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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공포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제가 얼마 전에 역사학과의 투쟁에 대해서 언급했었는데, 그것에 대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칼비노를 읽다가 재미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칼비노는 레몽 크노를 말하기 위해 전쟁 시기 프랑스에서 “헤겔”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얘기해줍니다.

우리에게 헤겔은 “역사철학”이고, “역사 발전의 법칙”, “역사의 진보”입니다.

하지만 전쟁 시기 “괄호쳐진”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헤겔은 역사 종말의 예언자였습니다.

헤겔은 역사의 종말을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헤겔은 그 역사의 종말 이후를 얘기한 적이 없죠.

그럼에도 전쟁 시기 프랑스 지식인들은 헤겔을 통해 역사의 종말 이후를 상상했습니다.

역사의 종말로 역사가 끝난다면, 필연성의 시대는 끝이 나고, 부정성(들)의 축제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말이죠.(바타유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와 헤겔주의를 결합시켜 해석했고, 영원할 것만 같은 암흑의 시대 이후를 상상하며 시대를 견뎌냈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해석입니다.

칼비노는 이탈리아인들이나 독일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헤겔일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죠.(칼비노는 진짜 진국입니다... 긴즈부르그가 왜 빠는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글을 정말 잘 씁니다. 또한 정신이 살아 있죠. 천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칼비노가 지적하듯이 이는 프랑스에 헤겔철학을 소개한 코제브와 영지주의와 마니교 연구자 푸에슈 아래에서 공부를 한 프랑스 지성인들에게 익숙한 테마였습니다.

단순히 가능한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들에게는 둘의 결합이 허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이죠.

 

제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역사에 대한 공포를 소개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전 기본적으로 독일 쪽 사상에 좀 더 익숙한 편이고, 당연히도 “역사의 종말”은 즐거운 예언이 아닙니다. 세계 멸망 같은 것이죠.

역사는 곧 인간세계고, 역사의 종말은 인간의 종말과 같습니다.

때문에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종말”이 저에겐 공포의 대상입니다.

반면 프랑스인들에게는 반대로 “역사”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역사의 종말”은 희망의 빛이었죠.

이런 이해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먼저 설명해야할 것은 “역사주의”입니다.

문제는 “역사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역사주의”는 “역사에 대한 중요성 인식”, “역사에 대한 진지한 연구” 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를 중시한 인물들 모두에게 ‘역사주의’란 이름표를 붙이고 헤매고 있죠.

“역사주의자들”을 살펴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거든요.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거나,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공통성만 발견됩니다.(특히 후자가 문제입니다. 차라리 전자는 말이나 되죠. 레비스트로스가 토테미즘 관련해서 토테미즘의 의의를 전부 부정한 연구가 결국 승리했다고 찬양—사실은 조롱—하는 것처럼 말이죠)

역사주의를 헤르더로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헤르더 이전에도 “헤르더적” 기획은 있거든요.(얼마 전에 제가 공유한 뫼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으로 소급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위-디오니시오스로,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소급할 겁니다.(그러다가 유대교 전통으로 소급하겠죠)

역사주의는 당연히도 19세기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역사주의”란 표현을 역사학 연구가 먼저 쓴 것은 또 아닙니다.

사비니가 먼저 썼죠.(정확히 말하자면 베를린 대학 자체가 “역사주의”였습니다. 사비니는 그 중 하나인 것이죠. 물론 사비니가 최고였지만요)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주의로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적어도 사비니는 아닙니다. 사비니와 ‘역사주의’를 제창한 관방학자나 국가학자는 더욱 아닐 거고요.

아마도 사람들은 랑케를 떠올릴 겁니다.

그런데 랑케는 왜 “역사주의”인가요?

이 물음에 답해야합니다.

 

많은 경우 “역사주의”의 대표자로 랑케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랑케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역사주의인지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랑케는 실증사학의 창시자죠. 하지만 실증사학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프턴은 엄청나게 현란하게 두들겨 패며 보여주듯, 실증사학은 이전에 확립된 거였습니다.

17세기 수도회의 역사편찬으로 소급하기 싫어도, 18세기 영국의 역사학자들로 소급하기 싫어도, 적어도 니부어로 소급해야할 무엇인가죠.(게다가 ‘실증’이란 단어는 문제적입니다. ‘실증’은 콩트 냄새가 많이 나는데, 콩트랑 랑케는 상극입니다)

니부어랑 랑케는 무엇이 다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헛소리를 시작합니다.

단어들을 결합해서 랑케가 우월하다는 것이죠.

