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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의 <피투자자의 시간> 보충

페어에 대한 제 비판은 사실 대안을 염두에 두고 제기한 거였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제 비판이 그 자체로 의미 없는 건 아닙니다. 이론적 일관성의 문제니까요.

이론적 일관성을 지적하며 다른 층위의 출구전략을 언급하긴 했지만, 페어의 제안을 부정하거나 깎아 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일단 접근 방향 자체는 완벽히 동의하거든요.

게다가 페어가 유의미한 정치 영역을 가리킨 것은 현상황에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적했듯이, 금융을 정치 문제로 다루는 것은 당연하지 않고, 이에 회의적인 지식인/정치가도 많거든요.

다만 페어에게 좀 실망한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페어 책에서 감격한 부분은 현실에 충실하려는 부분이었습니다.

경제사적 흐름 속에서 문제를 진단하려고 시도하고 있고, 거기에서 우울을 극복할 실천 영역을 발견해내려고 하고 있던 게 정말 좋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접근을 하면 현실에 정말 충실해야만 합니다.

불커에 대한 해석이나 부채 비중의 증대에 대한 분석은 틀려서는 안 되는 거에요.

다를 수는 있죠. 그런데 틀려서는 안 됩니다.

페어의 말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요.

그런데 몇몇 사실 문제에서 정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좀 화가 난 거고요.

주변에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알려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인용 및 참고문헌 목록을 보면 페어의 경제사 인식은 극 소수의 그것도 당파적 색채가 강한 책에 기반하고 있고, 그래서 발생한 실수라고 전 생각합니다. 좀 교과서적인 책도 참고했으면 이런 실수는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 좀 화가 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좋은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제가 언급은 안 했지만, 페어는 설득력 있게 자신이 제시하는 금융 정치 개입이 금융에 대한 타협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페어는—아까 제 레파토리에서처럼—노동운동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합니다.

임노동제를 전복하려면 노동 조건 개선 같은 식의 처방은 불합리하다고 여겨졌거든요.

노동운동은 결국 임노동제를 지속시키는, 사실상 전복을 포기하는 전략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이 주요 전략이 되었고, 이는 노동운동이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는 합의 덕분이었죠.

페어는 이 진실을 지적하며 자신이 제안하는 금융을 활용한 정치 운동이 타협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노동운동이 임노동제와 타협이 아니듯 금융운동도 금융권력과의 타협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정치 운동이 가진 역동성은 거부가 아니라 전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페어는 이런 식으로 해당 영역에 “참여”하고 “이탈”하며 다양한 정치 행위를 수행할 수 있음을 적절히 잘 보여주고, 이는 분명 좋은 성과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걸 건너 띈 것은 저에게는 저런 것들이 설득이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뿐이죠.

 

암튼 다른 얘기는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를 통해서 확장할 건데, 그 전에 <소외와 가속>도 간략히 언급하고 싶네요.

 

<소외와 가속>은 책 제목과 달리 가속에서 소외로 나아가는 책입니다.

이러한 접근 순서는 소외와 가속에 대한 로자의 재규정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겁니다.

가속이 소외의 원인이니까요.

로자는 소외를 선택의 문제로 재규정합니다.(이런 재규정은 이전의 소외 담론이 망상적이었고, 그래서 아무런 실증 연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상황 진단 속에서 대안으로 실험된 겁니다)

로자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무수히 많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스스로가 정해야만 하는데, 정보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합니다.

세상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선택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이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어떤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시간도 부족해서 선택의 강요가 “소외”로 경험된다고 로자는 진단합니다.

추상적인 얘기를 집어 치우고 사례를 다루자면 이러합니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과거와 달리 중개 상인을 끼지 않고 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는 일 이면에는 “그림자 노동”이 있습니다.

저렴하게 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물론 최저가 검색 사이트가 있죠.

하지만 저렴하게 구매하기 위해서라도 해당 시장에 대한 이해는 필요합니다.

저같이 여행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항공권을 구매하려할 경우 최저가 검색이 가능해도 선택은 어렵습니다.

동일한 상품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가격 차이와 상품 차이를 잘 이해하며, 저에게 제일 잘 맞는 상품을 골라야하는데, 이건 언제나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런 걸 위해 공부하는 것, 검색하고 알아보며 돈을 아끼는 일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이게 엄청나게 많은 심적/정신적 부담을 준다는 사실이죠.

