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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 대한 코멘트

꽤나 예전부터 흄의 <탐구>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쓰게 된다.

 

일단 책 자체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유명한 흄 연구자인 스티븐 버클이 인정하듯, 흄에 대해서도, 흄의 <탐구>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흄 철학의 핵심은 인과를 부정한 것에 있다는 것이나, 흄의 <탐구>는 그의 <논고>를 축약한, 조악하게 축약한 홍보 책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통념이다.

하지만 버클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통념은 근거 없는 것이다.

흄은 분명 회의주의자지만, “실재론적인 회의주의자이고,(물론 스티븐 버클이 지적하듯, 이런 라벨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회의주의냐이지, 어떤 이름의 회의주의냐가 아니니까 말이다) <탐구>는 그 통일성과 완전성에 있어 흄 본인이 평가한 것처럼 중요한 성취물이다.

텍스트 분석과 역사적 근거 모두 이러한 주장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음에도, 스티븐 버클이 불평하듯 저런 근거 없는 통념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영미 학계에서도 이런 통념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내가 자주 얘기하듯, 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역사적 탐구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그 중요성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20세기까지 흄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망쳐왔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좋은 흄 연구들이 많이 나왔고, 그런 통념들은 근거 없으며,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자료를 단편적으로, 부주의하게 확대해석했음이 증명되었다.

뭐 이런 발전 이후에도 멍청한 흄 철학 연구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영미 학계에서는 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면 뚝배기를 깨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것인다.

 

뭐 국내에는 일단 흄 연구자가 거의 없고, 제대로 된 토론이란 것도 존재하질 않고, 괜찮은 흄 연구서가 소개된 적도 없으니, 대중적으로 흄이 이상하게 소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대부분의 철학 연구자들은 철학사를 좆같이 공부하기 때문에 본인들의 편견만 확대 재생산한 편견 덩어리를 철학사적 상식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유통되는 것은 철학 연구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를 비판해줄 사람도, 비판의 근거가 될 책도 존재하지 않는 암울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비판의 근거가 될 책이 번역되지 않는 한 그런 멍청이들은 그 책을 읽지도 않을 것이고, 해당 저작의 저자가 학계에서 손꼽히는 학자고, 높이 평가 받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해당 문제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데, 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자신이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러니 저런 사실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실이 어디에 있냐고 되묻고선 본인이 논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뭐 번역된 책이 있어도 안 읽는 것은 매한가지란 것을 난 알고 있지만, 이 경우 그들의 게으름을 더욱 목소리 높여 비난할 수 있다)

 

암튼 잡설이 길었는데, 어쨌든 흄은 매우 인과를 부정한 적이 없고, 그의 <탐구>는 매우 조직적인 구조를 가진 책이라, 흐름을 잘 읽어내야 한다는, 현대 흄 학계의 상식을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런 상식을 보여주는 일이다.

흄이 인과를 부정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분명 인과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나?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답을 제공할 이유가 있으며, 괜찮은 흄 연구서도, 괜찮은 흄 개론서도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한 답을 제공하지 않고, 학계 상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일단 흄의 인과 부정을 반박하려면, 용어와 텍스트를 잘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흄은 4<지성 작용에 관한 회의적 의혹에 대해서>에서 인과를 부정하는 듯한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는 좀 더 섬세하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먼저 할 일은 용어들을 정비하는 일이다.

흄은 대충 인과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관념들을 연합하는 원리로서는 “cause and effect”(원인과 결과)란 표현을 사용한다.

흄은 5장에서 회의적 해결책을 제시한 후부터는 “causation”(인과성)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과력은 “necessary connexion”(필연적 연결)과 관련 있기에 이를 7장에서부터 논한다.

 

먼저 흄은 cause and effect를 관념 연합의 세 원리로 제시하고 있기에, 그가 cause란 관념을 부정한 것일 수는 없다.

흄은 causation, necessary connexion도 부정하지 않는다.

흄은 세상에는 우연이 없고, 모든 일이 인과력에 의해 필연적 연쇄에 의해 발생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여러 번 반복된다.

6장을 시작하며, 흄은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고, 우연은 그저 우리의 무지가 그런 믿음을 추동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8113절에서 흄은 사건들을 일으킨 원인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 이들은 그저 상놈vulgar일 뿐이며, 철학자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에 우연은 없고, 세계는 필연적 연쇄로 이루어진 총체whole임을 이텔릭체로 강조하며,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님을 여러 번 확인한다.(8234절은 최종확인일 뿐이다)

,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흄의 말을 그저 수사로 이해할 필요는 없단 소리다.

