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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 대해서

J씨에게 보내는 카톡






저번에 말씀 드렸듯이 전 요즘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 빠져 있습니다.
빠져 있다고 해서 여러 번 본 것은 아니고… 요즘 영화를 정말 안 보고 있는데, 그럼에도 영화를 보게 만드는 영화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스탠리 카버가 그랬었나? 하여간 걔도 영화를 안 보게 되었다고 그랬는데(카버 뿐만 아니라 긴즈부르그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안 보게 된다고) 저도 그런 과정에 있는지 영화가 별로 땡기지 않게 되더군요.


그래도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는 예외이고, 제가 왜 이 사람 영화에 꽂혔는지 말하고 싶어지더군요.


보통 영화나 소설이나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을 때 그 작품이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더할 것과 뺄 것이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가 혹평을 받는다면, 모두 대사와 서사 때문일 겁니다.
대사와 서사가 허접한 부분이 많고, 고치고 싶은 마음이 들죠.
근데 왜 감독이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평론가들은 별 생각을 안 하는 듯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대사랑 서사를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양반입니다.
<해피아워>에 “중심에 귀를 기울이다”라는 행사를 찍은 걸 보면 제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류스케 이 양반은 관찰력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저 장면도 우연히 본인이 참석하게 된 행사, 혹은 우연히 본인이 구경하게 된 행사에서 따웠을 겁니다.
어떤 걸 보면서 이게 영상이 되는지 안 될지를 감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좋은 영상을 찍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행사 장면은 별 것도 없고, 이유 없이 길지만 정말 재밌습니다.
어색함과 어색함에서 비롯되는 긴장, 긴장은 설레임이랑 헷갈리게 만들고, 그래서 묘한 기류를 만들죠.
사람들의 조금마한 움직이도 제스쳐가 되고, 별거 아닌 말에 전체가 반응하게 되고 그럽니다.
그런 걸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상으로 찍어낼 수 있는 거죠.
본인이 본 것에서 하나의 이상을 그려낼 수 있고, 그 이상을 재현해낼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다.


이런 재주가 있으면 그냥 그렇게 영화를 찍으면 끝납니다.
그냥 이런 장면들로 영화를 채우고 대사나 서사는 거의 생략하면 참 쉽습니다.
비평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대사와 이해될 수 없는 서사에 비난을 쏟을 수 없죠.
하마구치 류스케가 그냥 자기가 잘하는 걸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무도 비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보다 상을 더 받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덧붙이고 있죠. 대사나 서사를 넣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영화가 어색해지고, 허접해지는데도 말이죠.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는 것이지만, 동아시아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그걸 재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 대화로 소통하지 않거든요.
오즈 야스지로나 쿠로사와 아키라가 대사 없는 영화를 성취해낼 수 있었던 것은, 대화 없는 소통에 익숙한 덕분이었고요.(물론 이걸 성취해내는 것은 익숙함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죠. 오히려 이 익숙함을 타자화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또한 표현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천재적인 솜씨가 필요합니다)

J 씨도 동의하시겠지만, 저게 엄청 멋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이 예언적이고 웅변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조차 예언과 웅변이 부재하게 된 것이죠.
저런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예언과 웅변은 영화의 문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제가 루멧 영화에서 독특함을 느꼈던 것이죠.
루멧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연극 같습니다. 대화 중심이거든요.
하지만 루멧이 특이한 영화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제게 익숙한 영화들이 아키라나 야스지로의 맛에 빠진 사람들이 만든 영화였던 것이지, 영화가 원래 저런 것은 아닙니다.


