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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예술을 향하여 (1)

조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에 대해서 얘기하려니 생각이 많아지네요.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들을 꺼내보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이런 물음에서 시작해보죠.

비극과 히극에 대한 니체의 견해에 제가 주목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물론 논문으로 써보기에 적합한 주제라서 주목했을 수도 있습니다.

비극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있지만 희극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는 것에 불만을 느꼈던 것도 있고요.

설사 비극에 대한 “많은 얘기들”에도 많은 불만을 품고 있을지라도 말이죠.

그런데 제가 니체의 희극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웃음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습니다.

니체의 웃음에 대해서는 좀 병맛의 것들일지라도 얘기는 되어 있거든요.

전 그런 얘기들 자체에 신물이 났습니다.

뭐 얘기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좋은 얘기들이죠.

예컨대 웃음이 위험 없는 부조화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하고서, 세상의 (소위) “비극”을 웃음으로 넘기는 태도를 말하는 걸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게 철학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얘기니까요,

또 니체에 대한 틀린 해석도 아닙니다.

니체가 웃음으로 말하는 것들은 실제로 저런 것들이거든요.

애초에 니체가 비극과 희극을 말한 계기가 그렇잖아요.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미 태어나 어쩔 수 없고, 차선은 빨리 죽는 것이라는 실레노스의 지혜와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을 조화시키는 것이었으니 말이죠.

니체는 애초부터 실레노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이 명랑했던 것이 아니라, 실레노스의 지혜 덕분에 그리스인들은 명랑했다고 썰을 풀며 비극과 희극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니 웃음으로 저런 얘기를 썰푸는 건 니체에 대한 대충은 올바른 해석이 맞습니다.

저런 게 아니면 도대체 뭐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런 얘기가 하기 싫었습니다.

이건 제가 말할 이유가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냥 인문학 유튜버들이 읊을 만한 얘기지 전문 연구자가 논의할 것도 아니고, 철학자가 굳이 저런 걸로 지면을 소진시킬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전 애초부터 웃음이 아니라 희극을 얘기하려고 했고, 제가 희극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희극의 형식이지 희극의 웃음 유발이라는 특징이 아니었습니다.

희극을 대충 웃음을 유발시키는 예술로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모든 웃음을 유발하는 예술이 희극인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게 니체가 말하는 희극은 아니거든요.

비극을 얘기할 때, 니체는 그것이 대충 현대적으로 “비극적인 예술”이 아니라고 방방 뜁니다.

슬픔을 쥐어짜내는 것만큼 비극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고 지적하면서 말이죠.

애초부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비극이라는 단어는 말부터 이제 슬픔을 뜻하게 되었지만, 그리스 비극의 어원은 슬픔과 무관하거든요.

희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희극의 어원은 웃음과 무관합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결국 해당 장르의 큰 특징은 그 장르의 형식에 있었습니다.

당대에는 ‘하모니’라고 불렸지만 지금 우리의 언어로 따지면 화성보다는 선법에 가까운 무엇이 바로 그 형식으로 여겨졌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하모니가 선법이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물론 화성도 아닙니다.

둘 모두를 넘어서는 뭔가죠.

오늘날 우리의 음악은 워낙 발전해서 이런 식의 유형이 범주화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음악 장르를 규정하는 형식을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테니 말이죠.

고대에는 달랐습니다.

하나의 장르는 하나의 형식에 기초하고 있었죠.

그리고 이는 박과 선법, 악기 등으로 명확히 규정될 수 있었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그러한 음악들이 구체적인 제의에 기초하고 있었던 덕분일테고 말이죠.

음악은 아무 때나 그냥 귀에 이어폰을 꽂아 넣으면 들을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특정 시기에 특정 제의에서 들을 수 있는 무엇이었죠.

그리고 그러한 제의들은 단순히 시각적이고 관념적인 상징에만 기초한 게 아니었습니다.

굿을 할 때 상징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음악도 상징만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냥 요란한 소음 창출로 보일 수 있겠지만, 굿은 종교적인 음악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고 조금만 들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에 불안함을 느끼는 건 강아지만이 아닙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죠.

그런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에 노출되면 인간 또한 특정한 정신 상태에 돌입하고 그걸 발판으로 굿이 효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굿을 진행하는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도 이런 효력 덕분일 수도 있고(굳이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굿을 안 하고도 작두를 탈 수 있는 무당이 있기 때문입니다), 굿이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를 갖는 것도 이런 효력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죠.

굿하면 떠오르는 소리, 요란한, 하지만 무형식은 아닌 그것이 바로 제가 말하려고 한 음악 형식입니다.

제의에 의해 시공간적으로 규정되고, 제의 규범에 의해 악기나 음, 선법 등이 제한되죠.

비극이나 희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행자가 몇 명인지,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사용되는 악기는 무엇인지가 관례로 정해져있었죠.

그러니 장르로 구별될 수 있었습니다.

슬픈 이야기로 눈물을 쥐어짜내면 비극이고, 어떻게든 사람들을 웃게 하면 희극인 게 아니라 말이죠.

 

희극의 구체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제가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희극체에 대한 연구는 있긴 합니다.

그러니 <폴리테이아> 4권 같은 곳에서 “희극체” 서술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일 테고 말이죠.(플라톤의 “여성 정치가론”은 진지한 주장이 아니란 건 “해석”이 아니라 문체로 실증 가능한 문헌학적 사실이란 얘기입니다)

근데 이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애초에 비극에 대한 니체의 논의도 마찬가지죠.

