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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 대해서 J씨에게 보내는 카톡 저번에 말씀 드렸듯이 전 요즘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 빠져 있습니다. 빠져 있다고 해서 여러 번 본 것은 아니고… 요즘 영화를 정말 안 보고 있는데, 그럼에도 영화를 보게 만드는 영화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스탠리 카버가 그랬었나? 하여간 걔도 영화를 안 보게 되었다고 그랬는데(카버 뿐만 아니라 긴즈부르그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안 보게 된다고) 저도 그런 과정에 있는지 영화가 별로 땡기지 않게 되더군요. 그래도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는 예외이고, 제가 왜 이 사람 영화에 꽂혔는지 말하고 싶어지더군요. 보통 영화나 소설이나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을 때 그 작품이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마구치 .. 더보기
니체를 읽으면서 프로이트의 삶은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실천은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성공하였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삶과 실천과 정신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는 못했고, 결국 그것을 배신한 것도 사실이다. 한 인간의 삶을, 한 인간의 실천을, 한 인간의 정신이 그 자신의 말과 글로, 그 자신의 이론과 그 자신의 사상과 그 자신의 철학으로 살아 숨쉴 수 있다면! 이것은 어려운 요구이다.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과 글을, 이론을, 사살을, 철학을 하도록 요구하는 진실은 이 불가능성을 요구한다. 이를 배신하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더보기
철학의 위로 한 사람의 전기는 한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한다. 1592년 3월 28일 보라비아 남부의 한 마을에서 “요한”이란 이름의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한명의 요한, 후스를 마주해야한다. 후스의 육체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에서 불길 속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그 재마저 라인 강 어딘가에 뿌려져 그 누구도 그의 육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육신이 사라진 날 이후 보헤미아 사람들은 둘째 아들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설혹 그것이 강제된 것일지라도, 보헤미아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유골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기억하길 선택한 것이다. 보헤미아 사람들이 요한이란 이름을 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