대사 없는 영화는 분명 멋집니다.
하지만 대사 없는 영화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부재를 경험한 것이 바로 저 한계지점이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 없는 소통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정치는 대화입니다.
말이 있어야 소통이 가능합니다.
대화 없는 소통은 정말 소수의 동질성이 확보된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질성을 포용하는 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오직 말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말이 위대한 것이고, 예언가가 말의 영매가 되는 것이죠.
말로만 얻어질 수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저걸 아는 겁니다.
그가 끊임 없이 체호프를 얘기하는 것은 저 진실을 상기하기 위한 것이죠.
체호프의 예술은 말 그 자체입니다.
웅변 그 자체죠.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절절한 것이 없죠. 진실함입니다.
루소가 역설하는 예술이죠. 위로, 진실, 웅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예술은 체호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그게 아니라면 예술은 그저 사치, 거짓, 퇴폐에 불과할 테니까요.(저도 백번 동의합니다)
때문에 하마구치 류스케는 저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쉽게 갈 수 없는 것이죠.
본인이 잘하는 걸로 그냥 찍으면 됩니다 원래.
그냥 그것만 해도 모두가 박수를 칠 겁니다.
홍상수 영화에 박수를 치듯이 말이죠.(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진정한 예술이죠. 지금 영화로 길고 요상한 해석을 하는 치들을 볼 때마다 비평도 철학처럼 폭파시켜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상수가 어떻게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가늠 못하는 멍청이들이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슨 자격으로 떠드는지 모르겠단 것이죠. 홍상수 영화는 물론 재밌고, 일년에 한번씩 만원돈과 두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있겠지만, 그 영화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예술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겁니다.

이 선택은 어려운 길입니다.
동아시아에는 대화가 부재합니다.
때문에 그려낼 대화가 없습니다.
그럴싸한 대화를 넣으면 현실성이 사라집니다.
동아시아에서 저런 대화는 불가능하거든요.
연극적으로 보일게 뻔하고,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문제를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본인부터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대사들이 오그라들고 이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느끼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대화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거든요.
진정한 예술은 거저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대화가 아무리 어색할지라도, 대화를 현실적이게 할 길을 찾아야합니다.
그게 어색하지 않은 대화 상황을 구축해내는 일이든, 어색하지 않은 대화를 재현하는 일이든, 하다못해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대화를 유발하고 익숙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든 뭐든 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저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죠.
대사 빼고 만들면 편합니다.
어색하지 않고, 평론가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박수나 치겠죠.
홍상수 영화를 평가하듯이 븅신같은 말장난으로 극찬을 늘어놓을 겁니다.
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걸 거부하죠.
그건 위선이고 기만이고 사치고 거짓이니까요.


대화는 그럼에도 어색하죠.
그래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어색한 대화를 있는 그대로, 그럼에도 아름다울 수 있게, 이상으로 그려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감정은 “쪽팔림”입니다.
쪽팔린 상황이 자주 연출되죠.
특히 <해피아워>의 재판 장면이 그렇습니다.
진짜 그 장면은 불편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친구들 다 불러놓고 재판을 하는데,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판사가 참다못해 계속 그러면 재판에서 불리해질 것이라고 조언할 정도로 그녀의 변명은 구차합니다.
이 장명은 진짜 불편함 그 자체입니다.
왜 저 인간은 굳이 저러는지 잘 모르겠고,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쪽팔린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 장면은 쪽팔림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남편이 그 친구를 다시보는 계기가 되거든요.

해당 장면이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서사적 장치가 되진 않습니다.
여기서 계기라는 것은 오로지 정신적인 것이거든요.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쪽팔린 짓을 보며 민망함을 느낄 겁니다.
본인도 알겠죠. 본인이 얼마나 우스운 꼴일지.
근데 그걸 왜 하나요?
본인이 정말로 원하는 게 있으니까 하는 겁니다.
쪽팔림을 각오할 정도로 원하는 게 있으니까 감수하는 것이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부딪혀보는 것이죠. 가능하지 않다고 가만히 있으면 절대 불가능하거든요.
가능성이 낮아도, 쪽팔려도 그냥 그걸 하는 겁니다.
그만큼 절실한 것이고 그만큼 진실한 것이고 그만큼 정직한 거죠.