근거도 없고 내용도 없습니다. 니부어를 누가 읽겠어요. 그러니 되는대로 랑케의 혁신을 얘기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니부어와 랑케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고, 여기서 “역사주의”의 종차가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랑케는 니부어가 자질구레한 연구를 수행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물론 니부어는 자질구레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로마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일 또한 자질구레할 수 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니부어에게 역사는 자질구레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파악 가능한 것은 “역사철학”으로 말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란 통찰이 니부어 역사학의 본질이었으니까요.

니부어에게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 그런 환상들, 그런 오만들, 그런 위선들, 그런 광신들, 그런 억압들, 그런 지배들, 그런 폭정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기술인 것이죠.

자연과학은 일반적이고 역사과학은 개별적이라고들 떠들고는 했죠.

니부어에게 둘은 차이가 없습니다. 일반적이건 개별적이건 그런 짓에 목숨 거는 짓은 광신이니까요.

니부어의 “자질구레함”은 그래서 무의미한, 통찰력이 없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사소한 자질구레함이 아닙니다.

모두가 숭상한 것들을 깨부수는 자질구레함이었죠.

 

랑케는 니부어를 비판하고 극복하려 합니다.

랑케가 니부어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취해야할 개념은 총체였습니다.

역사가 본질적으로 자질구레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랑케는 헤겔주의적인 전 인류적 총체성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적인 통일성이자, 시대적 통일성으로 총체성을 말하려고 했죠.

즉 특정 민족의 특정 시대의 통일성에 기반한 총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정 민족의 특정 시대의 통일성의 경계는 무엇일 수 있을까요?

이게 핵심입니다.

이전 시대에도 총체성 건립이 말해지곤 했죠.

대표적인 게 볼테르입니다.

볼테르는 루이 14세의 “시대”를 다뤘습니다.

볼테르의 “시대”는 루이 14세의 탄생으로 시작하지도 않고, 그의 즉위로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또한 정치사들로 채워져 있지도 않습니다.

문학가들로 채워져 있고,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채워져 있죠.

볼테르의 “시대”는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시간적인 범위가 아니었습니다.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조직화하는 힘을 통해서 총체성이 확보되는, 특유성이 있는 범위죠.

그러니 인류의 전 시기가 시대를 갖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류사에 “시대”는 단 네 시기 뿐입니다. 그 외에는 시대란 것이 없습니다.

그 외의 시기에는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조직화하는 힘을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볼테르는 저 힘, 그리고 시대의 총체성과 개별성을 담지할 무엇으로 “천재génie”, 혹은 “양식”을 말합니다.

문제는 저게 도대체 무엇이냐는 거겠죠.

볼테르는 <영국인에 대한 서한>에서 관련된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저 방문객에 불과한 자신이 사소한 일화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 “영국” 혹은 “영국인”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하면서요.

볼테르는 “모순들 contrariétés”을, “여러 요인이 영국인들의 정신에 형성하는 모순들ces contrariétés que les éléments forment dans les esprits des Anglais”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방법도 말하지 않죠.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모순이 어떻게 통일성을 가능케 하고, 심지어 총체를 달성할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파악 가능하고, 하여간 자신이 내놓은 “총체”, 자신이 규정한 “시대”가 옳다는 것이죠.

 

랑케는 물론 저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랑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랑케 또한 갈등(“모순”에 해당)과 총람(이건 전부 수집해서 나열하는 것을 말합니다)을 말하죠.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단독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대립 속에서 존립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 어떤 개별적인 것도 그 자체로 존립하지 않고, 시대 속에서 존립한다는 것이 그 근거죠.

랑케는 개별적인 것들을 파편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지 역사의 한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편견들이 반영되어 있는 기록들로부터 사태 그 자체들을 복원해내고(이런 “사태”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대의 사료의 경우 편견 자체가 “사태”거든요), 그것들을 총람 가능하게 배열해낸다면, 분명 총체가 드러날 것이라는 게 랑케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여기서 랑케는 신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건 실정 종교적인 호소가 아닙니다.(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이런 호소는 무신론자들이 더 자주합니다)

이를 담보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에, 역사가들이 건립해내고서야 존립할 수 있는 것이기에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만 랑케는 여기서 통일성을 얘기하진 않았습니다.

통일성을 부여할 “천재”나 “양식” 따위는 역사에 드무니까요.

랑케는 통일성은 부재할 지라도, 긴장들 속에서 어느 정도의 “차이들”이 작동하기에, “민족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차이들”을 통해서 상호작용을 하며 “사건들”을 야기시키며, 무엇인가를 변화시킨다고, “시기들”로 부를 또 다른 “차이들”을 발생시킨다고, 그러니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진행”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랑케의 “총체성”이었습니다.

 

랑케의 호소는 종교적이고, 낭만적입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호소했고요.

이걸 학문화한 게 드로이젠입니다.

