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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이 미메시스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1.

  아리스토텔레스는 14장에서 어떻게 전승된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위해 서술하는 것은 행위의 종류들이다. 그는 이야기 속 행위를 행위 실행 여부와 인식 여부를 기준으로 분류하고 평가한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서 중요하시 하는 행위, 혹은 비극을 비극일 수 있게 하는 비극이 미메시스하는, 혹은 미메시스해야만 하는 행위는 인식과 실행을 통해 식별되고 평가될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위를 그 분류 자체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분류에 입각해 행위의 예술성/비극성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알고서도 행위하려고 했으나 행위하지 않은 것은 최악의 것이고, 모르고서 행위하려고 했으나 발견에 의해 행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최선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류와 평가를 제시하며 구체적인 작품들을 언급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는 13장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최선의 비극으로 꼽았음에도, 14장에서는 차선의 비극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모순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 13장에서의 “최선”과 14장에서의 “최선”은 다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13장에서는 비극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비극적일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좋은 비극일 수 있게 하는 것이 “복합적인 구조”라고 분석되고 있고, 이러한 구조에 입각해서 어떤 인물을 미메시스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는지가 말해지고 있다. 반면 14장에서는 그러한 인물이 수행하는 행위가 어떤 형식일 때 예술성/비극성을 갖게 되며 “최선”일 수 있는지가 말해지고 있다. 때문에 두 평가는 충돌하지 않는다. 14장에서의 논의는 13장에서 말해진 최선의 구조 안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들에 대한 평가 기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합리적인 답변이며, 나 또한 이러한 답변을 지지하지만 이러한 답변에서 놓치게 되는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을 차선의 비극으로 분류한 것으로 보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을 반드시 최선의 비극으로 평가해야만 했다고 볼 이유는 없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이디푸스 왕』을 차선의 비극으로 보는 근거다. 앞에서의 분류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차선의 비극으로 분류시킨 근거는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버지인지도 모른 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시적으로 언급하듯이 저 살해 행위는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 작품 안에서, 혹은 무대 위에서 미메시스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사소한 사실일 수 없다. 작품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 어떤 결함이 작품 내부, 혹은 무대 위에 있는지 여부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고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불합리한 것이 비극에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오이디푸스 왕』을 언급하면 그것이 있을 지라도 작품 바깥에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무대 위에서 미메시스되는지 여부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작품 안에서, 혹은 무대 위에서 미메시스되는지 여부는 작품 평가에서 중대한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되지 않는 부친 살해를 근거로 『오이디푸스 왕』을 행위의 종류에 있어 차선의 비극으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2.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되지 않는 부친 살해를 근거로 『오이디푸스 왕』을 행위의 종류에 있어 차선의 비극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는 무엇인가? 물론 해당 작품 안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들은 여럿이다. 모든 대사, 모든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는 미메시스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이루게 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물론 이러한 요구가 부당할 수 있다. 어떠한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반드시 단일한 행위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미메시스하는 것 행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모방이 조직을 통해 하나의 뮈토스를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러 행위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특정한 단일한 행위일 이유는 없다. 응우옌의 말처럼, 이야기를 미메시스하는 것은 서사 형식일 수 있으며, 행위를 행위로서 미메시스하는 것은 게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뒤퐁록과 랄로가 지적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행위들을 조직함으로써 성취된 뮈토스 또한 행위를 모방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어떠한 비극이 좋은 비극이라면,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행위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왕』과 함께 시작되고 함께 끝나는 행위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 왕』의 시작에 주목해보자. 『오이디푸스 왕』은 탄원으로 시작된다. 그 탄원은 무엇인가? 도시를 덮친 재난을 왕인 오이디푸스에게 해결해달라는 탄원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 또한 그러한 재난을 알고 있으며, 도시에 재난이 덮친 까닭을 알기 위해 이미 신탁을 받으러 사람을 보냈다고 대답한다. 때마침 신탁을 받으러 간 이가 돌아온다. 신탁에 따르면 재난은 선대 왕인 라이오스의 살해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 살해에 대해 복수해야만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오염이 정화될 수 있다. 왕으로서 자신이 반드시 살해범을 찾아내어 복수하겠다는 오이디푸스의 맹세와 함께 『오이디푸스 왕』의 첫 장면은 끝이 난다.

