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쪽글

카타르시스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설명하는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에 대한 서설preface

 

1.들어가면서: 비극의 역설과 통속적인 카타르시스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언제나 즐거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선사하는 즐거움이 다 같은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극한직업』 같은 영화에 대해 “재밌다”고 말하는 것과, 『나라야마 부시코』 같은 영화에 대해 “재밌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심지어 우리는 『나라야마 부시코』 같은 영화를 “재밌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이 “비극적인” 작품을 보는 일에 대해서 “재밌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을 볼 때 마음 아파한다. 만약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한 비극 작품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비극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우리는 비극을 감상할 때, 절친한 친구들과 웃고 떠들 때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낄 법한 그러한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극은 쾌감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쾌감을 제공하지 않는 일이 즐거운 일일 수 있겠는가?

  물론 절친한 친구들과 웃고 떠들 때 우리가 느끼는 쾌감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다르다. 두 쾌감은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위계적으로 차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것으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질적으로 구별된다. 적어도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일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쾌감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소방차를 볼 때 우리가 감각하는 “붉음”과 잘 익은 토마토를 볼 때 우리가 감각하는 “붉음”이 구별될 수 있는 것보다 심각한 의미에서 구별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쾌감 각각은 고유한 질적 특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교적인 즐거움과 미식의 즐거움 모두 즐겁다고 말하고 그것들이 쾌감을 준다고 말한다.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는 즐거운 일 모두에 공통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쾌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극의 즐거움 또한 이러한 일일 수 있는 것 아닌가? 비극 작품을 감상할 때 느끼는 “마음 아픔”이, 사교적인 즐거움이나 미식의 즐거움과 매우 다른 질적 경험일지라도,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일 수 있고, 그러한 질적 차이를 넘어서는 공통의 쾌감을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음 아픔 또한 쾌감을 주는 일일 수 있고,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설명이 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신의 신체를 학대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소위 ‘마조히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고통을 통해 쾌감을 느낄 수 있는지는 설명을 요구하는 흥미로운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설혹 이러한 인지적 흥미로움이 편협한 정상성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비극의 즐거움에 대해 우리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마조히스트에 대한 설명의 필요와 달리 편협한 정상성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조히스트가 아닌 사람들도, 그러니까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극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비극의 즐거움은 재현에 의존적인 것처럼 보인다. 비극을 즐겨 보는 사람일지라도, 비극적인 경험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체험하며 즐거워하진 않을 것이다. 비극의 즐거움은 사태 자체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재현을 통해 성취되는 즐거움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비극의 즐거움은 매우 특이한 즐거움이다. 사교적인 즐거움이나 미식의 즐거움, 심지어는 마조히스트의 즐거움과 달리 비극의 즐거움은,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 재현을 통해서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즐거움은 직접적인 경험을 배제한다. 그렇기에 비극의 즐거움은 비열한 즐거움으로 비난 받기도 하였다. “강건너 불구경”이라는 관용구가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경우 끔찍한 사태에도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어떻게 인간이 그러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지는 잘 모를지라도,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비열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러한 즐거움이 나의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다면 더욱. 비극의 즐거움 또한 안전한 좌석에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처럼 “비열한 즐거움”이 아닌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극의 즐거움은 그러한 “비열한 즐거움”과는 다른 점이 있다. 강건너 불구경을 할 때 우리는 마음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안도감은 마음 아픔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극의 즐거움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비열한 즐거움”과 구별된다. 비극의 즐거움은 비열한 즐거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극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통속적인 해답에 따르면 이는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이다.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나무위키에 따르면 이는 다음과 같다:

 

'카타르시스'란 독자 내면에 방치된 채로 썩어가던 상처를 픽션의 비극을 통해 직면하고 비로소 하지 못했던 슬퍼함을 통하여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비극의 즐거움은 치료의 즐거움, 혹은 배설의 즐거움과 흡사하다. 억압되어 표출되지 못했던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통속적이지만 이는 전통 있는 견해이다. 그것의 기원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소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정말로 합당한 것일까? 그리고 이것이 정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맞는 것일까?

