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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래썬 인류학을 의미 있게 말하기

어제 스트래썬에 대해 얘기 나눈 게 참 좋았습니다.

나중에 까먹게 될까봐 이런 식으로 좀 정리해보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스트래썬에게 있어 학문적으로 중요한 것은 2차 관찰로서의 인류학입니다.

하지만 스트래썬이 수행하는 2차 관찰로서의 인류학은 루만의 2차 관찰로서의 학문과는 느낌이 다르죠.

전 이런 차이가 스트래썬이 2차 관찰을 수행하는 조건과 동기가 루만과 달라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죠.

 

스트래썬이 멜라내시아의 증여/교환과 젠더의 관계를 문제로서 다루는 것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프랑스 인류학에서 특히 강조된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인류학 비판과 여성주의적 해석이 그것이죠.

해당 맥락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여성”을 젠더로서 다루지 않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여성”이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죠; 레비스트로스에게 중요한 것은 “여성”의 의미가 아니라 기호로서의 “여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교환되고 있는 현실과 해당 현실로부터 발생하는 법칙입니다; 라깡이 지적한 것처럼 무의미한 분류들이 중첩적으로 반복될 경우 법칙이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여자들을 교환하고, 이러한 교환으로부터 법칙이 발생합니다; 근친상간 등의 터부가 말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여성”의 의미나 터부의 기원 따위가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서든 뭐든 간에 여자들이 교환되고, 이로부터 패턴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법칙화되어 “친족 체계”가 형성된다는 게 중요하죠.

레비스트로스를 비판한 여성주의 인류학자들은 레비스트로스를 이렇게 (올바르게ㅋㅋ) 해석했고, 이를 비판했습니다.

다만 그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여성주의 인류학자들은 저런 교환에서 교환물을 중심으로 패턴의 발생을 추적하는 것만으로는 사회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환물로서의 여자가 아니라 교환의 상징으로서의 “여성”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한 사회적 사실이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여성”이라는 젠더의 의미를 포착해야만 이해가능한 “사회적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포착하지 못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런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이는 데에 그들이 실패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들은 이런 식의 조악한 주장으로 의미를 호소했습니다.

멜라네시아는 부권제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전의 인류학자들은 멜라네시아의 사회를 “남성주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여성주의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관찰들이 한계적이라고 지적했죠.

교환 등을 매개하는 상징으로서의 “여성”이 가진 의미를 포착하면, 그들의 사회는 “여성주의적”이라는 근거에서 말이죠.

이런 문제 도식 안에서는 결국 멜라네시아 사회는 여성주의적이거나 남성주의적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양자택일은 단순히 사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멜라네시아 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바로 저러한 양자택일의 결정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남성주의적인지 여성주의적인지에 따라 멜라네시아 사회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양자택일은 그렇기에 권리의 문제인 것이죠.

스트래썬은 이 문제에 참전하며 이러한 문제 도식을 바꿉니다.

스트래썬은 이 문제를 통해 진입하면서도 전혀 다른 현상을 관찰하고, 다른 문제로 넘어가죠.

중요한 것은 멜라네시아 사회가 남성주의적인지 여성주의적인지가 아니란 겁니다.

인간들이 사물들에 젠더를 부여한다는 사실과 그렇게 젠더가 부여된 사물들의 움직임 속에서 변화하는 관계망이죠.

중요한 것은 멜라네시아 사회 자체이지 저런 논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멜라네시아인들이 저런 활동들을 통해 어떤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어떤 놀라운 사회적 사건을 이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스트래썬은 이런 식으로 문제를 변용시킵니다.

양자택일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의미로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장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일들에 주목할 때 어떤 것들이 보이는지를 고민해보자는 거죠.

구조에서 문제를 도출하고, 이를 현장을 통해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이 경우 현장의 진정한 얼굴은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현장이 가진 힘이 논증/실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죠.

스트래썬은 현장을 그런 식으로 착취하지 말자는 입장인 것이고요.

 

만약 이게 전부였다면 스트래썬은 재미난 연구들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단순히 착취에 반대했다면, 현장 연구 자체가 지속 불가능해지거든요.