  『오이디푸스 왕』은 선왕을 죽인 범인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이렇게 맹세된 행위가 『오이디푸스 왕』 전체를 관통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맹세에 따라 선왕을 죽인 살해범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 끝에 자신이 범인임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오이디푸스 왕』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왕』을 관통하는 하나의 행위,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 되는 행동은 바로 선왕의 살해범을 찾아내어 복수하려는 오이디푸스의 행위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비극적 행위일 수 있을까? 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적 행위는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선왕의 살해범을 찾아내어 복수하려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비극적인가? 이는 충분히 비극적일 수 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찾아내려고 하는 인물은 사실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 사랑하는 인간일 수 있다.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니 분명 그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알고서도 실행된 것인가, 모르고서 실행하고 뒤늦게 알게 된 것인가, 아니면 모르고서 실행하려고 했으나 알게 되어 실행하지 않게 된 것인가? 오이디푸스는 자기 자신이 자신이 찾아내려고 하는 범인일 줄 모르기에, 그의 행위는 두 번째나 세 번째의 것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행되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 행위가 실행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는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보복하는 것이다. 그가 하려는 보복은 무엇인가? 그가 크레온을 범인으로 의심할 때 하려는 행위를 비추어 짐작해보면 그것은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바로 범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이를 실행하는가? 실행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자신의 눈을 찌르기에 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방하지도 죽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보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는 실행된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는 모르고서 실행하고 뒤늦게 알게 되는 차선의 것이 아니라, 모르고서 실행하려고 하다가 알게 되어 실행하지 못하게 되는 최선의 것이다.

 

3.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되는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선왕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어 그를 추방하거나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범인인 줄 모르고 진행되지만 자신이 범인임을 알게 되면서 실행되진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맹세와 달리 자신에게 보복하지 않는다. 자신을 추방하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분석할 가치가 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을 일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첫 번째 것을 먼저 살펴보자. 모르고서 행위하려고 했으나 발견에 의해 행위하지 않게 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13장에 따르면 비극은 행운으로터 불운으로 이행하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비극적인 행위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불운으로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다른 말로 이는 해피 엔딩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훌륭한 비극일 수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오이디푸스 왕』에는 제기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추방하지 않을지라도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 충분히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가 자신을 죽이거나 추방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충분히 불운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추방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불운이 더욱 강해지는 것은 아니며 끔찍함만을 덧붙일 것이다. 그렇기에 실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행위가 덜 비극적일 이유는 없다.

  두 번째 의의를 위해서는 윤리학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비극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를 서술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비극의 사건이 윤리적인 잘못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하마르티아”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며, 비극이 미메시스하는 행위가 윤리적인 가치를 함축하는 품격 있는 인물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극 작품에서 미메시스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윤리적일 수 있는가?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해질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탄원자들이 탄원하기 전에 도시의 재난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또한 그는 그 탄원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맹세하기도 한다. 선왕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고 복수하려는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윤리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이다. 그는 도시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왕으로서의 책임을 중요시한다. 또한 그가 실행하려는 보복은 개인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아니다. 그가 선왕의 살해범에게 보복하려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 때문도 아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만도 아니다. 오이디푸스가 비록 그것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가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러한 행위에 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도시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신의 명령이다. 때문에 살해범에게 보복하려는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는 보복을 실행하지 못한다. 이것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일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 그가 실행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작품 속 오이디푸스는 분명 자신을 추방할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크레온에게 자신을 추방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가 추방되지 않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그것을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신을 추방해달라는 오이디푸스의 요청을 크레온이 거절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추방을 유보한 크레온의 행위는 차치하고서도,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추방을 요청하는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가 추방을 명하면 되지 않는가? 그는 왜 그러지 않는가?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추방하지 않는 것은 그 스스로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서이다. 추방은 왕으로서 명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왕일 수 있게 했던 근거가 바로 그가 추방되어야만 할 이유가 되었다. 때문에 그가 그 추방을 인정한다면 그는 더 이상 왕일 수 없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추방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추방하지 못한다. 그는 자격 없는 왕이기에 그러한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추방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보복하지 않는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윤리적으로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맹세를 지킬 줄 몰라서, 혹은 사리사욕을 탐해서 포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이유에서 단념된 것이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의 이러한 단념은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미메시스된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정말로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인가? 적어도 그것은 좋은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 1장과 5권 8장에 비추어보았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잘못이 있는 행위에 대해서 단순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무지의 종류나 방식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와 윤리적인 잘못을 다르게 이해한 듯하다. 우리는 윤리적인 잘못에 대해서 고의성은 어느 정도 감안하지만, 결과에 입각해서 절대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및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잘못의 종류나 방식에 따라 다르게 평가했으며, 어떤 종류의 잘못에 대해서는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 듯하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행위 또한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행위는 아닐지라도, 의미 있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행위는 비록 “좋은” 행위는 아닐지라도, 의미 있는 행위일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는 매우 이질적인 생각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무엇일 수 있다. 현대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역할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우연을 중시한 것을 윤리적 행위가 갖는 가치가 우연에 의해 훼손되기 쉽다는 진단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연을 중시한 것은 윤리적 행위가 갖는 조건 자체에 대한 이해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윤리적 행위가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며,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우연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이어서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윤리적 실천은 단순히 우연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어려운 임무가 아니라,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업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윤리적 실천은 단순한 의무나 공리 증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특별히 가치 있는 활동일 수 있다. 윤리적 실천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에도 의미 있을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비극 작품 속 행위들을 분석하는 일 또한 윤리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일 수 있다. 비극 작품 속 행위들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라 정교하게 분석함으로써, 다시 말해, 잘못의 원인과 발견의 근거를 종류와 방식에 따라 정교하게 구별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인들의 실험적 과업으로서의 윤리적 실천을 이해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일을 기획/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