 

2.카타르시스, or something not enough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즐거움을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으로 여겼는가? 많은 연구자들이 이에 동의하지만 사실 이는 추론에 근거한 해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분석하는 『시학』에서 단 두 번 카타르시스를 언급한다. 종교적인 의미처럼 보이는 용례(1455b15)를 배제하면,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언급하는 용례는 단 하나 뿐이다. 단 한번 뿐이지만, 다행히도,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비극을 정의할 때 카타르시스가 말해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러한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하는 재현 예술이다.(1449b27-28) 이러한 언급은 비극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에는 매우 중요할 수 있겠지만, 비극의 즐거움과는 그 자체로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학』의 논의들을 면밀히 검토할 경우 카타르시스는 비극의 즐거움과 무관할 수가 없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언급하는 『시학』의 몇 안 되는 구절 중 하나에서,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로부터 비롯된다고 언급된다.(1453b10-14) 또한 비극을 정의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앞의 논의에 근거하여 비극을 정의하고 있다고 밝히는데,(1449b20-25) 이러한 언급을 따른다면 카타르시스를 통한 정의는 재현의 즐거움 말고는 관련될 수 있는 것이 마땅찮아 보인다. 그렇다면,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러한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하는 재현이라는 비극의 정의는, 카타르시스를 성취함으로써 연민과 공포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즐거움을 제공하는 재현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카타르시스에 근거한 것이자, 비극의 정의에 입각한 해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말해진 “카타르시스”가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어떻게 즐거움을 낳을 수 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해진 카타르시스가 어떤 의미인지를 밝혀줄 단서가 하나 있다. 음악이 수행할 수 있는 여러 역할을 논하는 『정치학』 8권 7장의 구절이 그것이다. 해당 구절에서 카타르시스는 음악이 수행할 수 있는 여러 기능 중 하나로 언급되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언급과 함게 『시학』이 언급된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시학』에서 다룰 것이고, 여기, 즉 『정치학』에서는, 일반적인 논의만을 다룰 것이라는 게 그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시학』에서는 ‘카타르시스’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드물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 또한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학』의 논의가 어떻게 카타르시스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일 수 있는지는 불분명 보이기에 이러한 언급은 분명 기이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학』의 카타르시스 논의와 『정치학』의 카타르시스 논의가 무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치학』에서 일반적으로 논의된 카타르시스는 어떤 것인가? 길지만 이와 관련된 구절 모두를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음악이 하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유익함을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교육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카타르시스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지금 당장은 일반적인 의미로만 사용하고, 『시학』에 대한 논의에서 보다 명확하게 다시 그것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음악은 여가를 위해, 그리고 휴식과 긴장의 완화를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모든 선법이 사용되어야만 하는데,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격에 속하는 것ethikotatais은 교육을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고, 활동에 속하는 것praktikais과 감화에 속하는(도취적인, enthousiastikais) 것은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동안에 듣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영혼에 강한 영향을 끼치는 (이를테면 연민과 공포뿐만 아니라 도취[열광]와 같은)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 영향의 끼침은 많고 적음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움직임에 의해 사로잡히기 쉬운 어떤 사람들이 있다. 신성한(종교적인) 멜로디의 영향 아래에서 그들의 영혼에 종교적인[신비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멜로디를 사용할 때, 마치 의술적 치료와 정화를 받은 것처럼 안정적 상태로 되는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동일한 것을 연민이나 두려움을 느끼기 쉬운 사람, 일반적으로 감정적이 되기 쉬운 사람, 또 이러한 감정이 그들 각자에게 속하는 한에서 다른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일종의 정화를 얻게 되고, 마음의 부담감은 즐거움을 동반해서 가벼워질 것이다.

