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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론, 혹은 정치적 예술의 가능성에 대하여

조지에게 보냈던 편지




쓰는 데 참 오래 걸렸네요.
조사와 연구 때문에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거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 했습니다.
반쯤은 게으름 때문에, 반쯤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에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또 안타깝게도, 변명으로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날 전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에 대해서 심판했습니다.
저 작품이 정치적 예술일 수 없다고 주장했으니 말이죠.
비록 제가
일단 제 비평은 그때 언급된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과 무관합니다.
전 저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고, 지금 제가 다루려는 문제는 어떤 특정한 작품에 대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제안했던 것처럼, 제 논의는 예술 일반과 비평 일반을 향해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일반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작품이 정치적 예술인지에 대한 판단, 어떤 작품이 좋은 정치적 예술인지에 대한 평가는 지금 제가 하려는 작업과 무관합니다.
제가 읽어보지 않은 작품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난날에 제가 제기한 의혹을 거두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날 제기한 의혹은 판단과 평가를 가능케 하는 기준에 대한 것이었고, 제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분명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몰이해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날 제기한 회의는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 혹은 가능한 훌륭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제기한 비평이 아니었다는 것이죠.(제가 제시한 작품이 아니기도 하니...)
의혹을 야기한 것은 저의 기준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제 의혹이 작품에 대한 비평이었다면 이는 정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의적이거나 선험적인 기준을 작품에 강요한 것일 테니 말이죠.
쓰는 데 참 오래 걸렸네요...
오래 걸린 이유가 조사와 탐구를 위해 필요한 시간 때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게으름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사실 늦게나마 무엇인가를 적어서 보낸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속이라고 해도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기억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을 약속이었으니 말이죠.
때문에 늦어진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늦게라도 무엇인가를 쓴 일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예술의 정치성에 대해서, 정치적 예술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죠.
지환 씨는 김애란의 <물 속 골리앗>을 모범으로 제시했고 저는 이를 부정했습니다.
그 날 비록 제가 자신만만하게 저 사례를 부정했지만, 전 저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그러니 제대로 된 평가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저에게 있어 비평은 판정이나 심판이 아니라 사랑 고백 같은 것이기에, 그것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로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제 자신의 신조에 벗어나는 짓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강렬히 제 입장을 고수했던 것은 제 치기 어린 아집과 무지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단언하는 법이며, 그 날 현대 예술 일반을 비방한 저는 아마도 영화와 건축을 제외하곤 현대 예술들에 대해서 무지하니까요─부디 양해를!
이러한 무지함은 대단한 것조차 아닙니다.
무용은 접할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것이고, 현대 문학처럼 원래는 관심이 많았지만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집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이는 다른 의미에서 틀릴 수 없는 주장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습니다.
김애란의 저 소설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주장될 수 있는 일반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이죠.

애초에 저란 사람이 예술의 정치성 따위를 주장한 것이 얼마나 특이한 일이었는지를 알고 계시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론적인 사람입니다.
이는 제가 단순히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이론적일 수 있겠지만, 전 철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유달리 이론적인 사람입니다.
전공하던 분야도 이론철학이었고, 이론철학 안에서도 유달리 더 이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이론이 제 전문분야였거든요.
이런 제 취향은 책 읽는 취향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전 역사를 좋아하고 맨날 역사를 떠들지만 원래 그렇게 역사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역사학의 정통은 사회사고 전 당연히(?) 사회사에 흥미가 없었습니다.
사회사라고 할 만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긴 했죠.
하지만 사회사가들이라면 자신들과 엮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세계 체제론이나 대분기 이론 따위에나 관심을 가졌지 모범적인 사회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 먹고 사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쓰는 것을 싫어했고, 구체적인 물질들보다는 관념들에 더 많은 구체성을 느끼곤 했습니다.(전 “먹기 위해 산다”는 말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경멸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공감이 어려워서입니다)
그러니 사회사보다는 과학사와 사상사에 제가 이끌렸던 것은 보편인력의 법칙처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순전히 재미로 이쪽 책들은 보니 말이죠.