뭐 니체의 비극론이 그렇다고 해서 허무맹랑한 헛소리인 건 또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니체의 해석이 결과적으로는 옳았습니다. 문헌학적으로도 말이죠.

문제가 된 건 애초에 주장이 아니라 방법이었습니다.

빌라모비츠 말마따나 문헌학자는 저런 식으로 주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문헌학적이지 않게 뇌피셜로 썰푼 주장들이 문헌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해서, 니체의 주장이 문헌학적인 게 되는 거는 압니다.

애초에 니체의 비극론은 문헌학적인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헌학적인 사실에서 멈추지 않고 예술 형이상학적인 주장으로 넘어갑니다.

단지 문헌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저런 예술의 형식성에 기초해서 파악한 인간성이 있을 뿐이죠.

전 이런 걸로 얘기하고 싶었고, 그래서 예술의 형식성을 계속해서 연구한 거였습니다.

비극과 희극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예술의 형식성과 그것으로 발견한 수 있는 인간성으로 말해야만 하는 철학이었기 때문이죠.

 

예술의 정치성을 말한 것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특별한 규범을 제안하는 것도 저런 기획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에 접근할 수 있는 꽤나 좋은 진입로가 떠올랐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강조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있는 예술의 정치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내용이 정치적인 것은 관심 거리가 안 됩니다.

대체로 그것들은 나쁜 예술의 온상이고, 애초에 “예술”로 말해질 이유가 없는, 혹은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확보되는 정치성은 아니기 때문이죠.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그런 난리통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어린 애도 알 겁니다.

근데 이건 예술이라 가능해진 재현이 아닙니다.

저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정치성을 갖는다면, 적어도 그건 저것이 영화여서도, 예술이서도 아닙니다.

걍 내용이 그걸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건 제 관심이 아닙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유치찬란하지 않더라도 전 똑같은 태도로 심드렁해했을 겁니다.

제가 최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대해서 심드렁하게 얘기한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 때문이거든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유치하고 쓰레기 같은 영화죠.

반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약간은 유치해도 절대로 쓰레기 같은 영화는 아닙니다.

<나우시카>의 유치함이 그렇게 문제적이진 않다는 그냥저냥의 양보가 아닙니다.

<원령공주>는 유치하지 않은 완벽한 영화지만, 유치할 수 없었기에 생긴 한계를 고려해서 <나우시카>를 선정한 것이기 때문이죠.(언제나 어떤 명확함은 유치함을 내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콘크리트 유토피아>랑 비교하는 건 너무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냥 관객을 개돼지로 상정하고 니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이런 포인트에 감동을 느낄 거야라고 생각하며 만들어낸 쓰레기 영화니 말이죠.(관객을 개돼지로 상정하지 않았더라면 감독과 작가가 개돼지라 다른 종류의 쓰레기 영화입니다. 위선은 면했기에 면벌의 이유는 있겠지만 쓰레기가 아닐 이유는 그대로 전무하겠죠)

캐릭터 자체가 배우의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죠.

저 새끼가 왜 저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 영화를 본 사람들이 토로하듯이 박보영이 연기한 캐릭터는 발암캐입니다.

이걸 보고 이기주의의 편협함으로 캐릭터를 심판한다고 비판하는 놈들이 더 쓰레기입니다.

그래서 저러는 이유가 뭔데라고 물어보면 쓸데없는 소리만 하거든요.

애초에 왜 저러는지도 모르고, 극중 전개도 핍진성이 매우 떨어집니다.(제가 이 영화르 삼일에 걸쳐 본 이유... 지루해 뒤지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박보영이 옳았던 것처럼 마무리되는데 그 장면은 영화 이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말이죠.(<미스트>처럼 저게 “결말”인 것도 아니란 얘기입니다)

근데 이걸 아무리 잘 포장해도 이건 예술의 정치성과 무관합니다.

정치성을 다른 것에, 그니까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나우시카>처럼 자연과의 상생 같이 주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죠.

애초부터 저 정치성은 저런 주제에 기초하고 있죠.

예술 자체에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술의 정치성, 예술 자체에 기초한 정치성은 무엇일 수 있냐가 문제겠죠.

예술의 재현에 대한 이해와 직결된다가 제가 찾은 진입경로입니다.

예술의 재현성에 대한 비판이 많죠.

전 그러한 비판은 예술의 재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전 저러한 비판에 다 동의합니다.

제가 주제에서 비롯된 정치성을 예술의 정치성에서 배제한 것도 저런 태도와 공명할 거고 말이죠.

예술의 재현은 모방이 아닙니다.

구두 그림은 구두를 그린 거죠.

보통 이럴 때 사람들은 예술의 모방을 말합니다.

근데 그렇게 그려진 구두가 구체적인 어떤 것일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제 닥터 마틴 더비를 그리는 것은 분명 모방일 테지만 모든 구두 그림이 이럴 이유는 없습니다.

고대인들 또한 지적했듯이 화가는 세상에 없는 것을 그릴 때가 더 많으니 말이죠.

