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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는 속물들의 학자연함에 반하며

미독에게 보낸 편지


전 요즘 이래저래 글쓰기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최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을 읽었는데... 복잡한 심정이 들더군요.
도대체 이런 책을 좋다고 평가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일까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니체를 전공하게 된 것은 상황에 따른 필요 때문이었지만, 니체를 전공한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니체의 글은 의미가 있거든요. 반면 디디-위베르만의 글은 그런 게 없습니다. 디디-위베르만의 책은 적당함을 지킵니다. 적당히 비판적이고, 적당히 학술적이고, 적당히 인간적이죠. 그래서 정말 별 볼 일 없는 책이고,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책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잔존하는 이미지>는 바르부르크 찬가였습니다. <반딧불의 잔존>은 파솔리니 찬가고요. 누군가는 이런 작업이 중요한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는 역사학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문명과 자본주의의 폭압에 저항한 과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디디-위베르만은 한 인물을 역사학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포콕의 <마키아벨리 모멘트>는 제임스 해링턴이란 인물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콕은 제임스 해링턴의 몇몇 문장을 내놓고 “의미”를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역사가 아니거든요. 포콕은 제임스 해링턴의 중요성을 당대 맥락 속에서 확인시켰습니다. 당대 발화 맥락 속에서 제임스 해링턴의 작업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의미성과 구체적인 영향을 입증함으로써 말이죠. 맥락 없이 몇몇 문장을 가져오면 독특해보이고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저 같은 병신의 글에서도 그런 유의미해보일 문장들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역사일 수 없습니다.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죠.
 
문제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문제를 객관적인 것으로 구축해내고, 객관적으로 해결해내는 게 중요합니다. 클래식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협화음에서의 이탈을 진보라고 착각하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세 음악 중에는 불협화음을 극대화한 괴상한 음악들이 많았거든요. 고전주의 음악이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매우 정교하게 조직된 음악을 생산해내서입니다.(굳이 여기에 첨언하자면 고전주의 음악에서도 불협화음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불협화음 어쩌구하는 겁니다. 조성 음악으로부터의 탈피는 단순 협화음-불협화음 문제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견고하게 구축된 설득력 있는 음악을 깨뜨리고 대체할 힘이 있는 음악을 내놓는 게 진정으로 위대한 진보였죠. 클래식의 역사는 그렇게 쓰여졌습니다. 정말로 역사를 말하고 싶다면, 그 맥락을 먼저 밝혀내야합니다. 그 속에서 한갓 가능한 것과 진정으로 잠재적인 것들을 구별해내야 하고, 자신이 발굴하는 인물의 발화와 (동등한 의미에서 현존했던) 다른 인물들의 발화들을 비교해야합니다. 꽤나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포콕의 작업에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말이죠. 하지만 이 과업을 감내해야만 역사를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디디-위베르만은 이런 과업을 감내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책이 그 증거죠.
 
디디-위베르만의 복원은 하이데거의 니체 연구와 비슷합니다. 하이데거는 니체와 대결하기 위해서 니체가 쓰지 않은 <힘에의 의지>를 복원하였습니다. 물론 하이데거가 사용한 책은 니체의 여동생과 친한 친구에 의해서 출간된 같은 제목을 가진 책이었습니다.(사실 버전이 좀 다르긴 합니다. 증보판을 사용해서...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 전기적으로 현존하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출간하지 않았고, 니체가 출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정신붕괴 때문에 그가 출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신이 멀쩡할 때 출간을 포기해서였거든요. 하이데거는 그의 유고를 가지고서, 의도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근대 형이상학, 혹은 서양 형이상학의 정점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쓰여지지 않은 책이니 그는 마음껏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체의 문장보다 그리스어 어원에 대한 설명이 많은 책이 나온 것이고요.(사실 이런 음흉함과 별개로 하이데거의 해석은 훌륭합니다. 오류지만 의미 있는 한 형태의 오류이고, 하이데거가 의도적으로 그런 오류를 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디디-위베르만의 책도 비슷합니다. 구체적인 맥락이 없습니다. 몇몇 구절들과 그 구절들로부터 상상될 수 있는 잡다한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멍청한 사람들이나 속는 것이죠. ‘잔존물’이라는 단어를 보고서 디디-위베르만의 박식에 감탄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고고학과 인류학을 잘 안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제가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디디-위베르만은 타일러를 직접 읽지 않았고, 타일러의 잔존물 개념과 관련된 연구들을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단어가 17세기부터 사용되었고, 그것이 단순히 살아남은 무엇인가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을테니까요. 오히려 저 개념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디디-위베르만이 고고학도 인류학도 모른다는 게 너무 잘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사회사적이고 실증적인 프랑스의 미술사학계로부터 도망친 것일 테고요. <반딧불의 잔존>에서는 저런 사기가 더욱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반딧불 얘기가 나오니 디디-위베르만은 발광생물의 계통적 발생을 연구한 논문을 인용하고, 반딧불의 생태를 다룬 논문을 인용합니다. 근데 이걸 왜 인용하는 거고, 왜 저런 얘기로 책을 채우는 건가요? 당연히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얘기될 반딧불은 상징적 형태소이지 생물학적 단위체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꺼냅니다. 있어 보이려고 그러는 것이죠. 게다가 그는 있어 보이게 논문들을 인용하지만,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로 쓸 수 있는 수준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논문을 안 읽었어도 이상할 게 없죠. 지식백과를 한번 읽으면 쓸 수 있는 내용이고, 그 어떤 방향성도 지시하지 않는 내용이거든요.
 