이론적인 사람이면 정치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한 게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이론적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들을 싫어합니다.
아마도 이는 정치가 기본적으로 이론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정치가 등장하면 구체적인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이 등장하겠죠.
이론적인 사람이라면, 예술이든 뭐든 간에 구체적인 것들이 나오면 바로 흥미를 잃을 것입니다.
저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들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는 공포의 근본적인 원인 따위를 따지는 그런 사변적인 영화들도 “충분히” 이론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저런 주제는 제게는 “영원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공포나 폭력 같은 것, 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했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저런 주장이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믿지 못하는 게 있다면 저를 위한 구원의 은총이지, 악의 존재를 부정하며 신을 변호하는 신정론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근거를 차치하고서도 이것이 저란 사람의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생각합니다.
저런 것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답게 저에게 저런 것들은 비존재로 치부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고, 저런 것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일은 지난 주 목요일에 먹은 점심밥 메뉴처럼 그렇게 중요해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저는 가끔씩 사제나 수사처럼 말하는데,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란 겁니다. 제가 경박한 인물인 것과 무관하게 전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제가 중세에 태어났다면 신학자가 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을 테고 말이죠. 중세에는 꽤나 경박하게 진지한 문제들을 놓고 다투는 것이 표준이었으니, 제 경박함은 신학자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가 아니라 타고난 신학자로서의 징표였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죠)
그러니 정치적인 것들에 대해서 제가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처럼 보이지 않을 겁니다.
이는 정말이지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취향에서 비롯된 차이기 때문입니다.(루터 말마따나 “저는 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아멘!”)

예술에 대한 제 태도도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 예술 작품들보다 예술 비평이나 예술 이론, 예술사 따위에 관심을 쏟는 인물입니다.
제가 고전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제 취향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식견이 그것들에 대해서 호의를 갖게 만드는 것이죠.
제가 자주 말하지만─저는 타락한 현대인이고, 타락한 영혼에는 고전적인 작품들이 와닿을 수 없습니다. 이는 원리적인 문제고 말이죠.(혹시하는 마음에 말씀드리자면, 저에게 고전은 일단은 고전기 고대를, 가장 넓게 잡아줘도 죽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대체로 20세기 초반까지에만 부여하는 호칭입니다)
그런 제가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 개입하는 작품에 호의를 표한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겁니다.
그러니 제가 예술의 정치성을 강조한 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론적인 주장을 하게 된 근거입니다.
물론 이는 유미주의자들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을 겁니다.
저는 평소에 비정치적 유미주의와 피상적인 사실주의가 예술을 망치는 근본악이라고 떠들고 다니니 이는 이상할 게 없습니다.
유미주의자들을 욕하려면 정치성을 얘기해야합니다.
예술의 자율성을 잘못 이해하는 그치들에 대해서 한방 먹이려면 예술의 자족성에, 예술의 자기지시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딴지를 걸 필요가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그날 현대 예술에 정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다른 극단을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술이 무엇인가를 지시한다는 진실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게 제 근거였습니다.
이는 이론적인, 그리고 원리적인 비방이며, 그렇기에 비난일지라도, 판별 근거를 제시한다는 비평의 고전적인 의미를 따르는 “비평”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예술이 정치성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는 제 진단의 근거를 밝히기 전에, 이런 진단의 층위가 성립한, 예술의 자율성과 지시 가능성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다른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은 당연히도 형식입니다.
하지만 예술 특유의 형식은 구체적인 형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작위로 문자를 입력하는 기계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똑같은 텍스트가 산출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이루지 않습니다.
이 논증은 물론 언어철학에서 유명한 논증이고, 이는 언어적 표현물이 지향성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위한 논증입니다만, 여기서부터 예술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논증이 예술에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예술일 수 있게 하는 것은 해당 대상이 갖고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완벽히 같은 성질을 갖고 있을지라도, 어떤 것은 예술이고 어떤 것은 예술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술의 경우에는 그것이 지향성을 갖고 있을지라도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완벽히 같은 작품이고, 둘 모두 인간이 쓴 것일지라도, 어떤 것은 소설이고 어떤 것은 역사일 수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 참거짓 유무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모든 문장이 참이라도 소설일 수 있고, 모든 문장이 거짓이라도 역사일 수 있습니다.(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가능세계들로 설명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많이 얘기된 것을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죠)
이런 기묘한 가능성을 근거로 제도주의 예술론을 설파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도주의 예술론에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 사례로부터 제도주의 예술론이 도출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저 사례를 제도주의와 엮은 것은 아마도 조지 디키일 것입니다. 단토는 단 한번도 제도주의를 표방한 적이 없고, 본인 또한 이를 강조합니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을 성립시키는 형식이 해당 작품에서 포착 가능한 형태적인 형식성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중요하고,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형식이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특정 사물의 속성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아니라 창작과 향유가 수행되는 차원에서 드러나는 형식일 뿐인 것이죠.

