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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정리

A샘에게 보내는 카톡

 


자연사 정리

 

18세기 자연사 흐름이 이제 대충 정리가 되네요.(아직 뷔퐁은 감이 안 오네요...)

정리하자면 이러합니다.

 

일단 린네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린네의 분류법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러한 성공은 학문적 상징이 됩니다.

19세기에도 린네 분류법에 비유하며 자신의 작업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있었을 정도였죠.(심지어 퍼스도 이런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푸코는 린네 분류이 19세기 학문의 모범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린네의 성공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명 분류 체계 어쩌구 하면서 그게 혁신이었고, 그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게 결정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성공적인 분류를 성공시켰기 때문인 것이지 새로운 방법론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류는 기준이 필요하죠. 그러니 자의적이지 않은 분류 기준을 성립시키는 게 근대의 학문적 분류였다고들 보곤 하는데... 자의적 분류와 학문적 분류를 내재적으로 분간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의적이라고 공격 받는 분류들(예컨대 존 레이의 몇몇 분류 기준)도 객관적인 근거는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이 한계적이었을 뿐이었고요...

린네는 기존의 성공적인 분류들을 잘 체계화하고 통합했던 것이고, 그것이 새로운 사고법 덕분은 아니었습니다.(린네가 중세적인 전통에 심취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연구들에 전 그렇게 동의하진 않지만...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만 봐도 새로운 사고법과 무관하게 린네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린네가 성공했다는 것이고, 린네의 성공을 모범으로 다른 분야들도 체계화하려고 했었다는 것이죠.

자연사는 본래 광물과 생물을 모두 다루는 것이었고, 생물의 한 종류인 식물에 대해서 체계화가 성공했다면 다른 분야들도 같은 방식으로 체계화하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문제는 그게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지적하듯,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광물은 린네 식으로 분류되지 않거든요.(그냥 안 되는 거죠 뭐...)

안 되는 이유가 있긴 합니다. 린네는 단절을 토대로 분류했습니다. 종의 구별은 종들의 차이를 전제하는 것이죠. 그러니 종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광물은 연속적이죠. 그래서 린네 식 분류가 안 먹힙니다. 많은 이들이 시도했지만 모두가 실패하죠.

 

중요한 것은 그 이후입니다. 자연사 안에서 린네 식 성공에 기초하든 독립적으로 발전하든 발전이 있었고, 그것들이 자연사를 복잡하게 분열시켰고, 자연사의 (재)종합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거든요.

 

동물에 대한 자연사적 접근은 식물 분류에 힘입어 발전합니다.

동물학 연구의 1세대는 퀴비에와 라마르크고, 퀴비에는 식물학에서, 라마르크는 화학에서 동물학으로 넘어옵니다.

 

퀴비에는 린네처럼 단절을 강조하는 입장이었고, 이게 과학적이었습니다.(라마르크에 대해 모두가 함구하고 있었던 합리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퀴비에는 고생물학적으로 동물학에 접근했습니다.

멸종된 동물들의 화석을 가지고서 동물학에 접근한 것이죠.

퀴비에는 과거 멸종된 동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화석을 토대로 그러한 생물을 복원하기 위해서 완전성을 활용하였습니다.

동물이 생존하려면 내적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육식 동물이라면 당연히도 육식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활동이 가능해야하죠.

포식자라면 빠른 속도가 필요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골반 형태를 갖추어야 하고, 양안이 정면을 향해 있고(거리감), 이빨과 발톱이 날카로워야하며, 턱 근육이 상하로 발달할 수 있는 턱뼈 구조를 갖추어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들은 일관성이 있어야하죠. 한 두 개만 갖춘다고 포식활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퀴비에는 이런 관점에서 화석을 연구했고, 그러니 화석 한 조각으로 그 생물의 완전한 삶을 복원할 수 있다고 (좀 과정섞어)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퀴비에의 접근은 성공적이었는데, 이것이 가진 학적 성격이 중요합니다.

퀴비에는 일반법칙이 아니 개체/종의 고유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정 종의 완전성, 내적 일관성, 기능적 합리성을 설명하는 것이 동물학의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는 격변을 주장하면서도 종변이에 대해서는 함구한 것이었죠.

멸종된 동물이 있는 것을 보면 격변은 분명합니다. 신종이 등장한 것도 분명해보이고요.

