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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어 관련해서 이래저래 떠들었죠,

전 페어의 출구로 다다르기 위해서라도 일루즈가 한 것과 같은 종류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전 일루즈가 어떤 연구를 했는지 자체를 이론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참에 그게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싶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삶의 형식”과 “미적 풍토”의 상호작용입니다.

문제는 저것(들)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겠죠.

 

일단 일루즈의 작업에 대한 제 언급을 재기술하자면 이러합니다.

일루즈는 사람들의 소비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의 소비에 주목한다고 해서 일루즈가 그런 소비들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루즈가 주목하는 것은 소비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죠.

일루즈에게 중요한 것은 소비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소비의 방식입니다.

다만 이러한 소비의 방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소비 패턴은 아닙니다.

일루즈는, 혹은 제가 <소외와 가속>을 통해 관찰한 일루즈는 무수히 많을 뿐만 아니라 모순되기까지 한 소비 조건 아래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적인 선택을 성공시키는지를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선택을 “성공”을 위해서는 선택지 감축과 모순을 견뎌내는 가치 부여가 가능해야합니다. 그것이 현대의 조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소비는 수동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인 전유에 해당될 활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선택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특정한 방식”이 앞에서 언급된 “소비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소비 방식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입니다.

다만 제가 지난 글에서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비 방식이 “지식”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낭만적 사랑을 매우 합리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잡지 속 연애 칼럼에서 잘 드러납니다.

연애 칼럼은 낭만적 사랑을 신화로 숭배하는 사원이라기보다는, 낭만적 사랑을 과학적이고 경역학적으로 소비하는 주체를 길러내는 대중강연장에 가깝습니다.

진짜 과학이든 아니든 명목상 “연구”에 해당될 것에 호소하면서 사람들에게 올바른/진정한 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이죠.

섹스 칼럼리스트의 가르침이 과학인지와 별개로,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합당할 수 있는지와 별개로 연애 칼럼이 ‘과학’으로 위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런 칼럼들이 과학을 표방하는 사태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러한 것이든 다른 방식으로든 낭만적 사랑을 “객관적”으로 혹은 “합리적”으로 소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태가 흥미로운 것입니다.

다양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거 제가 잘못한 건가요?” 식의 연애상담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합당하다고 확인/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저런 확인/인정에서 반응은 갈릴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이 될 만한 담론이 판단 근거가 되곤 하죠. 

저런 칼럼들이 “과학”을 표방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제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층위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을 성찰하고, 객관화하려 시도하는 담론 층위가 그것이죠.

 

이러한 담론 층위가 꼭 “과학”이거나 ‘과학’으로 포장될 필요는 없습니다.

연애 칼럼도 항상 어느 연구에 따르면도르로 환원되지 않고요.

특정 글 안에서는 추천 댓글이 일종의 판정관 역할을 하죠.

그리고 저런 류의 “판정”은 유통되고 있는 담론에 의존적입니다.

가타부타가 어떻게 되는지와 별도로 판정을 언어화할 때 유통되는 담론을 따르거든요.(예컨대 ‘설거지’, ‘시발 퐁퐁이형!’ 등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제가 주목하는 담론 영역, 그리고 제가 어떠한 종류의 변화를 기대할 때 매개할 담론 영역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담론입니다.

다만 저런 담론 영역에서 저런 담론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자는 식의 주장과는 구별되는 활동을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미리 고지한 “결론”인 “삶의 형식”과 “미적 풍토”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다만 이런 영역에서 미적 풍토와 삶의 형식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미적 풍토라는 것은 유통되고 있는 가능한 선택지들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소비할 때 사용될 수 있는 징표들(상품들), 평가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실천들이 “미적 풍토”에 해당됩니다.

미적 풍토에 속하는 대상들을 소비/향유하는 방식들, 혹은 그렇게 여겨지는 방식들이 “삶의 형식”에 해당되고요.

둘은 어느 정도 분리되지만 긴밀히 상호작용합니다.