예술은 사실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술이 허구이기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술은 사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예술이 사실을 가리킬지라도, 그것이 예술의 본질에 속하지 않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술은 사실과 우연적으로 결합할 수는 있어도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예술일 수 있는 조건은 그것이 —인 것처럼 여겨지는 층위에 속하는지입니다.
—인 것처럼 여겨지는 층위에 속한다고 모두 예술인 것은 아닙니다.
예술이라면 이 층위에서 유의미성을 성취해낼 수 있는, 바로 이 차원에서 그것이 가진 내적 형식으로 유의미성을 산출할 수 있는 무엇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형식은 —인 것처럼 여겨지는 층위에서 유의미성을 산출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유미주의가 맞습니다.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형식이 존재하니 말이죠.
유미주의가 문제라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유미주의도 진실을 담지하고 있고, 바로 이것이 유미주의가 담지하는 진실입니다.
예술은 고유한 형식에 의해 예술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가진 형식에 깃든 아름다움에 근거하여 가치를 가진다는 진실이 그것이죠.
그러나 제가 유미주의를 비판한 것은 이 진실을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문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 형식의 유의미성을 평가하는 근거입니다.

제가 유미주의를 싫어하는 이유는 유미주의를 표방하는 치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어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저런 멍청한 주장을 표명하는 멍청이들이기 때문에 괜찮은 놈이 없는 것이고요.
예술의 아름다움을 문자적으로 읽고 추함도 예술일 수 있다니 뭐니 떠드는 저능아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둘 다 뇌가 없으니 저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다를 게 없는 유미주의를 선언할 건 또 뭡니까?
선언이 필요하지 않고, 선언될 수조차 없죠.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형식이냐이지 형식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오직 아름다움만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자신들이 하는 멍청한 짓거리에 비난이 쏟아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변명이지 숙고와 고찰에 근거한 입론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유미주의”를 제가 싫어하는 거죠.
이는 동어반복이라 무의미하거나 아니면 병신짓에 변명으로 사용되는 유해한 담론이니 말이죠.
유미주의자들은 대체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지들 꼴리는 것과 구별하지를 못합니다.
그래도 주창자 와일드는 어느 정도 형식이란 것을 아는 놈이었지만, 그 놈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꼴리는 거는 당연히도 아름다움과 다르고, 꼴리는 것도 매우 정교한 형식을 토대로 계발될 수 있겠지만, 꼴림은 형식에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형식이니 형식을 정교하게 떠들어야 하는데 유미주의자 치고는 이걸 제대로 하는 놈을 못 봤습니다.
유미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오류를 범합니다.
고유함을 얘기하려면 자족적인 특성을 얘기해야하는데, 자꾸 다른 것에 반한다는 관계적 속성을 끌어들이며 설명하려 하는 거죠.
“다른 것이 아님”이 “이것임”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닌데도, 도덕이나 실용성 따위의 다른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둥의 소리만 합니다.
이런 건 너무 멍청한 주장이라 반박조차 필요 없을 테고 말이죠.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예술다움과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일 수 있는 형식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당연히도 이는 문제적입니다.
애초에 형식에 대한 형식적인 기준 제시는 형식적으로 불가능하니 말이죠.
당장 산술 체계를 근거 지을 형식체계가 무엇인지조차도 논리학적으로 결정될 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 예술은 두 말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자연수 체계는 좀 덜 논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애초에 논리학적인 “증명”인데 사례에 근거한 것일 수가 없죠ㅋㅋ 자연수도 논쟁적입니다. 콰인처럼 ZFC는 거부하고 ZF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ZF에도 회의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수리논리학자가 아니고 제 입장은 전혀 중요치 않겠지만, 제가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근거로 삼고 있는 연구들은 저명한 수리논리학자들의 높게 평가 받는 연구들입죠)