드로이젠은 “역사철학”으로 돌아갑니다.

저런 총체화 가능성을 규범화하고, 인류사적인 진행으로 말하죠.

이게 말이 안 되고, 랑케가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런 겁니다.

디드로의 미학론이 칸트의 미학론보다 오늘날에는 더 설득력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당대에는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결정적인 답이 없는 건 설득력을 가질 수 없거든요.

드로이젠은 역사세계의 건립을 말할 수 있는 구성요건을 토대로, “역사”의 “진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변화를 형식화하였습니다.

그러니 역사의 진행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는 게 됩니다.

이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로서 그런 것이죠.

역사가 실제로 필연적으로 진행하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어차피 역사의 진행의 시점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은 의미도 없거든요.

구체적인 혁명의 날짜를 말하는 것은 예언자이지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또한 그런 “우연들”을 무시하는 것은 매우 멍청한 일이고요.

하지만 적어도 역사학자가 기록해야만 할, 그리고 탐구해야만 할 “변화”는 한정적이고, 이 한정성에 의해 “필연성”이 말해지는 겁니다.(참고로 이걸 이해하는 역사학의 역사학자들이 거의 없더군요... 이럴 때보면 철학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드로이젠에 의해서 “역사”는 “연속적인 것”이 됩니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테제는 역사에도 성립하는 것이죠.(실제로 드로이젠은 다윈을 참고하여 자신의 방법론을 정교화했습니다)

이게 바로 “역사주의”입니다.

 

이런 “역사주의”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당장 니체만 해도 여기에 방방 뛰고 있었던 것이고요.(니체에게 역사는 언제나 도약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그러하듯이!)

다만 여기에 또 +a할 것들이 있습니다.

드로이젠의 역사주의는 그래도 매우 인간적입니다.

환상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휴머니즘에 기초하고 있거든요.

근데 저런 진행의 틀을 가지고 드로이젠의 휴머니즘적 역사주의만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다른 것들이 역사의 진행을 담지할 인간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죠.

예컨대 “기술”, “자본” 같은 것이 말이죠.

이런 상황이 되면, 역사주의는 단순히 갑갑한 것 이상이 됩니다.

영원의 족쇄 같은 것이 되니까요.

“시대로부터의 탈출”이 괜히 주창된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너도 떨어지는 모래알 같은 존재에 불과하니 시대의 바퀴가 되거나, 시대의 바퀴에 깔리라는 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요.(여기서 깔리는 것은 단순 뒤지라는 얘기가 아니라, 마찰력으로 진행시키는 밑거름이 되라는 소리기도 합니다. 꼬우면 뒤져라. 그게 시대의 밑거름이 된다는 건 알아두라는 식의 최악의 조롱이죠)

뭐 그럼에도 다다이즘이 망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프랑스 지성인들에게 독일의 “역사주의”와 비슷한 것으로 느껴졌던 것은 브로델의 “장기지속”이었습니다.

장기지속을 통해서 보았을 때 도대체 인간은 무엇이냐는 절망에 빠지게 된 거죠.

시대의 변천은 긍정하지만(브로델의 첫 저작은 펠리페 2세 “시대”를 다룹니다. 정확히는 바로 그 시대의 발흥을 다르죠), 도대체 그러한 진행에 인간이 지푸라기 인형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 하니까요.

그러니 저기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겁니다.

시대나 구조에서 벗어난 것들을 역사학자들이 찾아내려고 한 것도 저런 “장기지속”으로부터의 탈피를 위한 것이었죠.

민중들의 정신세계는 중요하죠. 긴즈부르그의 작품이 “역사적 의의”(“역사학적 의의”가 아니라, “역사적 의의”)가 없다고 누군가가 말하면 전 방방 뛰면서 죽일 듯이 싸울 거거든요.

근데 긴즈부르그의 작품은 그냥 시대와 구조로부터 벗어나 있는 한 농부의 정신세계를 알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코르뱅은 그런 작업을 실험했더군요.(<교차> 3호에 실린 민철 샘의 글을 참고)

당연히 실패했고, 당연히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알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오히려 뭐라도 얘기해보려고 코르뱅이 동원한 것은 모두 시대와 구조였고, 오히려 개인이란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실패했습니다.(코르뱅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혁명”의 “사건들”과 무관하게 산 사람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대”와 “구조”는 정치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코르뱅은 정치사적 시대에서 사회사적 시대로 이동하게 된 겁니다. 코르뱅은 또한 대단한 학자라 이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절절하게 느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장기지속으로부터 탈출은 무의미하거나, 현존한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무의미해 의심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브로델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가 정말로 인간을 소멸시키는 저작이었나요?

당연히 아닙니다.

브로델은 저 책을 포로수용소에서 적었습니다.

