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철학의 정치성을 해명하기 위한 한 시론
1.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역설과 그 역설의 역설
『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의 주제는 죄와 양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제목인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 또한 이를 방증해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2논문은 죄나 양심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제2논문은 의문스럽게도 약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약속은 도덕적으로 중요할 수 있기에, 『도덕의 계보학』에 약속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죄나 양심을 해명하는 일이 그 어떤 변명 없이 약속으로부터 시작될 수는 없다. 약속은 그 자체로는 중요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일 수는 있어도, 죄나 양심과는 특별히 관련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니체는 제2논문을 약속으로부터 시작한다. 심지어 그는, 인간이 약속을 할 수 있다는 게 역설적이라고 말하며 제2논문을 시작하는 것 같다. 그는 왜 약속으로 시작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 역설적이라는 도발적인 진단과 함께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인간이 약속을 할 수 있다는 게 역설적일 이유는 무엇인가?
니체는 약속이란 것이 그 자체로 역설적인 행위라고 진단하지는 않는다. 그가 역설적이라고 진단한 것은 인간이 약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약속할 줄 안다는 사실이 역설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한 사실이 자연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을, 자연이 길러 낸 것이 역설적이라고 진단한다. 신이 없다면, 그리고 진화론이 옳다면, 결국 인간은 자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니 니체의 말마따나 인간의 활동이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자연이 인간에게 그것을 기르도록 했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니체는 이것이 역설적인 과제라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 까닭을 밝히지 않는다. 그가 역설로 진단한 과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만 한다. 그는 이것이 인간에 관한 문제 중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문제라고 말하며, 우리가 약속할 줄 안다는 평범한 사실이 매우 놀랄만한 일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한다. 약속이 망각이라는 능동적이면서도 막강한 힘을 제압하고 성취된 것일지라도, 그것이 역설적일 이유는 없다. 흄이 지적하듯이, 어떤 일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그것이 법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약속할 줄 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해서, 그러한 능력을 우리가 갖게 된 것이 역설적일 이유는 없다. 고래의 선조가 발굽 동물이란 사실은 분명 놀라운 일이지만, 고래의 진화가 역설적인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것이 역설적이었다면 진화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진화가 가능했다면 역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니체는 이런 역설적인 진단으로 제2논문을 시작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런 것이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약속을 지킬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 따위가.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것은 모든 법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기초의 기초는 불분명해보인다. 신의성실의 원칙이든, 계약준수의 원칙이든, 약속이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 자체는 법을 넘어선다. 설혹 그것을 법조항에 기입할지라도, 바로 그러한 법조항을 지킬 근거는 해당 법으로부터 근거지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테제 그 자체는 고매한 라틴어로 치장된 채 법격언으로 추앙되거나 은근슬쩍 자연법으로 분류되곤 하였었다. 약속은 약속이 지켜져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약속이 지켜져야만 할 이유는 자연적인 사실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연에는 “그러할 수도 있는 것”이 있을 뿐,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존재와 당위는 구별되며, 자연에는 존재만 있을 뿐 당위는 없다. 그러니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동물로 길러낸 것이 자연이라는 진실은 역설적일 수 있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자연이 아닌 것이 자연히 생겨났다는 것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도, 약속의 진화란 것은 자연스러울 일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역설적일 수 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명시적으로 역설을 진단한 것은 약속의 진화 뿐이지만, 사실 도덕의 계보를 추적하는 작업 자체가 꽤나 역설적인 면이 있다. 우리말 ‘도덕’으로 말해지는 Moral은 “도덕”이란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어 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해당 단어에는 자연에 대립되는 것들을 폭넓게 가리키는 의미도 있다. 예컨대, 자연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에 moral이 말해지고, 자연인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법인을 말할 때에도 moral이 말해진다. 그러니 니체가 계보를 추적하는 도덕은, 정신적인 것이어서든, 인위적인 것이어서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어서든 자연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이지 않은 어떤 것의 계보를 추적하는 일은 이상해보인다. 출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덕의 계보를 추적하는 도덕의 계보학이란 기획 또한 역설적이다. 도덕의 계보학 또한 자연적이지 않은 것의 발생을 자연적인 것처럼 다루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역설에 대해 손쉽게 답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도 도덕은 생명체가 아니고, 그러니 도덕의 계보를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계보학”은 애초에 유비니 역설 따위는 없다는 답변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답변은 불충분하다. 그것이 유비에 불과하다면, 계보학이 말해진 까닭은 무엇인가? 니체가 제시한 방법론에 유비를 빼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큰 문제는, “계보학”이란 것을 유비로 볼지라도, 니체의 계보학 기획이 역설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니체의 계보학 기획은 자연주의적인 면이 있다. 그렇기에 제기된 문제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립되는 것을, 자연에서 비롯되는 자연에 속하는 다른 자연적인 것처럼 다루는 일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약속의 진화가 역설적인 것처럼, 도덕의 계보학도 역설적이다. 전자가 대상적이고, 후자가 반성적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둘의 역설은 동근원적이다. 결국, 무로부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진리에 반하며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는 것이 역설적인 것처럼, 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반하는 것이 자연히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역설적이다. 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반하는 것이 자연히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 같은 역설적인 기획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이란 기획이 역설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니체 본인이 약속의 진화가 역설적이라고 진단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이런 역설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초에 그가 논박하고 했던 것이 바로 그 역설일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역설을 만드는 것일까? 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반하는 것이 자연히 나올 수는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가 진단한 오류는 무엇이었을까? 