형식적으로 결정 불가능하다면 몇몇 사례들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이를 근거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제가 고전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당연히 우연이 아니지만, 특권이 부여될 “몇몇 사례들”이 반드시 고전에 속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고전에 특권을 부여할 이유가 있긴 합니다.
고전에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해당 장르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죠.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여성서사” 같은 것이 좋은 예술의 근거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기준으로서 갖추어야 마땅할 보편성이 결여되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애초에 전 “여성서사”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조차 가늠되지 않지만, 이를 지적하진 않겠습니다. 부분전체론적으로 따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죠)
애초에 저게 기준이라면, 지금 문학을 가능케 했던 작품들,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가능케 한 작품들,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문학”일 수 없었을 작품들이 배제되는 문제적인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로 모두 정리가 될 수 있겠죠: “나는 무엇보다도 호메로스의 두 위대한 서사시와 신과의 약속이 담긴 오래되고 새로운 두 성스러운 문서를,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와 호라티우스의 서정시를,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들을, 키케로의 웅변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변론을, 장미와 성배의 두 이야기를, 단테의 신성한 작품과 데카메론의 저속한 작품을, 라블레와 스위프트의 희극을, 세르반테스의 모험기와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을, 볼테르의 계몽과 괴테의 폭풍을, 발자크의 소설과 플로베르의 반소설을, 톨스토이의 역사소설과 바그너의 음악극을,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카프카, 조이스로 대표될 무엇이지만 그 무엇도 아닌 그들의 그 무엇도 아닌 작품들을 말할 수 있지만 당신은 무엇을 말할 수 있냐고. 나에게 문학은 저것들이지 다른 것들이 아닌데 도대체 당신의 편협함을 기준으로 삼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저것들을 말할 수 없다면 당신은 ‘문학’이란 단어를 잘못 쓰고 있는 거 아니냐고, 당신이 말하는 문학이 ‘깐따삐아’로 불리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지만 이는 논리적인 필연은 아니기에 강요될 수는 없는 기준입니다.
약간의 문제는 있겠지만, 꼴리는 대로 골라서 숭배하는 게 그 자체로 틀린 일일 수는 없으니 말이죠.(이를 객관적인 기준으로 선포하려 든다면 그때는 전쟁을 벌여야하겠지만요)

형식에 대한 평가 기준이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효과를 비추어서, 그 유의미성의 종류를 구별하는 방식으로 기준을 정립해야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고찰에서 “보편성”과 같은 기준이 등장한 것일 테고요.
그런데 전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성” 같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편성 같은 것을 저버리고 말이죠.
제가 이런 비행을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은 고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가 일반적이라고 해서 그것의 유의미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공포를 느낀다고 해서 공포 자체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죠.
그것이 일반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주목하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의의입니다.
허버트 사이먼이 강조했듯이, 주의는 한정된 재화이기에 주의를 끄는 일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다.(사실 주목을 끄는 것은 상호 인정이 가능한지와 직결되기 때문에 단순한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뒤에서 다뤄질 겁니다)
재미도 이유일 수 있겠지만, 대체로 재미만 없는 것을 넘어 재미도 없는 것들에게만 이길 수 있는 약한 근거일 것이고, 아마도 주목할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될 것입니다.
보통은 이게 맥락적인, 상황적인 의의가 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이상일 수 있는 것이 예술에는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죠.