스트래썬은 이를 다른 식으로 일반화하죠.

스트래썬에게 중요한 것은 2차 관찰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현대의 모든 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2차 관찰을 하고 있죠.

중요한 것은 어떤 2차 관찰이냐이고, 현재의 2차 관찰을 어떻게 다른 2차 관찰로 변형시키는지입니다.

스트래썬은 이를 보여주는 거죠.

멜라네시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멜라네시아라는 범주 자체가 인류학적인 발명품이죠.

스트래썬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기꺼이 껴안습니다.

멜라네시아가 인류학적인 범주이고, 멜라네시아가 그저 주어진 그 자체로서의 현장이 아니라 다양한 인류학적 문제들의 참조 지점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스트래썬이 달라지는 것은 그 사실을 그저 인정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에서부터 다른 사실로의 이행을 말하기 때문이죠.

스트래썬은 멜라네시아라는 현장을 참조하며 논쟁이 벌어지는 인류학적 문제들에서 시작합니다.

다만 그 문제들을 “멜라네시아적”으로 변용하고 멜라네시아적으로 의미 있는 문제들로 변용시킬 뿐이죠.

지역 연구자 특유의 일관성이 발휘되는 겁니다.

멜라네시아를 참조하는 다종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멜라네시아라는 고정점을 통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거죠.

이런 일관성은 언제나 바깥에서 부여된 문제들을 현장 중심적으로 변용하는 덕분에 성취가능한 것이고요.

스트래썬이 젠더 문제와 법과 인격 문제를 한 책에서 다루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두 문제는 종적으로 다르죠.

다른 인류학적 문제이고, 이를 묻는 인류학계는 종적으로 구별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스트래썬은 멜라네시아라는 현장에 자신의 중심을 두기 때문에 두 문제를, 아니 더 많은 문제들을 함께 다를 수 있습니다.

멜라네시아 안에서 전 문제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한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 문외한의 침범일 수 없기 때문이죠.

 

스트래썬 연구의 진정한 가치는 명제화될 수 있는 체계적이고 일관적인 이론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을 스트래썬이 지향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고요.

스트래썬의 일관성은 현장의 일관성입니다.

멜라네시안이들이 다른 문제들을 다르지 않게, 긴밀하고 연속적인 것으로 다룬다는 사실에서 가능해진 일관성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래썬의 진정한 기여는 2차 관찰을 더 잘하기 위한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2차 관찰을 다르게 수행하는 노력을 스트래썬은 잘 보여줍니다.

현장을 학문적으로 구성하는 바깥과 현장의 내부를 연결하고, 변용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이러한 변용은 변용을 위한 변용, 바깥의 참조를 부정하기만 하는 변용이 아니었습니다.

더 좋은 문제가 무엇인지, 멜라네시아에서 관찰 가능한 놀라운 현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볼 수 있게 하는 변용이었죠.

스트래썬의 성공은 이런 데에 있습니다.

2차 관찰에 대한 일반 이론이 아니라, 자신이 참여하는 현장에서 수행되는 2차 관찰을 변혁하는 실천으로 말이죠.

이것이 스트래썬과 루만을 다르게 하는 것이죠.

둘 모두 2차 관찰을 중요시하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2차 관찰에 주목함으로써 수행하는 활동이 다르니까요.

 

 

하여간 스트래썬을 지성사적이면서도 인류학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생각합니다...

존재론적 전환이니 뭐니 하는 일반적인 주장으로 해석하면 스트래썬이 성취해낸 혁신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트래썬의 진정한 위대함은 참조지점으로서의 멜라네시아를 바꿔냈다는 데에 있습니다.

때문에 스트래썬을 이해하려면 스트래썬이 어떻게 다르게 묻고 다르게 관찰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아야합니다.

