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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즈 <정치적 자유주의> 정리

버전1

 

저번에 얘기한 것처럼 롤즈는 좀… 철학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본인이 정말로 해야할 얘기와 할 필요 없는 얘기를 섞어서 하거든요. 그러니 그런 필요 없는 부분에서 엄청나게 비판을 받는…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거죠. 아니 도대체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이상을 구축하는 책에서 “정의로운 저축” 따위를 옹호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론과 실천의 교역지점과, 본인의 꼰대성 발현 지점을 좀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참담한 현장이 많습니다. 게다가 롤즈는 명민한 스타일이 아니다보니… 개념 구별이 필요할 때마다 형용사를 덕지덕지 붙여 개념어를 분화시킵니다. 덕지덕지 수식어가 붙은 이상한 단어들은 해당 구별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등장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미국스러운 언어들입죠…)

 

저런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대충 롤즈가 반드시 해야만 했던 얘기들로만 축약하고, 필요한 구별들이 등장하는 시점에 용어를 분화하는 방식으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롤즈의 작업이 정치철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롤즈는 현대 국가의 중심 원리가 입헌 민주주의, 혹은 민주 공화국이라고 진단합니다. 또한 입헌 민주주의, 혹은 민주 공화국은 다원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고 진단하죠. 롤즈는 이를 받아들여할 사실이라고 말하며, 이에 대하서는 별도의 정당화 없이 근본 개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전제도 나름의 근거는 있습니다. 롤즈는 이것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태에서 비롯된 주어진 현실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인 결과물 그 자체는 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치철학을 구축하기 위해 분석해야할 주어진 정치 현실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때문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정치철학을 전개하려면 주장하는 쪽에서 입증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학문적 합의는 부재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이든 간에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오늘날 금기시 되고 있으니 롤즈의 입장은 합당합니다. 꼬우면 민주주의를 부정해보던가… 이런 거죠.

 

롤즈는 입헌 민주주의, 민주 공화국의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관은 자신이 제시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롤즈는 다른 가능한 대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본인이 제시하는 답변이 철학적으로 합당한 수준이며, 더 나은 대안이 현재로서는 없는 것 같다는 입장인 것이죠. 롤즈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입장이 설득력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원주의를 전재했을 때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을 가진 시민들 사이에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롤즈는 자신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을 가진 시민들 사이에서 공정한 협동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협동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안정성을 가진 질서 정연한 사회 개념을 제공하는 정치관임을 보입니다. 롤즈가 기준은 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현실의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해당 전제에서 비롯될 수 있는 철학적 난점에 해당되니까요. 롤즈가 제시한 정치관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고, 당연히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롤즈가 해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관만이 유의미한 정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롤즈가 제시해야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을 가진 시민들 사이에서 공정한 협동을 가능케 하는 조건.
  2. 그러한 협동이 일회적인 것에 불과하게 하지 않고, 안정성을 갖게 하는 질서 정연한 사회 개념.
  3. 그러한 사회를 가능케 하며 지속 가능하게 하는 정치관.

 

롤즈가 제공하는 답변은 이론적인 답변입니다. 롤즈가 가능성을 설명하려는 협동은 협동 일반이 아닙니다. 롤즈에 따르면 협동은 외적인 강제에 의하지 않고, 특정한 규칙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며, 스스로 그러한 규칙을 따라 행위를 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이러한 협동은 무수히 많을 수 있고, 그 동기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롤즈는 이를 위해 협동을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공평성, 상호이익, 상호성. 공평성에 의거한 협동은 협동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선 개념관에 근거하여 수행되는 협동입니다. 이는 도덕적 협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호이익에 의한 협동은 협동 당사자들이 특정한 개념을 공유하는 것과 상관 없이, 협동에 의해 당사자들 모두 만족하는 이익이 기대될 때 수행되는 협동을 의미합니다. 이는 경제적 협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즈가 설명하려는 협동은 마지막의 상호성에 의거한 협동입니다. 상호성에 의거한 협동은 공유되는 일반선 개념관이나 이익과 무관하게 합당하게 기대될 수 있는 질서정연한 사회 개념관에 근거하여 수행되는 협동입니다. 이러한 협동을 근거짓기 위해선 합당함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롤즈에 따르면 합리적인 것과 합당한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것은 좋은 것에 대한 감각 능력(번역본에서 ‘선관’이라는 요상하게 번역되는데 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과 이성적 추론 능력에 기초한 실천이성적 대상입니다. 반면 합당한 것은 정의로운 것에 대한 감각 능력과 이성적 추론 능력에 기초한 실천이성적 대상입니다.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행위자, 즉 합리적 행위자는 자신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한 대상들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대상들을 추구하는 실천적으로 합리적인 방법 속에서 추구합니다. 이러한 합리적 행위자가 반드시 이기적일 이유는 없습니다. 해당 행위자가 이타적인 결과를 낳는 특정한 선관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롤즈는 이러한 합리성만으로는 공적인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진단합니다. 공적인 것은 합당한 것을 추구할 때 요구되기 때문이죠. 합당함은 정의감에 기초합니다. 합당한 것을 추구하는 합당한 행위자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자유롭고 평등한 이성적 행위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공정한 협동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자발적으로 협동할 의지가 있는 행위자입니다. 즉, 합당한 행위자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합당함을 아는 행위자들이라면 수행할 만한 협동을 구체화하고, 이에 근거한 협동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행위자들에게서도 협동을 기대합니다.