저런 걸 알아보는 건 스트레스도 많고, 수행할 때 많은 주의력을 낭비시킵니다.

돈은 아끼겠지만, 덕분에 자신의 원래 일에 집중을 못하거든요.

이런 문제 때문에 호구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회비용에 입각해 대충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란 게 심리학적 조언이죠.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큰 차이를 만듭니다.

실제로 유능함은 특정한 일에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필요한데,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저에게 이 문제를 알려준 심리학자 레비틴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결과적 차이에 불과하지 않고 성격적 차이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산만함이 강요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성격이나 에티튜드 자체가 다르게 된다는 거죠.

다시 말해, 상황만 달라져도 한 사람의 성질 및 역량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레비틴은 이런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런 상황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적인 대책을 제시하죠.

반면 로자는 이를 사회적 문제로 여김으로써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 정비를 추구합니다.

쓸데없는 고민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가 가능하다면 말이죠.

제가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원래의 논의와 밀접합니다.

선택의 문제가 사실 가치 평가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이런 연속성을 가지고서 페어가 제기한 문제를 재기술하면 이렇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금융적 가치 기준에 맞춰 계속적인 평가에 사람들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러한 평가에 맞춰 실시간으로 반응해야만 합니다.

페어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금융기관이 개미들보다 돈을 잘 버는 것은 예측을 잘해서가 아니라, 더 빨리 정보를 입수해서입니다.

호재와 악재를 빨리 입수해서 대응하기만 해도 돈은 벌릴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반응은 객관적인 경제적 인과와 무관합니다.

호재는 실제로 호재가 아니어도 되고, 악재는 실제로 악재가 아니어도 됩니다.

사람들이 호재라고 여기고, 악재라고 여길 것들이면 사람들이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죠.

이는 눈치 게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의 인과 추측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응들을 예상하고,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반응을 선취하며 자신을 맞춰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투자는 눈치 싸움을 하며 호재나 악재로 여겨질 만한 기호들을 찾고 반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정확히는 반응해야만 하는 거죠)

페어는 이런 식의 반응이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줄 뿐만 아니라, 개인의 품행을 금융적 기준에 부합하게 훈육하고, 금융적인 가치 기준을 절대화한다고 진단합니다.

로자의 가속과 소외는 이러한 페어의 진단과 비판과 잘 공명합니다.

실시간의 반응이 요구되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이 강요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저런 강요가 자신의 동의나 자신의 가치 기준과 무관하게 강요된다는 점에서 로자의 소외 진단과 공명하죠.

뭐 둘이 공명한다는 건 별거 아닌 얘깁니다.(로자의 주요 개념어 중 하나가 ‘공명’이라는 게 갑자기 떠오르는군요ㅋㅋ)

제가 굳이 둘을 공명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페어가 진단하듯, 금융적 가치 기준이 다양한 영역에 침투되고, 이에 반응하도록 강요되는 것은 제도 의존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의 근거는 우연한 제도적 선택이 전부일 수 없다 생각합니다.

금융적 가치 기준이 아닌 다른 가치 기준들이 도태된 것도 큰 문제거든요.

실제로 사람들이 객관적인 가치 평가 기준으로 여기는 게 금융적인 가치 기준과 가깝다는 얘깁니다.

다른 기준들은 자의적이니 개인적으로나 적용하고, 객관적인, 사회적인 영역에는 타당하지 않다 여겨지거든요.(이런 타당하지 않음은 가치 부여와 무관하게 성립합니다. 나에게는, 혹은 절대적으로 합당할지라도, 남들이 이 기준에 맞춰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도 해당 기준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페어는 이러한 질서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과정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로자는 이를—제도화와 무관하게—현대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상황적인 조건을 통해 일반적으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을 특정한 현상으로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고 둘을 공명시킨 겁니다.

이를 상보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페어의 출구에 동의하지 않은 부분을 다시 언급해보죠.

제가 보기에 페어의 답안은 틀렸습니다.

현실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답안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오답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페어는 다른 가치 기준이 가능하다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이는 이중적인 당연시입니다. 한편으로는 대안적인 가치 기준을 당연시 합니다.

