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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에서 모스로

저번부터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해석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야 뭘 좀 끄적거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성급하게 끄적거리고 있는 거기도 합니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데리다가 레비스트로스의 루소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레비스트로스의 모스를 비판하고 싶었는데, 데리다의 방식은 너무 수준이 높기 때문에 제가 언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지금 수준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도 충분히 의미 있을 듯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인정해야할 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해석이 기괴하거나 오독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를 현대 인류학의 선구자로 내세우며, 모스가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명하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모스의 진정한 기여는 인류학을 과학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과학적인 관찰은 관찰의 주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때에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모스야말로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긍정하는 방식으로든 부정하는 방식으로든) 손쉽게 해결하지 않고, 그 긴장을 인정하면서도 해소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룬 선구자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가 유일한 선구자는 아니라고 양보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는 특별한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20세기 초중반의, 저러한 접근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인류학이 나아가야할 길을 정확히 제시했기 때문이죠.

모스 이후에도, 과학적이기보다는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접근이 계속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모스의 작업은 특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굳이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찬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찬가가 바로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과 마나라는 모스의 핵심 개념어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언급했듯이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은 발견법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를 얘기했을 때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저런 발견법적인 개념이 연구를 더욱 잘 할 수 있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엄청난 오해입니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은 더 잘 연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선택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p.42 강조는 원저자)

레비스트로스가 왜 이렇게 진단하는지를 제 방식대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교환” 같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히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엄격하게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암석”, “고양이”, 심지어는 “나”도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물론 사회에는 어떤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건들 각각이 그것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특정한 유형의 사건이 될 수 있냐는 겁니다.

실제로 “사건”이란 것이 어떤 것일 수 있는 철학적으로 검토해보면 문제가 명확해집니다.

사건 이론만큼 합의가 없는 분야가 없거든요.

게다가 제시된 적 있는 모든 사건 이론은 괴상합니다.(이는 저 혼자만의 진단이 아니라, 마이클 루 같은 교과서 저자의 진단이기도 합니다)

“사건”이란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건이 “반복”될 수 있는 종류의 존재라는 우리의 직관에서 비롯됩니다.

분명 사건은 반복되며 같은 유형의 속하는 사건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게 어떤 것일 수 있는지, 어떤 것들은 반복적일 수 있는 사건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반복적일 수 없는 사건인지를 이해하는 게 매우 어렵습니다.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체계이론적으로 고려하면 문제가 좀 쉬워집니다.

사건은 사람들에 의해 반복되는 것으로서, 같은 유형의 것으로 포섭되는 무엇인가입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도약 덕분에 특정 사회 안에서 어떤 종류의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무엇인가가 “사회적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도약이 개인들을 경유한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개인들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개별적인 개인들에 의해 저런 도약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겠어요.

이를 적당히 뭉개면 신비가 되어버립니다.

이 문제를 좀 형식화하자면 이렇습니다.

사회 속에서 인정되는 “사회적 사실”은 객관적인 종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개인에 의존적이라면, 이는 주관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때문에 사회적 사실은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이율배반이 발생하게 됩니다.(p.43)

 

이러한 이율배반은 여러 수준에서 발생합니다.

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발생하죠.

어떤 특정한 사회 안에서도, 어떤 개별적인 사건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교환이나 결혼 같이 특정한 종류의 사회적 사실이기 위해서도 이율배반은 극복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사회적 사실이 존재한다면, 차이들을 무화하고 하나의 유형으로 귀속시키는 판단이 수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사회적 실재를 특정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p.39)

사회적 사실은 그 자체로 제도나 정신일 수 없고,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사실은 개인의 주관에 국한되는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지만, 심리적인 종합을 통해서만 현실화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회의 사회적 사실을 관찰하는 인류학자에게서도 발생합니다.

심리적인 종합을 통해서만 관찰과 검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p.40)

 

인류학이 수행되는 수준에서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집니다.

이를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관점 또한 관찰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보죠.