 

합당한 행위자들은 협동을 의지하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합당한 행위자들 사이에서도 협동이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서로 기대되는 협동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롤즈는 이러한 차이가 “판단의 짐”에 의해 발생한다고 진단합니다. 개념관적으로 동일한 것을 받아들일지라도 판단에 있어서는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경험적으로 이것이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이죠. 이에 따라 판단에 있어 “합당한 불일치”가 가능해집니다. 합당한 것을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합당한 행위자들 사이에서도 그들이 기대하는 협동이 기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하죠. 이러한 불일치가 단순히 미결정적인 것으로 종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합당한 불일치는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기대를 저버린 것은 합당한 불일치가 아닙니다. 분명 상대방도 합리적이며 합당한 행위자이지만, 판단의 짐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판단의 차이에 의해서 기대에 응하지 않는 경우로 합당한 불일치는 국한됩니다. 이러한 합당한 불일치로 인정될 수 있는 차이들을에 근거하여 합당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의가 개념화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가치관의 차이가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롤즈는 단순한 다원주의와 합당한 다원주의를 구별합니다. 롤즈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존중해야할 다원주의는 단순한 다원주의가 아니라 합당한 다원주의입니다. 합당한 다원주의에서 승인될 수 있는 가치관들은 합당한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의들입니다. 교의doctrine란 세계에 대한 인식과 이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실천 규칙을 담고 있는 체계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롤즈는 이것이 도덕적인 것일 수도, 종교적인 것일 수도, 철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교의가 일반적이라는 것은 해당 교의가 다루는 주제들이 다양하여 그 한계가 사회적 지식 전반에 걸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교의가 포괄적이라는 것은 해당 교의가 제공하는 실천 규칙들이 생애 전 영역에 걸쳐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의가 합당하다는 것은 당연히도 해당 교의가 다루는 일반성과 포괄성이 “판단의 짐”에 비추어보았을 때, “합당한 불일치”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롤즈가 설명하려는 상호적 협동은 바로 이들, 합당한 일반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교의들을 받아들이는 행위자들 사이에서의 협동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의들 중 무엇이 합당한가가 되겠죠. 이를 판단할 선험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롤즈의 핵심 전제입니다. 이는 그가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전제이며 그 자체로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롤즈는 주장합니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해당 문제에 대한 선험적인 기준을 제공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성에 근거한 기준이 제공 가능한가입니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판단의 짐과 판단의 짐에서 비롯되는 합당한 불일치를 합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죠. 롤즈는 정치적 구성주의를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합의를 위해서는 합당한 것에 대한 개개의 행위자들의 판단 내용이 공적으로 명시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공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지성을 통해서 정의의 내용이 공개적으로 유통되고, 이러한 유통에 기반해서 정의로움에 대한 공통의 판단과 공통의 합동이 공유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공지성도 여러 수준을 가질 수 있습니다. 롤즈가 가능성을 보이려는 공지성은 최고 수준으로, 추상적인 원리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합당한 불일치로 판단될 수 있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의들을 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즈는 이러한 한정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구성주의를 구체적으로 개념화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에 속하는 것과 정치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원리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서로 대립되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교의들은 당연히도 전 영역에 걸쳐서 합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립”이 불가능하죠. 롤즈는 그러한 대립 속에서도 “정치적인 것”으로 한정되는 영역에 대해서는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고, 이에 대한 합의가 추상적인 정치적 정의관에 국한되지 않고, 그가 “공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 질서에 대한 신뢰와 그 속에서의 결정 방식에 대한  인정, 투표를 통한 평가로 이루어지는 “입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정의관까지 합의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롤즈의 핵심 테크닉은 그러니, 도덕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정치적인 것에 대한 동기는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그가 전제하는 도덕적 대립 속에서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합당한 다원주의로서의 정치 영역을, 현 제도와 연결될 수 있는 공적 이성이라는 이념적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합리적인 것과 구별되는 합당한 것, 도덕적 구성주의와 구별되는 정치적 구성주의, 정치적 구성주의를 통해 달성되는 중첩적 합의, 중첩적 합의의 구성조건이면서 동시에 그 합의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운행 원리로서의 공적 이성 등을 구별해내고 조건적으로/구성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분석” 철학인 것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거기까지철학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교의들 사이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관용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시민들이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교의를 따르지 않는 데서 발생하거든요. 롤즈의 사회관은 옛날아니 수백년전에 멈춰 있는 것이죠. 그래도윤리학”, “정치철학에서 자신이 다루는 영역을 구체적으로 제한해야한다는 상식이 지켜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롤즈의 작업은 상식에 위배되진 않습니다. 점에서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설적이기만 해서 문제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