세상에 없는 것, 혹은 세상에 있는 것들에 기초해서 무엇인가를 그려낼 때도 모방이고, 원래 예술의 “모방”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지만(그 어떤 예술가도 걍 눈 앞에 있는 것을 모사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재현은 이런 모방도 아닙니다.

제가 지적하는 재현은 이런 겁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기에 재현합니다.

재현represent이라는 말의 중세적 용법처럼 예술의 재현은 부재를 의미합니다.

예술은 여기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점에서 재현합니다.

이게 뭔 소린지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제가 관악산에 올라서 볼 수 있는 바위는 딱히 재현하지 않습니다.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죠.

반면 예술은 그냥 거기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 있으면서도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그게 구두 그림처럼 구체적인 구두나 구두 일반을 가리키지 않을지라도 말이죠.

애초에 그냥 여기 있는 것은 예술작품이 아닙니다.

그게 예술작품이라면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라도 재현입니다.

예술작품을 재현한다는 점에서라도 말이죠.

제가 산에 오르면 보이는 바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어떤 의미를 갖긴 합니다.

제가 본 바위는 화강암이었습니다. 

화강암은 심성암이고, 한반도에서는 중생대에 형성된 암석이죠.

그러니 그 바위는 한반도의 지질, 한반도의 형성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부차적입니다.

애초에 거기에 바위가 없어도 되고, 그게 꼭 화강암이 아니어도 될 겁니다.

물론 다른 암석일 경우 관악산이 그렇게 생겨먹진 않았겠지만, 그게 꼭 중요한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우리나라 암산들은 화강암 기반이고 편마암 기반은 흙산이죠 보통)

애초에 화강암이 저런 의미를 만드는 건 부차적입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도 화강암은 화강암입니다.

화강암이 꼭 중생대에 속할 이유도 없죠.

그냥 지구의 역사에 의존적으로, 한반도 지질 형성의 역사에 의존적으로 저런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가끔 딴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어떤 바위는 특별하고 바로 그것의 고유함에 의해 의미를 갖는다는 등의 소리를 할 수 있죠.

근데 그거부터가 이미 걜 바위로 안 보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고 있는 거죠.

그게 다른 게 생겼고, 고유성이 없다고 달라질 게 없습니다.

달라진다고 방방 뛰면 본인이 품고 있는 다른 것(의미) 때문이죠.

예술처럼 말이죠.

예술은 그냥 거기 있으면 안 됩니다. 고유해야하고 특별해야하죠.

근데 그건 그냥 거기 있는 걸로는 확보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냥 거기 있는 게 아니란 의미에서 제가 부재를 지적하고 “재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술의 재현을 말하기에 앞서 재현을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재현이란 것 자체가 매우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면 그것이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일 수 있겠어요.

 

다행히 이런 것에 대한 단서가 있긴 하죠.

소위 자연 상징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연기는 불을 “의미”하죠.

가끔 이런 거에 대해서 연기와 불의 관계가 불명확하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전 그런 지적이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불이 연기를 일으키는 건 아니라도, 연기는 정말 불을 의미합니다.

드라이 아이스 같은 건 애초에 연기가 아니잖아요?

위로 솟는 게 연기인데, 위로 솟고 있으면 뜨겁다는 거고 그러면 불이 있을 겁니다.

물론 지하에 있던 가스가 솟구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가스 자체만으로는 연기로 보이지도 않을 거고 지하에 있던 가스가 갑자기 지상으로 뿜어져 나오면 불이 붙습니다.

그러니 결국 연기라면 불이 있는 건 오늘날에도 매한가지란 얘기입니다.

논리적으로는 결정적이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꽤난 법칙적으로 단단한 의미 관계입니다.

이런 것들이 있죠.

예컨대 북극성이 북쪽을 가리킨다거나, 지구가 자전하는 게 하루고 공전하는 게 일 년이란 것 등이 그렇죠.

이건 연기보다 더 확고합니다.

지구 극 방향으로 결정되고 그 방향에 항성이 있다면 그건 북쪽을 “의미”할 수밖에 없죠.

하루와 일년이 좀 더 심각합니다.

지구의 자전이 느려지고 공전이 느려진다고 말하며 하루가 길어진다고 말하곤 하죠.

1초를 세슘 원자가 91억9263만1770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정의하는데, 이러면 좀 우습게 될 수 있습니다.

12시 12분이 자정이 될 수 있고 달력이 계절의 변화를 못 따를 수 있나요?

과학적인 정의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상 용어에서는 하루는 계속 자전 주기를 24시간으로 삼을 것이고, 1년은 공전에 기초할 겁니다.

자전과 공전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서 시간이 바뀔 거고 말이죠.

하루가 길어진다면, 24시간에 12분이 추가되는 게 아니라 1시간이 1시간 30초로 는 채로 1시간이 될 겁니다.

이런 건 “의미”라고 할 수 있겠죠.

무엇인가가 다른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일 테고요.

뭐 그 자체로 갖는 관계는 아닐지라도 나름 대상성/객관성에 기초한 관계일 겁니다.

자연법칙이든 자연법칙들이든 하여간 꽤나 확고한 규칙성에 의거합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알갱이가 좀 큰 단단한 하얀 바위면 화강암이고, 그것은 분명 중생대에 형성된 심성암일 것입니다.

그거 말고는 원인이 없을 테니 말이죠.

답이 나왔네요. 자연 상징은 원인에 기초하여 의미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이게 의미의 전부인가요?

