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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정치철학 - 사물정치 비판

<정보사회의 철학>에 남길 코멘트였는데, 생각을 전개하다보니 독립적인 주제가 되었다.

<정보사회의 철학>에서 지적되듯 현대 심리철학은 인공지능이나 정보사회 분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원래 저 분야를 전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뭐 내 전공은 심성내용이라 언어철학과 심리철학과 형이상학과 참이론의 가운데에 있는 주제였지만 하여간 그렇다) 저자는 또한 인공지능의 역사를 다루는 표준적인 저작들이 상징논리 중심으로 그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 또한 비판한다. 하지만 저자가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역사 서술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다들 그렇듯이 저자 또한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원리>, 튜링 등을 가지고 인공지능의 역사를 서술한다.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 즉 상징논리 중심의 인공지능의 역사가 아니라, 연결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인공주의의 역사를 서술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물론 쉬운 방법이 있다. 그냥 연결주의가 잘나가게 된 20세기 후반으로 인공지능의 역사를 서술하면 된다. 하지만 그건 연결주의를 선택하는 진정한 동기, 차이, 기원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저자는 포더 또한 연결주의의 장점을 인정한다고 지적하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이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포더는 연결주의의 장점을 인점함과 동시에 상징논리의 중요성을 고집스레 주장하고 있다. 포더는 인지과학 및 인공지능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문제가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우울을 고백하기까지 한다.

포더는 틀렸다. 하지만 포더가 틀렸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20세기 후반에서부터 인공지능의 역사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사이버네틱스 및 인공지능의 역사를 18세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위너가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인 것은 그가 단지 사이버네틱스를 주창해서가 아니라 그가 재귀구조를 이론화했기 때문이다. 위너는 하층의 규칙성들이 상위의 규칙성을 어떻게 창발하는지, 상위의 규치성을 매개로 하층의 규칙성들이 어떻게 안정화되는지를 “재귀구조”로 개념화했다. 하지만 이런 개념화는 위너가 처음이 아니다. 위너가 처음으로 해낸 것은 그의 뛰어난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법칙적으로 연산 가능한 재귀구조 시스템을 모델링한 것이었다.(물론 위너의 수학적 접근은 다르시 톰슨의 작업으로 소급하거나 혹은 시대적 분위기로 동근원적 발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재귀구조 및 재귀구조 시스템을 개념화한 것은 언제인가? 바로 18세기이다.

시스템이란 단어가 등장하고 유행한 것은 16세기 후반이다. 17세기에 시스템은 지식을 주장하는 광신자들의 구호이기도 했다. 이것이 제대로 개념화된 것은 17세기 말 즈음으로, 비코가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비코는 이전의 광신적 시스템 주창자들과 달랐다. 비코는 자신의 시스템을 그 자체로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코는 자신의 시스템을 그 자체로 옹호하지 않고, 비교항으로 제시했다. 비코는 비교되는 것들 중에서 자신의 시스템이 우월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시스템을 옹호했다. 이런 접근을 루만은 “관찰에 대한 관찰에 기초한 시스템”이라고 부르는데 용어는 중요치 않다. 이를 ‘메타 시스템’으로 부르든, ‘관찰하는 시스템’이라고 부르든, 그냥 ‘시스템’이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18세기 중반 즈음이 되면, 철학 주창자들이 바로 저런 비교접근법을 토대로 한 시스템 주장만을 “지식”이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르커와 콩디야크의 “시스템” 주창이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또한 역사와 철학을 결합하는, 즉 역사 서술을 앞세우고, 철학을 토대로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식의 학문론 서술이 교과서적인 서술이 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러한 교과서로는 역시 프리스틀리의 저작이 유명한데, 비슷한 류의 저술은 당연히 이전시대에 나왔고, 부르커와 콩디야크도 바로 그렇게 저술한다. 이것이 18세기에 국한되는 접근법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휴얼의 과학철학 또한 역사와 철학으로 분리되어 서술되고 역사에 기초한 철학을 주창했으며, 이는 20세기 초반까지는 꽤나 확고하게 유지되는 전통이다.