『정치학』, (1342a37-b15)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음악의 여러 유익함을 논의한다. 그에 따르면 음악의 유익함은 교육, 카타르시스, 여가, 휴식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익함을 고려해볼 때 여러 선법이, 여러 방식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다. 성격에 속하는 것은 교육에 적합하고, 활동에 속하는 것과 감화에 속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육은 앞에서 논의된 방식에 따라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교육에 적합한지 유무는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지, 직접 연주하지 않고 감상하는지에 따라 구별된 것으로 보인다. 활동에 속하는 것과 감화에 속하는 것 모두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동안 듣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서술은 감상을 위한 선법의 사용의 한 예로 감화에 속하는 것을 상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음악의 유익함 중 하나인 “카타르시스”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인 것처럼 보인다.

  흥미롭게도 『정치학』에서 논의된 카타르시스의 “일반적인 의미”는, 앞서 언급된 오늘날의 통속적인 카타르시스 이해와 흡사한 것처럼 보인다.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출을 통한 치료와 흡사하다. 감정을 쉽게 느끼는 사람을 비롯하여, 우리는 감정을 느낄 필요가 있다. 때문에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경우 마음에 부담감이 쌓인다. 음악은 느낄 필요가 있는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러한 부담감을 해소한다. 카타르시스란 바로 이러한 느낄 필요가 있는 감정을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의 부담감을 줄이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느낄 필요가 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함으로써 쌓인 부담감을 “정화”하는 일이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카타르시스가 이러한 감정적인 정화라고 할지라도 카타르시스가 즐거움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는 불분명할 수 있다. 모든 유익한 일이 반드시 즐겁거나 그렇지 않은 일일 이유는 없다. 즐거움과 무관한 유익한 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정화 또한 즐거움과 무관한 일일 수 있다. 다행히도, 인용된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감정적인 정화는 즐거움과 관련이 있다. 다만,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은 결과물이 아니다. 부담감이 해소됨에 따라 얻어지는 즐거움은 아니라는 것이다.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은 카타르시스에 동반되는 것으로서, 부담감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다. 모든 치료 과정이 즐거운 것은 아니며, 좋게 되는 과정이 반드시 즐거운 것도 아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교육은 괴로운 것이다. 좋게 되는 과정이 즐거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즐거움을 동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카타르시스가 정확히 어떻게 즐거움과 연관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은 감정을 표출하는 일 자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비록 카타르시스가 즐거움을 동반할 뿐 카타르시스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을 느끼는 일 자체가 즐거울 수 있다고, 다시 말해 연민과 공포를 느끼는 일이 즐거운 일일 수 있다는 진단 아래에서 카타르시스에 동반하는 즐거움이 언급된 것처럼 보인다. 이를 고려해볼 때,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오늘날의 통속적인 카타르시스 이해에서처럼, 비극의 즐거움은 억눌린 감정의 표출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인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즐거움을 억눌린 감정의 표출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움으로 여겼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인용된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는 것은 카타르시스지 비극의 즐거움은 아니다. 카타르시스가 정확히 어떤 역할인지는 차치하고서도, 이는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과 동일시될 수가 없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음악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감정 표출의 필요에 근거하고 있다. (반드시 억눌린 것일 이유는 없지만) 억눌린 감정 따위가 주어졌을 때에만 카타르시스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비극의 즐거움이란 것이 반드시 억눌린 감정 따위가 주어졌을 때에만 느껴지는 것일 이유는 없다. 억눌린 감정 따위가 없어도 감정 표출은 즐거운 일일 수 있고, 인용된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도 않다.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은 카타르시스의 결과물이 아니다. 즐거움은 동반하는 것일 뿐 카타르시스에 종속되는 것도 아니며, 인용된 구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즐거움을 카타르시스에 종속시키려는 것 같지도 않다. 바로 앞 문단에서 논의한 것처럼, 감정을 느끼는 일 자체가 즐거운 일일 수도 있고, 연민과 고통을 느끼는 일 또한 바로 그러한 종류의 즐거움을 산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위의 구절을 토대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을 느끼는 일 자체가 즐거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일 뿐, 카타르시스가 즐거움을 산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일 수가 없다. 물론 여기서 논의된 카타르시스는 즐거운 일이 맞다. 하지만 카타르시스가 즐거운 일인 것은 그것이 감정 표출을 통해 작동하는 덕분이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어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카타르시스가 종교적이거나 의학적인 치료의 효과를 가진다는 서술을 토대로, 비극의 즐거움을 확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일이다.