 

여기서부터는 철학자들의 논의를 좀 경유하면 좋습니다.

특히 흄의 논의가 참 좋죠.

연기는 불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는 불이 연기의 원인인 덕분이죠.

뭐 이게 자연의 실재를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차치하고 저게 우리의 정신을 경유하는 건 분명합니다.

일단 연기란 것부터가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식에 의존하여 규정된 현상들의 묶음일테니 말이죠.

드라이 아이스의 “연기”는 연기인가에 대해서 딱히 이유를 얘기하지 않고 배제했지만, 이 또한 논쟁적일 수 있죠.

연기는 현상적인 겁니다.

시각에 의한 거죠.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경유한다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죠.

중요한 것은 이것도 아닙니다.

원인으로 판단케 하는 게 무엇이냐는 거죠.

이건 그냥 관념의 연합원리 중 하나인 원인과 결과로 얘기될 게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지만, 흄은 원인과 결과와 인과causation를 구별합니다.

관념의 연합원리로 다뤄지는 원인과 결과는 그렇게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설명은 모든 원리를 반영합니다.

연기와 불의 관계만 해도 그렇죠.

이건 그냥 원인과 결과로 연합된 게 아닙니다.

그런 연합은 의미를 일반화하지 않거든요.

모든 연기에 어떤 불을 연결하는 추론은 “원인과 결과”로 치환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저는 블로그에서 “닮음”이 두 가지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resemblance와 simularity가 흄에게 구별된다고 지적했죠.

전자는 초상이 그 초상의 대상인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거고, 후자는 제가 아침에 밥을 먹고 허기를 달랠 거라고 기대케 하는 그런 거죠.

전자는 닮음이 같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상과 사람을 구별 못할 바보는 없으니 말입니다.

후자는 닮음이 같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 같음은 어제 먹은 밥과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르지 않다고, 즉, 특별한 차이가 없는 거라는 그런 의미죠.

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와 불을 엮게 하는 일차적인 연합원리는 원인과 결과겠지만(사실 여기에는 인접성도 중요한 역할을 할테지만 이는 지금 논의에서 부차적입니다), 이런 연합을 일반화할 때에는 후자의 닮음이 결정적이고, 이는 전자의 닮음과 원인과 결과의 또 다른 결합에 의해서 추론된 겁니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현상들 중 연기로 보이는 것들을 추리고, 그런 것들이 불의 존재를 가리킨다고 추론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추론을 넘어서 아예 이게 약정의 단계에 이른 게 자연 상징의 기호화일 테고 말이죠.

그리고 자연 상징이란 것도 결국 여러 연합을 통해 연결이 가능케 된 연결망을 통해서 말해지는 것일 테고요.

 

제가 이런 얘기를 길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 판본에서는 빠졌지만, 원래 흄은 관념의 연합원리를 다룬 직후 그것들을 장르랑 연관시켰었습니다.

닮음을 서사시에, 인접을 연대기에, 원인과 결과를 역사에 연결했죠.

결국 의미 연관은 의미 연관을 가능케 하는 연결들을 통해서 말해져야 합니다.

자연물에 부여되든 인공물에 부여되든 예술의 재현 또한 그런 연합을 통해서 말해지는 특별한 연결관계를 형식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말해질 수 있고 말이죠.

이런 걸 얘기할 때 모든 예술에 대해서 이를 말할 이유는 없고, 이는 불가능한 시도일 겁니다.

당장 연기만 해도 무엇을 넣고 뺄지가 논쟁적일텐데, 아무 것들에나 예술을 말하는 오늘날의 일상언어를 거스르면서 특별한 의미에 규범성을 부여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죠.

그럼에도 몇몇 중요한 사례에 대표성(이 또한 “재현”이죠)을 부여하면 좋은 얘기가 가능해집니다.

물론 여기서의 사례가 작품이 아니라 형식이긴 하지만요.

 

제가 다룰 형식은 바로 “허구성fiction”입니다.

허구는 재현과 동일하지도 않고 당연하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허구가 어떻게 가능한지조차 매우 불분명합니다.

허구는 어떤 것이 마치 다른 어떤 것처럼 볼 수 있어야 가능해지는 겁니다.

다른 어떤 것을 그냥 가리키는 걸로는 안 되고 대체되어야만 하는데(사실 여기까지가 재현), 이런 대체가 당연하지 않고 매우 의도적인, 같지 않고 대체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전제해야 허구가 성립합니다.

이런 이유로 허구가 어원적으로 “꾸며냄”, “조작”, “사기”, “구라” 등을 의미한 것이고 말이죠.

그런데 허구는 저런 부정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고대에도 허구는 법적으로 의제나 간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니까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님에도 다른 어떤 것으로 “간주”할 때, 이를 의제상의 그것으로 규정했습니다.

대표적인, 그리고 놀랄만한 예가 이런 거죠.

로마법에서 죽은 자는 상속이 끝날 때까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죽으면 인격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이럴 경우 상속이 제대로 안 이루어져도 권리 침해가 성립하지 않게 되거든요.

죽은 자의 의지/유언이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참고점으로 삼기 위해서, 로마법은 상속이 끝날 때까지 죽은 자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상속 완료 후 신체의 사망시점으로 죽음을 소급시킵니다.

여기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전형적인 fiction입니다.