18세기에 저런 전통이 있다는 사실과 이게 인공지능의 역사와 무슨 상관인지가 중요하다. 콩디야크의 체계론은 비교에 기초한다. 때문에 역사적인 맥락과 현재 함께 살아가는 타인들이 중요해진다. 그들과 함께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창출 작업에서 콩디야크는 자신을 “선지자”로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우월한 앎을 갖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식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안다고 생각하는 상태일지라도, 그 내용이 이후 시대에 밝혀진 앎과 일치할지라도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은 한갓 두뇌 작용에 불과하니 말이다. 또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앎은 용량과 범위에서 언제나 사회보다 한계를 가진다. 때문에 콩디야크에게 있어 지식은 언제나 사회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사회 속에 실현되는 지식만이 진정으로 실재적이다. 지식은 개인의 두뇌 상태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자기 실현하는 힘을 가진 고유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콩디야크 지식론의 이러한 특징은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은 언제나 컴퓨터를 매개로 현실화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인간이 제작하는 인공물은 컴퓨터란 인공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공물이다. 콩디야크와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위대함은 바로 이 사실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평가한 덕분에 가능했다. 콩디야크와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을 가진 인공물을 제작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컴퓨터란 인공물은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이를 제작하려고 하진 않았다. 대신 그들은 사회란 인공물을 통해 인공지능을 현실화하려고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주어진 사회의 인공지능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프로그램, 우월하고 정교한 신식 프로그램을 설치하려고 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이 설치하려고 한 새로운 프로그램은 고사양의 것이었고, 당연히도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계몽은 언제나 교육혁명과 제도혁명과 함께 했던 것이다. 사회의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하드웨더인 인간들과 구체적인 제도들을 업그레드하지 않고서는 고사양의 프로그램은 설치될 수도 제대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전자장비에 국한된 것이라는 생각은 시야를 좁힌다. 계몽가들은 인공지능의 선구주자였다. 그들은 “조절”이란 용어를 통해 재귀구조의 안정화 기능을 개념화하였고, “성장”이란 개념을 통해 구조변동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유의미하게 다룰 수 있는 기관을 탐구했다. 18세기에 자연정체론이 등장한 것과, 사회학의 효시가 되는 이론들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지식론은 지식에 대한 시스템적인 사고를 열어젖혔고, 이 새로운 사고는 모든 것을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재서술할 것을 요구했다. 종교, 미신, 정신병, 사랑 등에 대한 시스템적인 (재)서술, 학문적 이론화가 18세기에 등장한 것이 우연일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모두가 알 것이다.

인공지능의 역사는 18세기로 소급된다. 하지만 이것이 연결주의적 인공지능의 역사서술과 무슨 상관인지는 열린 문제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주의, 의식중심주의에 빠진 관념론자들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들이 상징논리주의적인 인공지능 이론가와 다른 것은 수적인 추상물이 아니라, 그들이 상상으로 꾸며낸 관념들로 상징논리를 사용했다는 사실 뿐인 거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상징논리 인공지능 이론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아니, 객관성 마저도 결여되어 상징논리 인공지능 이론에 비교하는 것이 상징논리에 대한 모욕인 것 아닌가. 이에 대해 답변하자면 이렇다. 계몽주의는 그들이 상상으로 꾸며낸 관념들로 상징논리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상징논리가 그들이 상상으로 꾸며낸 관념들이란 것을 의식하였으며, 그래서 그 관념들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의 유용성과 위험성에 그 누구보다 주의를 기울였다. 콩디야크의 지식론은 관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운동하는 물질들에서 시작한다. 관념은 운동하는 물질들이 긴 역사 속에서 조직해낸 운동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콩디야크와 계몽주의자들은 관념을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콩팥에서 오줌이 만들어지듯, 뇌에서 생각이 만들어진다!”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콩팥에서 오줌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다 같은 오줌이 아니듯, 뇌에서 생각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다양한 관념들의 발생과 재생산을 탐구하는 학문의 필요성을 용기 있게 주장했다.(바로 이 학문을 가리키는 이름인 ‘이데올로기’가 오늘날 그들의 이상과 무관하게, 정말 보잘 것 없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사물 자체의 질서로 환원하지 않았다. 수적 질서의 체계성과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계몽주의 시대 수학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사상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에, 관조가 아니라 실천에, 이론이 아니라 실제에 맞추어져 있었던 덕분이다. 때문에 수적 질서, 수학적 진리에 호소하지 않은 것은 한계이면서도 장점일 수 있다.