  게다가 카타르시스를 근거로 비극의 즐거움을 확정하는 것은 성급함 이상의 문제가 있다. 인용된 구절에서 논의되는 카타르시스는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이 『시학』과 관련이 있다고 언급했고, 음악의 카타르시스 기능이 비극을 구성하는 주요 감정인 연민과 공포를 통해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비극에 직결되지 않는다. 음악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연민과 공포에 근거하지 비극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연민과 공포를 느낌으로써 수행된다. 그런데 연민과 공포를 느끼는 일이 반드시 비극을 통해서만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라도,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일이 비극은 아닌 것이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카타르시스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음악을 말하고 있고, 비극은 이러한 음악의 한 종류일 뿐 이러한 음악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때문에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를 느끼는 일 자체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음악들 중, 비극으로부터 비롯되는 특유의 즐거움을 설명해야만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설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3.역설 없는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설명하기에 앞서,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은 “마음 아픔”이 어떻게 즐거운 일일 수 있냐는 의문에 직결될 뿐만 아니라, 비극 고유한 즐거움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의 유genus이며,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의 종차인 것이다. 그렇기에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다루기에 앞서 좀 더 엄밀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을 역설로 이해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구교선이 지적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연민과 공포처럼 고통스러운 감정이 즐거운 일일 수 있냐는 의문을 명시한 적 없으며,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명 또한 제시한 적 없다. 고통이 어떻게 즐거운 일일 수 있냐는, 소위 “비극의 역설”로 불리는 의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대응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의문에 대응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역설을 파악하지 못해서 생겨난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 『수사학』에서 그는 연민과 공포 같은 감정들이 그 자체로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378a20) 비록 그가 다른 구절에서는 연민과 고통이 그 자체로 고통인 것처럼 서술하지만,(1382a20, 1385b15) 연민과 고통 같은 감정은 그 자체로 고통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쾌락이 활동 자체가 아니라 활동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1173b28~) 이를 수반으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활동에 대한 느낌 자체가 그것이 즐거운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진단(1173b20~)에 근거하여 이를 주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민과 공포는 일반적으로는 고통스러운 감정이지만, 좀 더 고양된 차원에서는 즐거움을 수반하는 감정일 수 있다. 이러한 진단을 염두에 둘 경우 그가 “비극의 역설”에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된다. 애초에 역설 따위는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문제는 남는다. 어떨 때 연민과 공포는 즐거움을 수반하는 것인가? 분노 같은 다른 감정은 즐거움을 수반할 수 없는 것인가?

  즐거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의 다음의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즐거움은 활동이자 완전함이다(energeia kai telos). 또 즐거움은 무엇이 생성될 때가 아닌 사용될 때(chōmenōn) 생기는 것이다. (……) 즐거움이 지각된 생성(genesis)이라고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 도리어 자연적 성향의 활동(energeia tēs kata physin hexeōs)이라 말해야 한다. 또 ‘지각된’ 대신에 ‘방해받지 않은(anempodiston)’ 것이여야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53a10-15)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즐거움은 활동이다. 즐거움이 활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소박해 보이지만 철학적으로 중대한 함의가 있는 주장이다. 한편으로 그는 즐거움이 상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는 즐거움이 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주장은 플라톤을 경향한 것으로서 행복이 상태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입장과 이어지며, 후자의 주장은 (감각적인) 즐거움은 결국 결여된 필요를 충족하는 불완전함에서 비롯된다는 플라톤의 비판에 대한 반박을 함축한다. 가려운 몸을 긁는 일이 즐거울지라도, 몸이 더 가려워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가려운 몸을 긁는 즐거움이 늘어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 더 가려워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즐거움은 가치 없는 일처럼 보이며,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의미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 말마따나, 그러한 즐거움은 누리지 않는 것이 더욱 좋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옹호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필요에 의한 즐거움은 무가치하다는 플라톤의 진단에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필요에 의한 즐거움은 필요와 무관한 즐거움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요에 따른 즐거움이 아니면서도, 감각적인 즐거움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그것이 인용된 구절에서 말해지고 있는 즐거움, 자연적 성향을 온전히 발휘하는 일의 즐거움이다.

