는 나의 논문에서는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저런 철학적 개념들은 보조적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상", "역사학", "즐거운 학문", "불멸의 기념비"이다. 힘에의 의지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필요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고, 영원회귀는 "즐거운 학문"의 직업윤리와 "불멸의 기념비"를 세우는 책임을 구축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발표문 작성 이후 한 선생님께 첨삭을 받았다. 그분께서 나의 논문의 주인공은 "역사"가 아니라 "이상"이 되었어야만 했다고 지적해주셨다. 너무 맞는 얘기라 할 말을 잃었다. 현실적으로 지금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다. 또한 현 논문의 "구조"도 나름 의미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상"을 주제로 논문을 하나 쓰고 싶다. 늦었지만 깨닫게 되어 다행이다. 논문을 쓸 때 체계를 너무 지향해서 난점이 생기는 것 같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논문을 완성시킨 것은 "체계의 부족"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필요한 체계를 제대로 못 찾았던 데에 있었다. 역시 체계는 중요하다. 문제는 체계가 부족해서, 혹은 체계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해서 생긴다. "논문 쓰기"로 이를 확신하게 되었다.

이하 발표문.



1.“역사적 감각”에 대한 니체의 강조
니체는 철학자다. 하지만 니체는 통상적인 철학자들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는 철학자다. 니체는 철학계 외부에서 철학자가 된 인물이었다. 니체는 철학이 아니라 문헌학을 전공하였다. 그럼에도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했고, 철학자가 되었고, 철학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기에 니체는 문헌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인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철학계의 외부인으로서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니체가 외부인의 관점에서 철학의 문제를 진단하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니체는 철학자들의 ‘체질적 결함’을 비판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역사적 감각”의 결여를 체질적 특성으로 갖는다. 이러한 체질적 특성 때문에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실체, 영원불변하는 진리,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 삶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잔인한 윤리를 신봉하게 되었다고 니체는 진단했다. 니체는 자신이 다른 철학자들과 다른 체질을 가진 외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듯이 철학자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태도는 내부인이 될 수 없었던 외부인의 원망, 혹은 외부인으로서 내부인을 설득하려는 수사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철학에 결여되어 있는 덕목들을 함양시킴으로써 철학을 개혁하는 과업을 니체 스스로 떠맡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철학자들에게 역사적 감각이 결여되었다고 비난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니체가 기획한 “미래의 철학”은 니체가 비판한 과거 철학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니체 철학에서 “역사적 감각”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적 감각에 대한 니체의 태도는 단순하지 않다. 니체가 역사적 감각을 긍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역사적 감각과 역사학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진 않았다. 니체는 누구보다도 역사적 감각이 야기하는 폐해를 경고하였고, 역사학 연구들이 잘못 진행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이처럼 니체에게 있어 역사적 감각은 진정한 철학, 미래의 철학을 위해 필수적이면서도, 비판될 필요가 있고, 극복해야만 할 폐해를 유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니체의 전통적인 철학에 대한 비판과 니체가 기획한 “미래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감각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험성을 주목하고, 니체가 어떤 이유에서 그것을 긍정하고 어떤 이유에서 그것을 부정하는지 잘 파악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니체 철학에서 “역사”가 갖는 양가적 중요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제출된 논문은 이러한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다.

2.“역사의 시대” 19세기의 위기
니체에 따르면 역사의 본질은 변화이다. 역사적 감각은 역사 속 변화들을 수집하고, 그러한 변화들을 비추어 자신과 사물들의 변화를 인식하고, 상상하고, 실천하는 일을 즐기는 취향을 의미한다. 역사적 감각은 그렇기에 형이상학적 실체, 영원불변하는 진리라는 환상에 대한 치료제일 수 있다. 역사적 감각을 가진 이에게 “변화하지 않는 것”은 믿을 수도, 즐길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감각은 소극적으로만 이점을 갖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잠재적인 변화를 포착하고, 현실적으로 이득이 될 만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 또한 역사적 감각 덕분에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 감각은 변화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덕목인 것이다. 역사적 감각이 결여된 이들은 시대의 변화를 따를 수도, 시대의 변화를 주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19세기가 “역사의 시대”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 시대를 극복해야만 한다고 진단한다. 역사적 감각은 19세기의 미덕인 동시에, “역사병”이라는 시대의 위기를 일으킨 원인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변화와 생성을 중시한 철학자였지만, 변화와 생성을 긍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를 변화와 생성으로만 인식할 경우 행위는 불가능해지며, “위대함” 또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19세기의 진정한 문제는 변화와 생성만을 쫓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 감각이 고양된 덕분에 종교와 형이상학이 몰락하였다. 이는 물론 위대한 진보였다. 하지만 종교와 형이상학이 몰락하면서 폐해 또한 발생하고 있다. 