하지만 종변이는 (퀴비에에게) 기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이 완전할 때, 형태의 일부분이 변화할 경우 완전성은 훼손될 뿐입니다.

때문에 변이는 불완전과 생존불능으로 이어집니다.(경험적으로 관찰되는 변이는 대체로 기형이죠)

그러니 종변이를 자연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라마르크는 변이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 무관한 맥락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이해 속에서 탐구된 것이었습니다.(이는 기회가 될 때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퀴비에는 단절과 격변을 중심으로 구별되는 것들의 내적 완전성을 탐구했고, 라마르크는 연속을 중심으로 일반법칙을 탐구했다는 구별 도식입니다.

 

광물에 대한 탐구도 이와 비슷하게 분할됩니다.

광물 자체의 조성에 대한 탐구는 이 시기에는 불가능했고, 이는 나중에 등장합니다.

광물에 대한 탐구는 지형학과 층서학으로 분할됩니다.

지형학은 연속을 강조하는 입장과 친연성이 있었습니다.

융기와 침식을 통해 거대한 지형의 성립을 탐구하였고, 융기와 침식은 동일과정설의 근본원리였거든요.

층서학은 단절과 격변론과 친연성이 있었습니다.

층서학이 가능하려면 지층들이 불연속적으로 구별될 수 있어야합니다.

지층은 실제로 불연속적으로 보였고, 그러니 격변론에 가까웠던 것이죠.

층서학은 홍수->퇴적 사이클로 지층들의 단절을 설명했고, 지층을 연대기적으로 탐구했습니다.

 

층서학과 고생물학도 친연성이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둘다 격변론이기도 했지만, 일단 탐구에서 둘이 겹칩니다.

특정 화석군은 특정 지층에서만 발굴되는 것이 고생물학과 층서학 각각에서 상식으로 인정받으면서, 양쪽에서 서로의 지식을 활용하거든요.(퀴비에도 그래서 층서 연구를 했고, 반대 사례도 가능했죠)

 

층서학과 지형학의 종합이 라이엘의 성취였습니다.

라이엘은 <지질학의 원리>의 목적이 홍수론자들을 무찌르는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에 걸맞은 성취를 이루어냅니다.

라이엘이 새로운 이론을 낸 것은 아니었고, 그의 진정한 성취는 다양한 사례를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에 있었습니다.(길리스피는 그래서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가 지질학 대전Summa이었다고 요약합니다)

즉 층서학에서 격변을 토대로 설명한 다양한 지질학적 사례/성과들을 모두 동일과정설로 설명한 것이죠.(그러니 분량이 많은...)

 

재미난 것은 이러한 작업이 꽤나 자연스레 다윈의 자연사 종합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라이엘의 작업에 대해 휴얼의 비판이 이를 보여주죠.

휴얼은 라이엘의 작업이 일관성이 있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질학적 변화만 설명할 게 아니라 생물의 변화, 즉 종격변을 설명해야한다고 지적합니다.

휴얼은 당연히도 이를 비판하기 위해 지적한 것이고, 종 격변은 설명 못하니까 라이엘은 틀렸다고 논증한 것인데, 이게 다윈에 의해 뒤집히는 것이죠.

 

다윈은 라이엘 식 동일과정설을 가지고 종 격변을 설명합니다.

이런 시도는 라이엘의 것처럼 격변론으로 설명해야만 했던 현상을 동일과정설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을 수 있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도 퀴비에 식 완전성을 새롭게 재구성해야합니다.

다윈은 완전성과 변이를 교묘하게 결합합니다. 완전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 사소한 변이들이 누적되어 어떤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죠.(지질학에서의 기법과 동일)

그래서 다윈은 사소한 것에 집중합니다.

라마르크vs다윈 식의 도식에서 기린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이었습니다.

기린 사례가 중요해진 것은 다윈을 비판하는 사람이 “기린이 이렇게 진화했대ㅋㅋ”라고 조롱한 것에 다윈이 반응하면서였습니다.

다윈은 저 사례를 <종의 기원> 6판에서 한 챕터를 추가하면서 삽입하는데, 거기서 (기린의 목이 아니라) 기린의 꼬리가 가진 형태를 가지고 진화를 설명합니다. 사소해보이지만, 곤충을 쫓아 내는 것이 생존 가능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당대 최신 연구에 근거해서 말이죠.

