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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책을 읽을 때 하기 쉬운 실수

게시판에 올린 글 복붙

 


 

사실 이 글은 모든 철학자들이 사기꾼이라 주장하신 어떤 회원님을 위해 쓰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 분은 강퇴되어 제 글을 읽지 못할 것 같군요... 제 게으름이 문제입니다.

 

꼭 그 분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읽으면 좋을 내용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최근의 논쟁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공유해봅니다.(전 최근의 논쟁들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꼭 그 회원분만이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철학자의 책을 읽을 때 공통으로 범하는 실수는, 어떤 철학자의 책을 몇몇 문장이랑 구별하지 않는 것인 듯합니다.

 

칸트가 “도덕과 행복은 다르다.”라고 주장한 것을 예로 들어보죠.

도덕과 행복은 다른가요? 다를 수도 있고,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문장만으로 칸트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비판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도덕과 행복은 다르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칸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때부터 있던 주장이고, 저런 주장을 한 사람도 많고, 저런 주장을 한 철학자들도 많고, 칸트 직전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식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 주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칸트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저런 주장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근거로 저런 주장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지요.

철학적 주장이란 것은 문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책이라는 체계 차원에서, 한 철학자의 철학이라는 체계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문장을 말하는 것과, 철학적으로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서 특정한 문장을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란 얘기입니다.

 

한번은 제가 홉스의 저작을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책이 갖고 있는 체계성 때문에 홉스의 책을 추천합니다. 홉스는 인간에 대한 관점, 인간이 어떤 앎을 획득하는 것에 대한 관점을 토대로, 인간이 어떻게 집단생활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면서 국가를 설명합니다. 홉스가 <물체론>, <인간론>, <시민론>에서 전개한 논의들이 <리바이어던>에는 담겨 있고, “사물들에 대해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데?”라는 물음을 다룸으로써, 국가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다뤄야하는지에 대한 본인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리바이어던>입니다. <리바이어던>은 체계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책이고, 철학적 사유를 연습하는 데 훌륭한 교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체계성보다는 그냥 그 책의 몇몇 문장에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절대왕정을 옹호하는 문장 같은 것에 말이죠.

 

홉스가 절대왕정을 옹호한 것이 중요한가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절대왕정을 옹호한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당대에 절대왕정을 주창한 인물들은 많았습니다. 홉스가 절대왕정을 주창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홉스는 그 주장으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지요. 심지어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욕먹은 것보다 절대왕정을 주창하는 사람들한테서 더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홉스가 “절대왕정을 옹호했다”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홉스가 그것을 어떻게, 왜 옹호했는지를 이해할 때에만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무튼 철학책을 몇몇 주장으로 요약하는 것은 독해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고, 이런 실수를 피할 수 있으면, 쓸데없는 논쟁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를 해석해보고, 이것을 다른 사례에 적용시켜보지요.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의 문장은 유명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실수들이 넘쳐납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정도로 이해할 저 문장을 데카르트가 왜 썼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않고, 저 문장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해하기 때문이지요.(“저 문장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이란 게 중요합니다. 데카르트가 왜 저런 문장을 썼는지 이해하지 않고, 본인의 상상 속에서 허구의 데카르트를 만드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데카르트는 사유=존재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틀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사유=존재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습니다.(이는 논리적인 오류입니다)

또한 데카르트는 물질의 연장성이 사유만큼이나 고유한 존재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이는 사유=존재에 가장 반하는 주장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사유=존재라는 비판은 논리적인 오류일 뿐만 아니라,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이지요.

 

또 어떤 분은 데카르트는 사유만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무시했기 때문에 틀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코기토가 사유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저 유명한 문장은 <성찰>에는 쓰인 적이 없지만, 저 문장과 비슷한 문장 다음 문장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사유가, 우리가 느끼고, 지각하고, 욕망할 때 일어나는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가 사유라면, 정확히 어떤 사유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사유들로 코기토의 의미를 채우니 오해가 생기는 것이지요.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자면, 데카르트는 감정이나 욕망의 중요성을 깎아 내린 적이 없고, 오히려 그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무튼 이런 실수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을 만듭니다.

서로가 어떤 문장, 어떤 단어에 대해 딴 소리를 하는데 그걸 모르니까요.

