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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보충

사이토에겐 맑스의 물질대사 개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질대사가 사이토 논의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죠.

이걸 잘 보여주는 사례를 들고 싶군요.

사이토는 3장에서 미하엘 하인리히의 <자본> 해석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전 사이토의 비판이 좀 과도하다 생각했어요.

미하엘 하인리히가 <자본>을 독해할 때, 맑스의 자본 분석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사이토가 비판하거든요.

사이토의 해석에 따르면, 맑스는 자본을 역사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진 않은 것으로서도 분석하고, 이게 중요하기 때문에 하인리히가 틀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본 분석은 어차피 근대 체제에서 중요해진 것이고, 자본주의 자체는 역사적-사회적 산물로 분석되는 게 맞거든요.

이런 역사성과 사회성 배후에 사이토가 강조하는 이면이 있는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하인리히의 분석이 문제적이라는 건 좀 과도한 주장입니다.

하인리히가 그렇게만 분석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고, 역사적-사회적 산물로서 분석하는 것도 의미 있기 때문이죠.

전 처음에 사이토가 왜 저런 걸로 오바를 하는지 좀 이해를 못했는데, 저게 핵심이라 그런 겁니다.

사이토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우연히 생태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생태학적 탐구에 근거하여 성립하였고, 이런 의존 관계는 본질적입니다.

다시 말해, 맑스의 생태학을 배제하고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맑스의 생태학과 분리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 정치경제학만의 개성/고유함은 생태학과 같은 자연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맑스는 지대를 분석할 때, 당연히 리카도가 발견한 수확체감의 법칙을 다룹니다.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의 개성/고유함은 리카도의 수확체감의 법칙에 대한 찬반 여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리카도의 해당 주장을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거죠.

애초에 맑스는 해당 문제에 대해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고, 이러한 유연함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맑스 사상은 모순에 빠지거나 그것을 조각낼 수밖에 없죠.(모순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시기 구별입니다... 제가 괜히 사상을 시기로 조각내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사상 자체를 부정하게 되거든요) 

사이토에 따르면 해당 문제에 대한 맑스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해당 문제를 자연과학적인 문제로 이해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맑스는 리비히 등의 당대 농화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했습니다.

맑스가 저런 것들을 심심해서 연구하진 않았죠.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는 수확체감의 법칙 따위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맑스는 농화학을 연구했습니다.

자본 투입량을 늘려도 산출물이 계속 증대되지 않는 것을 그저 경험칙으로, 정치경제학적인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어떤 자본이 투입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수확을 늘릴지 아닐지는 사변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농화학적으로 인식해야하는 문제죠.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는 이렇게 사고했고, 수확체감의 법칙이 어떨 때는 성립하지 않고, 어떨 때는 성립하는지를 농화학적인 지식을 통해 근거 지으려고 했습니다.

이게 맑스의 특유함을 이루고, 맑스의 자본 분석의 근간을 이룬다는 게 사이토의 주장이죠.

사이토는 그렇기에 “굳이” 하인리히를 비판한 겁니다.

맑스의 자본 분석은 분명 역사적이고 사회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인 사회적인 구조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만으로 발전하고 지속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에도 의존하기 때문이죠.

사이토에 따르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이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를 분석하려 시도한 것이야말로 맑스의 특유함이란 것이죠.

물론 사이토는 단순히 저런 문제를 고민한 게 맑스 사상의 본질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의 자본주의 모순 분석은 역사적 사회적 구조 안에서의 모순이 아닙니다.

그러한 구조가 체계적으로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조건을 무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이죠.

사이토는 이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맑스 사상의 본질로 생태학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체계 안에서의 모순이 아니라 체계 바깥을 고려한, 체계의 바깥으로부터 모순을 진단하는 게 맑스 사상의 정점이니 본질일 수 있죠.

그리고 하인리히의 분석은 체계 바깥을 참조해야만 함에도 체계 안에서의 모순으로만 모순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비판되어야만 합니다.

사소한 해석 차이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런 사이토의 해석은 물질대사 개념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회적 구조와 자연적 물질적 조건을 연결하는 게 바로 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물질대사야말로 맑스의 다양한 분석을 가로지르는 일반적인 사고 도구란 것이죠.

 

물질대사가 맑스의 다양한 분석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유추 확장을 위한 개념인 덕분입니다.

물질대사는 일차적으로 물질을 소화하고 흡수하고 배설하는 활동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활동”이 알아서 수행되긴 하지만 이는 사소한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꽤나 신비로운 활동이에요.

이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능케 하는 관건이었어요.