저런 건 학문이 아닙니다. 어떤 방향도 없고, 어떤 실증도 없고, 어떤 논증도 없죠. 뜬구름 잡는 서술들이 이어질 뿐입니다. 많은 인물들이 거론되고, 많은 책들이 다뤄집니다. 하지만 <반딧불의 잔존>은,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다 바꾸고 책들의 이름을 다 바꾸어도 똑같은 책으로 남을 겁니다. 그만큼 공허한 책인 것이죠. 물론 이 책은 “실천”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한 인물의 자본주의와의 투쟁과 민중친화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에서는 단 한번도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말하려 시도되고 있지 않고, 단 한번도 민중은 누구이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떤 것일 수 있는 것이지 말하려 시도되고 있지 않습니다. 파솔리니는 민중을 흠모했죠. 하지만 파솔리니 본인조차도 그의 흠모는 환상이자 향수에 불과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건 민중친화적인 게 아니라 본인의 환상충족인 것이죠. 파솔리니도 그걸 부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본인의 시에서 자신의 이중성을 언급하고 있으니까요. 놀랍게도 디디-위베르만은 이런 걸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게 진정한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것이죠. 놀랄 노자입니다.
 
이런 문제는 앞서 언급한 클래식의 문제와 상통합니다. 파솔리니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첨예화하고, 정말로 현실의 공고함을 뚫어낼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려운 시절을 살았으니 이것은 파솔리니에 대한 비난도 아닙니다. 제가 언제나 얘기하듯이 실패는 당연한 것이거든요. 열심히 산 사람을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성공으로 포장하며 사기 치는 것은 비난할 이유가 있습니다. 파솔리니 본인도 알았을 겁니다. 자신의 작업은 미약하고, 이걸로는 다른 누구를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킬 수도 없을 것임을.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이죠. 디디-위베르만은 이런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떤 특정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파솔리니뿐인 것처럼 말하고,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말함으로써 말이죠.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쉽습니다. 당대에, 아니 19세기에도 수십수백만이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문제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인 것이죠. 이게 어려운 것이고, 수십수백만 중 누구도 해내지 못한 과업이었던 것이죠. 이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됩니다. 마치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속이면 안 됩니다. 그런 짓은 멍청한 독자들이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자신은 깨어 있고,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병신이란 착각에 말이죠. 기껏해야 한 번의 산책보다 가벼운 일을 해놓고선 피라미드를 쌓았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이게 너무한 말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오늘날 목소리 높여서 인문학을 떠드는 이들의 전형이니까요.
 
적당한 것. 적당히 학문적이고, 적당히 비판적이고, 적당히 인간적입니다. 학문적인 척하지만 그 어떤 학문적 과업도 떠맡지 않습니다. 비판적인 척하지만 그 어떤 비판적 책임도 떠맡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척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제대로 마주하려하지 않습니다. 적당한 건 위선입니다. 공손함을 말하는 치들이 상대방을 보지 않고도 그를 존중할 수 있다는 기만적인 발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이런 진술은 19세기의 길데마이스터라는 “교양 있는 속물”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신들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죠. 이게 위험한 겁니다. 핼 포스터가 <강박적 아름다움>을 쓸 때만 해도 초현실주의자들을 유의미한 예술 조류로 본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개나소나 자신들이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떠들고 있죠. 해놓으니까 비슷하거든요. 걍 무의식적으로 아무 짓거리나 해놓고선, 이게 제도와 자본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떠들 수 있게 하니 더욱 좋죠. <강박적 아름다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지금은 저 책에 반드시 보충되어야할 내용이 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달리를 배신자로 여기며 경멸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물론 포스터는 설명을 했습니다. 강조도 했죠. 하지만 그걸 제대로 안 보는 사람이 많으니 제대로 적어두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게 말이죠. 적당한 것은 배신이고 위선이고 비겁일 뿐이라는 것을 초현실주의자들이 그 누구보다 강하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는 것을. 달리는 배신자입니다. 그가 배신자인 것은 자본주의를 찬양해서가 아니고,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전향해서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비판과 무의식을 팔아먹어서입니다. 그의 그런 비판적인 태도는 ‘달리’란 상품의 특색에 불과한 것이었거든요. 제대로 싸우거나, 아니면 희생할 것을 내놓아야합니다. 남들이 자신의 작품을 비싸게 사주면 신을 내며 고급 와인을 들이키는 건 비판이 아니란 소리죠.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현대의 작가들 중 저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허영의 노예들이거든요. 그런 경멸을 보이게 적어두어야 합니다. 크고 잘 보이는 글씨로, 한 장을 할애해서 말이죠.
 