또한 스트래썬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스트래썬의 물음을 그대로 따를 게 아니라, 스트래썬처럼 다르게 묻고 다르게 관찰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현장을 배신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현장을 구성하는 인류학적 물음들을 잘 활용해서 말이죠.(갑자기 여기서 유르착의 스보이들이 수행하는 탈-영토화적 변용이 떠오르는군요ㅋㅋ)

다만 다르게 묻고 다르게 보기의 가치가 “다름”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란 것은 명심해야할 것이고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마지막의 문제, 가치 생성의 가능성 문제를 좀 자세히 말하고 싶습니다.

일단 사례로 시작하고 싶네요.

어제 제가 강조했듯이 유르착의 “스보이” 개념은 매우 흥미롮습니다.

스보이는 일반적인 개념이면서도, 맥락 속에서 매우 구체적인 집단을 가리키며, 그 집단에 동질성을 부여하는 개념이거든요.

스보이는 스보이들로 복수로 존재하면서도, 일반적인 인격성을 부여하는 개념이기에 특별합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함은 스보이에만 부여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유르착은 이런 특별함을 스트래썬에게 빌려왔습니다.

스트래썬은 멜라네시아인들의 인격성을 분석하면서, 공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면서도 사적이고,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인격성을 포착할 수 있음에 주목했습니다.

스트래썬은 그래서 인격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공적인지 사적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공적이고 어떻게 사적인지, 정확히 말하자면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이 결합하며 만들어내는 특수한 결합태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죠.

유르착은 스트래썬의 연구 덕분에 스보이 개념을 정교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분명 스트래썬 연구의 “의미”입니다.

제가 시작하고 싶은 사례이고요.

 

제게 흥미로운 것은 저런 연구 내용 자체가 아닙니다.

유르착이 스보이 개념을 정교화할 때 골머리를 썩다가 스트래썬 책을 보고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죠.

이 경우 제가 제시한 스트래썬 연구의 의미는 유르착 연구 과정이라는 맥락에 국한될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럴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유르착은 이전에 스트래썬 연구를 흥미롭게 읽었고, 자신의 연구를 발전시키며 스트래썬 연구를 접목 시켰을 수 있죠.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스트래썬의 연구를 이렇게 읽을 거고요.

전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관건은 결국 “유비” 가능성입니다.

스트래썬 연구를 참조한 유르착의 연구는 스트래썬의 멜라네시아 인격 개념을 후기 소련의 스보이 인격 개념에 유비했습니다.(전 이걸 굳이 ‘유비’로 말해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지금 사용되는 비교 개념이 전 근대의 유비 개념에 가깝고, 스트래썬이 말하는 유비 개념이 18세기에 등장한 비교 개념에 가깝거든요. 하여간 이건 중요한게 아니고ㅋㅋ)

중요한 것은 이런 유비가 실현되기에 앞서, 인식적으로 유비에 따라 발생 가능한 의미가 창출될 수 있다는 거죠.

이는 유비가 가진 특이한 성격 덕분입니다.

유비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비슷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인 덕분이고, 다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특수한 덕분이죠.

결국 모든 유비는 일반적이면서 특수한 덕분에 가능해집니다.

이는 당연해보이지만, 꽤나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재미란 것, 흥미란 것, 의미란 것이 발생 가능한 조건을 말해주기 때문이죠.

그저 일반적이거나 그저 특수하면 재미도 없고, 흥미도 안 생기고, 의미도 없습니다.

“어쩌라고?”란 반응만 가능하죠.

결국 “무엇”인가가 의미 있다면 이는 일반성과 특수성이 결합한 덕분이에요.

교훈담 같은 단순한 사례도 마찬가지죠.

교훈담이 가능한 것은 그게 일회적인 일화면서도, 일반적인 가치를 가져서입니다.

그러니 “반복”될 수 있는 거죠.

 

이를 약간 인식적인 언어로 번역하면 “예측 불/가능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재미난 것은 확률적이란 것이죠.

일이 척척 진행되는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척척 진행되는 일이라면 척척 진행되어도 기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을 때 기쁜 거죠.

지각 위기에 조마조마할 때 마치 날 위한 것마냥 때마침 도착하는 지하철처럼 말이죠.

결국 재미, 흥미, 의미는 (정보 개념에서처럼) 기대 가능성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일치/불일치의 차이 덕분입니다.