디드로가 <달랑베르의 꿈>에서 말했듯이, 물질대사야말로 물질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활동이기 때문이죠.(사이토는 이 문제가 생기론이랑 관련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생기론이 뭔지, 그리고 물질대사가 왜 이거랑 가치 얘기되는지, 그리고 여기서 “생기”를 과학적 개념으로 인정하는지 유무가 어떤 차이를 의미하는지는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물질대사는 물질과 생명을 중계하는 개념이었다는 겁니다.

물질대사가 그런 환상을 매개할지라도, 그게 과학적으로 연구되지 않으면 소용 없죠.

19세기에 유기화학이 발전하면서 이게 과학적으로 다뤄질 수 있게 됩니다.

저런 사태, 즉 물질이 생명이 되는 사태가 가능한 것은 유기물질의 고유한 성질 덕분임이 당대에는 밝혀집니다.

단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유기물은 틀機에 기반하여 배열되고 조합되는 물질을 가리킵니다.

저런 단위 물질들의 배열과 조합에 의해 다양한 화학적 성질들이 발생하고, 이러한 현상에 입각하여 생명활동이 가능해지는 거죠.

사이토에 따르면 맑스는 이런 현상을 매개로 물질대사를 유추확장합니다.

물질대사를 신체 내부의 생리적 활동에 이를 국한하지 않고, 물질들의 움직임 사이에서 가능해지는 다양한 구조변동(형태변환Formwechsel)을 “물질대사”라는 개념을 통해 유추하였다는 겁니다.

유추확장을 통해 물질대사는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즉 자연과 기술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을 가리키는 개념을 대체하는 개념이 된 것이죠.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하면서 가능해지는 변화들을 “변증법적 발전”이란 개념을 통해 파악하려고 할 경우 관념적이게 되지만, 이를 “물질대사”란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 실증적 개념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물질이 오고가며, 그러한 물질들의 교환을 통해 어떤 형태변환이 성취되는지를 파악하는 문제가 되니까요.

사이토는 이런 식으로 맑스를 이해하고 있고, 그러니 역사적 사회적 분석을 물질대사적 관점과 분리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사이토의 저런 접근에 좀 회의적이긴 합니다.

사이토가 저런 식으로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도 가고요.

맑스의 “물질대사” 같은 개념을 말할 때, 맑스가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될 만한 몇몇 인물을 거론하며 그들의 저작에서 발췌할 수 있는 흥미로운 구절을 근거로 맑스를 말하는 치들이 있고, 그들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저 또한 니체 연구에서 같은 종류의 문제로 종종 빡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입장 자체는 그렇게 특이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저런 입장으로 맑스의 독창성이나 고유성을 얘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거리라는 겁니다.

사이토가 언급하는 것처럼 리비히도 저런 물질대사와 정치경제학적인 교환을 유비시킵니다.

사이토의 인용을 인용해보죠.

 

개인의 신체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의 총합에서도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의 모든 조건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물질의 변화가 이어진다. 구가가라는 유기체에서 활동하는 금과 은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에서 활동하는 혈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둥근 원반 모양의 혈구가 양분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매개체로, 물질 변화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체온을 유지하고 혈액과 체액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열과 힘을 생산하는 근본적인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 역시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매개하는 매개체가 된다.

 

사이토는 리비히의 이런 서술에 좀 당황합니다. 그러니 이게 “흥미롭”지만, “조악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 분석이 빠져 있다는 한계가 있다”고 굳이 “비판”하는 거죠.

전 사실 이거 보고 좀 빵터졌어요.

도대체 리비히가 저걸 얘기하면서 화폐를 분석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ㅋㅋ

애초부터 저 구절은 화학 개론서에 실려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리비히의 저런 서술은 생리학의 정치경제학으로의 유추확장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오히려 정치경제학의 생리학으로의 유추확장일 수도 있는 거죠.

리비히는 우리의 경제적 활동과 생리적 활동을 유비시킴으로써, 생리작용의 합리성 및 합목적성을 설명/논증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원래 설명과 논증은 쉽게 구별되지 않습니다ㅋㅋ)

근데 저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으니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는 게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애초에 저런 유비는 상식적이었어요.

사이토의 주장과 다르게 이는 로셔와 맑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정치경제학 자체가 저런 유비로부터 발생한 겁니다.

 

요즘은 “정치경제”란 표현을 잘 안 씁니다.

그러니 정치경제가 망하고 경제만 활개쳐서 문제라는 식의 주장이 가능한 거죠.

그런데 정치경제는 그냥 경제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습니다.