니체가 오늘날의 물리주의자들처럼, 사실은 도덕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라고 진단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상식적으로, 자연으로부터 자연히 나오는 것은 오직 자연뿐인 것처럼 보인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이 자연법으로 말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렇기에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Natura non facit saltus”는 격언이 진리일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다른 것을 말했다. 그는 일찍이 『선악의 저편』에서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는 통념을 비판한 바 있다. 니체에 따르면 그러한 통념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자연이야말로 도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진단은 명확하다. 문제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비롯된다. 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반하는 것이 자연히 나올 수 있다는 게 자연스러운, 자연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속의 진화와 도덕의 계보학은 역설적이면서도, 진리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둘 경우 약속의 진화가 역설이라는 진단과 함께 제2논문이 시작되는 것은 임의적인 것도, 수사적인 것도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니체 철학에 일관적인 것도 없고, 이보다 『도덕의 계보학』에서 시급한 진단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나와야만 하는 진단이었다. 그리고, 혹은 바로 그렇기에 제2논문은 중요하다. 니체가 제2논문에서 약속하는 작업이야말로 자연은 도약하는 것이라는 니체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이 어떻게 길러 졌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자연이 어떻게 도약하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변죽은 그만 울리자.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까.
2.감히 누가 약속할 수 있는가?
니체에 따르면 약속의 탄생은 역설적일 것이다. 그런 역설적인 과정은 도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기대를 품고 니체의 서술을 따라가보려 한다면 실망하고 말 것이다. 니체가 인간의 약속 능력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태초에도 약속은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의 시작이 빚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빚은 약속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에 빚을 질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약속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약속하는 인간의 진화를, 약속하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니체가 설명을 약속한 “약속할 줄 아는 인간”이 특별한 의미에서 말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말하듯, 모든 단어는 여럿으로 말해지는 법이니까. 실제로 니체는 특별한 의미에서 약속할 줄 아는 인간을 말했던 것 같다. 그가 강조 표시까지 하며 약속할 줄 아는 인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versprechen darf”라는 표현은 심상찮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 표현을 번역할 때 많은 번역자들이 골치를 썩였다. 박찬국은 단순히 약속을 말하는 동물과 구별할 수 있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동물로 번역하였고, 김정현은 “약속할 수 있는” 동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상의 문제는 한국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어 번역의 경우에도 어떤 이는 “약속할 수 있는 권리right”를 가진 동물로, 어떤 이는 “약속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동물로, 어떤 이는 “약속이 허락된” 동물로 번역하였다. 무엇이 되었든, 니체는 약속할 줄 아는 것을 특별한 의미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약속의 존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약속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특별한 의미에서의 약속은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 니체가 전제한 약속부터 파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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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따르면 원시인들도 약속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약속은 우리와 다른 전제 위에서 성립했던 것 같다. 니체에 따르면 그들은 상대가 빚을 갚을 것이라고 신뢰하지 않고서도 빌려줄 수 있었다. 상대가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원칙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이다. 빌린 것을 갚지 않아도 빚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응징이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이 신뢰 없는 약속을 보장해주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걱정할 필요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다른 것으로 변제받을 수 있다.(정확히 말하자면, 변제 받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변제 시키는 것이겠지만!) 그러니 약속은 태초부터 있었다. 단지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신의성실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고통으로 변제 가능하다는 고통변제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을 뿐. 니체에 따르면 태초에는 신뢰가 아니라 응징이 약속을 보장하였다. 약속을 말하는 사람이, 약속을 지킬 수 없을지라도, 약속이 허락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약속할 권리나 특권 따위가 없을지라도, 약속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약속할 수 있는 인간 이전에 약속이 있었던 것은 역설이 아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과 약속을 말하는 것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란 우스겟소리가 떠도는 시대에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과 약속을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게 뭔 대수인가 싶을 수 있다. 바퀴의 발명은 바퀴의 개념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에서처럼, 약속 개념이 존재했다면 약속은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고, 변제 가능성은 오늘날에도 중요해보인다.(그렇지 않다면 민법은 왜 있겠는가?) 니체의 주장처럼, 고통을 통해 변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설혹 사람들이 인과응보를 바랄지라도, 그것으로 빚이 청산된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죗값을 치렀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죗값을 치르는 것과 빚을 청산하는 것은 다르며, 죗값을 치러도 빚은 남을 수 있다. 형사소송이 민사소송을 막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형사소송에서 패했다면 민사소송을 각오해야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이러한 차이가 그렇게 중요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한 차이가 약속 개념 자체에 큰 차이를 낳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변제 가능성을 염두에 둘지라도, 불확실성을 인정할지라도,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다. 변제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서, 변제 받을 자신이 있기에 빚을 내어준 것일지라도, 신뢰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신뢰하기에 속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구별은 사소해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구별이 사소하지 않을 수 있는 맥락이 있다. 개개인 간의 약속이 아니라 집단적인 약속이 필요할 때, 거창하게 말하자면, 사회를 탄생시킬 때가 바로 그렇다. 사회를 탄생시킬 때 인간이 약속을 한다? 이건 사회계약론이 아닌가? 그리고 니체는 사회계약론을 거부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도덕의 계보학』에서! 물론 니체는 사회계약론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사회계약론에서 분석된 문제 상황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사회계약론에서 해명을 시도하는 민족이나 계급과 같은 본질적인 공동체에 대해서, 니체 또한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사회계약론과의 관계를 포착하기 전에, 민족이나 계급과 같은 본질적인 공동체에 대한 니체의 해명 시도를 먼저 확인해보자.
