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헤겔의 국가관에 대하여 법철학 257-271에 대한 코멘트 일단 이 부분을 읽으면, 뭘 어떻게 얘기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에 대한 헤겔의 서술은 본인 철학 체계 속에서 정립된 것을 (말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라,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를 그의 철학 체계에 비추어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또 어려운 점이, 이런 서술의 유의미성은 철학 체계 내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어요. 이는 체계의 체계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에 가깝다보니, 다른 선택지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헤겔이 국가에 대해서 내린 판단이 어떤 유의미성을 지니는지는 다른 선택지들과 비교했을 때에만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법철학의 해당 부분을 읽으면 이게 뭔 소린가 싶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헤겔 철학에 익숙해서 헤겔이.. 더보기 "영국적인 계몽"을 위한 변론 는 에드워드 기번의 를 다루는 연구서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에드워드 기번의 지적 전기도 아니며 의 저술 과정에 대한 역사학적인 연구도 아니다. 이 책을 통해 포콕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영국의 계몽”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 영국의 계몽을 밝히는 작업이라면, 포콕은 영국의 계몽을 에드워드 기번과 그의 를 통해서 밝히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합당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1) 기번 또한 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칸트와 같은 필로조프들처럼 ‘계몽가’여야만 하며, (2) 그의 저작 는 그러한 필로조프들의 저작들처럼 계몽 사상을 담은 계몽서여야만 한다. 이 두 주장은 소박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매우 까다로운 주장이다. 꽤나 역설적인 주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더보기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1) - 정의와 윤리의 관계로부터 한 때 샌델의 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사실과 부합하는지와 별개로, 저 책의 유행의 원인은 “사회적인 정의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 꼽히곤 했죠.그런데 저런 진단은 좀 신기한 구석이 있습니다.왜냐하면 저 책에서는 사회적인 정의에 대한 논의는 정말이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거든요.애초에 저 책의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인 게 미스터리일 정도입니다.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책을 읽었는데, 정의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실망했다는 독자평이 있을 정도죠.이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저 책은 사실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윤리학 수업 교재로 쓰인 거거든요.미국에서는 이미 확립된 수업 양식에 따라 쓴 책입니다.제임스 레이첼스의 같이 거의 비슷한 책들이 널려 있고 말이죠.저 책은 저학년의 학부생들을 .. 더보기 카타르시스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설명하는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에 대한 서설preface 1.들어가면서: 비극의 역설과 통속적인 카타르시스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다 같은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극한직업』 같은 영화에 대해 “재밌다”고 말하는 것과, 『나라야마 부시코』 같은 영화에 대해 “재밌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심지어 우리는 『나라야마 부시코』 같은 영화를 “재밌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이 “비극적인” 작품을 보는 일에 대해서 “재밌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을 볼 때 마음 아파한다. 만약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 더보기 『오이디푸스 왕』이 미메시스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1. 아리스토텔레스는 14장에서 어떻게 전승된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위해 서술하는 것은 행위의 종류들이다. 그는 이야기 속 행위를 행위 실행 여부와 인식 여부를 기준으로 분류하고 평가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 중요하시 하는 행위, 혹은 비극을 비극일 수 있게 하는 비극이 미메시스하는, 혹은 미메시스해야만 하는 행위는 인식과 실행을 통해 식별되고 평가될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위를 그 분류 자체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분류에 입각해 행위의 예술성/비극성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알고서도 행위하려고 했으나 행위하지 않은 것은 최악의 것이고, 모르고서 행위하려고 .. 더보기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역설 ―니체 철학의 정치성을 해명하기 위한 한 시론 1.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역설과 그 역설의 역설 『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의 주제는 죄와 양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제목인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 또한 이를 방증해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2논문은 죄나 양심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제2논문은 의문스럽게도 약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약속은 도덕적으로 중요할 수 있기에, 『도덕의 계보학』에 약속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죄나 양심을 해명하는 일이 그 어떤 변명 없이 약속으로부터 시작될 수는 없다. 약속은 그 자체로는 중요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일 수는 있어도, 죄나 양심과는 특별히 관련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니체는 제2논문을.. 더보기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 (0): 프롤로그 저번에 짤막하게 언급만 했던 얘기를 좀 자세히 풀어 얘기하려고 합니다.문제가 문제인지라, 이 문제를 제대로 강조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얘기했던 것처럼, 전 최근 누스바움의 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누스바움을 싫어했지만, 이번 계기로 다시 봤고, 그래서 [읽은 것들은 정말이지 못봐줄 책들이었으니] 아직 읽지 않은 주요 작품을 읽어볼까 싶어 을 펼쳤죠.그리고, 예전처럼 폭발하고 말았죠. 제가 자주 말하지만, 누스바움은 최고의 속물 교양인입니다.뭣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자신이 교양인이라고 생각하는 쓰레기들과 다르게 실제로 교양 있는 사람입니다.그러니 누스바움의 해석 자체가 그렇게 멍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제가 읽으면서 정말이지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던 2장에서 보여주.. 더보기 덕을 쫓다 (1) : 선량한 칸트의 정화된 향락 문학론에서 잠시 빠져나와 다른 얘기를... 니체의 양심 개념과 칸트의 양심 개념을 좀 비교해보려고 했다가 결국 칸트에 대한 제 기존 이해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공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전 칸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전 항상 칸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습니다. 독일 철학 자체를 탄생시킨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진정한) 철학자들은 마땅히 존중해야한다는 제 윤리를 충실히 따랐었죠. 당연히도 칸트의 작업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차이는 그리 중대하지 않았습니다. 존경을 저버릴 만큼 문제되는 차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죠.(강성훈 샘에게 공격도 많이하지만 전 언제나 강성훈 샘에게 존경을 바치며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칸트와 결별해야만 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 더보기 푸코의 <니체, 계보학, 역사> 비판 관련된 주제의 발제문을 올림(주석이 생명인데 주석을 옮기기 어려워 그냥 파일로 올림) 더보기 정치적 예술을 향하여 (2-2) 금방 쓰겠다고 얘기해놓고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지난 글은 쓰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끊고 마무리한 것이었고, 그러니 바로 이어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쓰는 게 오래걸렸습니다. 물론 이는 게으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쓰려고 했던 방향으로 쓸 수 없겠다는 진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번 글은 루소의 서문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전 루소가 소설의 유용성을 문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졸라로 시작했지만, 원래는 졸라를 제물로 삼고 루소를 얘기하려고 했었고요. 그런데 막상 졸라를 읽으니 졸라의 기획을 졸라와 다른 방식으로 옹호하고 싶어졌습니다.(나중에 얘기할 수도 있을텐데, 졸라는 콩트에 의존하여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이전 1 2 3 4 5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