연결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그저 관계만을 떠들며 구체적인 결정을 거부하는 연결주의는 구시대의 것으로 이미 멸종한지 오래이다. 연결주의의 혁신은 연결주의적 인공지능에 위계를 도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연결주의자들은 단순히 방대한 데이터를 넣는다고 좋은 인공지능이 학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문제에 적합한 학습 방향을 지도하며, 조심스럽게 그 추이를 지켜보며 그때 그때 개입한다. 계몽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계몽은 철학을 사변과 관조에서 해방시켰다. 철학의 임무는 문화비판이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속에 유통되는 실천들, 행동들, 사고들, 믿음들, 신념들, 제도들, 가치평가들을 성찰하며 이에 개입하는 것이 진정한 근대 철학이다. 그들은 오늘날의 연결주의 인공지능 프로그래머들처럼 사고한다. 모든 것을 계획하며 통제하지 않는다. 진행을 지켜보며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여 도움이 될 개입을 수행한다. 그들은 때론 실수한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언제나 현재의 가능성 속에서 사고하며 개입한다. 물론 기획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기획이 모든 것을 통제할 경우 그것은 근대 철학과 현대 학문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기획은 중요하다. 이는 언제나 강조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기획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 이론서뿐만 아니라 실무서에도 소통과 조직관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기획과, 함께 해결하는 문제들,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 모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것이다. 계몽주의는 하나의 이성이 아니라 여러 이성들을 주장했기에 계몽일 수 있었고 위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보사회의 철학>이 틀린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정보사회의 철학>은 논의 맥락을 재구성하는 전략적 실천물이다. 저자가 기획하는 것은 유일하게 올바른 역사, 유일하게 올바른 철학, 유일하게 올바른 맥락이 아니라, 현재보다 더 나은 사고를 가능케 할 지침을 용기에 담아 유통시키는 일이었다. 저자는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했다. 저자는 맥루헌과 루만으로 맥락화를 시작한다. 정보사회하면 떠오를 이미지들을 고려하며 맥루헌은 좋은 입구이며, 그 입구를 통해 루만식의 다형적 소프트웨어, 최대 규모의 포털로 진입하는 것은 더더욱 좋은 선택이다. 거기까지 도착하면 그 뒤는 쉽다. 다음 페이지는 정해진 키워드를 검색하면 포털이 알려줄 테니까. 저자는 18세기를 다루지 않지만, 몰역사적이지는 않다. 체계 이론은 일반 이론이며, 이는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를 포괄한다. 때문에 체계이론을 활용할 경우 모든 것이 평평해질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며, 자신은 그 평평함 속에서 스케일을 바꿀 때 포착될 단층들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선택지점들, 그가 포착한 격변들이 모든 격변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인지적으로 유의미하기에 그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다.


<정보사회의 철학>이 문제는 아니지만, 내가 대안으로 제시한 역사가 망각에 가까운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문제이다. 이에 대한 망각, 혹은 기억상실이 만들어내는 인문학적 폐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라투르로 이를 말해보자. 라투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가 무슨 용어-객체, 사물, 모임, 관심-를 사용하기를 바라든 간에, 핵심적인 움직임은 쟁점을 기성의 정치권에 편입시켜 처리되도록 하는 대신에 정치에 대한 모든 정의가 쟁점 주위를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상황이 공적인 것을 하나의 문제로 전환하는 방식을 규정하고, 그러고 나서야 정치적인 것이 무엇이고, 어떤 절차가 정립되어야 하고, 다양한 회집체가 어떻게 합의에 이를 수 있는지 등을 더 정확히 규정하려고 노력하라. 그런 것이 바로 인간중심적인 현실정치와 대조를 이루는 STS의 냉철한 사물정치다.”