니체는 부채감을 통해 민족이나 계급 같은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족이나 계급 같은 공동체는 사람들이 모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족이나 계급에 속하는 것은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탈 등의) 이익일 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설혹 그러한 모임이 일시적이지 않고 장기적일지라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따위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또한 공동의 규율을 따른다. 하지만 그들이 공동의 규율을 따르는 것은 이익을 위해서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진 않는다. 설혹 집단에 속하는 일이 생존이 달린 중대한 문제일지라도,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지는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본질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가 누구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필연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을 탈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목적을 위해 모인 집단은 민족이나 계급 같은 본질적인 공동체일 수가 없다.
니체는 저러한 본질적인 공동체를 부채감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상에 대한 부채감에 의해 저러한 공동체에 대한 귀속이 개인의 본질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한 설명처럼 보인다. 내가 태어난 것이 부모님 덕분이고, 그렇기에 태어난 것에 대해 부모님께 부채감을 느낀다면, 그러한 부채감은 본질적인 것일 수 있다. 누구의 자식인지는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떠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공동의 선조에 대한 부채감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본질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그들이 해당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은, (부모 자식 관계에서처럼) 본질적인 관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가 그들이 누구인지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을 차지하게 된다. 공동의 조상에 대한 부채감을 공유하는 이들은, 어떤 이의 후예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본질적인 공동체를 세우게 될 것이다. 부채감을 통해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동의 정체성을 통해 본질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문제는 민족이나 집단과 같은 본질적인 공동체가 부채감을 토대로 형성된다는 것이 그렇게 당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레이버가 지적하듯이, 공동체적인 부채감은 부채와 너무나도 다르고, 부채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에 대한 빚이나 다른 계급에 대한 빚 따위는 원리상 갚을 수 없거나, 빌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갚는 빚이다. 예컨대 부모에게 빚진 생명은 갚을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되거나, 자식을 낳는 것 따위로 갚아야만 하는 빚이다. 이런 건 빚일 수가 없다. 그러한 빚을 지기로 약속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갚는 방식이 매우 해괴하기 때문이다. 동의하지도 않은 빚이 왜 생겨나는가? 설혹 그러한 빚이 가능하더라도, 자식을 낳음으로써 갚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해보인다. 그 빚을 청산시켜 주는 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가 빚을 청산해주는 것이라면, 그 빚을 손주를 통해서 갚아야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빚을 다른 식으로도 청산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렇게 청산해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빚이 자식을 낳음으로써 청산된다면, 도대체 왜 자신이 낳은 자식은 빚을 지며 태어나는 것인가? 빚은 청산으로 해소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왜 빚을 갚았는데, 새로운 빚이 생겨나는가? 애초에 저러한 빚은 부모에게 갚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는 부모가 살아있지 않더라도 갚아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자신의 삶을 빚졌고, 이를 자식을 낳음으로써 갚아야한다는 따위의 의식은, 때문에 일반적인 부채로 이해될 수 없다. 일반적인 부채와 달리 이러한 빚은, 청산을 부정하고 빚의 순환과 연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상에 대한 부채감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은 그들에게 빚질 수는 없는 법이며, 무엇인가를 빚질지라도, 이를 주어진 방식으로 갚을 이유도, 그러한 빚이 청산되지 않고 계속되는 이유도 불분명하다. 조상에 대한 빚 또한 청산을 부정하고 순환과 연쇄를 상정하는 그러한 종류의 빚이다. 이는 개인들 사이의 약속 따위로 설명될 수 있는 종류의 빚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종류의 빚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니체는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레이버의 진단과 달리, 저러한 식의 이행이 꽤나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저런 것은 애초에 빚이 아니며, 저러한 종류의 빚을 통해 의무를 해명한 것은 사제처럼 특수한 계급에 속한 이들에 의해 이따금씩 시도된 것일 뿐 통용된 적 없는 것이지만, 주고 받는 것에 근거하여 질서를 서술하고 의무를 해명하는 것은 꽤나 범문화적일 뿐만 아니라 사제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저러한 비대칭적 부채 관계를 담지하는 위계의 발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이지, 저러한 비대칭적 관계가 부채에 부채에 근거한 것일 수 있는지가 아니다. 비록 위계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인류학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부채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설명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이다. 이러한 이행이 사회계약론에서, 특히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지를 확인해보자. 