유행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 도덕과 정신 또한 유행에 불과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덕과 정신은 유행으로 전락하자 “위대함” 또한 망실되었다. 변화하는 것이 본질인 역사 속에서 불멸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하기에, 위대한 것을 쫓는 일은 조롱받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는 기껏해야 유행의 변화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정신”이 추앙받는다. 니체는 이것을 “속물 교양”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문명의 척도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는 인간들을 평준화하고, 인간들의 개성을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계발하여 개성을 꽃피우는 “진정한 인간다움”을 훼손시킨다. 그렇기에 역사적 감각은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3.역사의 과잉 혹은 지식의 과잉 - 젊은이들의 조로와 평준화
니체에 따르면 역사적 감각은 학문의 부흥에 따른 결과였다. 학문의 부흥으로 인한 지식의 과잉이 곧 역사의 과잉이며, 역사적 감각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으로 인해 단편적인 지식들이 범람함에 따라, 그 어떤 위대한 학자도 모든 지식들을 통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팽창하는 지식들을 통괄하는 것을 포기하고,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소한” 지식들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학문을 추구하는 목적, 학문을 통해 성취한 지식의 의의에 학자들이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그러한 무관심이 학문의 조건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교육을 망가뜨리고 문화를 몰락시키는 원흉이다. 위대한 것을 추구하려는 젊은이들의 야망을,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어리석음으로 폄훼하며,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백과사전적 지식을 함양하길 요구하게 된 현상황의 근거가 바로 저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오류일지라도, 목적을 갖고 특정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백과사전적인 지식들은 그러한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위대한 일을 향한 투쟁 의욕을 좌절시킨다. 전인교육을 표방하며 파편적인 지식들을 암기하는 것에만 열중하게 만드는 일은, 그렇기에 젊은이들을 애늙은이로 만드는 가장 잔인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니체는 19세기의 진정한 폐해는 바로 이것, 역사와 지식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젊은이들의 조로라고 진단한다.
학문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폐해를 극복할 수 없다고 니체는 진단하였다. 학문을 부정하는 것은, 학문 이전, 종교와 형이상학으로 퇴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학문은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에, 이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학문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학문의 힘을 제압할 수도 없다. 학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학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학문이 종교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종교를 극복한 것처럼, 자기극복을 통해서 학문을 지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극복을 통해 지양된 학문을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라고 말한다. 학문은 “즐거운 학문”이 될 수 있고, “즐거운 학문”만이 학문으로부터 야기된 시대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학문이 지양되기 위해서는 모순을 품고 있어야한다. 니체에 따르면 맹목적인 진리를 향한 의지에 의해 학문에 모순이 생겨난다. 학문은 진리를 향한 의지를 쫓는다. 그런데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 또한 진리를 향한 의지로 검토될 때에만 진리를 향한 의지는 완성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학문은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를 진리를 향한 의지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현재의 학문은 모순적이다. 니체에 따르면 진리를 향한 의지를 진리를 향한 의지를 통해 검토할 경우, 진리를 향한 의지 또한 힘을 향한 의지의 일종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진리를 향한 의지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진리를 향한 의지가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깨달음은, 19세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학문을 기획하고, 새로운 학문이 수행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4.니체의 역사철학 및 역사학 비판
“학문은 그 자체로는 목적일 수 없다. 학문은 수단, 도구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 것이나 학문의 목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니체에 따르면 당대에도 목적을 부여하는 조류들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문제적이기에 대안이 필요하다. 학문에 목적을 부여하는 조류로 니체는 헤겔주의적인 이념적 역사철학과 진화론을 거론한다. 이념적 역사철학은 비판적인 사변철학을 통해 “역사 진행의 법칙”이라는 이념을 직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 진행의 법칙”은 “역사의 배후”에 설 수 있을 때에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역사를 초월한 관점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니체는 이념적 역사철학이 제공하는 관점이 아무리 철학적으로 정교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특정한 시대에 형성된 특수한 관점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철학적으로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세련된 관점으로 “역사 진행의 법칙”을 주장하지 않고, “역사의 배후”에 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 이념적 역사철학은 과거의 종교와 형이상학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역사의 배후”에 서는 일은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념적 역사철학은 문제적이다.
