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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추언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추언

 

조금 급조한 감이 있지만 데카르트 성찰에 대해 정리한 글을 쓰게 되었다.

해당 글 안에서 쓰기 뭐해서 넣지 않았지만, 저런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여 글을 추가적으로 남긴다.

 

 

일단 이런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어쨌든 글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글은 본인의 글도 아니라, 보통 옛날 사람의 글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서 해당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쉬운 일이라고 여긴다.

글에 이런 문장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글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그 글을 읽을 수만 있으면 말이다.(과거의 언어는 오늘날과 다르고, 우리는 그저 시대적으로 다른 것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다른 언어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에라스무스는 라블레를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라블레는 에라스무스를 무신론자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둘다 무신론자인가? 아니면 둘 다 무신론자가 아닌가?

무신론자라는 주장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우리의 눈에 라블레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무신론자에 가깝게 보이고, 에라스무스는 좀 멀게 보인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 전통을 잘 아는 저자의 눈에 라블레는 당대 신앙의 전형적인 사례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무신론자란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현대에 해당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무신론의 의미를 가지고 누군가를 마음대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의미 사용일 수는 없다.

“913일 오후 3시에 신께 경배를 드리지 않은 이들무신론자의 정의라고 떠벌리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해당 단어를 사용하냐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은 별로 고민하지 않지만, 이는 역사학의 오랜 고민이었다.

역사학은 과거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기술을 써야하는지를 고민했다.

여기서 기술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그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글들에 있는 주장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그것을 해석하는 데 있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어떤 추론을 할 때 합당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느 수준에 이르러서야 객관적일 수 있는지, 그러한 방법은 몇가지나 있는지....

역사학자들은 저런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그래서 심성사나 지성사를 쉽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냥 되는대로 주장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며, 수많은 증거와 증거들을 토대로 한 추론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증거와 증거를 토대로 한 추론이란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은 증거일 수 있으며, 어떤 주장이든 증거를 토대로 한 추론일 수 있다.

누군가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진술이 의식철학의 증거라고 떠벌릴 수 있다.

물론 나는 저 진술이 의식철학의 반대 증거라고 주장하였지만 말이다.

둘 모두가 틀릴 수는 있어도, 둘 모두가 맞을 수는 없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증거와 추론이라고 할 때, 우리는 증거와 추론을 가볍게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법 및 법학 전통에서 보여주듯 증거와 추론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아무 것이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여기서 아무 것이나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소화기가 빨가니까 데카르트는 의식철학자야라는 주장은 소화기는 빨갛다라는 사실을 증거로 삼고 있다.

이런 아무 것을 배제하는 의미에서 아무 것이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 사건에서 심증은 증거일 수 없다.

살인에서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흉기가 무엇인지를 입증하고, 해당 흉기와 피의자의 관련성은 증거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입증관련성에는 또다시 따옴표가 필요하다.

살해 후 시체를 훼손했다고 했을 때, 사체에는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밧줄로 목이 졸린 흔적, 칼에 찔린 흔적, 둔기로 머리와 주요 부위를 내려친 흔적 등등

이 중에서 무엇이 흉기일 수 있는가?

당연히 과학적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사후에 행해진 흔적과 죽음에 이르게 한 흔적에 대한 체계적인 앎이 요구될 것이며, 그러한 앎에 근거하여 흉기를 규정할 것이다.

관련성이란 것은 무엇인가?

해당 흉기와 피의자가 같은 시공간에 있다면 그것이 관련성인가?

관련성은 임의적이지 않다.

지문이 발견되었다든가 해당 흉기의 소유자임을 입증할 근거가 있을 때나 관련성은 말해질 수 있다.

여기서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중적이다.

그러한 증거와 추론의 관계를 밝혀주는 앎이 있어야하는 것과, 그러한 앎을 법적 증거로 채택하는 것 모두 임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필적이나 지문, DNA는 처음부터 법적 증거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증거를 법적으로 채택할 수 있다는 근거를 명시하고 이를 판결함으로써 법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판례는 증거 채택의 기준을 만든다.

어떤 사건에서는 지문이 결정적일 수 있겠지만, 다른 어떤 사건에서는 지문이 결정적일 수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인지와, 해당 사건 유형에서 채택될 수 있는 증거추론은 판례를 통해 규정된다.

 

 

좀 빙둘러 왔다.

하고싶은 얘기는 이런 것이다.

어떤 주장을 위해 필요한 증거가 무엇이고, 그러한 증거를 토대로 할 수 있는 추론이 무엇인지는 규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들은 무턱대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 많이도 의심했는데, 그들이 그런 것을 의심한 것은 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진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체적인 타인들에 대해 그들을 이해하는 것을 성공했다는 이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그런 의심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 그들은 타자의 생각을 고려할 때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어려움들에 근거하여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의심을 극복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성격을 갖는다.

성공적인 문제 해결 사례가 있을 것이고, 아직 성공적인 문제 해결이 제시되지 않은 문제 유형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파악되지 않은 사례에 대해서는 그것이 성공적인 문제 해결 사례에 속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실험을 통해 확인한다.

해당 사례가 성공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성사, 사상사 따위가 발전해왔다.

데카르트 또한 이러한 발전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그냥 글만 읽고 이렇다 저렇다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내가 반박한 그런 주장들은 구체적인 물음을 가져본 적도 없는 조류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나름의 증거를 사용하였고, 증거보다는 추론에 좀 더 비중을 두고 해석을 하였다.

내가 지금 당장 내가 사용한 범주들이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철학의 계문강목과속종은 아직 규정된 바가 없다.

다만 나는 어려운 분류에서 분류를 위한 분류명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의 완결된 책을 하나의 완결된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러한 방법에는 개인을 들여다보는 기법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문학에서 배웠으며, 데카르트에 대한 여러 전기를 비교 검토하여 데카르트의 철학을 해석할 수 있게 할 테마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판단이, 혹은 선택이 필요했다.

그것들을 밝히지 않고 주절주절 써내려갔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주장하고 반박하는 일은 피했다고 자부한다.

그러한 고민 없이, 그러한 선택 없이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인 수많은 책들은 피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나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 누군가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사람일 때나 그런 부동의는 의미 있을 것이다.

그저 한 구절, 한 문장, 본인의 언어 습관에 기초하여 주장하고 반박하는 이들은 바람에 따라 소리를 내는 쓰레기 더미와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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