그래야만 니체의 제2논문이 사회계약론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명확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3.홉스의 사회계약론:사회계약 없는 사회계약론은 가능한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듯하지만, 홉스는 사회계약으로 사회의 발생을 설명하지 않았다. 사회를 가능케 하는 것은, 홉스에게 있어, 계약contract이 아니라 신약covenant이기 때문이다. 물론 홉스 또한 사회계약을 말하긴 한다. 다만 사회계약은 신약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파생적이다. 사회를 이루는 신약이 선행되고 나서야, 구체적으로 정치체를 설립하는 계약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홉스는 굳이 왜 이런 이중적인 계약론을 주장한 것일까? 도대체 사회계약을 가능케 하는 신약은 무엇이고, 그런 것이 왜 필요한가? 이를 좀 꼼꼼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신약은 사실 계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약 또한 계약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신약은 약속의 이행 시점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점에서 특별한 종류의 계약이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홉스에 따르면, 주권자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공동의 합의이며, 이에 대한 약속이 이행되었는지 여부는 현재에는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혹은 미래에도, 그가 주권자의 명령에 복종할지에 따라 그가 약속을 지켰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계약에 앞서 신약이 필요하다. 사회계약을 따를 것을 담보할 신약이 있어야 사회계약이 효력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은 미래를 담보하고, 그래서 사회계약 이전에 그러한 사회계약을 담보할 신약이 필요하다. 단순해보이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신약을 보장하는 것이 사회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설이 발생한다. 신약이 사회계약에 선행해야하지만, 신약 이전에 사회계약의 결과물인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
흥미로운 점은, 홉스가 모든 신약이 사회계약 이후에 가능해진다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계약과 독립적으로 자연상태에서도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원칙이 성립한다고 홉스는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것이 자연법에 속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속이 지켜져야만 한다는 원칙은 신약이 상정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약속과 약속의 이행이 동시적이라면 약속이 지켜져야만 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가 이른바 계약준수의 원칙을 자연법에 귀속시켰다면, 이는 사회계약 이전의 자연상태에도 통용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홉스에게 있어 자연법은 자연상태에도 통용될 수밖에 없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약이 사회계약 이후에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자연상태에는 존재하지도 않을 약속의 준수가 자연법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러한 의문에 앞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물어져야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요약될 자연상태에서, 약속이 지켜져야만 한다는 원칙 따위가 통용된다는 것이 말이 될 수 있겠는가? 홉스는, 약속에 대해 순진한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약속의 신성함 따위가 전제되지 않고서, 어떻게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자연상태에서 약속 따위가 지켜질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도, 이름 난 회의주의자인 홉스는 약속의 신성함 따위를 믿지 않았다. 홉스답게, 홉스는, 약속이란 것은 “한갓 말과 숨에 불과할 뿐”, “아무에게도 의무를 부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약속은 지켜질 수 있는가? 놀랍게도 홉스 또한 니체처럼 보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약속은, 보복에 의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빌린 물건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강제로 이를 되찾아 오는 것이 합당할 수 있다. 이것의 합당함은 도덕률에 의해 근거지어진 것이 아니다. 빌려준 물건을 되돌려 주지 않을 경우, 빌려준 주인이 자신의 물건을 강제로라도 되찾아 올 것을 누구나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합당한 것이다. 누구라도, 그것을 강제할 힘이 있다면 강제로 되찾아 올 것이라는 게 모두에게 예상된다. 그렇기에, 이를 되돌려주지 않는 일이나, 이를 되찾아오지 않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주인이 강제라도 되찾아갈 것을 예상하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며, 자신의 것임에도 되찾아오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속을 하고서도 지키지 않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을 내버려두는 일은, 자연상태에서조차도 있어선 안 되는 일이 된다. 그것이 불합리함은 자연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속은, 자연상태에서조차도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홉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연상태에서도 약속이 지켜져야만 한다는 원칙이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자연상태에서는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자연상태에서도 지켜지는 약속은 명확한 급부와 반대급부가 있다. 빌리거나, 손해를 끼쳤고, 그에 준하게 갚거나, 보복 당하게 된다. 그런데 급부와 반대급부가 불분명한 경우는 어떤가? 예컨대 당신이 나에게 대가代價 없이 10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당신이 나에게서 10억원을 빌려갔을 때처럼, 이를 강제로 빼앗아 오는 것이 합당한 일일 수 있겠는가? 심지어 당신이 나에게 그러한 약속을 행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나와 당신 뿐이라면, 당신이 그러한 약속을 한 적 없다고 발뺌할 때, 내가 어떻게 항변할 수 있겠는가? 이럴 때 내가 당신에게서 10억원을 강제로 가져온다면, 이는 도둑질이나 강도짓과 다름 없이 여겨질 것이다. 이처럼 일방적인 증여 등에 대해서는 상호적인 계약과 달리 판단될 수밖에 없다. 