의미 자체가 다른 건 아니란 소리에요.(“경제”가 과거의 “정치경제”를 포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단 얘기입니다)

애초에 저게 왜 정치경제로 말해졌는지를 모르니까 저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economy란 말은 오늘날의 경제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었어요.

저 단어를 가지고, 자연경제, 동물경제를 말하듯이, 특별히 정치경제도 말한 거였습니다.

개념사가나 지성사가 모두 ‘경제’란 단어가 가정술로부터 비롯된 걸 상식처럼 여기던데 전 이거 완전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자연경제랑 동물경제는 자연 가정술과 동물 가정술이 되나요?(정치경제보다 자연경제와 동물경제가 먼저 사용되었다는 것조차 모르더군요 보통)

경제는 서로 다른 것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질서를 이루는 걸 의미했어요.(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활동을 통해 질서가 드러나는 겁니다. 질서가 먼저 있는 거죠)

교환, 출입, 상호작용 등을 통해서 특정한 질서가 성립하는 것을 “경제”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러니 인간 같은 동물의 신체가 먹고 싸며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질서를 “동물경제”라고 부른 것이고, 오늘날로 치면 생태계에 해당될 질서를 “자연경제”라고 부른 겁니다.

정체경제는 당연히 저런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공동체의 질서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거죠.

물론 “정치경제”는 인간들의 상호작용으로 국한되기도 했습니다만, 근대 경제학은 그런 국한을 극복하며 생겨났습니다.

중농주의가 근대 경제학의 기원이 맞다면 말이죠.

제가 맨날 얘기하지만, 중농주의는 원어로 ‘physiocracy’입니다.

직역하면 “자연정체론”에 해당될 표현이에요.

이게 생리학physiology이랑 연속되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애초부터 케네도 글케 유추 확장한 거였고요...

맑스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리카도가 자연과학적 근거 없이 수확체감의 법칙을 주창한 것과 별개로, 해당 문제가 정치경제학의 주요 문제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은 저런 유추확장이 정치경제학의 근본이었던 덕분입니다.

그니까 이런 유추확장은 걍 저 시대에는 당연했단 얘깁니다.

요즘 학자들은 각 분야의 자율성을 불가침투성으로 이해하며 다른 분야에 관심 없지만, 옛날 학자들은 안 그랬어요.

그냥 저런 유추확장이 당연한 거고, 그런 식으로 지식들을 종합시켜갔습니다.

다시 말해, 19세기 사회담론이 진화론 기반 구조 연구였던 것은 우연일 수 없단 얘기입니다.(야우스는 19세기부터 “기술”은 자연과 대립되는 개념이었다는 얼척 없는 주장을 하던데 진짜 뭘 몰라야만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언제나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전부 있어요. 자연과 대립시키며 기술을 얘기한 사람들도 있지만, 기술 자체를 자연 현상으로 이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식을 설명해야하는 게 전 좀 빡칩니다) 

그러니 맑스의 저런 자연학적 태도에 얼마나 중요도를 부여할지는 열린 문제란 거죠.

결국 <자본>의 자본주의 모순 진단이 문헌적으로 어떻게 논증되는지가 논쟁을 결정지을 겁니다.(전 하인리히가 쉽게 질 것 같진 않다 생각합니다)

맑스의 자연과학적 배경은 중요하고, 맑스가 <자본>을 집필할 때 특히 많이 연구했으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 너무 많이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좀 오바일 수 있단 것이죠.

뭐 지금 시대에는 강조할 필요가 있긴 합니다.

맑스의 <자본> 같은 책을 쓰고 싶다면서 헤겔 <법철학>만 읽는 게 연목구어란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죠.(<자본> 같은 책을 쓰고 싶으면 저처럼 연구해야죠... 맑스는 <법철학>으로 <자본>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배경은 배경에 불과합니다.

걍 좀 제대로 연구하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상식이지, 특출나거나 독창적인 입장일 수는 없단 얘기입니다.

사이토의 주장처럼 이런 관점에서 개성이 성취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맑스 사상은 언제나 시대착오적이게 됩니다.

당대 과학에 의존적이게 되니, 거짓일 수밖에 없죠. 때문에 “맑스주의”를 말하는 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껏해야 자연과학적 배경을 가지고서 경제학적 합리성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당연한 주장 이상이 어려워지니까요.

다시 말해, 발리바르가 내용 없는 철학으로 맑스주의를 재규정한 건 뻘짓이 아니란 것이죠.

“맑스주의”를 의미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 주장한 거에요...ㅎㅎ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