  문제는 자연적 성향을 온전히 발휘하는 일의 즐거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보통 ‘잠재태’와 ‘현실태’로 번역되는 뒤나미스와 에네르게이아에 대한 꽤나 논쟁적인 정교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에 대한 이해는 잠재태와 현실태에 대한 복잡한 논의 없이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영혼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일은 즐겁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은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눈이 언제나 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자고 있을 때, 눈은 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영혼 또한 마찬가지이다.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이 곧 영혼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영혼 또한 잠들어 비활성화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처럼 보이며, 영혼도 여럿이고, 영혼의 능력도 여럿이기에 언제나 영혼들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더 이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느끼는 게 영혼의 능력에 속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그러한 능력은 언제나 발휘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경험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을 언제나 느낀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며, 상충하는 감정들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끼는 일은 영혼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일일 수 있고, 즐거운 일일 수 있다. 연민과 공포 또한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본성적인 감정을 경우에 맞게 적절하게 느끼는 일은 즐거운 일일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통스러운 감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문제는 외려 감정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인 것처럼 보인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분노처럼 고통만을 수반하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영혼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감정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물론 분노가 무의미하거나 본성에 어긋나는 틀린 감정이라는 해석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분노는 자유인으로서 살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단지 분노는 “에네르게이아”에 해당되는, 즉, 활동에 해당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분노는 필연적으로 필요를 의미한다. 분노는 복수에 대한 욕구를, 즉, 필요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분노는 즐거운 일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들은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필요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이러한 감정들의 경우 그러한 필요를 축종시키려는 욕구를 느끼게 되므로 고통스러울 수 있다. 분노처럼.

  반면, 연민이나 공포는 특정한 욕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 물론 연민이나 공포 또한 특정한 욕구를 수반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괴한의 위협에 공포를 느꼈을 때 우리는 도망칠 필요를 느낄 것이고, 굶고 있는 갓난아이를 먹이기 위해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보고 연민을 느꼈다면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필요는 바로 자신이 마주한 경우에 따라 수반될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도망칠 수 없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을 때라면 공포를 느껴도 도망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단순히 그러한 필요를 참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도망”을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폭우로 물난리가 났을 때, 넘치는 물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려고 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낄지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넘치는 물이 집에 들어오지 않게 막는 일이 시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민 또한 마찬가지이다. 연민이 든다고 해서 언제나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필요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따른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들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고통스러운 욕구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진 않지만, 주어진 상황과 그 상황과 관련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통스러운 욕구를 수반할 수도 있다. 연민과 공포가 고통스러운 것은 이러한 경우 때문이다.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이렇게 해명될 수 있다.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영혼 능력의 온전한 발휘와 이러한 발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통해 이해할 경우, 연민과 공포를 즐기는 데 있어 재현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재현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느낄 경우에는, 대체로 고통을 수반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음악처럼 감정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경우에는 그럴 것이다. 그 경우에 연민과 공포는 구체적인 상황에 의존하지 않기에, 상황에 의해 발생하는 고통스러운 욕구가 수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경우, 물론 음악이나 볼거리 또한 활용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연민과 공포를 유발한다. 이야기의 경우 인물이 행동을 수행하는 사건의 상황 등이 비극 작품 안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관객들에게 있어 그 상황은 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간접적으로도 말이다. 그렇기에 비극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재현할 경우, 대체로 고통스러운 욕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듯이, 끔찍한 사건을 무대에서 직접 재현할 경우, 그러한 혐오스러운 짓거리를 보는 일은 불쾌한 일이기에 즐거움은 줄고 고통만 남을 수도 있다.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을 영혼 능력의 온전한 발휘로 이해하고, 고통을 우리가 처한 상황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이처럼 여러 모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과 일관적이다. 이는 재현이 즐거움에 기여하는 역할과 끔찍한 사건을 무대 위에 올리지 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침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만으로도 비극의 즐거움이 자신은 안전한다는 안도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해석은 배제된다. 자신과 무관한 것은, 연민과 고통을 즐기는 일에 있어 필요조건일 뿐이다. 이는 방해가 없다는 의미일 뿐, 즐거움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다. 연민과 고통의 즐거움은 안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활동이 아니라 운동일 것이기에, 온전한 의미에서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즐거운 비극:Die fröhliche Tragödie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은 영혼 능력의 온전한 발휘를 통해 해명되었다. 그렇다면 비극 고유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단서는 『시학』 4장 초두에서 언급된, 재현의 즐거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재현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1448b5-10) 재현은 직접 수행하든 감상하든 즐거운 일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지어 불쾌한 것들의 경우에도, 그것들을 재현한 것을 감상하는 일은 즐거운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1448b10-12) 다만, 이러한 감상의 즐거움은 일종의 인식의 즐거움으로,(1448b12-13) 재현한 작품이 재현된 바로 그것임을 인식함으로써 성취되는 즐거움이다.(1448b15-18)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많은 연구자들이 인지적인 즐거움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단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충분히 합당한 근거 같다. 앞서 지적되었듯이, 『시학』 전체에서 즐거움의 원천으로 제시된 것은 이것 말고는 없기도 하고, 『시학』의 논의 자체가 인지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인물이 어떠해야하며 서사 형식은 어떠해야하는지 따위를 다루는데, 이 조건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해당 조건들을 의식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규모가 너무 장대해서 길 경우 관객들에게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는데,(1451a4-6) 이러한 진단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비극의 효과에 결정적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관객들이 해당 비극의 재현하는 작품의 내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지만 훌륭한 비극일 수 있다고 진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인지적인 즐거움이다. 왜 아니겠는가?