약속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급부와 반대급부가 불분명하거나 성실한 이행이 불분명할 경우에는 강제 수단이 마땅치 않으며, 애초에 그러한 약속이 정말로 성립했는지도 불분명할 수 있다. 자연상태에서도 성립할 수 있는 약속은 그런 종류의 약속이 아니다. 약속의 근거causa가 명확할 때에만 약속은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계약은 이런 종류의 약속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신약은 미래와 관련된 모든 약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약 등에 있어서, 당장 이행되지 않는 부분을 의미한다. 사회계약에 있어 필요한 신약은 계약의 모든 부분이 당장 이행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약의 이행이 딜레마를 낳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위기 상황에 서로가 도와주기로 계약을 맺었다고 해보자. 이 경우 계약의 이행은 전적으로 미래의 위기 상황에 수행될 것이다. 그런데 자연상태에서는 이러한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상대방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위기에 빠진 상대방을 도울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이행이 합당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이행은 불합리한 것이 된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상대방의 도움을 강제할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약은 확신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홉스는, 이러한 종류의 약속은 그것의 이행이 강제될 수단이 없다는 것이 모두에게 예상 가능하므로, 그 이행을 기대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약속은 (효력을 가질 수 없기에) 무효라는 것이다. 사회계약에 필요한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상대방이 이러한 약속을 수행할지가 전적으로 불분명한 상황에서 행해지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이는 자연상태에서는 효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홉스는 어떻게 사회계약의 성립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단서는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리바이어던』 2권에서 찾아야만 한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갖는 역설은 내가 지적한 것말고도 하나 더 있다. 바로 제헌의 역설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한 인간 무리a multitude와 한 민족a people은 존재론적으로 구별된다. 전자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다. 이는 그 구성원들을 통칭하는 표현일 뿐이다. 반면 후자는 하나로 기술된다. 구성원이 바뀌면 전자는 다른 무리가 되지만, 후자는 구성원의 변화와 상관 없이 하나로 말해질 수 있다. 그러면 인간 무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바꾸는 것은 무엇인가? 홉스에 따르면 이는 대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표자를 통해서 대표됨으로써 그러한 무리가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대표자가 가진 단일성unity이 무리의 집합성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사회계약을 수행하는 것은 민족인데, 민족은 사회계약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사회계약이 먼저 있어야 하고, 사회계약이 있기 위해서는 민족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역설이 발생한다. 그런데 홉스에 따르면 사회계약이 아닌 방식으로도 대표가 세워질 수 있다. 종교에 의해서도 대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신을 따르는 일은, 주권자를 따르는 일과 같고, 주권자를 따르는 일은 대표가 성립한 것과 같다. 그렇기에 하나의 종교를 공유하는 이들은 하나의 민족을 이룰 수 있다. 결국 사회계약이란 것은 독립적인 개인들이 한 데 보여 합의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이는, 종교를 통해 하나의 민족을 이룬 이들이, 자신들과 국가의 관계를 고려하는 틀로서만 의미가 있다.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세우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홉스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사회계약을 위해서는 사회계약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는 절대적인 단일성을 요구한다. 로크에게 있어서 이는 화폐를 매개로 가능해진 미래의 이익에 대한 희망과 공포였고, 루소에게 있어서 이는 자연상태에 대한 특유의 고찰에 입각해 상상될 수 있는 사회상태 속 자연인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니체의 제2논문은 이러한 이행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
4.독 속의 약Le remède dans le mal, 혹은 옆으로 구르는 역사
약속을 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일을 설명하는 일은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 이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설명되던 이행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2논문의 계보학은 사회계약론과 경쟁한다. 그런데 니체가 제안하는 대안이 정확히 어떻게 사회계약론과 구별될 수 있는지가 불분명하다. 사회계약론에서, 사회계약이란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제안된 것이 아니다. 이는 원리적인 탐구를 통해 제안된 가설이자, 자연으로부터 도덕으로의 이행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도약 장치로 고찰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고찰을 매우 자연주의적으로 수행한다. 홉스, 로크, 루소 모두 심리적인 현상에 입각하여, 저러한 절대적인 단일성의 필요를 설파하고 이에 부응한다. 홉스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 망상에 불과하다. 자연의 광대함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겪게 되는 공포와 인간이 가진 생리학적인 특징에 의해 창출된 놀라운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로크는 애초에 사회계약을 이익에 대한 망상에 근거짓고 있고, 루소 또한 이를 원리적 가능성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고 있다. 사회계약론에 대한 통속적인 주절거림들을 배제한다면, 오히려 이들의 작업이야말로 니체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니체의 특유성은 ‘사회계약’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있는가?