그런데 이 때 그는 정말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과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상속 문제에만 저게 적용되거든요.

특수한 영역에서, 매우 구체적인 문제를 두고서, fiction이 성립합니다.

이는 다른 fiction도 마찬가지에요.

전 게임이 전형적인 픽션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게임은 비디오 게임이 아닙니다.

축구 같은 거죠.

지정된 시간에 골을 더 많이 넣은 팀이 승리하죠.

이때 승리가 픽션이 아니면 뭐겠어요?

“승리”는 전쟁의 언어입니다.

전쟁 이외의 것은 모두 유비적인 표현이죠.

다른 말로 픽션입니다.

상속에 있어서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자로 간주되듯이, 축구에서는 골을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걸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러니 승패가 있는 모든 경기는 일종의 픽션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런 픽션은 상속에서처럼 매우 제한적입니다.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에나 골을 많이 넣는다고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밤낮 할 것 없이 모든 골대 앞에서 정신 없이 골을 넣는 사람들이 즐비했겠죠.

또한 아무 방식으로나 골을 넣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축구공을 손으로 잡고 상대방 골대에 도달하면 환호대신 야유를 받겠죠.

제한된 시공간과 엄격하게 통제된 규칙을 따를 때에만 골을 넣는 것은 의미를 갖습니다.

가치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의미론적인 의미에서 말이죠.(그니까 골을 넣는 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떠나 그것이 골을 넣는 일이기 위한 조건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법적인 픽션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상속 의지 표명자가 저런 식으로 처리되지 않죠.

조선 사람이 로마법에 적용될 이유는 없으니 말이죠.

특정한 사람들에 한해서, 특정한 경우가 성립할 때에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픽션은 그러니 가정과 약정에 의한 현실 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짜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가짜임에도 현실로 간주되는 것이 중요하단 얘기입니다.

사기는 픽션이 아닙니다.

그건 가짜임에도 현실로 간주되는 게 아닙니다.

현실로 착각된 거죠.

또한 픽션은 비현실이 아닙니다.

축구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축구 자체는 허구가 아닙니다.

축구는 실재합니다. 단지 그것을 실재일 수 있게 현실화하는 것이 허구인 거고요.

그리고 바로 이 허구성에 기초해서 예술을 말할 때 예술의 정치성이 제대로 얘기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허구는 매우 목적 지향적입니다.

문제 해결 등을 위해 만들어진 현실이란 점에서 그렇죠.

축구 같은 경우부터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축구의 목적은 불분명하니 말이죠.

축구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축구를 현실로 만드는 허구 덕분에 축구라는 활동이 가능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와 무관하게 하여튼 그러한 의미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니까요.

허구성 자체에 주목하면 이런 가능케 하는 힘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예술의 허구성이라는 형식에서 이런 가능케 하는 힘에 주목하면 예술의 정치성이 다르게 보이고 말이죠.

예술의 내용을 가지고 정치성을 얘기하는 치들은 예술을 예술로 보지 않습니다.

학술서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을 나쁜 방식으로 다르게 얘기하는 것이죠 그냥.

생태 위기가 정말 중요하다고 할 때 그것을 전달할 최고의 매체는 학문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

생태학자들이 생태주의자들을 싫어하는 건 나름 다 이유가 있는 거에요.

엄격하게 얘기를 해야만 존중될 수 있는 건데 자꾸 이 문제 저 문제를 섞어대며 헛소리하니 불신만 팽배해졌거든요.

<침묵의 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그냥 생태주의자의 감성적인 얘기로 말하면 저 책을 모욕하는 거에요.

<침묵의 봄>이 생태운동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고, 바로 그런 운동 덕분에 저 책이 정말 힘 있게 된 것도 맞지만, 저 책은 명백히 생태학에 기초한 학술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엄격함이 그런 운동들의 힘에 “책임”을 부여한 것이고 말이죠.

적어도 그 운동의 힘은 저 책의 학술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그 운동이 현실에 부합하게 된 것은 학문성에 근거하고 있는 겁니다.

가짜였다면 그렇지 않겠죠.

내용은 그 내용이 근거하고 있는 현실을 토대로 검토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엄격한 현실 파악이 중요하고, 생태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등 학문에 기초해야하는 거죠.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감성으로 고찰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연을 사랑해도 복어독은 치명적인 것처럼 말이죠.

결국 내용의 정치성은 예술 고유의 것도 아니고 예술에 적합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의 허구성에 기초한 정치성은 어떨까요?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이는 예술에 고유한 것이겠죠.

중요한 것은 그게 어떤 종류의 정치성을 내포하는지입니다.

 

모든 허구는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정치 또한 허구에 기초하니 이는 당연한 것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진리입니다.

모든 허구는 그것이 주어진 현실과 다른 현실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보조하든, 보완하든, 이탈하든, 거부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허구에 개입하는 활동은 허구에 근거하고 모든 허구는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개입합니다.

심지어는 킬링타임용의 에로물이라도 그럴 겁니다.

현실을 잊게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니 말이죠.

지금 약간 ‘정치적’이란 말을 남용하고 있는데 이건 꽤나 유의미합니다.

애초에 무엇이 정치적이고 무엇이 정치적인지 아닌지를 위해서라도 바로 이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고려해야하니 말이죠.

정치는 로마법이나 축구로 얘기했던 허구의 특성을 잘 갖고 있습니다.