페어는 당연하다는 듯 환경, 젠더, 인권 같은 게 대안적인 가치 범주라고 주장합니다.

왜 저것들이어야 하는지, 저것들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하지 않고요.

다른 한편으로 페어는 가치 기준의 재편성이 당연하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페어가 포착한 사례에서처럼 사람들이 실력행사(책에서 ‘이니셔티브’로 번역되는 표현을 전 이렇게 번역하고 싶군요)를 하면 알아서 잘 반영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이 둘 모두 당연하지 않습니다.

저런 가치 범주가 객관화 가능하고, 실제로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기준일지 불분명하고기 때문이죠.

저런 가치 범주를 반영한 질서가 정말로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그게 현실화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얘기입니다.

저런 기준이 특정한 영역에서 일시적으로 적용될 수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를 적용할 경우 자기파괴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지적했듯이, 이런 실력행사가 페어의 꿈처럼 일상화되면, 현 금융 시스템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풍요로움도 상실될 거고, 사람들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에서 극단적인 입장이 극단이 아니라 중도처럼 여겨지며 극우가 등장했다는 페어의 진단이 다른 버전으로 반복될 겁니다.

결국 경기 침체는 사람들의 불만을 낳고, 그런 경제 정책을 편 세력을—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볼커에게처럼 물리적으로—축출하려 들 테니까요.

(뭐 전 풍요로움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인 궁핍을 저도 못견뎌내겠죠)

이렇게 비판한다고 해서 페어의 답 전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방향 자체에는 동의하죠. 단지 구체적인 답안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고요.

제가 로자를 페어에게 공명시킴으로써 보완하려는 것은 다른 답을 위해서입니다.

페어는 제도적 문제를 확인했고, 제도적인 해결책에 가까운 답을 내놓았습니다.

근데 전 좀 다르게 생각했어요. 제가 자주 얘기하는 거지만,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 거든요.(나쁜 제도도 있는데, 보통 나쁜 제도도 인간이 쓰레기라서 나오는 겁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염두에 두고 제도를 만들어서 나쁜 제도가 나오든, 쓰레기 같은 인간이 설계해서 나쁜 제도가 나오든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대안이 되는 가치 기준 자체가 지금 불명확합니다.

페어 눈에는 민중이 보이는지 몰라도, 제 눈에는 안 보이고, 가치 기준은 불명확하고 매우 모순적으로 적용되고 있거든요.

제가 여기서 모순을 말하지만, 이걸로 사람들을 비방할 생각도 없습니다.

이거 자체가 현대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곧이어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를 통해 저 문제를 다룰 거거든요.

단지 여기서는 로자를 경유하여, 저런 문제 상황이 어떻게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지를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너무 많은 판단이 강요되고, 그래서 실질적인—정치적인 것이든 다른 것이든—주체성이 발휘될 수 없다는 현실을 지적함으로써 말이죠.

다른 가치 기준을 통용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혹은 대항할 수 있는 주체성이 실현되어야만 합니다.(이는 페어도 완전히 동의할 주장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단순히 다른 품행이 허용되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특정한 품행이 대안이자 대항마로 현실화되어야만 합니다.

그 품행은 다른 가치 기준을 반영하고 있고, 다른 가치 기준을 대안이자 대항마로 강제시킬 테고요.

이런 대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람들이 저런 수준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가치 기준을 내재화하고, 이에 맞춰서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금융적 가치 기준에 대항해야하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게 어렵습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금융적 가치 기준에 굴복하는 것은 저런 대항 가치 내재화가 어렵기 때문이거든요.

로자가 진단하듯 현대의 조건 자체가 이를 어렵게 합니다.

가치 확립을 위해 필요한 여유를 제공하지 않아요.

물론 어떤 가치 기준을 내재화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확고하지 않고, 그래서 모순적이고, 모순이 당연시되는 겁니다.

모순을 해결할 정도로의 여유는 없기 때문이죠.(제가 “5분만 생각해봐도 모순인 걸 알 수 있다” 운운하는 건 이런 점에서 틀린 거죠. 5분의 여유 정도야 있겠지만, 이론적 정합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고 프로세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꽤나 오랫동안 이론철학을 공부해야하기 때문이죠)

이 상황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말이죠.

다시 말해, 페어 식의 출구 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로자 식의 출구 전략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거죠.