라투르는 사물정치를 촉구하는 팜플렛에서 위와 같이 선언한다. 하지만 저것은 처음부터 틀렸다. 라투르가 틀린 것은 라투르의 사물정치가 오류라서, 악해서, 문제를 야기해서가 아니다. 그가 사물정치를 설치하려고 기획하는 그가 마주하고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라투르가 말하는 사물정치야말로 현실정치이기 때문이다. 현실정치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20세기가 아니다. 19세기 독일에서 유행하였으며, 비스마르크의 정치를 가리키는 당대 언어였다.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는 18세기의 실물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실물철학에 기초한 자연정체의 산업화된 버전이 비스마르크의 이상이었다. 라투르가 “interes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그레이엄 하먼은 놀라움을 느끼지만, 이는 인식장애에서 비롯된 거짓 놀라움이다. 18세기를 아는 누구나 정치는 interest를 매개로 한다는 것을, 사람과 사물 모두가 interest를 매개로 만나고 모인다는 것을, 그래서 interest는 이익이라는 삭막한 용어라기보다는 존재esse 사이inter를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물정치”라는 이론, “사물정치”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해당 개념이 필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는 얘기다. 계몽주의자들이 꿈꿨던 정치가 그것이며, 근대와 현대 정치의 밑바탕에 놓인 기초 개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소리이다. 과학은 사물정치 아니었던가. 근대는 과학의 시대였다. 근대 정치는 당연히도 과학을 꿈꾸었고 그렇기에 근대 정치 또한 사물정치였을 수밖에 없다.(솔직히 말하자면 과학에 대해 그러한 평가를 내리면서 과학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는 것은 기본을 지키지 않은 것이긴 하다. 욕을 좀 쳐먹어야하는 멍청한 실수인데, 현대 철학자들 중 이 기본을 지키는 사람이 워낙 없어 비난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사물정치를 새로운 이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틀린 소리일 수밖에 없다.

물론 사물정치를 주창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현실정치가 실제로 사물정치를 제대로,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현실정치가 사물정치이다. 라투르가 현실정치를 하나의 사상으로서 제대로 공부했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이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받아들일 경우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 그렇다면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문제가 있는가?” 이게 어려운 문제이다. 현실정치는 이론적으로 문제적이지 않다. 이는 사물정치를 포괄하는 현대 정치학의 정수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하는 정치 현실은 정수spirit라기보다는 폐수이다. 왜 정치인들은 정치 이론에 합당한 실천을 하지 못하며, 왜 정치적 현실은 현실정치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정치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현실 또한 합리성을 갖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더욱 좋은 선택지가 분명히 있음에도 그것이 왜 실현되지 않는 것인가? 라투르가 시작해야할 지점, 그리고 우리 모두가 시작해야할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의 부재가 아니다. 이론적으로 명확한 문제조차 사회적으로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조금만 더 비난을 이어가보자. 라투르는 뒤르켐을 비판하며 타르드를 내세운다. 타르드 또한 위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르켐이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라투르는 바로 이 진실을 무시하기에 범죄적인 명예훼손을 범하게 된 것이다. 뒤르켐이 정치중심이라서 문제적인가? (뒤르켐이 단 한번도 “정치사회학”을 운운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넘어가자. 뒤르켐을 아는 이라면 모두가 뒤르켐 사회학의 핵은 정치와 도덕,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도덕이란 것을 알테니 말이다) 뒤르켐은 오히려 라투르를 앞서간다. 라투르가 주장하는 주제 중심의 회집체를 그 누구보다 먼저 현대사회에 합당한 사회적 비전으로 제시한 인물이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 뒤르켐은 사회의 본질을 소통으로 놓았다. 뒤르켐은 보편적 소통이란 헛된 환상에서 비롯된 사회적 총체라는 대표를 사회학에서 축출시켰다. 그는 문제 중심의 다양한 회집체로 이루어지는 다성적인 사회 조직화를 사회학이 내놓을 수 있는 규범 이론으로 제시했다. 그러니 라투르나 마레가 말하는 그런 류의 다종적인, 문제 중심의 공동체론은 뒤르켐이 원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뒤르켐이 그런 이론을 주창했다면, 왜 그가 중앙적 정치에 꽤나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는가. 뒤르켐은 중앙 정부, 혹은 국가가 사회적 총체를 매개하는 특권적 매체라고 판단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실현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현되더라도 문제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그는 중앙에 힘을 부여했다. 그 이유는 개개의 공동체들이 전횡을 일삼을 때, 다른 공동체와 개인들을 힘 있는 공동체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회 속 공동체들은 국가 안의 국가로서 그 자신들만을 위해 다른 이들을 착취하려 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선 국가가 있어야 다. 뒤르켐이 주장하듯 국가는 중요하다. 특정 공동체의 전횡을 막고, 다수의 공동체 속에서 방향을 찾아내어 조화를 이루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자원을 지속적으로 사회에 재분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뒤르켐이 국가에 특권을 부여한 것은 국가 자체가 특권에 걸맞은 존재 지위를 가져서가 아니라, 그것에게 부여된 임무가 막중해서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어떤 국가이냐는 사회학적 진단인 것이다. 뒤르켐은 결국 귀족의 전횡을 막는 것은 민중과 왕의 연맹이었다는 옛 역사서술의 클리셰를 현대적으로 전유하며 자신의 주장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그는 국가를 재규정하며 자신의 사회론이 가질 수 있는 문제를 다차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렇다면 라투르는? 그에게는 역사가 없다. 그렇기에 철학도 없다. 그가 설 곳은 과거 예언가들의 광신과 망상의 자리이지 역사에 기초한 체계적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과 철학의 자리가 아니다.