물론 저것들보다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매우 엄격한 규칙에 근거한 허구죠.

하지만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와 해결을 위해 따라야할 규칙이 불분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정치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현실과 허구의 혼합이기 때문이죠.

어떤 정치적 문제가 정치적 문제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허구에 참여해야만 하는 거고, 그건 로마법 전문가나 축구 선수가 되는 일처럼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훈련이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나서야 바로 그 허구가 공동체 전체의 현실이 되는 거고 말이죠.

아마 여기서 아까 얘기랑 상충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축구는 그 자체로는 허구가 아니라고 해놓고서는 여기서는 말이 바뀌는 것 같다고.

축구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모두의 현실은 또 아닙니다.

저처럼 축구를 안 하는,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축구는 다른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점에서만 현실인 그런 현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열심히 현실로 삼고 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이유도 없으니 받아들이는 거지 제 현실은 아닌 거죠.

적어도 전 축구라는 현실에 진입하게 하는 허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제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당사자성이 중요합니다.

남들의 현실이라는 식으로 정치적 현실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러면 왜 정치를 하겠어요?

왜 굳이 국내 정치에 주목해야하는지도 불분명하죠.

해외 축구 팀을 응원하는 사람처럼 그냥 해외 특정 정당을 지지해도 이상할 것 없으니 말이죠.

정치는 선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정치에 관심을 갖는지와 무관하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시민적 의무거든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헤서라도, 아니면 특정 정당, 특정 정책,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위해서라도, 아니면 특정한 정치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정치적 현실은 남들의 것으로 남아선 안 됩니다.

그 현실에 진입케 하는 허구를 배워야하는 거죠.

그러니 모든 허구는 정치적인 겁니다.

 

그런데 허구의 정치성은 예술의 정치성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술의 정치성은 허구의 정치성과 종류부터 다릅니다.

정치적 현실에 진입케 하는 허구는 예술이 아닙니다.

저런 허구는 전당대회나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정치인의 행보에 대한 홍보 같은 것인데 그게 예술인 건 아니거든요.(사실 여기에 어떤 사례가 속하는지는 아직 저에게 불명확합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비교항이 종교의 선교 활동과 비신자들도 참여 가능한 의례들이라는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을 듯합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예술의 허구성에서 비롯되는 정치성은 저런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저걸 가능케 하는 근거에서 비롯된 정치성입니다.

허구의 정치성을 얘기할 때 전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말했습니다.

바로 그걸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현존하는 허구들이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허구의 기술도 있기 때문이죠.

어떤 것이 허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 있듯이, 믿는 척하고 싶어도 믿는 척할 수도 없는 게 있습니다.(물론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도 중요합니다. 전 어떤 의미에서 축구를 믿는 척할 수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믿는 척할 수도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런 가능성은 매우 역사적입니다.

즉 변화한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변화가 단지 거창한 역사적 변천에만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허구의 기술에서도 차이가 있죠.

소위 매체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모두 이런 것입니다.

책이 없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했던 허구가 있고, 책의 등장 이후에 가능해진 허구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건 책의 존재유무만이 아닙니다.

어떤 책이냐도 중요하거든요.

대표적인 게 신약성서입니다.

신약성서는 네 개의 복음서와 사도들의 활동이 담긴 기록과 왜 사도인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사도이며 가장 중요한 사도이며 단 한 명의 사도를 뽑아야만 한다면 무조건 뽑아야만 하는 바울의 편지들을 묶은 겁니다.(묵시록도 있는데 이건 좀 논의에서 차치하겠습니다)

이런 묶음에서 네 개의 복음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애초에 바울의 편지는 그 자체로 성서가 아닙니다.

그냥 편지였던 것을 성서로 편성한 거죠.

복음서는 좀 다릅니다.

원래 없던 글인데 그게 등장하면서 사실상 성서가 된 거거든요.

또한 구약성서에는 없는 형식의 글입니다.

복음서는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전기 장르에 속하는 글이기 때문이죠.

한국어로는 철수나 영희에 해당될 아마도 글을 쓰는 노예였을 ‘마르쿠스’라는 사람의 이름이 붙은 글이 세상에 나왔고, 그 글을 모방한 글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이 소위 복음서로 불리며 신약성서의 뿌리와 줄기를 이루게 됩니다.

마치 예수의 기록인것처럼 여겨지면서 말이죠.(매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ㅋㅋ)

이런 가능성은 구체적인 장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전기가 그것이죠.

처음으로 복음서를 쓴 아마도 ‘마르쿠스’란 이름을 가졌을, 어디 출신이고 어디에서 살았고, 어느 종파에 속했고, 어느 계급이었을지는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특별한 형식으로 글을 쓴 덕분에 신약성서가 가능해진 겁니다.

이건 사소한 것일 수가 없죠.

역사를 바꾼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그 형식이 위대하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마르쿠스가 저런 형식을 창안하든 아니면 채택하든 어떤 방식으로 그런 가능성이 그에게 열려 있었던 덕분에 그 사람은 그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전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술에게 기대해야할 형식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어떤 주제에 대한 어떤 생각을 신명 나게 전달하는 것은 다른 걸로 해도 충분합니다.

예술이 정치적어야만 한다면 정말로 그것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런 겁니다.

특별한 형식으로 특별한 가능성은 여는 것입니다.