 

암튼 이제 밑밥은 충분히 깐 것 같으니,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 책에 흥미를 느낀 지점은 저 문제랑 관련이 있습니다.

일루즈는 저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연구하고 있거든요.

로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선택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로 계속해서 선택하고 있어요.

또한 사람들의 선택은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합리성 안에서 잘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어케 가능한지를 제가 최근 흥미를 느낀 사례로 소개하고 싶군요.

신도시 아재룩.jpeg이라는 식의 조롱글을 하나 보았는데, 이게 좀 흥미로운 점이 있었어요.

저런 식의 유머가 올바른지와 무관하게 말이죠.

아마도 사람들이 저런 글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실제를 반영하기 때문일 거거든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저렇게 유형화된 아재룩이 잘 차려입은 옷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이게 좀 중요해요.

잘 차려 입은 옷은 유형화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대충 입은 옷은 유형화가 당연하지 않아요.

임의적으로 입는데 그게 어떻게 유형을 이루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이 창출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죠.

편한 옷차림으로 한정한다고 해도 말이죠.

운동화만 해도 그렇잖아요?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편한 운동화가 있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운동화 중 자신의 운동화를 우연히 선택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른다고 해서 엄청나게 대단하게 고르는 건 아니에요.

자신이 추구하는 옷 스타일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옷과의 어울림으로 운동화를 고르진 않죠.

그럼에도 완전 임의는 아니에요.

이미 자신에게 익숙한, 그리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상품이 있기 때문이죠.

신도시 아재룩이라는 유형이 어느 정도 성립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유행을 경험했고, 그때의 경험과 그때에 형성된 이미지를 기준으로 선택하거든요.

그러니 대충 편하게 입어도 비슷한 차림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특별히 골라 사지 않고, 특별히 골라 입지 않아도 어느 정도 패턴이 형성되는 거죠.

일루즈는 이런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사회학적인 현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소비라는 건 그 자체로는 별로 안 중요할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특별히 엄청 신경 써서 소비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무슨 가치 지향 같은 게 그자체로 담겨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일루즈가 강조하듯, 그런 사소한 것들로부터 꽤나 많은 정보를 추출해낼 수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에서 사람들이 감축을 해내고 있고, 그런 감축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니 말이죠.

일루즈는 이런 걸로 자아를 연구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요.

자아라는 걸 신비로운 것,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환경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보면 말이죠.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는 이런 접근에 기초해서 사람들의 사랑관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앞에 언급했던 것들이 발견되죠. 바로 모순이 그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모순을 발견하는 게 그다지 큰 통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을 “소비”하는 일은 모순이에요.

그런데 이런 모순을 인식하는 일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일루즈가 지적하듯, 학력이나 경제 수준과 무관하게 모두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결국 낭만적 사랑과 소비를 통한 사랑 실현은 모순이란 것은 정말 모두가 알고 있죠.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모순 그 자체가 아니란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저런 모순을 체계적으로 잘 내재화한다는 겁니다.

소비를 통한 낭만적 사랑 실현은 모순이고, 사랑과 소비를 엮는 것은 상술이죠.

사람들은 그걸 잘 알고 있어요.

상술임에도 그걸 잘 이용하고 있는 거죠.

결국 사랑은 사회적인 활동일 수밖에 없고, 마음을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기호/표상을 활용해야하니까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특별할 수 있는 상황일 경우, 저런 현실과 분리될 수 있는 예외로 취급하며 저런 상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표현을 해석합니다.

여기까지도 어떤 의미에선 별 거 없을 수도 있어요.

일루즈의 연구에서 “별 거”라고 할 것은 사람들의 현실 활용의 패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패턴들의 사회적인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해 저런 식의 활용에서 학력이나 경제력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런 차이가 수준 차이와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물론 학력이 낮고, 경제 수준이 낮으면 상술에 더 잘 부합하는 상징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그들이 멍청해서 상술에 더 잘 속아서도 아니고, 문화 수준이 낮아서 세련된 표현을 취하지 못해서도 아니에요.

일루즈가 진단하듯 차이는 맥락에서 비롯됩니다.

낭만적 사랑은 정상성에서 이탈하고, 예외적인 상황 속에서 낭만성을 향유하게 합니다.