놀랍게도, 해당 전개를 진행시키는 데 있어 니체의 특유성은, 그가 저러한 이행이 “병”과 관련 있다고 진단한다는 데에 있다. 물론 홉스나 로크 또한 이행을 매개하는 상상이 실체가 불분명한, 그러니 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환상에 속하는 것으로 보긴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진단은 환상이란 것에 대한 일반적인 진단에 근거한 것일 뿐이기에 이를 병적으로 진단했다고 보긴 어렵다. 병적이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환상과 그렇지 않은 환상을 구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의 필요를 고려해볼 경우, 루소의 작업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일 수 있다. 규범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규범을 담지할 기준을 제안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연에서 사회의 이행과도 같은 보편적인 사태에서는, 그러한 기준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루소의 자연인은 바로 그러한 기준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그런데 루소는 그러한 기준점에서부터의 이탈을 모두 자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비록 그가 초기의 사회상태에 특별함을 부여했을지라도, 그러한 특별함의 근거는 불분명하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가능해지는 사회상태 자연상태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는 근거를 말하긴 한다. 자연인의 독립성과 사회상태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사교의 즐거움이 조화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화가 제대로 근거지어지기 위해서는, 그가 타락이라고 진단한 문명사회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조화가 가능한 사회적인 즐거움이 원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루소는 이 둘을 원리적으로 구별하는 데에 실패한다. 결국 기준의 자연상태가 담지하기 때문이다. 타락은 자연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으로서만 “심화”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타락을 자연인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혁신이었지만, 한계 또한 갖고 있었다. 기준점이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대안은 근거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소의 진단과 답변은 많은 연구자들을 당황시켰다. 그의 진단과 답변이 양립 가능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가설로서 제안한 것일 수 있다. 그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고백』을 통해 서술한 반면, 『에밀』은 일어났으면 좋았지만 일어나지 못했던 일을 묘사하고 있듯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불평등 기원론』이 서술한다면, 『사회계약론』은 일어나야만 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던 일을 묘사하는 것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일어나야만 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던 일은 현실일 수가 없다. 니체가 지적하듯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어야만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루소 또한 이를 모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스타로뱅스키의 문체분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헛되이 꿈을 꾸고 있음을 문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건설적인 제안은 이미 늦어버린 희망이기에 멜랑콜리의 회한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이다.
조심해야할 것은 여기서의 멜랑콜리가 오늘날의 우울증과 전혀 다른 것이며,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수학자들의 병이며, 회한에 빠진다는 점에서 노년의 병이다. 수학자들의 병이자 노년의 병이라는 것은, 오직 수학자들이 겪는다는 의미거나, 오직 노인만이 겪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학자들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상상력 뿐만 아니라 예민한 지성적 직관력을 갖춘 덕분이다. 그들이 보는 것을 남들이 보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보는 것은 광인들의 망상과 구별된다. 그들은 감각적인 환영이 아니라 지성적인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멜랑콜리는 지성적 직관력을 갖춘 이들이, 그들이 보는 것에 의해 겪게 된다는 의미에서, ‘수학자들의 병’이었던 것이다. 비슷하게, 멜랑콜리는 노인만이 겪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노년의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노년의 병이었다. 찬란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앞으로는 쇠망만이 남았다는 특유의 시대적 감각이 멜랑콜리의 특유함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멜랑콜리는, 예민한 지성의 직관을 가진, 다시 말해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이, “늙은 시대”인 근대에 겪게 되는 시대의 병일 수도 있었다. 루소는 근대라는 시대에 특유한, “시대의 병”을 진단할 단서를 품고 있었지만, 이를 명시하진 않았다. 이를 명시한 것은 이후 시대의 문인들이었다.
만약 니체가 이러한 맥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면, 그의 서술은 사회계약론과 구별되는 특유성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고를 시작하면서 다룬 역설을 해결할 수 있다. 병은 두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병은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병은 본성에 반하면서도 자연적인 것이다. 병은 그렇기에 자연으로부터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의 이행을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매개할 수 있게 한다. 본성은 곧 자연을 의미하기에, 병은 한편으로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도덕이 자연에 반하는 것이면서도, 자연에 의해 자연에 따라 발생한 것이었다면, 도덕은 일종의 병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창조적인 것을 낳는 것은 병이다. 니체가 임신을 병에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니체에게 있어 새로운 것을 낳는 것은 일종의 병이며, 병이야말로 새로움의 원천이다. 그리고 병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도덕으로의 이행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니체는 사회계약론에 반대할 수 있다. 계약이 아니라 병이 이행을 매개한다는 것은 ‘계약’을 다른 용어로 바꾸는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작업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의 서술에서 병은 시대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니체가 진단한 병이 시대적인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가 진단한 병을 자세히 살펴보자.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제2논문에서 양심의 기원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추적한다. 양심의 가책은 그에 따르면 병이다. 애초부터 그는 이행이 아니라 이행을 매개하는 병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심의 가책이 병이라는 진단은 당연하지 않다. 양심의 가책이 그 자체로는 나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양심 없는 인간”이라 말하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양심의 가책이 병이라는 진단은 상식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고 상식이 아닌 의학에 의존해서 양심의 가책을 병으로 진단할 수도 없다. 양심의 가책을 겪는 것을 병적이라고 판단해줄 [생리학적인] 의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어떻게 양심의 가책을 병이라고 진단하고 있는가? 얼핏보면 그는 양심의 가책이 망상적이기에 병이라고 진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진단은 불합리한 면이 있다. 망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니체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그가 양심의 가책을 그가 기획하는 미래에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신이 진단하는 보편적인 도덕률이나 동정 같은 현대의 병들을,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치료하려고 한다. 즉, 양심의 가책은 니체가 제안하는 새로운 도덕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은 일의적으로 병일 수가 없다. 양심의 가책은 맥락에 따라, 그것이 어떤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하냐에 따라서 병일 수도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병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양심의 가책은 시대적인 병이다.