특정한 대상들이 미적 풍토에 속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삶의 방식 덕분인 것이고, 특정한 삶의 방식들은 바로 그것들이 향유하는 사물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다루어질 수 있을 테니 말이죠.

또한 미적 풍토에 속하는 특정한 대상은 어떤 삶의 형식과 관계 맺는가에 따라서 다른 체험과 다른 가치를 산출해냅니다.

같은 징표가 사람 및 맥락에 따라 다른 값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죠.  

게다가 미적 풍토에 속하는 것은 규정되지 않습니다.

(뭐 정말로 실무한개는 아니겠지만) 이에 속하는 사물들은 무한히 많기도 하고, 무엇이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는 선험적으로 규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속 유무 자체가 삶의 형식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가변적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대상, 다시 말해 “상품”은 어느 정도 정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규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즉 자신이 이에 가치를 부여하든 부여하지 않든, 다른 사람들에게 익숙할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대상들은 어느 정도 범례화될 수 있다는 거죠.

“뻔한 러브 스토리”의 경계를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임의적이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죠.(이는 철학에서 ‘vagueness’란 용어로 주제화됩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빈도/강도를 가지고서 미적 풍토에 속할 것으로 여길 만한 것들을 언급할 수 있을 겁니다.

삶의 형식은 좀 당연히 언급 가능해보입니다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걸 잘 다루는 게 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통속적으로 유통되는 임의적인 표현을 말한 것으로 마치 삶의 형식을 말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기 쉽기 때문이죠.

제가 말하는 삶의 형식은 저런 통속적으로 명명된 무엇인가랑 구별됩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삶의 형식은 메타적 언급에 해당되기 때문이죠.

그러니 저런 통속적으로 말해지는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구체적인 형식을 보일 수 있어야하만 뭔가를 제대로 말했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좀 자세히 얘기해야하겠군요.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징표들을 전유합니다.

저런 징표들은 “부유하는 기표들”이라고 불릴 무엇입니다.

그 자체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확실하지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면서 생산, 유통, 소비가 되니 말이죠.

제가 주목하려는 것은 여기서 사람들이 저런 부유하는 기표들을 마주하는 태도와 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것을 해서도 안 되고, 다른 것을 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을 하는 것이겠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는 다 다른 것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때문에 이런 공통성과 차별성을 어느 정도 유형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당연히도 유형화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제 의도에 부합하는 특정한 유형들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죠.

저는 저런 전유에 있어서 “주체의 유형”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유형이라고 명명한 것은, 삶의 형식의 일종입니다.

소위 근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자신의 선택에 의존적이라고 여겨지며 형성되는 삶의 형식을 “주체화”로 여기며 유형화하겠다는 것이죠.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사회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주체화는 수행됩니다.

하지만 근대 사회에서의 주체화는 다른 주체화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주체화를 스스로의 선택 및 스스로의 판단의 소산으로 본다는 점에서 좀 구별되거든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생각하든, 개인이 스스로 책임져야할 영역으로 생각하든, 혹은 자기 자신이 가치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든, 결국 주체화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에게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근대 사회의 주체화는 특유합니다.

전 이런 주체화 방식이 널리 퍼진 것은 사회적 적응도를 높여서였겠지만, 전 이게 어떻게 널리 퍼질 수 있었는지, 즉 어떻게 저런 류의 삶의 형식이 미적 풍토에 유통되고,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며 활용(모방이든 대상화든)될 수 있었는지에 더 주목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 모범이자 반면교사로 여겨진 삶의 형식의 유통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거죠.

전 이런 유통 창구로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계발서이죠.

전 저런 작품들에서 발견될 수 있을 삶의 형식, 다시 말해 주체화 형식을 식별하고, 이를 유형화해보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주체화 형식에 입각해서 가치 평가 수행을 유형화하려고 합니다.

아 여기서부터는 너무 길어질 것 같군요.

일단 이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ㅋㅋ

 

하여간 이런 것에서 “형식”을 시작해보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