만약 그가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필연성이 자유에 대립되고, 도덕을 집어 삼킨다는 주장을 논박하며, 자유와 필연성은 대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이는 8장의 주제이다)

 

흄이 인과(원인과 결과인지, 인과성인지는 차치하고)를 부정했다는 그런 통념은 사실 그 자체로도 난점이 있다.

도대체 인과를 부정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인과 개념을 부정하는 것인가?

사실 나는 앞에서 이미 이런 문제들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인과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인지, 인과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인지, 인과라는 사실이 없다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부정되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흄이 인과를 부정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치들이 정확히 어떤 것을 부정하는 것인지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만약 그런 생각이 가능했다면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여기에 대해서는 정교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

 

일단 흄에게 있어 관념 자체는 부정될 수가 없는 그런 것이다.

관념은 그저 관념이고, 감각들이 연합되어 이룬 조합물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냥 우리가 뭔가를 생각할 때 회상recall되는 그런 것들을 가리킬 뿐이지 별 게 아니다.

여기에 대해 있다 없다를 얘기하는 것이나, 부정하는 것이나 모두 무의미하다.

 

부정될 만한 것, 이성의 대상이 되고,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relation of ideas(관념들의 관계)matters of fact(사태)이다.(이건 4장을 시작하며 선언된다. 만약 흄을 읽고 이런 구별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흄은 관념들의 관계는 실재 여부랑 상관이 없고(사실 여기서 사용되는 말은 reality가 아니라 existence실재란 말은 좀 맘에 들지 않지만 하여간), 사태만 실재 여부랑 상관이 있다고 말한다.(바로 4장의 첫 절과 두 번째 절)

 

여기서 실재 여부는 당연히도 추론reasoning이다. 우리의 판단이란 소리가 되겠다.

그렇다면 실재 여부를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여기에서 우리는 흄의 진짜 물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흄이 직접 언급하듯,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실재 여부를 부정하는 사실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긍정하는 사실이다.

흄이 말하듯, 사태에 대한 긍정은, 우림의 감각에 의해서도, 감각을 회상하는 기억에 의해서도 확인될 수 없다.(414)

모든 관념은 감각적 기원을 갖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감각 및 감각의 회상으로 확인될 수 없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흄은 분명 모든 관념은 감각적 기원을 갖는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오직 감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감각적 기원을 갖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관념은 연합 원리를 가지며, 그러한 연합 원리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적으로 조합될 수 있다.(사실 여기에는 1777년 수정판에서 빠진, 3장의 후반부 기술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흄은 그곳에서 관념 연합이 얼마나 풍부한 다양성을 함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이것이 빠진 것또한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52부에 나올 만한 논의이면서도, 그것이 단순 사태 분석이 아니라 연합 원리 제시란 점에서 52부에 도입되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태를 긍정 부정할 때 단위가 되는 관념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감각들을 연합하여 확장시킨 관념이라 할 수 있다.

흄은 이런 대상, 감각적으로 확인될 수 없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우리가 긍정(이는 조금 뒤에 fictionbelief로 세분될 것이다)하는 일은 경험되는 사실임을 받아들이고,(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우리는 matters of fact에 대해 말하지 조차 않을 것이니) 이러한 활동을 가능케 하는 nature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것이라고 말한다.(흄은 이를 직접 말하진 않고 이것을 탐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며 본인이 이를 다룰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말한다. 4장의 중심 주제는 이것이다) 이것의 중요성이 중대함에도 고대에도 현대에도 탐구되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말이다.(414)

 

흄은 사태에 대한 긍정에서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말하면서 이것이 지성의 활동인지를 검토한다.

이것이 지성의 활동이라면, 이는 선험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연역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그런 판단일 것이다.

, 지성의 활동에 의해서 긍정되는 사태는, 관념들의 관계가 아니면서도 확실성이 성립하는, 확정demonstration이 가능한 영역이 될 것이다.

흄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태에 대한 모든 추론은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로 논의를 시작한다.(45)

물론 이것은 추측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추측에서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사태들에 대한 추론에 대해서, 바로 이런 유형의 추론에 대해서 이것이 지성의 작용이라기보다는 경험에 의해 발견되고 확장되는 활동이란 것을 말이다.

이 경우 모든 사태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그것이 경험적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원인과 결과에 기초한 사태에 한해서는 그것이 경험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흄은 바로 이러한 논증을 4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흄은 논증은 다음과 같다.

원인과 결과는 관념 연합의 원리이다.

이러한 관념 연합은 특정한 감각들을 연합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연합들을 반복함으로써 단순히 어떤 감각들을 연합하는 것을 넘어서, 원인과 결과라는 연합 자체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 원인과 결과 관계라는 관념을 형성하는 계기가 지성의 활동이냐는 것이고, 흄은 바로 이것이 지성의 활동일 수 없음을 논증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다.

