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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쫓다 (1) : 선량한 칸트의 정화된 향락

문학론에서 잠시 빠져나와 다른 얘기를...
 


 
니체의 양심 개념과 칸트의 양심 개념을 좀 비교해보려고 했다가 결국 칸트에 대한 제 기존 이해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공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전 칸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전 항상 칸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습니다.
독일 철학 자체를 탄생시킨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진정한) 철학자들은 마땅히 존중해야한다는 제 윤리를 충실히 따랐었죠.
당연히도 칸트의 작업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차이는 그리 중대하지 않았습니다. 존경을 저버릴 만큼 문제되는 차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죠.(강성훈 샘에게 공격도 많이하지만 전 언제나 강성훈 샘에게 존경을 바치며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칸트와 결별해야만 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에 대한 저와 칸트의 이해 차이는 결코 사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를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비평적으로 보았을 때 칸트는 분명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였습니다.
문제는 칸트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비난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난이 그렇게 이상하진 않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 벌여진 끔찍한 일들은 분명 “악행”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한 악행들을 비난하는 것은 기이할 수가 없고, 칸트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그러한 악행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비난과 지지가 양립가능한지는 문제될 수 있겠지만, “비판적 지지”와 같은 방식의 태도가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예컨대 이런 것이죠.
보통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악행도 정당화된다고들 생각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전 이런 사고 방식에 대해서 예전부터 비판적이었습니다.
대의를 빌려 행해진 악행들이 악의에 의해 일어난 악행들보다 얼마나 많고 방대한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죠.
설혹 전쟁들 사이에서의 평가가 중요할지라도(예전에 <영구평화론> 수업을 들었을 때, 평화론이 적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평화론은 고대 때부터 흔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작업은 전쟁을 도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은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처럼 설혹 전쟁을 벌이더라도 지켜야할 규칙을 다룬 전문 연구서였습니다) 그러한 평가가 반드시 “정의로운 전쟁”을 상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어떤 목적도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진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죠.
전 칸트도 당연히 이런 입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지지할지라도 적어도 프랑스 혁명을 위해서 행한 범죄들까지 옹호해서는 안 되고, 이런 범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악행은 분명 비난 받아 마땅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가 강제되진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는 제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일단 칸트의 전략을 소개하겠습니다.
칸트는 도덕의 영역과 역사의 영역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피해갑니다.
도덕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악행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선할지라도, 그러한 선을 위해 하는 행위는 악행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을 위해서 프랑스 혁명기에 벌어진 악행들을 나열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을 위한 모든 실천은 그 자체로, 원리상으로 악행입니다.
주권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러한 명령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오직 소극적 저항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애초에 적극적인 저항은 모두 악행입니다.
주권자인 왕을 처형하는 일은 비교할 수 없는 범죄이고 말이죠.
설혹 그가 법에 의해 처형 당한 것일지라도 이는 원리상 범죄입니다.(사실 전 재판 없이 신속하게 처형해야한다는 생쥐스트의 입장에 동의해서... 법에 따른 처형은 코미디긴 했습니다)
이쯤하면 의문이 생겨야 정상입니다.
도대체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칸트가 지지할 수 있었냐는 것이죠.
칸트는 이를 도덕적으로 지지하진 않지만 역사적으로 지지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인간종의 “개선으로서의 진보를 추론하게 하는 하나의 사건”(7:84)입니다.
다만 칸트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은 “진보의 원인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단지 암시적인 것으로, 역사의 기호(Geschichtszeichen)로 보아야”(7:84) 합니다.
프랑스 혁명을 역사의 기호로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칸트에게 인류의 진보적 추세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생각된 것은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내에서 일어난 특정 행위들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이 사건에 대해 보여준 열광적인 동조의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프랑스 혁명 지지는 바로 그 사건을 이끌어가는 행위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구경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지라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칸트의 화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의 진보적 추세를 보여주는 사건은) “이런 대전환 극에서 공공연하게 노정되는 한낱 구경꾼의 사유방식일 뿐이다. 다른 편의 배역들에 대항하는, 한편의 배역들에 대한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비이기적인 공감은, 이러한 편파성이 그들에게 매우 불리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보편성으로 인해) 인간종의 성격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그 비이기적임으로 인해) 적어도 소질로 있는, 인간종의 도덕적 성격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개선으로의 진보를 희망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종의 능력이 현재로서 충분한 한에서,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진보이다.”
 
“우리가 오늘날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한 총명한 국민의 혁명은 성공을 거둘 수도 좌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혁명은,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설령 그가 두 번째로 시도하여 운 좋게도 완수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해도, 그러한 대가를 치르는 실험을 결코 결심하지 못할 만큼, 참사와 잔학행위들로 가득 채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말하자면 이 혁명은 (그 자신이 이 극 무대에 얽혀 있지 않은) 모든 구경꾼들의 마음에, 그 소망에서 거의 열광에 가까운, 그들의 표현 자체가 위험과 결부되어 있는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감은 인간종 안에 있는 도덕적 소질 외에 다른 것을 그 원인으로 가질 수 없다.”
 
