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쪽글

철학의 위로

한 사람의 전기는 한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한다. 1592년 3월 28일 보라비아 남부의 한 마을에서 “요한”이란 이름의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한명의 요한, 후스를 마주해야한다. 후스의 육체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에서 불길 속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그 재마저 라인 강 어딘가에 뿌려져 그 누구도 그의 육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육신이 사라진 날 이후 보헤미아 사람들은 둘째 아들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설혹 그것이 강제된 것일지라도, 보헤미아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유골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기억하길 선택한 것이다. 보헤미아 사람들이 요한이란 이름을 선택하였기에, 그 뒤로 어떤 교황도 요한이란 이름을 선택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살아있는 과거이다.

유감스럽게도 코메니우스는 별점에 능하지 않았다. 1622년 합스부르크가가 보헤미아의 통치자로 등극하였을 때, 그들이 297년 동안 보헤미아를 지배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상황이 진정되기를 바라며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났을 때, 그는 자신이 고향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리가 아는 코메니우스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가 몰랐던 것처럼.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은 그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오랫동안 그저 기다렸다는 기록된 사실 뿐이다.

기다림 속에 희망은 빛을 바랬다. 근심은 타올랐다. 그 어떤 현실적인 돌파구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절망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히 절망하며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자신이 던져진 도시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한다. 하지만 ‘순례자’는 그가 피난 온 도시에서 속임과 거짓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제작한 연극 속 주인공처럼. 그가 도시의 가장 낮은 거리에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하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순례자’처럼 지칠 대로 지쳐 도시로부터 “마음의 집”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마음의 골방 속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뒤로” “문을 닫았다.” 이로써 이 교사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만 말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자신들의 적대자들과 후원자들이 구하고 있었던 “활기찬 양식”을 부정하였고, 그의 작품은 그에게 남겨졌을지 모를 용서의 길을 영원히 닫았다.

역사는 언제나 변천한다. 포르투나는 변덕의 여신이다. 투퀴디데스와 귀차르디니의 <역사>가 인류의 영원한 책장에 영원히 꽂혀 있는 것이 증명하듯 역사는 변천한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작품으로 용서의 길을 영원히 닫았다. 하지만 이와 함께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가 덧없다고 비난한 길, 인류의 기억에 남는 영광의 길, 문학의 길, 불멸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그가 부정한 길임에도 우리는 바로 그 길에서 그를 만나고 있다. 변천하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전쟁도 변천한다. 보헤미아 전쟁은 독일로, 덴마크로, 스웨덴으로 번져갔다. 유럽이 격동한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천한다. 철학자는 정치가로 변신한다. 그는 낯선 땅에서 그의 교회의 운명을 교섭하는 데에 자신의 미약한 삶을 바친다. 세상의 높은 자들이 유럽의 심장에 있는 작은 속국을 잊지 않도록 애를 쓴다. 스웨덴의 승리는 그의 머리가 고국의 미래를 생각하도록 재촉한다.

스웨덴 군대가 프라하를 정복한다. 망명자들은 이 새로운 점령자를 동맹자로 환영한다. 그들은 새로운 점령자와 함께 합스부르크가와 철저하게 다시 싸울 수 있길 희망한다. 그들은 모른다. 그들의 비극이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는 것을. 지배자들은 유럽을 나누어 갖기 위해 서로 화해한다. 꿈은 깨진다. 최종결정이 내려진다. 망명자들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추방된다.

정치가는 다시 교사가 된다. 그가 교사로 삶을 시작한 것은 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 <더 간단한 문법 규칙들>이 그의 남은 삶을 예고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알 수 없다. 그의 첫 작품 속에서 우리는 불멸의 교육자 코메니우스를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이 탄생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을지라도, 우리는 불길과 망명으로 변천할 그의 삶과 그의 이름과 동의어가 된 불멸의 교육자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던 것만 같다. 정치가 코메니우스가 고국의 미래와 자신이 돌아갈 바이센 산을 위해 내놓은 것이 교육 개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우리는 추방과 불길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첫째 요한 후스로부터, 추방과 불길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둘째 요한 코메니우스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그의 두 번째 고향에서 그는 가족을 잃는다. 그가 다시 두 번째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도시의 불길 속에서 그는 원고와 재산을 잃는다. 그는 그렇게 두 번째 고향도 잃는다. 그의 마지막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의 작품을 남기고 떠난다. 교육을 통해 유럽의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란 꿈을 남기고서. 그는 1670년 11월 15일에 숨을 거두었고, 그가 그리던 바이센 산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나르던에 묻혔다.

전기는 누군가의 삶을 모방한다. 전기는 삶의 불완전한 복사물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은 끝날지라도 어떤 이들의 전기는 끝나지 않는다. 불길과 물길 속에서 흩어지고 흘러간 첫째 요한의 삶처럼, 육신은 사라져도 정신은 살아남는다. 불길과 물길의 변천 속에서 첫째 요한의 정신은 둘째 요한의 정신으로 되살아난다. 정신은 단단한 육신을 갖지 않는 미약한 존재처럼 보인다. 정신은 총과 칼을 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정신은 그 어떤 군단보다 강한 권력을 이룬다. 생각은 사람들의 뇌를 불타오르게 만든다. 총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사람들을 정복한다. 총과 칼은 나와 닮은 존재를 나와 닮지 않게 만들지만, 정신은 나와 닮지 않은 존재를 나와 닮은 존재로 만든다. 잃어버린 닮음을 회복시킨다.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게 한다. 닮은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줌으로써.

정신을 만드는 것은 몽상가거나 천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몽상가이자 천재이다. 30년 전쟁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을 폐허 속에서, 잿더미가 된 원고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는 몽상가이면서 천재일 수밖에 없다. 코메니우스가 그렇듯이.

그는 몽상가였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몽상가였다. 지상의 앎과 신에 대한 사랑이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몽상가였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천재이기도 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였기에.
지상의 앎과 신에 대한 사랑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였기에.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세상을 바꿀 열쇠라는 것을 보였기에.

그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되었기에 우리는 그가 몽상가이면서 천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 또한 보았기에 우리는 그가 몽상가이면서 천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두 요한의 고향 보헤미아는 오늘날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때처럼 지금도 역사의 풍파 속에서 그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체코의 말과 글은 두 요한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후스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코메니우스가 정세를 받아들이고 그가 사랑하는 바이센 산에 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살아남았을 것이고, 모두가 부러워할 평온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변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후손은 탄압 속에서 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말과 글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후스가 진리를 위해 불길로 걸어 들어가고, 코메니우스가 사랑을 위해 방랑을 선택한 것은 그 어떤 탄압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을 자유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20세기 언젠가에 남겨질 체코의 침묵 속에서 두 요한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그들의 말과 글이 정말로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일까? 시대와 공간이 다른 우리 독자들이 그들의 말과 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학자들의 흥밋거리일 수도 있다. 그들의 말과 글은 역사가와 신학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글이 지금 이 곳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은 그들 작품 속에 그들의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 삶이 증언하는 정신이 무엇일지 우리는 모른다. 세계시민주의일까? 유럽의 시민정신일까? 역사의 진보일까? 혹은 그들에게 눈물을 강요한 절망과 그럼에도 그들을 숨 쉬게 한 희망일까?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의 글이 수백 번의 겨울을 견뎌냈고, 그들의 죽음이 수백 번의 망각 속에서도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겨울과 망각과 함께
그들을 기억하며

'쪽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사 정리  (0) 2022.07.09
양심의 목소리  (0) 2022.06.27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추언  (0) 2021.09.13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0) 2021.09.13
흄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 대한 코멘트  (0) 2021.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