 

하여간 다윈은 어느 정도 기능론적 접근을 수용하되, 이를 일반법칙의 차원에 복속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설명을 제시했고, 기능적 완전성을 일반법칙적 변화에 종속하는 것을 성공시켰기에 체계적이고 완전한 이론을 성취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이 분열된 자연사를 다시 종합하는 시도이기도 했다가 제가 강조하고 싶은 측면이고요.

 

 

중요한 것은 이게 18세기의 자연사와 추측적 역사학의 교차와 무슨 연관인지죠.

제가 이래저래 찾아보고 생각해본 결과, 추측적 역사학은 대체로 일반법칙 지향적이었던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또한 자연사 서술의 가설적 성격을 인정하는 루소와 퍼거슨의 공통성도 이것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단순히 사료가 없어서가 아닌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사료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때문에 저 영역은 원리적으로 사료가 부재합니다.(선사시대란 개념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었다...라고 전 생각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선사시대’를 다루는 학문을 표방한 모건 및 여타의 연구가 그래서 충격적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물리적 흔적인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죠.

여기서는 결국 퀴비에, 라이엘, 다윈 식의 서술이 필요하게 됩니다.

저런 서술이 가능하려면 구별 가능한 단위들이 분류되어야합니다.(사회 형태 등)

그리고 그 단위들의 내적 일관성이 포착되어야합니다.(사회의 완전성, 양식적 일관성 등)

일반법칙까지 다루고 싶다면 저런 단위들의 변이 가능성이 설명되어야 합니다.(사회의 단계론적 진화 등)

 

제가 생각하기로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서는 일반법칙을 설명하는 것이 대체로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가능한 앎의 형식이기도 했고요.(규칙성/법칙만이 앎의 대상이라는 뉴튼주의적 전제)

재미난 것은 이런 시도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연사에서야 다윈의 종합이 법접할 수 없는 획기적 성취였지만, 사회사는 또 다른 것이거든요.

변이를 다루더라도 그것이 일반법칙적일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퀴비에의 학문적 목적에서 볼 수 있듯, 저런 단위들을 그 자체로 또 완전하기도 하죠.(독일 역사학은 개별적 완전성을 서술하는 것을 지향하죠)

변이가 진보는 아니란 얘기입니다.(다윈도 이것은 받아들입니다. 다윈에게 진화의 유의미성은 통시적인 게 아니라 공시적입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도 이걸 알았지만, 그들은 이를 극복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퍼거슨은 시민적 덕성과 상업 사회의 비일관성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도 퍼거슨은 상업 사회로의 이행이 진보라고 주장했죠.

스미스도 분업이 소외를 낳는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게 진보라고 주장했죠.

흄은 덕성은 중요치 않고 행복의 증대만이 중요하다고 아예 총알을 씹어버리고요.

 

재미난 것은 흄의 입장이 어떻게 보면 지질학에서의 진보와 반대방향이라는 점이죠.

흄의 입장은 라이엘 이전, 허튼의 광신적 동일과정설과 더욱 흡사해 보이거든요.

 

개인적으로 학문적 성취, 학문적 입장의 근본적 차이는 좀 평가하기 어려운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퀴비에가 옳았냐하면 전 좀 복잡한 심정이듭니다.

퀴비에가 매장한 라마르크(라마르크를 찬양해야할 송사에서 라마르크를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린....)가 결국 19세기 후반에는 다윈만큼 중요한 상징이 되죠.(이게 진정한 라마르크주의인지와 무관하게...)

원리적으로 저런 접근들을 구별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부 겹치니까요.

19세기 학문론에서 자연과학(일반법칙 연구)과 정신과학(개별적 완전성 연구)을 구별하며 전자를 물리학 후자를 역사학으로 표상하는데, 저 구별 도식을 히트시킨 딜타이도 물리학에 개별연구적 성격이 있고, 역사학에 일반법칙적 접근들이 동원된다는 것을 인정했거든요.

 

흄의 경우도 그렇죠...

가설적인 문명사는 제거해버리고, 상업적 번영이 국가를 몰락시키는 원인인가만을 따졌다고 볼 수 있고, 이에 대한 답은 “아닌데?”였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이 경우 흄은 제가 제시하는 분류 기준으로 추측적 역사학으로 분류해야하는가 하면 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연속성이....)

뭐 하여간 흄에 대한 평가는 여러모로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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