  문제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비극이 제공하는 인지적인 즐거움이 다른 인지적인 즐거움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인지적인 즐거움이 앞서 논의된 연민과 공포의 즐거움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다. 연민과 공포라는 감정과 인지는 무슨 상관이며, 이것이 어떻게 고유한 즐거움을 이룰 수 있는지이다. 먼저, 비극이 제공하는 인지적인 즐거움이 다른 인지적인 즐거움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에 답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은 행위를 재현한다.(1450a5) 그런데 행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이다. 설혹 행위들이 유형적으로 판별될지라도, 행위의 진리는 개별적인 것에 놓여 있다.(1107a29-32) 비극이 재현하는 행위가 개별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진리가 개별적인 것에 더 가깝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단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진단이다. 이러한 진단에 따르면, 행위의 영역에 대한 판단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판단과 상이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위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보편적인 것들을 인식하는 (이론) 이성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평가가 이론 이성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면, 행위는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위는 윤리적인, 실천 이성에 입각하여 인식되고 평가된다. 비극이 재현하는 것이 결국 행위라면, 그것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실천 이성에 근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으로부터 우리가 인식적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실천 이성에 근거한 인식적인 즐거움일 것이다. 다시 말해, 비극의 즐거움은 도덕적인 판단의 즐거움이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도덕적 판단의 즐거움이다. 이는 의외의 답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기이한 답처럼 보인다. 또한 재현의 즐거움을 언급하는 『시학』의 구절과 너무나도 괴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해당 구절에서 재현을 통한 인식의 즐거움은 “그 사람은 저 사람이다”와 같은 사실 판단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판단은 분명 개별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지만, 도덕적인 판단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이루는 인식적인 즐거움도, 이런 종류의 인식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를 도덕적인 판단으로 볼 마땅한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이는 합당한 비판일 것이다. 그런데 마땅한 이유가 있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연민과 공포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들이 음악을 통해서처럼 직접 재현되지 않고, 이야기를 통해서 불러일으켜질 때에는 이는 도덕적인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인식이 단순한 사실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학』에서 직접 논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야기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연민과 공포는, 그러한 행위를 수행한 이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와 그러한 끔찍한 결과를 야기한 원인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에 근거한다. 만약 행위자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물이거나, 도덕적으로 불량한 악인일 경우 연민과 공포는 발생하지 않는다. 연민과 공포는 도덕적으로 완벽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선량한 사람에게서만 불러일으켜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연민과 공포는, 비극을 통해서 재현되는 사건에서 발생한 불운한 일이, 그 행위자로부터 비롯되어야만 불러일으켜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불운한 사건의 원인이 행위자에게 귀속되지 않을 경우, 행위자가 완벽한 성인군자인지 아니면 악인인지와 무관하게 연민과 공포는 불러일으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민과 공포는 그 행위자의 잘못에서 비롯하되, 그가 겪는 불운이 그가 범한 잘못에 비해 훨씬 클 때에만 불러일으켜진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평가와 판단이 필요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 판단과 평가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하는 것처럼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따르면, 어떤 비극이 훌륭하게 그 자신의 목표를 수행하였다면 연민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만약 그 작품이 음악이나 볼거리에 의존하지 않고 행위를 재현하면서 연민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켰다면, 그 작품은 관객들에게서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적절한 도덕적인 판단을 이끌어낸 것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의 근간이 되는, 비극으로부터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사태는, 도덕적인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비본질적인 요소에 근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는 달리 연민과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외이지만, 만약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인지적인 즐거움이라면, 그것은 분명 도덕적인 종류의 인식일 것이다. 도덕적인 종류의 인식 중에서도, 도덕의 원리를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도덕적인 판단에 해당되는 그런 종류의 인식일 것이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도덕적인 판단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일 것이다. 도덕적인 판단 또한 인지적인 활동이기에 즐거운 일일 수 있다. 문제는 비극을 감상할 때 수행되는 도덕적인 판단과, 비극으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연민과 공포가 어떤 관계인지이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단순히 도덕적인 판단의 즐거움이 아니라, 연민과 공포로부터 비롯되는 도덕적 판단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연민과 공포와 도덕적 판단의 연관성은 이미 해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극을 감상할 때 우리가 수행하는 도덕적인 판단은 비극의 이야기 구조에 의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이 이미 논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의 논의만으로는 문제가 충분히 해명된 것일 수가 없다.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사태에 대한 인식이 어떤 점에서 특별히 즐거운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도덕적 판단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도덕적 판단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도덕적 판단의 즐거움을 말할 때, 사건의 특수성에서 유래되는 그러한 종류의 감정이 해당 도덕적 판단의 즐거움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일 이유도 없고, 그러한 감정에 근거하여 고유한 즐거움으로 분류할 이유도 없다. 