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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예술을 향하여 (2-2)

금방 쓰겠다고 얘기해놓고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지난 글은 쓰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끊고 마무리한 것이었고, 그러니 바로 이어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쓰는 게 오래걸렸습니다.

물론 이는 게으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쓰려고 했던 방향으로 쓸 수 없겠다는 진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글은 루소의 <신엘로이즈> 서문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전 루소가 소설의 유용성을 문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졸라로 시작했지만, 원래는 졸라를 제물로 삼고 루소를 얘기하려고 했었고요.

그런데 막상 졸라를 읽으니 졸라의 기획을 졸라와 다른 방식으로 옹호하고 싶어졌습니다.(나중에 얘기할 수도 있을텐데, 졸라는 콩트에 의존하여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루소를 더 이상 참고하기 어렵게 만들었단 것이죠.

루소의 고민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 읽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루소와 졸라를 같이 말하기는 어렵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소설의 유용성을 논의할 때 루소의 논의를 반드시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말이죠.(아마 다음에 얘기하겠지만, 루소는 애초에 소설이 허구인지 사실인지를 가지고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하면서도 더욱 비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졸라의 논의만을 가지고서도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얘기가 저번에 궁금하다고 말씀하셨던 흄에 대한 제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이걸 풀어보겠습니다.

 

졸라의 선언은 강렬하지만 의문이 들어야 정상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론 소설은 사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졸라의 저 주장을 약화시키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사실적인 소설”을 주창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졸라가 몇몇 구절에서는 저런 식의 표현을 쓰니 나름 문헌 근거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단순히 졸라가 직접적으로 소설과 사실을 등치시키는 발화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물론 그런 발화를 했고 이 또한 문헌 근거가 있죠)

애초에 졸라의 주장은 “사실적임”에 근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사실적인 것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과거의 문학들과 구별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의 문학들도 모두다 사실적이었을테니 말이죠.

문학은 원래 그럴듯해야합니다.(여기서 ‘핍진성’으로 번역되는 괴상한 단어를 꺼내진 않겠습니다)

그것들또한 모두 “사실임직함”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과거의 “사실임직함”과 현대의 “사실임직함”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테고, 졸라의 의도가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관습에서 탈피해서 진리로 이행했다는 졸라의 선언은 맥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

문학의 진리가 문학이 아닌, 문학 밖의 “과학”에 근거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화나 종교에 의존하던 것으로부터 과학에 의존하는 것으로의 이행은 그다지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소설가를 과학자의 발밑에 두는 일입니다.

소설가의 작업물 속에서 비과학적인 것들을 과학자가 발견하여 지적한다면 언제나 순종해야할테니 말이죠.

졸라가 저런 주장을 했다면 한심한 주장을 한 것잁테지만 다행히도 졸라는 저런 한심한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졸라는 문학자가 과학자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문학이 과학처럼 그 자체로 실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학이 단순히 사실적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가리는 힘이 있는 무엇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작가의 손으로 쓰인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일 수가 있나요?

또한 반대의 의문도 품어야 합니다.

도대체 사실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문학 작품일 수가 있나요?

이를 이해할 단서를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서는 “사실”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실은 사실 무엇인가요?

막연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사실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제가 어제 아침으로 카레를 먹은 것은 “사실”에 해당될 겁니다.(실제로 카레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실이 정말 저런 것들만을 가리키나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던가,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근대의 시작점이라던, 까마귀는 까맣다 따위는 어떤가요? 이것들은 사실이 아닌가요?

이것들이 의심스럽다면 이런 건 어떤가요? 흡연과 음주는 암 발생률을 높인다는 것, 이건 사실이 아닌가요?

제가 어제 아침으로 카레를 먹은 것은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로 말하는 것, 심지어 사실로 말해지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저런 구체적인 사건도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시작과 끝 뿐만 아니라 범위 또한 모호하기 때문이죠.

흡연과 음주는 암 발생률을 높인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말해진 게 아닙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게 전제되어 있는 경향성/법칙성을 언급한 것이고 그것은 어떤 특정한 곳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죠.(법칙은 어디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무엇인가입니다. 법칙을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하는 논의들이 1철학자 1이론인 건 우연이 아닙니다. 법칙이 시공간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란 “사실”이 1철학자 1이론이란 사태를 야기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요)

사실 “사실”이란 단어는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인도유럽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사실”의 역사는 충분히 복잡합니다.