도대체 포로수용소에서 저 두꺼운 박사논문을 왜 썼을까요?

심심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담겨 있죠.

브로델은 블로크와 함께 “독일의 영토”였던 알자스 로렌 지역을 정신적으로 수복하기 위해 파견된 학자였습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아무나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프랑스 만세”에 학생들이 눈물을 흘렸지만, 현실은 다를 수 있죠. 

이미 독일인이 된 사람들을 프랑스인이 될 수 있게, 그들의 정신을 프랑스의 정신으로 유혹하기 위해 신진학자들이 선별되어 파견된 것이었습니다.(페브르 말마따나 둘이 왜 보내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둘이 단연 최고였으니까요)

그런 양반이 포로수용소에서 박논을 쓴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킬링 타임도 아니고, 학위를 받기 위한 형식적인 활동도 아니었죠.

블로크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도대체 “역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물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 죽음의 경계에서 <역사를 위한 변명>를 쓴 것처럼, 브로델은 <지중해>를 쓴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 것도 모르는 봉인된 삶 속에서 그 어떤 결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역사”를 남기기 위해서 쓴 것이었죠.

 

브로델의 장기지속은 매우 비인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브로델의 작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적인 작품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원래 비인간적입니다.

이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배신이죠.

브로델은 인간이 정말로 지푸라기 인형처럼 보이는 흐름 속에서도 인간을 말하는 책을 쓴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개인의 눈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비인간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사소해보이는 인간들의 사건들에 의해 지탱되고 진행된다고, 이슬람의 시대가 끝나고, 유럽의 시대가 시작한 것처럼, 누구 하나가 예언하고, 누구 하나가 역사의 축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시대가 변화하는 것이라고... 결국 우리가 겪고 있는 영원할 것만 같은 이 암흑의 시대도 끝날 것이라고, 이 순간에도 이 시대를 바꾸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위대한 장군이나 위대한 정치인, 위대한 대왕은 우리에게 없지만, 사실 역사는 그런 위대한 이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흐르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절망할 이유는 없다고, 희망을 가지라고 브로델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역사”이자, “역사학”이라고요.

 

다다이즘은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대로부터의 탈출”을 염원하는 것은 정상이죠.

하지만 힘없는 저항으론 시대로부터 탈출할 수도, 자신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다큐먼터리”는 다다이즘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서사 저널리즘 등을 말하면서 효과만 좋다면 “다큐먼터리”를 통해 거짓말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맨 처음 다큐먼터리가 제시된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연의 자기서술”로서의 사진은 이미 끝났죠.

그들은 사진이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사진도 결국 연출이고, 조작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사진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정직함을 통해서 진실을 포착해낼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의 정직함을 통해서만 시대는 극복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거짓을 말한다면 잠깐은 편할 수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실망하고, 자신들의 탐사를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자신들이 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든 발견하지 못하든, 그것이 불가능하든 불가능하지 않든, 그들은 진실만을 말해야만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죠.

브로델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을 말해서 뭔 소용인가요.

적당한 허상으로는 결국 나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잠깐은 도움이 될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은 군인들에게 투여되는 각성제보다 못할 겁니다.

결국 진실을 통해서만 설득해야하고, 진실을 통해서만 극복해야합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인 것이죠.

 

브로델은 맞는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브로델의 장기지속은 의도를 배제해도 그렇게 갑갑한 것은 아닙니다.

브로델은 특정한 장기지속이 얼마나 실효적인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서 열어두었고, 중층결정의 미묘함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당연히 시대와 동떨어진 이들이 있죠.

하지만 그들로 시대의 극복을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제가 니체를 통해서 보이려했듯이,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시대 내부로부터의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시대적이기 위해서는 시대 내부의 중층성을 잘 파악하고, 섬세하게 해부하고, 영악하게 전략을 짜야합니다.

장기지속은 시대와의 투쟁에 동원되어야할 개념이란 것이죠.

무엇에 어느 정도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지를 포착하는 기술이자, 그것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뭐 프랑스 놈들이 이걸 왜 잘 이해못했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음모론에 빠져 소련의 지침을 받는 이들의 애국자들에 대한 중상모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실제로 소련의 스파이가 많았죠. 전 지금도 주체가 달라졌을 뿐, 그런 공작활동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너무 진지하게 대적하려 하면 우스워보일 수 있어서 대놓고 공략하지 않는 것뿐이죠)

하여간 외부인으로서는 그냥 잘 활용하면 됩니다.

샹뱌오도 역사에 대한 자신의 비방은 실수였다고, 장기지속 짱짱을 외치더군요.

이게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오히려 복잡한,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대/사회/세계/역사 속에서 방향을 잡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랜드마크들이니까요.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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