그러한 감정의 수반은 부수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명에 있어 관건이 되는 것은 연민과 공포가 도덕적 판단과 어떤 본질적인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판단에 있어 그러한 감정이 그저 부수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본질적인 구성요소라면, 그러한 감정들이 해당 도덕적 판단의 특유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공포와 연민은 본질적으로 상관적인 감정이기에, 공포와 연민이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면, 바로 그런 본질적인 연관성에 입각하여,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말하는 것은 충분히 합당할 수 있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산출하는 도덕적 판단이 다른 도덕적 판단들과 외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공포와 연민이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면, 이는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고통과 연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시학』의 구절을 특별한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 이해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인지적인 즐거움이라는 해석을 지지하는 많은 연구자들은,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해당 구절이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인지적인 즐거움이라는 해석과 상충한다고 여겼고,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정교한 해석적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만약 공포와 연민이 도덕적인 판단의 부산물이 아니라 본질적인 구성요소라면, 해당 구절은 긴장을 야기하지 않을 수 있다. 공포와 연민에 수반되는 즐거움이 비극의 즐거움을 이루는 인지적인 즐거움의 구성요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반응으로 이루어진, 종합적인 즐거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공포와 연민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을 구성하기에,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이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만큼 적절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감정이 불러일으켜지는 일이 운동이 아니라 활동이라는, 그것이 자연적 성향의 올바른 실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단에 정확히 들어맞는 서술이 된다. 공포와 연민의 즐거움이, 그러한 감정들을 담지하는 영혼의 능력을 완성하는 실현일 수 있게 하는 좋은 실례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연민은 도덕적 판단과 어떤 본질적인 연관을 맺는가? 이러한 관련성은 누스바움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누스바움이 지적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천 이성의 발휘는 보펀적이지 않고 개별적인, 변화하는 질료로 이루어진, 불멸하는 신과 달리 필멸적인, 운동하는 동물과 닮은 점이 많은 인간에게 적합하게 이루어질 때에만 진정으로 현행적인[현실적인] 것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천 이성의 발휘는 언제나 불분명하다. 실천 이성의 발휘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구체적인 사태에 대한 실천 이성에 따른 우리의 판단은 법칙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이 법칙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가능한 모든 사태를 포괄하는 올바름의 기준을 구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가능성이 우리의 인식적인 능력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진단된 것이라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을 해결하는 보편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도덕적 판단 능력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불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리적으로, 인간의 도덕적인 판단이 한계적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조건에 토대하고 있음을 진단함으로써,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분명함을 불신으로부터 구제해냈다. 그러한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행동하고, 평가하는 인간의 실천이 도덕이라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누스바움이 제안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해에 따르면, 도덕의 불분명함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고민과 노력 같은 실천들은,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운동과는 구별된다. 그러한 실천들은 정해진 답을 따르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답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과정일 수 없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언제 어디서 멈추더라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엇이 아니라 이미 실현된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덕적 실천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활동, 즉, 에네르게이아일 수 있다. 도덕적 실천이 이러한 의미에서 활동이라면, 감정 또한 그것의 필수 요소일 수 있다. 도덕적 실천을 수행케 하는 인간의 경향성과 그러한 사태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그러한 활동의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정들은 바로 그러한 활동들의 질료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감정적인 반응들은 단순히 인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서가 되거나, 인식에서 비롯되는 부산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식의 요소가 된다. 적어도 실천 이성을 발휘하는 도덕적 판단에서는 그러하다. 그렇기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는, 그러한 판단에 부합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애초에 그러한 인식을 성취하지 못한 것이 되는, 인식과 분리될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판단에 있어 감정은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감정은 도덕적인 인식에 도움이나 방해가 되는 상관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가 도덕적인 인식의 필수 구성요소이다. 그렇기에, 비극의 고유한 즐거움은 인지적인 즐거움이면서 동시에 연민과 공포라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일 수가 있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테제야말로, 인식과 감정 모두가 우리 영혼의 능력을 완성시킨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실천 철학의 정수를 잘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누스바움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철학자들이 쫓아낸 비극을 철학적으로 구원해낸 철학자라고.