철학 개념어들은 이런 싸움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자유”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자유가 무엇인가요? 당연히 정의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유라는 개념에 기반해서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져왔는데, 이러한 논의들에서 활용하는 자유 개념은 하나가 아닙니다. “자유”는 여러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사전에서 자유1, 자유2 등등으로 나올 그런...)

그런데 같은 단어를 쓰니, 서로가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같은 얘기를 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저럴 때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동음이의어를 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구는 먹는 배를 말하고 누구는 타는 배를 말하면서 싸우는 거죠.

 

이런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단어로, 이 문장으로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남을 이해할 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장을 이해할 때도 말이죠.

 

한 단어, 한 문장은 여러 의미일 수 있고, 그 여러 의미들 중 자신은 어떤 의미를 사용하고 있고, 왜 그렇게 사용하는지를 이해해야합니다.

 

“자유”를 얘기하고 싶다면, 자유에 대한 여러 의미 중 정확히 어떤 의미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인지를 말하고, 이러한 선택이 어떤 장점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 경우 정확히 어떤 영역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단어가 사용되고, 해당 철학이 문제 해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런 논의는 싸움이 나도 항상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싸움이 납니다.

어떤 자유 개념이든, 각각이 가진 장점과 각각이 가진 역할이 있습니다.

때문에 논쟁이 벌여졌을 때, 특정한 입장이 아예 틀리는 일은 없습니다.

단지 효율성 차원에서, 문제 해결 차원에서 좀 더 잘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가 논쟁의 축이 될 뿐입니다.

자신이 주목하는 문제 상황이 무엇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 개념과 이 주장을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냐가 논의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럴 경우 논쟁은 생산적일 수밖에 없죠.

반대할 때, 구체적인 이유들을 제시하게 될 테니까요.

“내가 제시하는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를 너의 해결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듯하다.”라고 말하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지적은 언제나 실익이 있습니다.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문제는 다루지 않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해결 가능하면, 본인의 주장의 범위가 더 넓어질 테니까요.

 

극심한, 날선 논쟁은 보통 딴 소리에서 비롯됩니다.

서로 보는 사태가 다르고, 다른 의미를 사용하고, 같은 문장으로 다른 것들을 생각할 때 일어나죠...

 

무튼 저런 오해를 피하는 것이 논쟁에도 도움이 되고, 철학자들을 이해할 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면, 동의할 수는 없어도, 바보 같은 소리는 안 했다는 것은 알게 되거든요.

 

 

부록:

 

철학 관련해서 사례를 좀 추가하고 싶군요.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이런 것을 잘 고려해야합니다.

저런 증명에 대해서 많은 분들은 저런 것이 이상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데카르트를 옹호하시는 분들도 대체로 저런 것을 “시대적 한계”로 옹호하십니다.

그때 당시에는 기독교를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이 시대적 분위기에 의해, 기독교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일까요? 이런 판단 이전에 우리는 데카르트가 증명하는 신이 기독교랑 무슨 상관인지 물어야만 저러한 판단은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증명하는 신이 기독교의 신인가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3성찰에서 증명된 신을 기독교의 신, 야훼 혹은 엘로힘이라고 이해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데카르트가 그렇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의 저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퀴나스는 이성을 토대로 신을 증명하는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러한 증명이 기독교의 신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논증이 우리가 이성을 활용할 때, 이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전제되는 초월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아퀴나스는 이 초월성을 기독교 신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고, 그러한 초월성들을 하나라고 볼 이성적 근거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라고 볼 이유는 오히려 계시를 통해, 유일신을 믿음으로써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니 데카르트가 증명한 신을 기독교의 신이라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일단 그렇게 말하지도 않고, 신 존재 증명은 중세 때부터 그렇게 이해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로 데카르트의 신을 이해하려고 하니 오해가 커지는 것이지요.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왜 그러한 신이 등장하고, 그러한 신이 그 책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하는 것이 중요한데 말이죠.(3성찰의 신과 4성찰의 신과 5성찰의 신은 같은 신일까요? 우리는 신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들로 사용되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가능하면, 적어도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자라고 비난하거나, 신에 의존한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없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독교, 어떤 신이냐고, 그러한 요구가 합당한지인 것이지요...(가끔 얘기하는 말이지만, 자칭 무신론자들은 대체로 신을 모시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그 신이 ‘신’이라고 안 불리는 것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냐는 물음만이 아닙니다. “어떤” 무엇이냐라는 물음 또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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