“결혼”은 범-인류적인 현상입니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결혼 제도를 갖추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어떤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회는 남자와 여자가 성적 접촉을 통해 성취해내는 인구 재생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할 겁니다.

하지만 인구 재생산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사회적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혼 제도로 남자와 연자의 성적 접촉을 통제하는 관습을 동일한 유형으로 여기지만 이는 임의적인 번역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각 사회의 그러한 관습은 매우 다르며, 그 의미나 역할 모두 상이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모두 “결혼”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동물들도 그러한 관습(?)은 갖기 때문이죠.

물론 우리는 동물들에게도 인간의 관습을 투영하여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자유혼” 따위로 동물들의 성적 접촉을 기술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사실”일 수 없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모스의 기여는 바로 인류학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바로 저러한 차이들을 무화하여 하나의 유형으로 포착 가능케 하는 인식적인 관점을 제시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총체”를, 하나의 사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들 사이에서도 효력을 가질 “총체” 안에서 사회적 사실을 관찰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총체” 같은 것에 어떻게 접근 가능한지입니다.

이에 대한 단서는 바로 객관과 주관의 상보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사실은 심리적인 종합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총체는 심리적인 종합의 배후에서 발견되어야만 합니다.

총체는 무의식의 영역에 속합니다.

주관과 객관의 일치는 언제나 잘못된 동일시identification일 수 있습니다.(p.45)

개인 안에서, 그리고 개인 사이에서의 일치는 의식 차원에서의 동일시로 환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관찰되어야하는 일치는 주관과 객관이 교차하는 지점, 주관의 성립을 결정하면서도 주관으로 포착될 수 없는 무의식 층위의 현상이어야만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의식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인류학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혹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어떤 것인지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모스의 연구 영역이 레비브륄이나 융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죠.(pp.46-49)

인류학에서 다뤄지는 무의식은 “주관적인 자기와 객관화하는 자기 사이, 때로는 객관적인 자기와 주관화된 타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추구”의 영역입니다.(p.48)

다시 말해, 인류학이 다루는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인 겁니다.(ibid.)

무의식적인 것을 집합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인류학일 수 없습니다.

인류학은 무의식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구체적인 시도들을 실증적으로 연구합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모스의 “마나”는 바로 저러한 동일시를 실증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제안된 개념입니다.

마나는 실체가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무지의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그거”, “거시기”, “무엇인가”에 해당될 무엇인가죠.

레비스트로스는 그렇기에 마나가 “부유하는 기표”에 해당되는 기표라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마나가 이런 개념이라면 모스의 마나 개념 사용은 문제되지 않을 겁니다.

부유하는 기표는 작동하는 체계에 필수적이고, 레비스트로스 또한 이를 받아들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의 마나 개념을 비판합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모스는 마나 개념을 오용했습니다.

모스가 마나 개념에 특별한 힘을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모스는 특정한 개인들이 동일시를 수행하는 데 있어 마나라는 관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기를 보고 불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인과성” 개념 덕분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모스에 따르면 마나 개념은 바로 이런 인과성 개념, 어떤 결과를 발생시키는 “힘”에 대한 인간의 발견법적인 개념입니다.(p.72)

모스는 마나 개념을 통해서만 다른 사회의 사회적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모스의 실수였습니다.

인과성 개념 없이도 연기를 보고 불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이 추론 없이 반응하듯이, 이러한 연결은 그 자체로 주어지는 사태일 수 있습니다.(p.77)

동일시는 물론 주관 속에서 수행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p.76)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주관은 그 자체로 발생하는 현상으로서의 동일시이며, 이런 동일시의 관념적인 작동원리는 사태에 본질적이지 않습니다.(p.73)

동일시가 먼저 존재하고, 이에 대한 해석이 부차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이지, 해석이 동일시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류학적인 실증 연구는 관념 연합의 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연합들을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스는 이러한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였고, 인류학을 이해의 영역으로 귀속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란 것은 비과학적인 주관을 반영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의 사회적 사실을 이국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비학문적인 여흥에 불과합니다.(pp.74-75)

모스의 마나 개념은 그렇기에 문제적입니다.

