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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니체는 도덕과 함께 인류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내딛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사시대는 무엇인가? 모두가 알고 있다. 선사시대는 역사시대 이전의 시기를 의미한다: 인류가 출현하고, 역사시기에 진입하기 이전 시기를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선사시대라는 개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에는 "시대"라는 자연적 마디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 아니라 역사가 시대를 만드는 것이다. 선사시대 또한 다른 시대들처럼 역사 속에서 시대로 규정되며 출현했다. 그런데 선사시대라는 개념은 놀랍게도 19세기 중반이 넘어서야 등장했다. 그리고 선사시대라는 개념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선사시대는 놀라운 개념이었고, 논쟁적인 개념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만 같은 “선사시대”라는 개념은 놀라운 개념이었다; 이러한 놀라움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의 이행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니체가 도덕의 탄생을 그 이행으로 여긴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시대”가 무엇인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다.  

“역사”는 “과거 사실들의 총체” 따위를 의미하지 않았다. ‘역사’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는 탐문 및 심문을 의미했다. 히스토리아는 신적인 직관과 구별된다. 진정한 진리, 확고불변하는 진리는 히스토리아를 통해 얻을 수 없다. 히스토리아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수행해야만하는 인간적인 인식의 방법을 의미했다. 신들은 언제 어디에나 자리할 수 있다. 신들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신들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두 눈 앞에 둘 수 있기에 신들은 진정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멸자 인간은 언제나 있을 수 없고, 어디에나 있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이 가르쳐주는 진리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또한 분명히 인식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진리는 아닐지라도, 신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인간 또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간이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다면, 신들이 가르쳐주는 것들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 또한 인식한다. 경험을 통해 배움으로써. 

인간은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제한적이다. 신들과 달리 인간은 필멸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영원함과 공간의 광활함에 의해 인간의 한계가 결정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무한 앞에 유한은 무한히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조금 더 넓힐 수는 있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더 많은 경험을 쌓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복이다.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구전되는 증언들과 과거의 기록들을 확인해야 한다.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발로 뛰며 조사해야 한다. 그렇게 “경험들”이 모아져야한다. 하지만 증언들과 기록들이 가르쳐주는 “경험들”을 모은다고 해서 앎을 가질 수는 없다. 수집된 증언들과 기록들에는 문제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믿지 못할 이야기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 서로 모순되는 증언들, 다른 기록들과 충돌하는 기록들,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기록들……. 경험들은 그 자체로는 지식일 수 없다. 그것은 시장판의 소문과 다르지 않다. 경험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체계를 부여해야한다.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 때, 그 때 경험은 지식이 된다. “역사”는 과거 사실들 그 자체도, 과거 사실들을 기록한 문서 따위도 아니다. 역사는 체계적으로 경험들을 탐문하고, 수집하고, 조사하고, 기록하고, 비교하는, 체계적으로 관찰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관찰들을 심문하는, 탐구 활동이었다. 그렇기에 문헌학자 브루노 스넬은 역사가 곧 경험과학이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역사시대”라는 것은 역사 탐구를 통해 조사 가능한 시대였다. 역사 이전은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거나, 탐구 불가능한 시대였다. 그 시대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지라도 매우 짧을 것이라고 생각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선사시대”라는 개념이 출현했다. 선사시대라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증언과 기록이 아닌 것들을 증언과 기록처럼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역사는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한 탐구활동이다. 역사시대는 그렇기에 증언과 기록이 존재할 수 있는 시점, 문자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정의상 선사시대에는 참조할 수 있는 증언과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선사시대를 개념화하고, 탐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증언과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체계적인 경험적 탐구가 가능해야만 한다. 본격적인 “선사시대” 연구는 물론 19세기 중반이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유사한 역사 탐구가 수행되었고, 그 덕분에 선사시대 연구는 학문이 될 수 있었다. 선사시대 연구의 기원이 되는 “역사”, 증언과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떻게 “역사”일 수 있었을까? 중요한 물음이 하나 더 남았다. 그것은 도대체 왜 등장한 것이었을까?

증언과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 “역사” 하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바로 그것이다. 루소는 본인의 탐구를 위해서는 역사의 보고報告들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44) 루소의 탐구 대상은 사회 속 인간이 아니라 자연 속 인간이다. 그런데 역사의 보고는 사회 속 인간이 남긴 것이기에 사회의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때문에 자연적인 인간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사회의 편견을 갖지 않은 인간을 탐구해야한다. 루소에 따르면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루소는 그것을 가설적으로, 이론적으로 추측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루소가 그것을 굳이 탐구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루소에 따르면 사회는 특정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는 규범적인 힘을 발휘하는 믿음에 의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들은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들은 신에 의해 계시된 것이라고 주장된다. 종교적인 신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들을 자연에 기초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들은 기이하며, 본성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루소는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자연 속 인간을 탐구한다. 때문에 루소는 기존의 “역사”에서 탐구의 근거로 삼던 것들을 사용할 수 없다. 루소 본인이 그것들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루소는 자신의 탐구를 위해 새로운 방법을 도입한다. 루소는 인간이 완성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완성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덕분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믿음은 믿음에 그치지 않는다. 믿음은 정념, 생각, 행위 따위를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본성을 변화시킬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소는 사회를 가능케 하는 믿음들의 참거짓 유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믿음들을 인간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이다. 사회에 대한 믿음은 매우 특이한 정념과, 생각과 행위를 산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연적인 본성에 부합해보이지도 않고, 심지어는 자연적인 본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히 어떤 인간이 그러한 믿음을 갖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해보는 것과 확신하는 것은 다르다. 루소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그러한 기이한 믿음들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루소는 이를 정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지성, 다시 말해, 모호한 의식의 대상들을 구체화하고 구별가능하게 분류하여 특정한 것들을 포괄하는 개념이 되게 만드는 능력은 전제하지 않는다. 루소는 의식의 대상들은 모호한 채로 둔다. 루소는 그러한 수준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특정한 자극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특히 그들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고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루소는 그것들을 탐구하면 인간들이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인간이 가진 완성가능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단순히 상상 속 자연인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자극과 반응들 사이에서 인간의 의식들에 떠오르는 대상들이 어떻게 생각이 되고, 말이 되고, 논리가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소는 역사를 이러한 믿음들의 변천으로 이해했다. 그러한 믿음들이 삶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루소는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를 정념과 믿음에 대한 분석 속에서 통일한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단절은 있다. 신체적인 반응, 본성에 의한 충동이 아니라, 특정한 믿음, 확신, 결심, 의지가 인간과 인간들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니체 또한 루소의 이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루소의 ‘완성가능성’을 니체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동물’라고 표현한다.(<선악> 144.) 이는 믿음 덕분에 가능해진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탄생의 행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다르지 않다. 즉,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들에 행위들은 체계적으로 구별된다. 신체에 각인된 본능에만 반응했다면, 인간들은 비슷하지도, 그렇다고 차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덕은 인간들을 비슷하게 만듦과 동시에 차이 나게 만들었다. 한편으론 특정한 사람들에게 공통의 믿음을 주입함으로써, 그들의 정념, 그들의 생각, 그들의 행위를 통일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비슷해진 “우리”와 구별되는 “그들”을 생각하며,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그것에 기초해 자신들을 차별화한다. 이러한 차별화 덕분에 인간은 흥미로운 동물일 수 있다. 인간은 변화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역사를 이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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