당장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현실이 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다지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어떤 허구가 가능케 하는 형식들을 창안하거나 정교화하는 일인 것이죠.

전 예술의 정치성은 이런 것이어먀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노예에 불과했을, 그다지 교양있지 않은 미천한 마르쿠스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도운 가장 중요한 혁신을 세상에 제공하는 것이 그것이죠.

그것들이 가능할 수 있게, 그리고 힘 있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야만 합니다.

이런 활동들이 허구의 고유한 영역이고 예술의 허구성에서 가능해지는 진정한 정치성은 바로 이것이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성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화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까는 장르로 얘기했지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르를 창안하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장르의 창안이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중요한 것이 장르의 창안일 이유는 없다는 것이죠.

제가 언급한 사례에서도 명확하죠.

전기를 쓴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서 “복음서”를 창안한 사람은 마르쿠스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의 이름을 빌린 이후의 복음서와 달리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복음서가 세상에 남겨진 것이고요.

전기는 중요한 장르고 특별함이 있지만, 전기를 창안한 사건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기가 가져온 가능성이 반드시 전기라는 장르를 경유해야하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전기는 아니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 어떤 전기보다 생생하게 한 인물을 삶을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장르 혁신이 아니라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가능성을 확보하는 활동입니다.

이런 활동이 일어나는 영역이 바로 “삶의 형식”이고요.

 

“삶의 형식”이라고 하면 보통 비트겐슈타인만 떠올립니다.

그런데 저 단어의 원어를 보면 약간 다른 인상을 받을 겁니다.

‘Lebensform’. 뭔가 생철학 냄새가 나지 않나요?

실제로 생철학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구글에 검색해보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죠.

비트겐슈타인 이름은 나오지도 않고 말이죠.

생철학에서 등장한 전문용어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게 이상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생철학하면 보통 어슬픈 헛소리로 삶에 대해서 떠드는 걸로 생각할 수 있는데(실제로 한국에서는 그렇게 소비되고 있죠) 원래 생철학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생철학은 생물학 기반의 학문적 철학이었기 때문이죠.

그럼 여기서 “생물학”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신경생리학도 포함되지만, 당대에 도입된 새로운 개념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예컨대 영토권 같은 게 그런 것이죠.

우리는 “새처럼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새들은 자유롭지 않다는 게 당대에 확증되었습니다.

새들은 영토 안에서 살고, 이동또한 매우 엄격한 규칙에 따르기 때문이죠.

생물학자들은 이런 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을 이룹니다.

삶이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출입과 활동이 규칙적인 하나의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죠.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그냥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구획되어 있고 규칙으로 채워져 있는 하나의 건물 같은 것이죠.

이런 건물의 재료가 다양하다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생물학적인 “환경Umwelt”이 건축학적인 “장소”와 인류학적인 “언어”에 이르는 것이 확인된 것이죠.

샤피어와 워프의 언어-사고 동일성 주장 같은 것도 사실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작업이었습니다.

저들이 좀 아마추어라서 과장되게 주장해서 그렇지 사고나 삶을 제한하고 규칙을 부과하는 “구조”는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 공간, 역사, 제도, 문화 등으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게 확인된 거죠.

그리고 저런 구조들을 분석하여 확인 가능한 여러 구조적 차이들을 “삶의 형식”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 삶의 형식은 애초부터 다양성을 소통가능성을 위한 개념이었던 거죠.

 

중요한 것은 이 삶의 형식이 제약과 통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형식은 제약과 통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의 형식은 오히려 자유의 가능성을 확보해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는 삶의 형식 속에서 누리를 수 있는 특별한 활동입니다.

자유는 임의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수 없습니다.

결정론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임의성을 가져오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듯이 말이죠.

자유는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하게 행위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활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나 “제작”과 구별한 “행위”의 영역이란 것이죠.

이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상황에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수행해낼 때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당연히 이것이 전형적인 energeia입니다)

그때 가치는 상태나 소유로 말해지는 게 아니라 실현으로서 그 자체로 누려질 수 있고 말이죠.

삶의 형식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제약과 통제가 아니라 자유의 근거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혁명은 바로 이것들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고요.

 

이 영역에서 진정한 혁명이 이루어져야하는지를 심도 깊게 다뤄야합니다.

진정한 가치 창출 원천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바로 이 영역이 우리의 삶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게해서기도 합니다.

사회가 변화하면 삶의 형식 또한 변화합니다.

그런데 삶의 형식이 변화해도 가치를 창출하는 삶의 형식 전부가 이에 적합하게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에서 공포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용기의 원천이었고, 용기라는 미덕은 단순히 공포라는 감정을 극복함으로써 달성되는 게 아니라 공포라는 영혼의 상태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특별한 힘으로 실행되는 에네르게이아였습니다.

이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는 역시나 전쟁이었고요.

그런데 현대에는 어떤가요?

일단 공포에 대해서 저런 이해를 갖고 있지도 않고, 용기를 발휘할 전쟁터도 없습니다.

전쟁터가 있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현대의 전쟁은 고대의 전쟁과 다르기 떄문이죠.

애초에 현대는 고대적인 미덕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구조 자체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삶의 형식의 변형은 규범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조건의 변화로 재편성되지만 그에 맞춰서 좋은 미덕들이 그대로 유지보존되는 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점에서 보존하는 미덕들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다른 삶의 형식에 의해 철저히 억압될 수 있습니다.