하지만 마나 개념 자체가 문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나 개념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인류학적으로 활용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해 모스의 이해가 문제일 뿐이죠.

마나 개념을 신비로부터 구해내어 올바른 위치에 놓는다면, 부유하는 기표로서, 제로 상징가로서 여긴다면, 마나 개념은 인류학의 개념일 수 있습니다.(pp.80-81)

 

레비스트로스의 진단은 매우 학문적이지만, 그럼에도 불합리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마나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 인류학이 수행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합니다.

 

“우주 전체가 단번에 의미를 갖게 된 순간이 곧 사람들이 우주를 더 잘 인식하게 된 순간은 아니다. [……] 기표 전체와 기의 전체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상호일치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들을 선택하는 과정으로서의 인식은 아주 느리게 궤도에 진입한다. 마치 인류가 하나의 광대한 영역과 그 세부 지도를 단번에 획득했고 둘 사이에 대응관계가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지만, 지도 위의 어떤 상징이 그 광대한 영역의 어떤 광경을 표상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수천 년이 걸려야 했던 것과 같다. 우주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무언가를 의미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앞선 분석에서 도출되듯, 처음부터 우주는 향후 인류가 인식하게 될 것들의 전체를 의미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인간 정신의 진보라고 부른 것, 또는 적어도 과학적 인식의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완결적이고 자기보완적인 전체의 내적 조정 작업처럼 이뤄질 수밖에 없다. 즉 진보란 내적 분할들을 바로 잡고 새로운 분할과 편성을 시도하며, 소속 관계를 정의하고 새로운 자원을 찾아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pp.77-78)

 

이 구절이 도대체 마나 개념과 무슨 상관인지 의문이 들 수 있을 겁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마나에 대한 주관적 이해 없이도, 인류학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마나를 통해 이해하려고 하는 동일시의 시도는, 객관화 가능한 동일시들을 시도하는 활동으로도 충분히 기술될 수 있어서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사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사이에서도 적용합니다.

인류학에서 수행하는 “동일시”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동일시의 내적 근거가 아니라 동일시 자체가 중요한 것처럼, 인류학 또한 동일시의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동일시들이 계속해서 시도되는 것만으로도 학문은 성립할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인류의 세계 이해의 “역사”가 올바른 이해와 독립적으로 진보했듯이, 인류학 또한 그렇다는 것이죠.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더라도,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를 추구하지 않아야만 학문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한, 인류학은 학문이 아니라 마법이라는 진단 아래에서 말이죠.

 

전 레비스트로스의 이러한 진단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류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의 상보성을 긍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인류학에서의 상보성은 자연과학에서의 상보성과 다릅니다.

인류학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 혹은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이기 때문이죠.

이는 레비스트로스 본인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p.43)

그런데 레비스트로스는 마치 그런 주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제안하는 접근은 사회적 사실이나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에 닿을 수 없습니다.

이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동물들의 반응들과 사람들의 추론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의 반응과 사람들의 추론은 다릅니다.

이는 동물들에게는 영혼이라는 신비로운 실체가 부여되지 않고, 인간에게는 부여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사실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추론은 동물에게서는 그다지 잘 발견되지 않는 추론이이서 그런 것입니다.(이는 인간의 이성을 주지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당 스페르베르도 인정하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을 주지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강조되어야만 하는 구별입니다)

상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상징은 동일시의 특정한 유형입니다.

총체화를 통해 엄격한 자타구별을 생성해내는 독특한 유형의 추론이죠.

인간은 유인원들 중에서 매우 특이한 종에 속합니다.

인간이란 종의 특이성이 그렇다고 신비로운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사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에 가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유인원과 달리 말이죠.