그럼 원래 얘기로 돌아와 스트래썬 연구의 의미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진술해보죠.

스트래썬은 한편으로는 멜라네시아를 연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론 멜라네시아만 참조하는 것은 아닐) 멜라네시아를 참조하며 진행되는 일반적인 인류학 연구들을 연구합니다.

후자의 일반적인 담론은 구속 같지만 오히려 전환의 기회가 됩니다.

그런 얘기가 가능한 것부터가 그게 설득력이 있어서죠.

스트래썬은 그런 기대들을 전환시키는 겁니다.

당연하지 않게, 하지만 그게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면서요.

마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시련들”이나, 극을 진행하는 “사건사고들”에 해당될 것을 가져오는 것이죠.

이런 시련과 사건을 가지고 스트래썬은 전반적인 맥락을 바꿔나가면서 흥미로움을 유지합니다.(사실 시련과 사건은 그 자체로는 전반적인 맥락을 변경하지 않습니다. 고대 로맨스극처럼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건”에 의해 전반적인 맥락이 변경될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은 19세기 소설의 특징입니다)

스트래썬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 일반에 대한 기대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재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걸로는 그 자체로 학문적일 수 없습니다.

저런 기대를 활용하면 재미는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의미가 있겠지만, 그게 학문적 의미일 이유는 없습니다.

스트래썬의 저런 기대 다루기는 언급한 것처럼 이전의 인류학 연구들의 기대를 다루기에 학문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진짜 맥락적인 겁니다.

이는 일케 표현하고 싶네요.

제목, 저자 이름, 본문 내용이 완벽히 똑같을지라도, 그 책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 그것은 자서전이겠지만, 다른 경우에는 픽션일 수 있죠.

이런 차이는 단순히 발화 맥락 차이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조건의 차이도 아닙니다.(왜 이 둘을 언급하는지는 생략하겠습니다... 설명하자면 깁니다. 언어철학이 둘 중 하나로 얘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결국 “물=H2O”의 필연성을 어케 설명할지에 대한 가능한 두 입장입니다)

전 이게 “참조”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책을 “하나의 작품”일 수 있게 하는, 일반성과 개별성이 혼합되는 지점에서 참조하는 바깥의 차이 때문이란 것이죠.

자서전도 픽션처럼 읽힐 수 있고, 픽션도 자서전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장르 차이는 단순한 사실 차이가 아니라, 바로 그 대상(작품)을 하나의 무엇인가로 의미 있게 만드는 조건을 어디로 두냐의 차이란 것이죠.

그것이 사실을 가리키고,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누군가의 증언/기록으로서 하나의 무엇일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내부의 다양한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는 일련의 이야기로서 무엇일지에 따라 장르가 달라진다는 얘깁니다.

결국 “참조”가 중요하단 거죠.

스트래썬은 “참조”를 중요시했습니다.

멜라네시아를 “참조”하는 “연구들”을 다루며, 참조 관계를 바꾸는 일을 중요시했죠.

이런 게 학적 의미의 한 양태일 수 있습니다.

어떤 개별적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적인 것”을 변경시키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으로 참조되던 “특수한 것”으로서의 멜라네시아를 바꾸는 거죠.

다시 말해 스트래썬은 멜라네시아에 인류학자들이 주목하게 하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바꾼 겁니다.

이런 변경은 특별합니다.

분명 그 이전에도 멜라네시아를 보았고, 그 이후에도 멜라네시아를 보고 있죠.

하지만 같은 멜라네시아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멜라네시아가 보이죠.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다른 멜라네시아가 생긴 건 아닙니다.

분명 같은 멜라네시아를 보고 있는 거죠.

단지 다르게 보이는 멜라네시아를, 다르면서도 의미 있게 보이는 멜라네시아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게 학문적 실재성과 학문적 재미를 가능케 하는 의미 출현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운다는 미학적 테마를 반복하는 것이고...

플롯 중심으로 학문을 재검토해야한다는 어제의 논의의 연장이란 얘깁니다.

어제의 얘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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