양심의 가책은 시대적인 병이다. 그리고 이것이 니체가 진단한 역설에 대한 해답이자 니체의 역사서술에 특유함을 부여하는 종차이다. 이것이 갖는 특유함은 무엇인가? “양심의 가책” 같은 병은, 루소가 그의 시대에 진단한 “타락”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스타로뱅스키가 주장한 것처럼, 독 속에서 약을 찾으려 한 게 루소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이라는 병으로 그 시대의 병을 치료하려고 한 니체는 루소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니체의 병은 타락과 다르다. 니체에게 있어 병은 단순히 양의적인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서나, 로크에게서나, 루소에게서나 역사는 일방향적이다. 자연과 문명의 두단계 발전론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역사는 일방향적이다. 루소는 다르지 않은가? 아니다. 루소 또한 일방향적이다. 그는 문명이 아니라 타락으로의 이행으로 일방향적인 역사를 썼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제1논고는 학문과 예술이 인류의 타락을 야기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지 않은가? 그가 대안을 말할지라도, 그의 대안은 특정한 시기에만 가능한, 그리고 그조차도 넓은 의미에서는 타락으로의 이행에 속한, 단지 타락을 늦추는 처방에 불과했다. 독 속에서 약을 찾았지만, 루소에게 있어 약은 치료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락을 늦춰주는 완화제이거나 타락의 폐해를 줄여주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독은, 독일 뿐이거나, 기껏해야 약인 정도이다.
니체의 병은 다의적이다. 양심의 가책은 현재로서는 병이기만 하다. 자연에서 도덕으로의 이행을 진행시킨, 그리고 오늘날을 좀먹는 시대의 병들의 원천이기도 한 근본적인 병이다. 하지만 니체가 예언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면, 양심의 가책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병들을 쓸어버리는 치료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의 윤리를 뒷받침할 것이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이 새롭게 봉사하는 새로운 존재는 주권적 개인이다. 동시에 주권적 개인은 진정으로 약속이란 것을 시작한 인물이다. 주권적 개인은 한편으로는 시작하는 지점에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끝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권적 개인의 이러한 이중성과 비동시적 동시성은 양심의 가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편으로 양심의 가책은 병이다. 이는 인간을 병든 동물로 만든 악의 원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양심의 가책은 병든 동물인 인간을 치료할 약이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은 병이면서, 병의 원흉이고, 이와 동시에 병의 치료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예언처럼 정말로 인간이 병에서 해방된다면, 양심의 가책은 병도, 병의 원흉도, 병의 치료제도 아니게 된다. 바로 그렇게 시작되는 그 시대의 조건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니체 말처럼 주권적 개인은 양심의 가책이란 병이 내놓는 최후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에서, 양심의 가책은 나무가 되고 주권적 개인은 그 나무의 과실이 된다. 당연히도, 과실은 먹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코르크 나무가 코르크 마개를 만드는 데 사용될지라도, 코르크 나무의 목적은 코르크나무 자체이지 코르크 마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무에서 열린 과실물은 새로운 나무로 자라날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나무가 시작될 때, 이전의 나무가 겪은 과정은 병이나 치료나 성취물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무의 선조 이야기로 남는다. 이는 필연의 과정일 뿐 더 이상 병도, 병의 원인도, 치료제도 아니다. 그 자체로 자연의 과정이다.