저게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해피아워>에서 주인공의 저런 진실함은 외려 본인에게 가장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남편이 다시 반해서 정말로 진심으로 그녀를 쫓아다니게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저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중요치 않죠. 과정도 중요치 않습니다. 그것들은 정말로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태도죠. 그것은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남편은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하죠.
그게 정당한 사랑이 아니란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란 것도 알고 있죠.
그래도 본인은 그런 모든 것을 각오합니다.
비난에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할 뿐이죠.
“드디어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찾았습니다.”
이 한마디면 될 일이란 것이죠.
비난한다면 비난을 받아들일 거고, 도움을 베풀기보다 방해로 일관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일 겁니다.
그걸 모르고 선택한 것도 아니고, 거기에 굴할 것이라면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걸 보여줍니다.
전문 배우들의 웅장한 연설이 아니라 허접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더듬거리면서도 정말 강인하게 진정으로 자신을 내놓는 뮈토스의 현장을 말이죠.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가 좋은 것은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죠.
하지만 이 부족한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도 모릅니다. 있다면 이미 누가 했겠죠.
하마구치 류스케는 정말로 그걸 실험하고 있는 겁니다.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우스꽝스럽다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해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그건 이미 각오한 거니까요.
오히려 불평불만을 원할 겁니다.
그걸 알아야 더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혹시라도 누군가가 비판과 함께 정말로 더 나은 대안을 가져온다면 그는 더욱 기뻐할 것이고요.
그는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현실을 위해 작품을 내놓는 것이니까요.
명예 따위가 아니라 소통 그 자체를 위한 것이고, 더 나아질 가능성을 찾기 위한 것이니까요.
누군가가 정말로 잘 때려주고 나은 길을 보여준다면 당장이라도 고칠 겁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루소가 절망한 “공모의 불가능성”을 극복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뭐 일단 실력이 좋으니 좋아하는 것도 있죠.
정말 잘 찍습니다.
“이거 이렇게 찍으면 멋지지 않을까?” 이 감각이 정말 대단하죠.
<아사코>에서 보여준 도피의 드라이브 장면도 정말 대단하죠.
그러니까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다시 써먹은 거고요ㅋㅋ
하지만 이 양반의 대단함은 저렇게 자신이 잘하는 것이 명확한데도 그걸 버릴 용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본인이 잘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고, 쪽팔림을 각오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긴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시도덕들이 참 많죠. 그러니까 영화가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흥행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런 선택들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민이 묻어 나오죠.
<드라이브 마이 카>에 등장하는 빨간 차가 그렇습니다.
저 차가 쿠페라서 진짜 개븅신같은 장면들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데(쿠페의 뒷자석은 타라고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게 이해가 갑니다.
포스터를 보세요. 저 차를 봤다면 어떻게 저걸 포기하겠습니까.
그냥 저걸 쓰고 싶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또 거기서 나오는 감성이 있는 겁니다.
이런 즉흥성이 정말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고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등장하는 다언어 연극 같은 것도 그런 경우일 겁니다.
아마 어디서 저런 걸 보고 “요거 괜찮은데?” 싶어서 가져온 것일 겁니다.
정말 제대로 그려냈고 그래서 정말 멋지죠.
원래 저런 이상한 짓을 싫어하는 저이지만 보다가 감탄하고 진심으로 보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특히 거기에 등장한 수화하는 캐릭터….
아마 이것도 의도하진 않은 것일 겁니다.
하지만 정말 대박이었죠. 진정성을 200%로 보여줍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임시도덕을 따르는 덕분입니다.
완벽하게 통제하여 완벽한 영화를 내겠다고 생각했으면, 평생 영화를 못 찍었을 겁니다.
본인이 마주한 것들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들을 가지고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죠.
그러니 영화가 나오고, 그러니 어느정도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완벽하진 않죠.
하지만 적어도 완벽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시도들 덕분입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완벽을 떠드는 븅신들은 입에 담을 가치가 없는 것이죠.
불완전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하여간 좋은 감독입니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고요.
아쉽지만 이런 영화는 비평이 잘 안 통합니다.
내부만을 바라보는 영화가 비평에 적합하죠.
구조주의 비평은 원래 그런 짓거리에 특화된 것이고, 그걸 작품성이라고 포장하는 천상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모든 내부는 바깥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바깥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진짜 예술이고 이게 진짜 작품이란 것을 알죠.
하지만 이런 작품에 대한 비평은 더둠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는 구조주의에서만 가능한 개념이거든요.
전체와 부분의 순환들로 보여줄 수 있는 주제-변주의 무한계열은 구조주의 비평에서만 가능하죠.
그러니 탈구조주의는 아름다운 음악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주제-변주의 무한계열은 그들의 장르가 아니거든요.
이걸 하려고 억지를 부리면 영화가 븅신처럼 그려집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떠벌림이 그런 것처럼요.
뭐 하여간 비평과 예술에 대한 저와 가장 비슷한 동류를 만났다… 이런 것이죠.
같이 술마시고 싶은 양반입니다.
제정신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포기하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하소연하고, 그럼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영웅들을 찬양하면서 밤새 술마시고 싶습니다.
남는 건 숙취 뿐이라도 즐거운 시간일 겁니다. 삶을 기념하는 자리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