그런데 학력과 경제 수준이 낮으면 향유 기회 자체가 드물어져요.

그러니 표준적인 상징을 특별함을 객관화하는 매체로 선택하는 겁니다.

당사자 둘 사이에서 객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로 그게 적합하거든요.

반면 학력과 경제 수준이 높으면 저런 표준적인 상징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러니 표준적인 상징들이 특별함을 객관화하는 매체로 선택될 수 없게 되는 거죠.

일루즈는 이런 현상에 입각해서 사람들 사이에서의 구별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딱히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 편견이 있지 않아도,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사랑하기 어려워지거든요.

계층에 따라 상대방에게 요구하게 되는 사랑 표현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결국 사랑은 증명이 필요하고, 표현과 해석이 소통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의 소통은 단순히 납득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감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을 정도여야 하고요.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를 머리로는 알아도 감정적인 영향을 안 받는 거에요.

자신의 코드에 안 맞기 때문이죠.

일루즈는 당연히도 이런 현상을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 의거해서 설명합니다.

다만 부르디외와 달리 계급 재생산 자체나 아비투스에만 주목하지 않고, 이런 일의 배후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소통의 문제로 이를 분석하죠.(이는 일루즈 피셜입니다ㅋㅋ)

이게 매력적인 거에요.

이게 제가 얘기하는 문제랑 뭔 상관이 있는지가 중요하죠.

일루즈는 저런 문제를 다루면서 가치 범주와 가치 범주의 적용 문제도 다룹니다.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물론 무의식적인 반응에 가깝죠.

하지만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반응만으로 모든 선택, 모든 평가, 모든 판단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극은 꽤나 흔하거든요.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했을 때에만 “선택”을 수행합니다.(당연히도 저런 “나름의 기준”은 사회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리고 당연히도 유통되는 러브 스토리 등등의 “사랑 상품”이 큰 영향을 끼치죠. 일루즈 연구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뻔한 것 말고, 사람들이 과학성을 표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 선택을 정교화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일루즈 말마따나 여성 잡지의 사랑 상담 코너는 신화 재생산의 매체라기보다는 과학 통속화의 매체입니다. 일루즈가 보여주듯 모든 문단에서 연구를 인용하며, 합리적인 사랑 선택 및 합리적인 사랑 주체화를 요구함으로써, 독자들을 과학적인—“경영학적”에 가깝기도 한—주체로 만들거든요)

일루즈는 저런 임계점 설정에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맥락이 반영되는지를 분석하며 사람들이 실제로 가치 평가를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연히도 사랑을 위해서는 상대방은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판단되어야만 합니다.

당연히도 이를 위한 범주도 다르죠.

그런데 평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범주만이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범주가 같아도 괜찮은 사람의 증거로 채택하는 징표가 달라지면 평가가 달라지거든요.

일루즈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맥락에 따라 판단의 증거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도 설득력 있게 제시하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효력이 있는 증거로 채택한다는 소박한 진실을 사회학적으로 입증해준다는 얘깁니다.

 

일루즈는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딱히 출구전략을 기획하진 않습니다.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해 이후의 저작인 <사랑은 왜 아픈가>에서는 꽤나 비판적인 평가를 수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후속작에서도 대안을 찾고 그러진 않습니다.

일루즈는 사회학자답게 현상 자체를 분석할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죠.

이런 도구들을 가지고 일루즈가 해결책을 만들어 놓지는 않았지만, 이것들은 해결책 만들기에 적합한 도구들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저런 소외 상황에서 어떻게 잘 살아가는지를, 사람들이 제가 최근 반복해서 애기하는 유르착의 탈-영토화적 실천 행위를 어떻게 일상적으로 잘 해내고 있는지를 일루즈는 잘 보여주죠.

저런 전유들을 의식화하고 방향성을 부여하면 전유들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루즈에 주목한 것이죠...

페어가 요구하는 층위의 출구전략이든 로자가 요구하는 층위의 출구전략이든 결국 사람들의 전유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제도 개선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결국 결정적인 것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겁니다.

넛징 가지고는 절대 정치를 이룩할 수 없어요.

결국 정치는 주체화의 영역이고, 사람들이 공통의 주체성을 스스로 전유해낼 때에만 이룩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일루즈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결국 가치의 재평가를 확립하는 일이 관건이다...

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