예술은 대체로 삶의 형식을 표현합니다.(제가 굳이 ‘대체로’를 도입한 것은, 삶의 형식이 아닌 다른 것을 쫓는, 제가 존중하는 예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삶의 형식”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아침으로 보드카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지, 콩물에 꽈배기를 찍어 먹는지, 계란 후라이와 부추김치를 곁들여 밥을 먹는지 따위와 구별될 삶의 형식을 말할 수 있어야만 하고요.
이를 말하기 위해 고전적인 논의로, 제 주장을 소급시킬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전에 기생하여 주장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술은 사물이나 사태가 아니라 행위를 모방합니다.
당연히도 이러한 행위는 특별한 무엇인가인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요구를 따라가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술이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행위하는 인간을 모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떠어떠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인간성을 그려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이는 꽤나 까다로운 요구입니다.
민족의 영도자에게 걸맞는 의전의 화려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요구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민족의 영도자라면 수행해야할 성취뿐만 아니라, 그러한 성취를 가능케 한 내적인 근거를 모방하라는 것이죠.
민족의 영도자라면 당연히 조국해방을 성취해내야 할 것입니다.
조국해방이 무엇인지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의 의미를 바꾼, 해방자 메시아의 의미를 바꾼 그리스도교의 탄생이었으니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인 작용에 의해 그런 성취를 이룩했는지까지를 다뤄야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그냥 능력이 있어서, 재미로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의 소재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예술의 소재일 수 있다면,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을 재미로 행할 수 있는 정신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죠.(이는 니체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니체가 놀이를 얘기할 때, “그냥”은 중요치 않습니다. 도대체 그런 걸 그냥하려는 정신은 어떤 상태인지가 중요한 것이죠)
이 층위에서 포착 가능한 무엇, 바로 “정신”이 예술이 모방하는 삶의 형식입니다.

예술이 모방하는 정신은 가지각색이기에 그것들이 공약불가능해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비교 가능합니다.
예술의 놀라운 기술은 정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꾸며내는 일이기에 그것들을 비교하는 일이 가능해지죠.
보이지 않고 그렇기에 비교할 수 없는 정신들을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면 앞에 두고 비교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정신들을 비교하면 그것들에도 유형이 있고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듯, 구조주의는 바로 이 가능성에서 시작된 게임이었고 말이죠.
그토록 다종다양한 민담들이, 마법적이고 신비하며 뒤죽박죽 잡탕인 것 같은 민담들이 몇 가지 유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방법을 문학 일반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사건과 관계 맺는 인간의 행위 방식 일반으로 확장하여 적용하는 일에 수십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 지금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이러한 확장 시도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참고하면 삶의 형식이란 것이 거시적으로는 그리 많은 유형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규모와 척도를 바꾸어 세분화하거나 단순화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유형화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볼 경우 문학에서 그려지는 삶의 형식의 유의미성은 바로 이러한 유형들 속에서 의미를 생산해내는, 매혹적인 한 형태를 제시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삶의 형식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한다면 대체로 문제가 있는 일이고, 이미 그려져 있는 것을 그저 반복하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사실 반복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허버트 사이먼을 인용하여 말씀드리자면, 유의미성을 환기하는 일은 그것의 유의미성 그 자체만큼이나 유의미합니다. 단지 이를 환기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본인이 탐구하는 삶의 형식이 어떤 종류에 속하며 형식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는다면 꽤나 문제가 있는 것이 될 겁니다.
제가 자주 “실험”을 말하는데 그게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실험입니다.
최초로 문학을 “실험”으로 주창한 졸라와는 달리 저의 실험은 인간의 생리학적인 경향성이나 사회적인 조건의 필연성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쿤데라식의 실존에 대한 탐구에 가깝지만 말입니다.(고백하자면 어린 시절의 저에게 문학의 이상은 쿤데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ㅋㅋ)