진화론은 이념적인 합목적성을 부정하고, 자연과학적으로 합당할 수 있는 기능적 합목적성만을 수용한다. 진화론은 과학적인 기능적 합목적성에 근거하여 “적응도”를 목적으로 내세운다. 니체에 따르면 이 또한 문제적이다. 인간, 심지어는 자연은 적응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적응도는 역사에 의존적이기에 고정된 법칙으로 여겨질 수 없다. 특정한 종의 탄생에 기여한 적응이, 해당 종의 지속에 유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적응은 역사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도 또한 그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법칙으로 제시될 수 있을 적응도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화론은 종교나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하지만 변천하지 않는 것을 파악하려고 했기에 그것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니체는 역사적 감각을 갖춘 학문, “역사적 정신”을 발휘하는 학문만이 현대의 학문에 부합할 수 있고, 현대의 학문에 목적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5.니체의 역사학적 철학
니체의 철학은 역사적 감각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이념적 역사철학이나 진화론과 차별성을 갖는다. 니체는 역사의 변화를 인식하기에 이념적인 역사 진행의 법칙이나, 진화론적인 법칙적인 기능적 합목적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있어 이념과 법칙은 역사의 대상도, 철학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런데 니체 또한 역사의 변화 속에서 불변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역사 탐구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이상”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상은 인간들의 환상이다. 물론 니체의 이상은 역사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의 지속성은 이념과 법칙을 불변성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행위하는 것이 가치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상징을 통해 상상할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들이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수집하고, 선택하고, 배치하며 상상해낸 환상이 바로 이상이다. 이러한 이상들은 상징이기에 역사의 변화 속에서도 지속성을 발휘할 수 있다. 욕망과 환상의 동형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효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상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신들의 행위 근거를 고정시키는 준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니체의 이상은 이념이나 법칙과 구별될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들이 이상을 통해 형성시킨 고정점이 곧 “역사서술”이다. 인간은 자신을 과거로부터 형성된 존재로서 인식하며, 과거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이에 근거하여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역사서술은 이러한 활동의 조건이자 근거를 제공한다. 때문에 서술된 역사가 인간 활동의 고정점이 된다. 니체의 “이상”은 그렇기에 역사서술 속에서만 발견된다. 단순히 공상을 통해 꾸며낸 환상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이해 속에서 구축된 구체적인 환상이며, 구체적인 물질적 증거들에 기초한 환상인 것이다. 니체의 이상은 증거에 기초하고 있기에 학문적일 수 있고,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니체의 이상은 학문적이고 객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것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은 이념도 법칙도 아니다. 때문에 그것들을 다시 선택하고, 재배치하는 것이 가능하다. 역사탐구를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이상들을 수집할 수 있고, 역사서술을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이상들을 선택하고, 재배치하여 확립해낼 수 있다. 즉,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역사와 역사서술의 본질이기도 하다. 역사가 변천하듯이, 인간들의 욕망과 환상 또한 변천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새로운 이상을 추구할 수 있고, 새로운 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쓰는 것만큼, 역사를 다시 쓰는 것 또한 가능한 것이다. 역사를 다시는 쓰는 능력, 니체의 반시대적 철학은 인간의 이러한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이상은 그 자체로는 환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주목하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과거”로 받아들임으로써 지속성이 부여된 “시대”로서 지배력을 갖고, “미래”가 통제된다. 하지만 이상은 “인간적인 것”이기에 변화할 수 있다. 역사의 변화에 따라 인간들의 욕망과 환상도 변화하고, 이상 또한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인간적인 것”이기에 목적을 제공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변화하기에 규정될 수 없음에도, 다수의 인간들이 품고 있는 욕망과 희망이 이상에 담겨 있기에 공통의 준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인간적인 것”이기에 학문적일 수 있다. 이상은 인간동형론적인 투사project를 통해 인간이 꾸며내는 것이기에, “사물 그 자체”와 달리 인식될 수 있고, 증거를 기반으로 객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상은 “인간적인 것”이기에 반시대적일 수 있다. 이상을 새로 제작함으로써 우리의 욕망과 희망을 재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역사를 통해 “이상”을 새로 제작할 때, 역사는 재구성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재구성될 때, 시대는 극복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다.

6.결론
니체에게 있어 역사는 시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니체에 따르면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실천이며, 종교나 형이상학의 망상과 구별될 수 있는 인간이 실제로 수행 가능한 철학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역사를 쓸 뿐만 아니라,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존재다. 역사를 재서술함으로써 인간은 “역사”, “시대”,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규정된 “인간다움”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니체에게 있어 진정으로 인간적인 실천은 그렇기에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철학 또한 니체에게 있어서는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어야만 했다. 그럴 때에만 인간적일 수 있고, 반시대적일 수 있고, 진정으로 철학적일 수 있다.
니체 철학은 그렇기에 “역사학적 철학”이다. 그리고 이를 고려할 때 니체의 시기에 따르면 변화와 모순들이 해소될 수 있다. 역사를 비판한 초기의 『반시대적 고찰』에서부터, 자신의 역사학을 제시한 후기의 『도덕의 계보학』에 이르기까지, 니체는 줄곧 “역사적 감각”을 강조하고, 비판하였으며, “역사학적 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니체는 줄곧 그것이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이상을 탐구하는 것이며, 역사를 재서술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발전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철학은 확고한 것이고, 확고한 것은 처음부터 함께 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니체의 철학을 “역사학적 철학”으로 이해할 때에만 니체의 확고한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제출된 논문의 핵심 주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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