일단 우리의 해석과 무관한 사건/사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증언”이란 의미와 그렇게 증언되는 (보통은 경악스러운)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저 단어는 그래서 법정에서 많이들 쓰였고, 17세기의 과학혁명의 흐름 속에서 통제된 개념으로 발전하였습니다.(자세한 건 메리 푸비의 A History of the Modern Fact: Problems of Knowledge in the Sciences of Wealth and Society를 참고)

재미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흄의 작업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흄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하나는 관념들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의 문제matter입니다.

전자는 형식적으로 포착 가능한 관계입니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던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따위가 해당되죠.

해당 단어의 의미를 알거나, 해당 단어의 의미를 통해 추론할 경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관계죠.

근데 후자는 도대체 뭔가요? 후자로 말해질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긴 한가요?

흄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관념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흄의 방식대로 분석될 이유가 있나요?

이는 단순히 관념 연합 원리를 거부하거나 수정하자는 그런 주장이 아닙니다.

흄은 어떤 관념에 대해서 어떠어떠한 관념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결합된 것이라고 분석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석이 우리에게 합당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런 의문은 단순히 흄의 분석이 틀렸다는 그런 식의 의문이 아닙니다.

애초에 흄의 분석이 어떻게 옳고 그를 수 있냐는 의문입니다.

흄의 분석은 옳을 수 있습니다. 그 자신에 대해서는 말이죠.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관념에 대해서 그게 옳을 이유는 무엇인가요?

흄은 제 정신을 분석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갖고 있는 관념의 기원을 파악할 수 있는 건가요?

이런 의문은 그렇게 기이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흄이 사물에 대해서 다발 속성 이론을 주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과는 빨갛고 달콤하고 향긋한 것이니, 사과는 “빨감”, “달콤함”, “향긋함” 등의 속성들의 다발이란 게 다발 속성 이론입니다.

흄이 저런 걸 생각했다면 제가 제기한 의문은 매우 합당하게 제기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사실의 문제 또한 저런 다발들의 관계에 지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과가 빨간 것은 총각이 남자인 거랑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사과라는 관념에 이미 빨갛다는 게 포함되어 있는데 사과가 빨갛다는 게 사실의 문제일 이유가 어디있겠어요?

빨갛지 않은 사과가 있다고 반박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건 그냥 다른 관념일 수 있거든요.

“사과”라고 부르지만, 그냥 동음이의어인 거죠.

그냥 “사과”라는 관념은 사실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사과’라는 내용을 고려하지 않은 음성기호/문자기호만을 공유하는 다수의 관념들의 집합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저런 집합의 원소들이 사람들마다 다르니 생각이 다른 것일 뿐이고요.

여기에 어떤 논리적 모순이 있나요?

반대로 “사과”를 저런 관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으로 만드는 데에 더 많은 공이 들지 않나요?(실제로 그렇습니다ㅋㅋ)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사실의 문제라는 게 가능한가요?

 

당연히도 흄은 저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흄은 애초부터 관념들을 주관적인 것으로 밀봉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흄은 로크의 작업을 이어받아 언어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로크의 <인간지성론>에서 언어는 최종적인 논의의 장이 됩니다)

관념을 주관적으로 밀봉시키면 자의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애초에 일반적인 관념이란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빵들은 고유한 개별자며 다 다른 인상을 불러일으키는데 “빵”이란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흄에게 있어 관념들은 저런 다양성들을 무시하며 도약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립하고, 관념 연합 원리는 저런 도약을 이끄는 지도원리이고, 저런 도약의 원천은 본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성에서 비롯되는 유사성과 함께 “사회성”에 의해 특정한 방식의 도약이 특정 집단 안에서 일반적인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통제의 중요한 매체가 바로 언어입니다.

언어에는 그런 도약의 방향이 “이미” 지시되고 있기 때문이죠.

때문에 관념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국한된, 본인 신체의 생리학적 작용에 의해 형성된 관념의 기원을 탐구하는 게 아닙니다.

해당 단어를 매개로 사람들이 저런 단어를 습득하고 그 단어를 사용하며 이루어진 변화들을 추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관념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은 저런 “역사”를 추적하면서 해당 단어에서 추출할 수 있는 “원리”를 포착하는 일인 겁니다.(이건 제 뇌피셜이 아니라 흄 [뇌]피셜입니다)

이걸 고려하면 흄이 역사를 철학 실천의 무대이자 방법으로 삼은 게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말이죠.