이런 실험들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강조한, 주의력은 한정된 재화라는 테제를 고려한다면 이것이 정치적이게 되고, 바로 이 정치성이 제가 장광설의 변명거리로 내세운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과도 공명합니다.
저런 삶의 형식을 사람들에게 내세우는 일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매혹시키는 삶의 형식은 효력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기회가 부족해서이든 능력이 부족해서이든 사람들은 그 삶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삶의 형식을 이상적인 것으로서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지니까요.
이는 <스파이더맨2>에서 말해지는 영웅의 본질처럼 사람들이 그것을 마음에 품고 용기가 필요한 순간 그들을 응원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감동적인 순간들이 아니더라도 저것들은 힘을 갖습니다.
이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바뀌기 때문이죠.
삶의 이상은 도대체 누가 고귀한자인지, 우리의 관심을 끌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것이 정치적이게 됩니다.
정치는 아렌트 말마따나 서로가 서로를 내세우는 무대에서만 성립합니다.
그리고 이 무대는 모두 모두를 볼 수 없다는, 누군가는 시선을 끌고 누군가는 시선을 끌지 못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술이 정치적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무대에서 주목 받을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에 개입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공유하는 이상적인 삶의 형식을 공정하는 일, 그것을 재확인하든, 정교화하든, 변신시키든 하여간 바로 그것에 개입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입니다.
나아가, 주목 받을 가치가 있는 삶의 형식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혹은 상상된 적 없던 삶의 형식을 탐구해낼 수 있을 테니 정치적인 것이고 말이죠.

제가 생각하는 예술의 정치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주제를 암시하거나 지시하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예술이 그것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입니다.
예술이 사실을 가리키는 일이 우연인 것처럼 말이죠.
또한 그것이 우연이기 때문에 이는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해당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지식 없이 이를 미화하는 일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 말이죠.
푸코처럼 잘 모르는 이란 혁명에 대해 섣불리 떠들었다가 변명하게 되는 일만큼 추잡한 일도 없습니다.
푸코는 심지어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신경질적으로 되묻고선 자신의 실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하지만 쿤데라가 지적한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자신의 눈을 뽑았습니다.
무지는 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이디푸스는 그 이름부터—‘오이디푸스’는 “발이 부은 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앞서 본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지혜가 보장된 자였고, 인간이 가진 지혜로 포착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파국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지에 변명을 내놓지 않고 이를 받아들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를 불쌍한 이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고귀한 자로, 지혜롭고 현명한, 그토록 절망적인 운명을 감내할 줄 아는 최고의 인간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오이디푸스와 자신들을 비교하며 괴로움을 겪지 않는 자신의 위치에 안도하지도, 그러한 괴로움을 겪는 인물들에 동정을 던지며 자신들의 동정심을 자랑하는 그런 사디스트적인 취향으로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니체 말마따나 동정심에 눈물을 질질 짜내며 즐거워하는 일은 그리스 정신과 가장 동떨어진 일이니 말이죠.
결국 다뤄야할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을 다룰지라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실을 마주하는 삶의 형식입니다.
삶의 형식을 다룰 때만이 그것이 근거한 사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닐지라도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죠.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그 자체로의 정치를 위해서는 오직 삶의 형식만을 다뤄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업이 투쟁하는 삶의 형식을 구체화하는 일이라고 밝힌 것은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이것만이 제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정치적인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정치가 이러한 것일 이유는 없고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큰 문제가 되겠지만, 이론가인 저에게 “영원한 문제”일 수 있는 정치 행위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제가 고집을 부린 것은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을 비방하는 것이 정당해서가 아니라 바로 제가 고집하는 무엇 또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이를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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