P라는 감각 뒤에 Q라는 감각이 뒤따른다. 이런 뒤따름은 그 자체로는 그냥 서로 다른 감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관념 연합 원리에 의해 우리는 이러한 반복적으로 뒤따르는 감각을 원인과 결과로 연합한다. P라는 감각과 Q라는 감각이 연합을 이루는, 연상 관계를 맺는 것이든 그 이상의 것이든 어떤 관념적 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은 물론 경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은 감각과 감각들의 반복과 관념 연합 원리의 작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에서는 아직 사태 판단이 함축되지 않는다.

감각과 연상되는 다른 감각이 있을 뿐이다.

사태 판단은 이러한 감각들의 연합을 일반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단순히 P라는 감각과 Q라는 감각을 넘어서, P 종류의 감각들과 Q 종류의 감각들을 형성하고 고정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이런 것이다.

P라는 감각이 Q라는 감각을 연상시키는 것은 일회적이다.

P와 유사한 감각이 주어지고, 이것이 resemblance(모방)이란 관념 연합 원리에 의해 P 감각을 연상시키고, P라는 감각이 Q라는 감각을 연상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연상들의 연쇄에서 P와 유사한 감각은 P와 유사한 감각, P를 연상시키는 감각일 뿐이지 P 감각 그 자체는 아니다.

사태에 대한 판단은 이러한 연상 관계에 만족하지 않는다.

P와 유사한 감각에 대해서 P와 같은 판단을 내리는 것까지 나아간다.

즉 과거에, 그것을 섭취했을 때 허기를 달래주고 힘이 나게 만든 감각적 대상물을 기억하고, 이를 현재에 적용하여, 그 감각적 대상물과 유사한 감각적 대상물 또한 그러한 결과effect를 가져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감각들의 유사함에 대한 독특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관념 연합 원리로 제시된 모방resemblance와는 다른 것이다.

흄은 여기서 similarity란 단어를 쓰며 다른 유형의 닮음을 얘기한다.

 

resemblance도 닮음을 얘기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감각과 다른 감각을 동일시하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흄이 제시한 resemblance의 실례를 확인해보자.

초상화는 어떤 사람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초상화와 사람을 혼동하진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한 감각과 닮은 다른 감각을 가지고서, 바로 그 사람에 대한 감각을 회상하는 것이지, 두 감각을 혼동하진 않는다.

초상화가 바로 그 인물과 동일하다는 믿음 아래에서 초상화에 말을 걸지는 않으니 말이다.

 

similarity는 다른 종류의 닮음이다.

그것은 동일한 효과를 기대하는 연상이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말을 걸었고, 그 사람이 대답했듯이,

초상화를 마주쳤을 때 말을 걸고, 그 초상화가 대답할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다만 여기서 similarity는 초상화에는 적용되지 않고, 사물들에 적용된다.

, 계란 같은 것에 말이다.

즉 특정한 감각들을 묶고, 그것들이 반복적으로 같은 효과를 낼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감각들 사이에 한결같음uniformity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매우 독특한 것인데, 바로 이러한 감각들을 단순히 감각들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각 유형을 다룸으로써, 그것이 한 유형에 귀속된다는 판단을 함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감각들 사이에서의 연상들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해당 감각이 바로 이러한 감각 유형에 속한다는 판단이 개입된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감각이, “에 대한 감각이란 것을, 단순히 어떠어떠한 감각들이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감각들로부터 특정한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similar한 감각들에 해당된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해야할 것은 이러한 similarity가 사태 판단의 nature를 이룬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similarity 판단의 추론이 지성의 활동인지 여부이다.

여기서 논증되어야할 것은 바로 두 명제 사이의 관계이다.

1) P라는 감각이 Q라는 감각의 원인이 되며, Q라는 감각의 결과이다.

라는 경험적인 관념으로부터,

2) P라는 감각과 유사한 감각들은 Q라는 감각과 유사한 감각들의 유발할 것이다.

라는 관념을 추론하는 것이 지성이냐는 것이다.

흄은 이러한 추론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흄은 이러한 추론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한다.(4216)

다만 흄은 이러한 추론이 지성의 활동으로서 reasoning인지, 지성의 활동이 아닌 다른 추론인 inference인지를 판단해보라고 요구한다.