한 가지 더 강조해야할 것이 있다. 니체에게 있어 병은 여러 의미를 가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그 자체로 변동적이다. 앞서의 설명에서처럼, 니체의 진단은 미래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린 일이 된다. 니체의 예언에서처럼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면, 아마도 병이자 병의 원인인 양심의 가책은 치료제이자 새로운 시대의 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양심의 가책은 병이나 병의 원인으로 남을 것이다. 혹은 니체의 해석에 따르지 않고, 지금 시대의 조건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러한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병일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현시대를 시작하게 한 조건일 수도 있고, 그렇기에 진보의 원천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니체에게 있어 병이란 것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미래가 도래하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사고는 홉스나 로크에게서 뿐만 아니라 루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니체 특유의 사고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역사가 그럴 수 있는가? 미래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그런 것은 사실일 수도 없고, 학문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한 돌연변이가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었을 경우에는 그것은 그저 돌연변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돌연변이가 자손을 남기고 죽는다면, 그리고 그 자손들이 그 돌연변이의 특성을 물려 받으며 하나의 종을 이루게 된다면, 그는 더이상 돌연변이가 아닐 것이다. 그는 그 종에 속하는 최초의 존재이지 돌연변이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의미변경은 돌연변이의 부모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이 낳은 돌연변이가 그저 한 괴이한 돌연변이로 사라지는지 아니면 새로운 종의 시작이 되는지에 따라, 그들은 돌연변이를 낳은 부모이거나 최초의 선조를 낳은 부모가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러한 돌연변이를 낳게 한 요인들, 그들의 유전자 풀이나, 바로 그 돌연변이가 그 돌연변이의 종차에 해당될 유전자 조합을 갖게 한 (외부적인) 조건 따위의 의미가 결정될 것이다. 때로는 괴물을 낳게 만드는 악조건이, 때로는 새로운 종의 창시를 가능케 한 산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변화야말로 진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아닌가? 니체가 다위니즘에 투쟁했다면, 바로 이러한 진화론을 위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해야만, 니체의 역설이 풀리고, 니체의 특유성이 해명되며, 의사도 아니면서 병을 진단하는 니체의 기이한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철학은, 그 시대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 맞서는 것이여야만 한다며 반시대적인 철학을 주창했던, 자신은 시대와 투쟁한 인물로 남고 싶다던 니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닌가?
5.결론 - 니체의 정치철학을 위한 변론
오늘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탠포드 철학백과를 사용할 것이다. 철학의 최전선이란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스탠포드 철학백과는 전선을 표시된 지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탠포드 철학백과의 「니체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항목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이 항목은 도덕철학에 대해서는 많은 해설을 제공하지만, 제목과 달리 니체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해설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항목은 니체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는 오직 “니체 철학에서의 정치철학의 부재”로만 말하고 있다. 해당 항목에 따르면, 누군가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겠지만, 이는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정치철학이란 분과를 세운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플라톤과 니체 사이에서의 선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정치철학을 하지 않았다면 정치철학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해당 항목의 저자 브라이언 라이터는 저명한 니체 연구자며, 라이터가 정치철학의 부재를 언급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용하듯이, 이는 누스바움이 제기한 문제이며, 라이터는 누스바움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니체의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답해야만 한다고 판단하여 이를 해당 항목에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누스바움의 문제제기에 답할 필요가 있는가? 누스바움에 따르면 진지한 정치철학이기 위해서는 “절차적 정의”, “정의로운 입법 절차나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정치 구조”, “젠더와 가족”, “국제적 정의” 따위의 주제를 다뤄야만 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가? 니체 철학은 (아마 지금도) 나치 철학으로 여겨지며 “극우적 철학”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데 그러한 오해들이 정말로 저러한 주제들 때문에 오해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니체 철학이 나치 철학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니체 철학이 저러한 주제에 있어서 나치들이 참고한 근거를 제공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니체 철학이 가진 유대인 혐오나 약자 혐오, 기존의 도덕에 대한 경멸 따위가 나치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저런 주제가 뭐 대수란 말인가? 현대 정치 연구에서 나치만큼 중요한 제재題材도 없는데 말이다.
라이터는 다른 방식으로 니체 철학에서 정치철학의 부재를 진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을 주장했기에, 그는 도덕철학자일 수는 있어도 정치철학자일 수는 없다. 니체가 개인주의적인 철학을 주장했다는 것은 많이들 공유되는 해석이다. 예컨대, 매킨타이어 또한 니체를 개인주의적인 철학자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우리의 선택을 궁극적으로 근거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진단을 수행한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그 어떤 모호한 답변도 거부하며 날것의 진리를 직면해야함을 주장한, 진정으로 현대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그렇기에 자신이 해석한 공동체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철학과, 개인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니체의 자유 철학을 선택지로 내세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선택해야한다. 이러한 선택지에 기시감이 느껴졌다면 다행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매킨타이어와 흡사한 진단 속에서, 플라톤과 니체 사이에서 선택을 정치철학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이 개인주의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치철학이 아니라 도덕철학이기만 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개인주의적인 철학이란 이유에서 그것은 정치철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이게 전부인가? 니체가 개인주의적인 철학을 제안했기에 그가 정치철학자라는 주장만이 니체 철학에 담긴 정치철학 모두를 해명하는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본고에서 해명한 사회계약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 따위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으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행에 대한 니체의 다계열적인 입장 따위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오히려 니체 철학의 나치즘에의 기여를 설명하게 될 지도 모른다. 최신 연구들이 보이듯, 나치즘의 특유성은 유대인 혐오나 약자 혐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근대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에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니체의 정치철학, 혹은 니체 철학의 정치성은 본고에서처럼 연구되어야만 한다. 정치적 행위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정치적 현실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본고가 이러한 진실을 조금이라도 담을 수 있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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