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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 (0): 프롤로그

저번에 짤막하게 언급만 했던 얘기를 좀 자세히 풀어 얘기하려고 합니다.

문제가 문제인지라, 이 문제를 제대로 강조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얘기했던 것처럼, 전 최근 누스바움의 <연약한 선>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누스바움을 싫어했지만, 이번 계기로 다시 봤고, 그래서 [읽은 것들은 정말이지 못봐줄 책들이었으니] 아직 읽지 않은 주요 작품을 읽어볼까 싶어 <정치적 감정>을 펼쳤죠.

그리고, 예전처럼 폭발하고 말았죠.

 

제가 자주 말하지만, 누스바움은 최고의 속물 교양인입니다.

뭣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자신이 교양인이라고 생각하는 쓰레기들과 다르게 실제로 교양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누스바움의 해석 자체가 그렇게 멍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읽으면서 정말이지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던 2장에서 보여주는 모차르트 해석은 훌륭한 게 맞거든요.

그는 <피가로의 결혼>의 발생과 모차르트의 선택을 밝혀내며 그 안에 담긴 정신을 잘 분석해냅니다.

문제는 모차르트 해석이 아닙니다.

모차르트를 찬양하는 걸로 딴지를 건다면 그만큼 제가 동의하지 않을 무엇인가는 없습니다.(전 모차르트빠이고, 굴드의 모차르트 앨범에 담긴 악의에 정말이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 그 앨범을 추천하는 인간들을 보게 되는데 정말이 저주스러운 속물 교양인들입니다)

누스바움은 언제나 그렇듯 저런 걸 얘기하면서 좆도 모르는 다른 걸 깍아 내렸고, 그게 하필 루소라 제가 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누스바움은 속물 교양인답게 적절히 현대를 비판하면서 현대를 추종합니다.

그는 언제나 현대에 숭상되는 가치만을 숭상하죠.

개방성, 부드러움, 연민 따위를 설파합니다.

이것들이 이미 현대의 전제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우습게도 이런 걸로 현대를 비판하고 말이죠.

누스바움은 옳게 보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저런 가치를 긍정하고, 루소는 이를 부정하죠.

누스바움이 틀린 것, 정확히는 속물 교양인답게 절대로 얘기하지 않으며, 적당히 넘어간 점은, 루소가 저러한 가치들을 부정한 이유입니다.

루소도 현대인입니다.

그 또한 저런 가치들이 숭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저것들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을 것이고, 속도 편하겠죠.

세상은 점점 나빠지며, 미덕은 조롱 받고 악덕은 숭상되겠지만 말입니다.

루소가 저것들을 부정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개방성, 부드러움, 연민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정말로 아름답고 힘 있고 선하겠죠.

하지만 다른 모든 때에는 혐오스럽고, 힘 없고, 악할 겁니다.

개방성, 부드러움, 연민은 적당히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서 그 속에서 만족을 꾀하게 만드니 말이죠.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모든 타자를 긍정하는 것은 타자를 부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 없이 인정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거든요.

“그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라고 넘기는 일은 절대로 타자를 인정하는 일일 수 없단 얘기입니다.

저런 인정은 무관심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타자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와 갈등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 속에서 상호 인식과 인정이 수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종류의 인정은 포괄적이거나 선험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존재인지를 그 스스로가 깨닫기 이전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개방성 자체를 추구한다는 말은 전형적인 위선이란 얘기입니다.

적당히 구경하면서 그 타자성을 쾌락에 봉사시키겠다는, 소위 “오리엔탈리즘”으로 비난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루소가 동시대인들의 저런 태도를 비난할 때, 그들이 인간과 그들의 삶의 터전을 “풍경화”로 바꾼다고, 다시 말해 인간과 그의 삶의 터전을 쾌락에 봉사할 수 있는 사물로 바꿔버린다고 비난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죠.

그들은 타자와 함께 살 생각이 없습니다.

풍경화로 적당히 즐기고 잊고 싶어할 뿐이죠.

그들은 기부금을 내면 타자에 헌신한 거라고 믿는 이들이며, 그런 행위를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행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칭찬 받을 만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얘기죠.

이보다 루소의 언어로 말해져야만 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루소가 그 누구보다 목소리 높여 말했던 것도 없고, 루소의 진정한 공로는 바로 이들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한 것일 테니 말이죠.

그들은 자기편애에 빠진, 나르시스트입니다.

 

루소에 따르면 그들은 타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죠.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랑 받아 마땅한 자기 자신이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죠.

그들은 자신이 정말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눈에 비칠 자신이기에 상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현대의 모든 문제가 저것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의 제1논고와 제2논고 모두가 이 진단을 위해 쓰였죠.

루소는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이 사슬에 묶이게 된 기이한 과정이, 자신을 잃고 타인에게 종속되는 이해불가능한 과정이, 사랑을 위해 사랑을 잃어버리는 역설에 기초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그것을 알게 해준 인물이 바로 루소였죠.

그렇기에 루소는 누스바움이 찬양하는 그러한 가치들로부터 등돌렸습니다.

저것들이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 “문명”이란 것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고, 인간을 세련스럽게 하고, 평화를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 이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던 것이고요.

그러한 희망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단하였기에 그는 그래야만 했습니다.

스스로가 극작가고 오페라를 지은 적 있지만, 그가 사랑하는 조국 제노바에 극장이 세워져선 안 된다고 반박했던 것이고요.

누스바움은, 바로 저걸 역설하는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인용하면서도, 그의 변호를 단 한 구절도 가져오지 않으며 루소를 비방하고 모차르트 편을 들고 말이죠.

그는 아는 겁니다. 근거를 가져오는 순간 그의 주장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걸.

그러니 애초에 가져오지 않는 겁니다.

그가 책을 쓰는 목적은 남들로부터 사랑 받기 위한 것이지 정말로 세상의 악을 진단하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니 말이죠.

 

제가 이를 길게 얘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루소의 문제 의식으로부터 말해져야 할 정치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는 루소 이후에서 시작될 것이 아니라, 플라톤과 홉스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정치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두 철학자를 구별하기 위해선 바로 저 문제 의식이 필요하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