흄이 주장하는 것은 저런 유사함에 기초한 판단은 지성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런 추론, 유사함에 기초한 추론은 power라는 관념에 기초한 추론이고, 이러한 power 관념은 특정한 감각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만을 보여줄 뿐이다.(여기서 밝히자면 흄은 forcepower를 명확히 구별해서 말하고, 여기서 말하는 power는 사태, 특정 사물을 구획하고 해당 사물이 특정한 인과적 효력, 즉 인과력causation을 가질 것을 기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에만 사용한다. 이러한 개념을 명시하는 것은 7장이며, 이는 4216절에 첨부된 흄의 주석에서도 언급되는 정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당연히도 한계가 있다.

흄이 논증하는 바는 경험적 관념1에서 관념2로의 추론이 지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어떤 감각들, 즉 경험들을 가지고서 그것으로 원인 결과 관계를 확장시키는 것만을 평가하자면 그것이 지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power 그 자체라는 관념을 갖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 경우에 저런 추론은 경험적 관념1에서 추론된 것이 아니라, 특정 power 관념에서 연역된 것이 될 것이다.

흄은 이러한 가능성도 당연히 검토한다. 다만 이는 7장의 주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 온 것을 확인해보자.

흄은 원인과 결과라는 관념 연합의 작용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는다.

흄은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 맺기를 활용하는 추론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것이 지성의 작용, 연역, 선험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특정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 즉 인과력을 말하는 것이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바로 특정한 경험들을 구획하여, 지속적인 반복이 확인되는(혹은 확인하는) “한결같은 실험에 근거하고 있다.

흄이 말하는 실험은 자연과학적인 실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흄이 말하는 실험은 특정한 관념과 결합된 감각들이 해당 관념에서 기대되는 방식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을, 그것이 경험으로 제시되었거나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여기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이것이 증거들을 통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하나는 그런 경험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자는 과거의 사례들을, 후자는 특정한 새로운 경험 창출을 유발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경험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는 같다)

 

그러니 흄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인과, 인과관계, 인과력이라기보다는, 저런 관념을 경험적 근거 없이, 혹은 일회적 사건을 근거로 주장하는 일이 된다.

흄은 이런 주장을 하고 있기에, 저런 추론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지를 6장에서 논하고, 궁극적으로 10장에서 기적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와 그러한 믿음을 가질 합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따지며, 11장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아예 부정해도 좋을지를 논한다.(그의 입장은 모호한데, 자연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기대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런 믿음이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란 사고는 부정해야만 한다는 입장이 되겠다. 이런 점에서 흄은 계시신학뿐만 아니라 자연신학 또한 부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신학은 학문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연신학 대신 <종교의 자연사>를 서술한 것이다)

 

대충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얘기를 기초로 흄의 그 다음 테크닉을, 인과력과 자유가 어떻게 양립 가능한 개념인지를 논하는 부분을 다루면 좋겠지만, 이는 다음에 논하는 게 나을 듯하다.

내가 여기서 제공한 방식의 분석을 도입하면 흄이 제시하는 논증의 흐름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흄을 이렇게 정상적으로읽기 시작하면 많은 것이 보인다.

칸트의 작업이 매우 흄적이란 것이라던가, 흄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어떤 회의냐는 것이고, 흄이 제시하는 모델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냐는 것 따위가 되겠다.(난 앞서 스티븐 버클을 호의적으로 언급했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스티븐 버클과 나의 해석은 매우 다르다. 흄이 제시하는 모범이 무엇인지에 대한 입장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와 흄의 관계에 대해서 짤막히 언급하자면 이렇다.

칸트는 비판기 이전에 힘의 종류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살아 있는 힘을 사고하는 것이 정말로 합당한지를 따지거나, 그러한 힘 개념을 활용하는 것이 합당할 수 있음을 보이는 작업을 보통 수행하였다.(최근 한길사 칸트 전집에서 출간된 번역들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확인해보라)

<비판>의 가장 큰 특징은 힘을 세분화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는 칸트 본인이 <순수이성비판> A판 서문에서 밝히는 <비판>의 핵심 목적이기도 하다. 칸트는 이성적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본인 또한 다루지만 이는 부차적 문제이고, 그것은 단지 본인의 의견일 뿐이기에 그것이 맞든 틀리든 순수 이성의 활동들을 구획하는 목록 작업은 타당성을 잃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해지는 의견에 불과한 작업은 통각의 종합에 해당되고, 칸트는 그런 작업, exact science의 토대가 되는 감성형식 논증보다는, 순수 이성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목록화가 기획에 있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힘의 세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흄 <탐구>의 핵심 기획 의도였으니, 칸트가 이를 흄에게 배웠든 배우지 않았든, 칸트의 작업은 분명 흄 철학의 연장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하여간 책을 멀쩡히 읽으면 생산적인 비교 연구가 가능하단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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