 

5.나오면서 – 더 나은 비극 이해를 향하여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비극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 분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비극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마주해야만 하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위대한 실천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예술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슬픔에 집중하며 감정의 배출 따위의 효용을 말하는 당대 연구자들에게 분통을 터뜨린다. 이러한 격정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유효할 수 있다. 우리는 비극을 문자 그대로 “슬픈 이야기”를 뜻하는 단어인 ‘비극悲劇’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극을 뜻하는 단어 ‘Tragödie’의 어원이 슬픔 따위의 감정과 무관하다는 니체의 일갈은 우리에게 좀 더 불분명하게 들릴 것이다. 비극에 대한 니체의 독해는 매우 통찰력 있으며 선구적이면서도 시의적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비판은 조심스럽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비극의 어원은 슬픔 따위의 감정과 무관할지라도, 비극을 감상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비극이란 예술의 중대함의 필수요소라는 진실을 존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는 감정을 중요시하였고, 감정을 (이론 이성적인) 인식의 영역에서나 (실천 이성적인) 행동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려고 한 소크라테스 및 그 일당을 고발하는 데 언제나 심혈을 기울였지만, 비극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 대한 그의 일갈은 (니체의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오도의 위험이 있다. 니체 말마따나 비극은 눈물을 쥐어짜내며 주인공에게 동정을 베푸는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는 한심한 짓거리는 아니지만, 비극이 우리의 눈물을 요구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비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시작될 필요가 있다. 감정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이성의 한계만을 말하는 순진함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누스바움의 지적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어도, 적어도 이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알겠는가? 니체 또한 그랬던 것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