이는 인간이 사적인 친밀도와 상관없이 집단적인 방식으로 자타구별을 수행하는 덕분에 가능한 것입니다.(이는 <인간 무리>란 책의 핵심 주장입니다)

이런 자타구별은 특정한 기표를 특정한 기의로 환유하는 인간의 추론 덕분에 가능해지는데, 이게 바로 상징 능력입니다.

이 상징 능력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을 “우리”로서, “인간”으로서 환유하고, 특정한 집단들을 “적”, “악마”로서 환유합니다.

이러한 환유는 단순한 동일시 시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상징 기호들의 내적 연관성을 통해 환유를 공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상징은 그 자체로 발생하는 행위가 아니라 의식 속에서의 종합 속에서 그 합당함이 “판단”되는 활동인 것입니다.

때문에 종합의 이해가 중요해집니다.

어떻게 개별 부족들이 자신들을 총체화하는지는 이국적 취향이 아니라, 인류학 고유의 연구 대상입니다.

인류학의 연구 대상은 개별적인 동일시 시도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동일시 시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바로 총체를 종합하는 인간 특유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족지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인용할 때 “인류학”으로 말한 것들 중에 “민족지”도 있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족지의 가능 근거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민족지가 민족지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류학 일반으로 환원될 수 없어서입니다.

ethnology가 아니라 ethnography가 필요한 이유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처럼 모든 인류가 ‘우주’란 단어의 시작과 함께 같은 게임에 들어섰다면 민족지는 필요없을 겁니다.

민족지가 필요한 것은 “모든 인류”를 말하기 어려워서, “모든 인류”가 ‘우주’란 단어로 “함께” “같은” 게임에 들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서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번역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옳게 주장하면서도, 마치 번역이 당연하고, 그 번역들은 자동적인 기표 처리를 통해 확보되는 진보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전 이것이 예정조화와 무엇이 다른지, 구원 혹은 심판에 대한 신앙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미래는 중요합니다만, 미래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것이 예수처럼 심판해서가 아닙니다.

현재의 의미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중요하고, 지금 우리가 연구하는 대상들이 중요합니다.

미래가 중요한 것은 현재를 정당화하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활동을 계속 이끌어가기 위해 계속 미래로 현재를 투기해야만 해서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을 섭리에 맡겨두고 현재를 숭고하게 마조히스트처럼 견뎌내자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동일시 시도”를 밝히는 인류학자의 길일 수 없습니다.

동일시는 모두 오류이며, 이는 투기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점에서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인류학의 근거를 옳게 진단했음에도, 옳은 연구방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모스의 길은 순전한 과학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스처럼 이해를, 특정한 총체성을, 그 자체로 과학적일 수 없는 “마법”의 영역에 투신해야만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위험 부담을 감수하길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상아탑 속에 안주하는 것이 학문이지 투신하는 것이 학문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학문은 애초부터 투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자연과학조차 말이죠.

그래도 레비스트로스가 옳습니다.

모스야말로 진정한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의 공험은 그 마나 개념까지 포괄합니다.

우리 또한 “마나”로, 다른 인간, 다른 사회, 인류 일반의 배후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인류학의 과학성과 현대성은 이 현실을 부정으로 극복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실천 현실임을 인정하고 끌어안는 덕분에 성취됩니다.

레비스트로스 말마따나 모스는 바로 그 점에서 칸트를 닮았습니다.(p.73)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이 모스의 오류라고 진단했지만 이는 오류입니다.

칸트는 선험적인 원리를 실체로서가 아니라 투기로서 선포했고, 모스 또한 이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구시대적인 철학자로 전락하지 않은 것처럼 모스 또한 구시대적인 인류학자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모든 학문은 비판에 근거를 두어야만 합니다.

“선험적 종합”으로 분석하고 그 요소를 밝힐 때에만 학문적 대상이란 게 신비로부터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모스의 길이야말로 마법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것은 섭리가 아니라 과학에 따른 입증 책임이기 때문이죠.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