그래도 라투르의 실천 속에서 강조되어야할 진실이 있다. 라투르와 라투르가 자신의 발판으로 삼은 마레는 리프먼과 듀이를 올바르게 해석한다. 그들이 이전 정치이론과 근본적인 단절을 이룩하였다는 주장은 한심하게 오류이지만(미슐레의 <민중>을 읽은 이라면 그러한 단언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알 것이며, 18세기의 팜플렛들이 가진 힘과 그 힘들이 벌인 전쟁의 치열함을 아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말하는 “정치”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올바른 비판 또한 수행해낸다. “리프먼과 듀이가 공중이 조직되는 과정에 관해 언급하는 바가 놀랍게도 전혀 없”고 “오로지 어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존재자가 공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을 뿐이라는 루소주의적 가정을 비판하면서 리프먼과 듀이는 실제 사람들 혹은 인간 집단들이 공중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하기만 했을 뿐이라 문제란 것이다.(물론 여기서 “루소주의적” 따위는 의미가 없으며, 죽은 이의 명성을 착취하는 가증스러운 도굴꾼의 폐륜적 범죄이지만 이는 넘어가겠다)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리프먼과 듀이가 문제일 수는 있어도, 우리에게 이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를 채워가는 것은 정치적 실천이지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실로 문제제기를 침묵시키기엔 현실이 너무 소란스럽다. 나는 얼마전 마비노기의 트럭시위 사건에서 참된 정치를 떠올렸다. 내가 그들의 활동에서 참된 정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이용자들이 해낸 일이 (일상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 사건에서 목격한 것은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의 어려움을 극복해낸 그들의 노력과 그들의 의지, 그들의 (마비노기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게임은 그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 그것을 지켜내야했다. 서로 다르고, 의심스럽고, 좋은 결과를 꿈꾸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그들은 소중한 것을 위해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이는 당연히도 공짜일 수가 없다. 그들이 함께 싸우기 위해선 그들은 하나의 마비노기 이용자로 회집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의 마비노기 이용자로 회집할 수 있기 위해선, 큰 비용을 치루어야했다. 물론 돈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는 데 드는 가장 큰 비용은 돈이 아니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큰 값으로 신뢰를 투자해야만 한다. 그들은 신뢰와 노력으로 정말로 멋지게 그 값을 치렀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성취했다.(물론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며, 이미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공동체를 이루는 일만큼이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공화주의는 이 진실을 똑바로 마주했기 때문에 위대한 철학일 수 있었다) 라투르와 마레는 과정을 떠들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말뿐이다. 하지만 그 말들이 중요하다. 공동체는 자연발생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 공동체는 멸종위기종이며, 평생동안 목격하지 못할 수 있는 희기종이다. 이 진실이 가려져있는 동안 공동체는 탄생할 수 없다. 허버트 사이먼이 주장했던 것처럼, “주의력은 한정된 재화”이며, 그렇기에 중요한 문제에 대한 “주의환기는 당연하면서도 가치가 있다”. 공동체를 목격해야 한다. 현대 사회가 아니라면 역사에서라도. 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라투르와 마레의 말이 계속해서 주의를 환기시켜야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다면 진실은 소음에 묻혀 사람들의 귀에 닿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더욱 떠들어주길. 다만 선조들에 대한 비난은 줄이고, 살아 있는 현실들로 목소리를 높인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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