 

이게 도대체 졸라의 “사실”과 무슨 상관일까요?

흄의 사실을 정리해보죠.

흄에게 사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관념들의 관계로 단순화될 수 없는 모든 주장이 “사실”의 영역이죠.

물론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도덕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도덕은 왜 사실의 영역이 아닌가요?

말해진 바가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반응을 하는 것에 의해 객관화되었을 뿐 대상은 없는,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진술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사태를 가리키는 언어의 영역이기 때문이죠.(쉽게 말해 심리적 사태인데, 심리적 사태를 가리키는 의미는 아니란 얘기입니다. 예컨대 “어린 아이를 이유도 없이 학대하는 일은 나쁘다”가 “어린 아이를 이유도 없이 학대하는 일은 나쁘다라고 그는 생각한다”로 분석되지 않는다는 거죠. 보통 메타윤리학에서 흄의 윤리를 정서주의로 분류하고 정서주의에서는 이렇게 분석해서 오류라고 진단하는데, 흄은 저렇게 분석하는 게 말도 안 된다고 본인이 먼저 얘기합니다...ㅎㅎ)

그럼에도 저런 진술을 야기하는 기원은 객관적으로 말해질 수 있고, 그래서 논의가 가능합니다.

그럼 다시 묻죠 사실은 무엇인가요?

바로 저렇게 논의될 수 있는, 규칙성/법칙성이 성립하는 진술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흄이 “matters of fact”란 표현을 쓴 게 잘 이해가 됩니다.

증언이 있습니다. 그 증언의 질료/재료/소재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놀라서 잘못본건 아닌지, 공포심에 사태를 좀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지,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 이끌려 기억을 재조립한 건 아닌지 따위를 확인해야 도대체 무엇이 증언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법정에서 당연히 해야할 일들이고 이런 문제를 다룬 수많은 사례가 있고, 이런 사례를 기초로 한 수 많은 픽션이 있습니다)

흄이 사실을 말한다면, 증언들에 대한 탐구 끝에 내린 결론으로 규칙성/법칙성을 말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졸라의 “사실”이 이해가 됩니다.

 

졸라의 사실은 사건이 아닙니다.

졸라는 그 자신의 문학이 인간의 기질과 그 인간이 처한 조건으로부터 귀결되는 일련의 결과들을 보고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정말로 보고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결과인가요?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냥 결과를 기술했겠죠.

인간이나 조건이었나요?

그렇다면 그냥 인간이나 조건을 기술했을 겁니다.

졸라의 사실은 “귀결”도 “인간”도 “조건”도 아닌 바로 그 인간과 조건으로부터 귀결을 야기하는 원인입니다.(심지어 이것도 직접 주장합니다)

그 원인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흄은 역사-탐구로 밝혔습니다.

졸라는 그것이 콩트의 사회학, 역사-탐구로 확인된 인간 사회 발전의 법칙에 따라 파악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의문을 가져야할 겁니다.

아니 그럼 콩트처럼 사회학을 해야하지 왜 문학을 하고 있냐고.

사실 콩트의 사회학으로 생각해도 똑같은 의문이 들어야합니다.

콩트는 인간 사회 발전의 법칙을 파악했고 그래서 사회학을 주창하고 있거든요.

이미 법칙을 파악했는데 도대체 연구할 게 뭐가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콩트는 끊임없이 책을 씁니다.(공부는 안 하고 쓰는 거라 퀄리티 하락이 심각하지만... 하여간 뭔가를 얘기합니다!)

도대체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쓰는 걸까요?

저런 법칙은 거시적일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애초에 저런 거시적인 법칙은 논리적으로 연역된 게 아니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토대로 추상된 것에 불과하고 말이죠.

추상에서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성 등이 고려되지만,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매우 맥락적입니다.

그러니 할 얘기가 계속 남는 겁니다.

이런 식의 변화가 분명 있는 것 같은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다양한 변수들(환경과 인간성으로 말해질 수 있을)을 고려하고 통제하며 조정해볼 필요가 있겠죠.

그런 작업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발전의 법칙이란 건 이런 작업들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근거일 뿐이고요.(저러한 근거가 배후에서 하나의 무대를 제공하지 않으면 애초에 논의가 불가능하거든요)

그러니 콩트도 졸라도 뭔가를 써대는 겁니다.

 

아 일단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는지는 밝혔지만, 저런 사실들이 어떻게 “문학”일 수 있는지는 다음으로 미루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