생각보다 니체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은근히 맞는 얘기만 하고, 은근히 양심 있는 놈이죠. 니체는 저런 적당함을 못 참습니다. 그러니 다비드 슈트라우스를 비판한 것이고 “교양 있는 속물들”을 비판한 것이죠. 글도 솔직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디디-위베르만처럼 되도 않는 학식을 뽐내며 글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목표는 명확하고, 그에 부합할 얘기들만을 모아두었죠. 파편적이지만, 그 글들은 다 나름의 쓸모가 있습니다. 심지어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따위의 글도 말이죠. 니체의 글들 중에는 추상적이고 뭔 소리인지 모를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 게 많죠. 확실히 선형적인, 앞으로 나아가는 글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것들도 나름 니체의 기획에 봉사합니다. 저 구절로 요상한 해석을 하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염두에 두고 저걸 쓴 겁니다.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글들에 봉사할 수 있는 경구 같은 것으로 말이죠.(좌우명이든 속담이든 하여간 살다가 한번씩 마음에 품을 구절로 봉사하길 바라며 썼단 뜻입니다.) 추상적인 글들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공통의 경험을 부여하는 것은 힘든 일이죠. 그럴 때는 추상, 심지어는 내용이 결여된, 그 자체의 형식으로만 말을 건내는 문장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언어의 기원으로 여겨진 흥얼거림처럼, 혹은 상형문자처럼 그 자체로 구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문장들을 건내려고 한 것이죠. 나름의 이유가 있고, 나름 그의 목표에 잘 봉사합니다. 쓸모없는 얘기가 없고, 솔직하죠. 바그너를 비난하며 비제를 찬양하는 자신의 말이 악의적인 비방인 것은 맞지만,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진실이 있으니 너무 뭐라고 하진 말라고 말하고, “바그너는 혐오스러운 인간이지만,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은 다른 음악을 들어줄 수 없게 된다.”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말이죠. 꽤나 솔직하고 꽤나 양심적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이 성취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것만은 기억해달라고 요청하거든요. 니체는 “말할 이유가 있는 것만을 말하라”라는 자신의 규범을 잘 따랐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말할 것. 그럼에도 언제나 특별한 것을 말할 것”이라는 규범도 지키려고 했고요. 실증은 많이 포기했지만, 그 약점을 잘 인정했습니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것과 니체가 말하는 것을 그래서 열심히 구별하곤 했고요.(사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면서, 다시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이 규범은 출판하지 않아서인지 지키지 않더군요ㅋㅋㅋ) 단순하게 특별한 것을 말했고, 쓸데없는 걸로 허풍 떨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븅신 같지만, 그래도 다 이유가 있고 의식적으로 선택한 광대짓이었고, 변죽을 울리며 교양 있는 척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죠. 그의 글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솔직함과 진정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 양식style을 제공했던 덕분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려면 이렇게 말해야했던 것이죠.(물론 이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하이데거가 지적하듯이 니체와 나치는 완전히 다르지만, 니체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적인 "영향"으로서 과대평가한 것일지라도 말이죠.)
 
하여간... 좋은 글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망할 놈의 학자연함과 길게 빙빙 둘러말하는 것들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납니다. <고통 받는 몸>도 <반딧불의 잔존>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대놓고 얘기하면 없어보이니 빙빙 둘러말하는 거죠. 막상 까보면 별거 없고, 논리적인 가능성을 따져보면 좋은 선택도 아닙니다. 근데 빙빙 둘러말하니 사람들이 속는 거죠. 막상 핵심 명제들을 분석해서 제시하면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내용입니다.(특히 <고통 받는 몸>이 그렇습니다.) 이런 글들을 어떻게 뚝배기를 쳐야하나 고민하게 되는군요. 그런 걸 하는 게 문체비판인데... 전 누구의 문체를 비판할 만큼 글솜씨가 좋지 않아서... 게다가 제가 비판하는 문제 지점이 “문체”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이런 걸 누구에게 토로하겠습니까ㅋㅋ 그냥 들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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