미덕은 그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 탁월함을 달성할 때 실현됩니다.

그런데 판사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권한을 행사하면 다들 비난하고 징계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장기적 불황에 의해 실직한 남자가 오랫동안 구직을 했음에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였고, 갓난아이인 자기 자식이 굶는 지경에 이르러 강도질을 하게 되었을 때, 그가 강도질을 하기 전에 수시간 이상을 주저하며 고민하였고, 결국 행한 강도질 마저도 너무 허접하여 쉽게 체포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 강도질에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봐 가짜 총을 사용했고 강도질을 당한 피해자마저도 그 사정을 듣기 전에도 이 사람의 딱한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을 때에도, 이런 사람을 감옥에 쳐 넣으면 결국 그의 처자식은 굶어 죽게 되고, 이 남자가 훨씬 더 다듬어진 범죄자로 훈련되어 출소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판사들이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막아두고 있습니다.

이것도 월권이란 것이죠.

어떤 가능성을 철저히 탄압할 때, 그것이 “공정함”이 아니라 미덕의 탄압임을 밝힐 때에도 삶의 형식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존의 삶의 형식을 분석하며 갈등을 이해하고 삶의 형식을 변경하고 재편성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연구 차원을 넘어서 삶의 형식 자체가 창안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불분명하거나 불가능할 때가 그렇죠.

 

전 요즘 어쩌다보니 동아시아쪽 연구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구들을 보다보니 수호전 같은 것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닫게 되었고요.

수호전 같은 게 왜 중요한지가 중요합니다.

그 때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가치 있는 삶의 가능성들 중 어떤 것들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뭐 중국인들이야 원래 부자가 되는 게 지고의 목표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 말이죠.

중국인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경멸스러운 야만족들에게 지배되고 있다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근데 그게 현실이고 심지어는 저항도 불가능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왜 위대한 중국이 저 미개한 야만족에게 굴복하게 된 것인지, 어떤 것이 부족했기에 그런 일어나면 안 되었던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바뀔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었죠.

재미나게도 이런 활동들이 문학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수호전 같은 것이 그런 것이죠.

그 책은 꽤나 라블레적입니다.

똥오줌이 즐비한, 신체가, 욕망의 기관으로서 난무하는 책이죠.

이런 책이 쓰여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호걸들은 전통적인 미덕의 캐릭터가 아닙니다.

욕망이 가득하고, 에너지가 가득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죠.

그들은 정체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특징이 그들에게 놀라운 힘을 부여합니다.

그들은 평생을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사는 사제들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제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냅니다.

그들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인물 군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불가능할 일, 놀라울 만한 일들을 해내죠.

수호전은 이런 삶들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위대한 중국이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굴복하게 된 이유이자 희망의 원천으로 말이죠.

이러한 삶들을 탄압되었고, 그렇기에 힘을 상실하였다고, 이제는 이러한 삶들을 복원시켜야하고 그러한 삶들이 특별하게 빛날 수 있는, 다양한 인물 군상 사이에서 사건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죠.

수호전의 집단 창작적 성격과 비평적 성격은 이런 특징에 기초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삶을 추가할 것인지, 혹은 배제할 것인지를 두고 문인들 사이에서 경쟁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러나 어떤 쪽이든 문학을 통해 삶을 그려내고, 그러한 삶이 당장 어떤 목적을 갖지 않을지라도, 힘을 충전할 수 있는 다양한 삶들을 구해냄으로써 혁명이 이루어져야한다는 데에는 동의했습니다.

얼마나 가능성이 보이는지와 상관 없이, 그 가능성을 고민하는 매체가 문학이었던 것이죠.

 

제가 요즘 보고 있는 게임 연구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화는 이미지를 기록하고, 문학은 사건을 기록한다면, 게임은 행위를 기록한다.

전 이 말이 반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회화는 이미지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루벤스의 용을 제압하는 성 게오르그의 그림 속에서 행위와 사건 또한 목격합니다.

문학 또한 마찬가지고 게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건과 서사가 불분명한 소설도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경험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혹은 목격하더라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는 행위들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죠.

이는 사소하지도 당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행위들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전 예술들이 허구라는 형식성 안에서 정치성을 발휘할 영역이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형식을 구조화하는 기술을 갈고 닦는 것, 그리고 그러한 기술로 무엇이 기록 가능한지를 실험하는 것이 그것이죠.

이 기술이 확보되고 유포될 때 우리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들을 훨씬 더 수월하게 재조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이 가능한 허구이고 어떤 것들이 불가능한 허구인지의 경계를 바꿔낼 수 있을 것이고요.

무신론자는 성인군자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스피노자가 폭파시킨 것처럼, 큰 공화국은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미국 혁명이 폭파시킨 것처럼, 대표는 오직 단절을 의미하고 민중은 지배자로 군림할 수 없다는 진리를 프랑스 혁명이 폭파시킨 것처럼 말이죠.

이런 가능성의 경계를 바꾸는 일에는 허구 자체를 바꾸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놀라운 혁명을 기록조차 못할 테니 말이죠.

전 이 영역에서의 활동, 이 영역에서의 정치야말로 예술을 통해서만 실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가능한지 불가능하지 불분명한 영역에 속해있기에 진정으로 허구의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