그럴싸해보이지만 결국 똑같은 얘기입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오직 구경꾼으로서만 지지합니다.
해당 사건을 이끌어가는 행위자들은 모두 범죄자고 악인입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악행을 범하고 있으며,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일으키는 사건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역사의 진보를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만 그것은 유의미한 겁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 매우 기이한 것입니다.
악행을 바라보며 그것을 낙관하는 구경꾼들이야말로 인간 쓰레기일 거 같기 때문이죠.
고통에 소리치는 사람들이 뻔히 보이는데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자기를 이해하며 팝콘을 먹고 있는 사람이 인간 쓰레기가 아니면 누가 인간 쓰레기겠어요?
그럼에도 칸트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이런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칸트가 다음과 같은 구별을 도입하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자연의 구별이 그것이죠.
칸트에 따르면 자연소질은 그 자체로는 도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연소질일지라도 그 자체로서는 맹목적인 기계적 운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이런 구도를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가져오면 다음과 같아집니다.
저런 악행은 도덕적인 게 아니라 자연적인 운동이고, 그러한 자연적 운동들 중 “비사회적 사회성”처럼 그 자체로는 자연적이지만 도덕적인 진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종류의 자연적인 것들이 있기에, 저런 악행 또한 도덕적인 진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일 수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칸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인간의 행위를 자연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보”를 “기대”, 혹은 “희망”한다는 겁니다.
꽤나 비인간적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이상한 것만은 아닙니다.
애초에 인간종은 자연적인 것이고, 그것이 도덕성을 담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애초에 이는 저런 방식으로 번역/치환해서 기대/희망해야하는 종류의 무엇이라는 게 칸트의 입장이기에 저런 주장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속이 좀 매스꺼워지겠지만, 그래도 철학적으로는 말이 되는 주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말이 될 수 없는, 거부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 됩니다.
이런 걸 생각해보죠.
칸트는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들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떤 판단을 했을까하는 겁니다.
추측할 수밖에 없겠지만, 칸트는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들으며 기쁨을 느꼈을 겁니다.
국왕살해 같은 몇몇 악행에 대해서는 격분했지만, 칸트는 언제나 팝콘을 뜯으며 싱글벙글 뉴스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기쁨이 아니면 뭐겠어요?
웃긴 것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기쁜 소식에 대한 칸트의 판단입니다.
그는 그가 기쁨을 느낀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을 겁니다.
물론 기쁨이나 슬픔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닙니다.
애초에 기쁨이나 슬픔 자체는 도덕과 무관합니다.
하지만 기쁨이 좋고 슬픔이 나쁜 것인 한 칸트에게 있어 기쁨과 슬픔은 도덕과 무관한 것일 수 없었습니다.
도덕적인 선이 기쁨에 마땅하고 도덕적인 악이 슬픔에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악한 일을 보고 기뻐한다면 마땅하지 않은 기쁨 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칸트는 악행을 보고서는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기쁨을 느꼈다면 부당한 기쁨을 느꼈음을 깨닫고 죄책감으로 상쇄해야만 하고 말이죠.
이딴 게 바로 칸트의 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제가 조악하게 끌어왔지만 칸트 덕론의 핵심은 이런 것이기 때문이죠.
만약 칸트의 덕이란 게 이런 거라면 칸트는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는 기쁨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답은 사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정당화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칸트는 저런 기쁨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정당화합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가는 구체적인 행위들에 기뻐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건 자체의 기호를 역사적으로 구경하고 있음으로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쁨을 느끼는 반응을 악행에 대한 기쁨이라는 자연적 반응이 아니라, 구경을 통해서만 취할 수 있는 종류의 낙관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죠.
칸트는 자신을 둘로 쪼갭니다.
행위자로서의 자신과 인간종으로서의 자신을 구별하고, 인간종으로서의 자신이 반응하는 기쁨과 행위자로서의 자신의 반응을 독립적인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 자신이 한 명의 행위자로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개별적인 사건들의 소식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류적 존재로서 하나의 사건에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죠.
칸트는 자신을 둘로 쪼개고 기쁨을 누리는 자신을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그러한 기쁨을 정화하고, 그것을 정당하게 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걸 잘 조정하는 기술이 바로 덕입니다.
위험은 모두 피하고 좋은 것만 누리겠다는 것이죠.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꼬리를 흔들겠다는 스토아 철학이란 신념을 신봉하던 개새끼들은 이정도로 뻔뻔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기쁨은 누리지 않았거든요.
칸트는 기쁨마저 누리려고 합니다!(도대체 이걸 어떻게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꽤나 역겨운 얘기지만, 이 얘기로부터만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다만 이는 다음 기회로 넘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