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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유주의> 정리 – 하버마스와의 비교

이전 글에 대한 후속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을 다시 읽는 중인데, 그러다보니 롤즈를 비판한 부분이 이제 좀 보이더라고요. 관련하여 정리해봤습니다.

 

일단 하버마스의 롤즈 비판은 합리적입니다. 적어도 하버마스는 로티 식의 비판, 롤즈가 미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미국인들의 상상적 자아를 이상화하였다는 식의 비판은 합당하지 않다고 평가합니다. 하버마스 본인이 로티 식의 비판을 직접 언급하며, 이는 롤즈의 구별들을 무시하거나 혼동할 때에나 가능한 비판(오독이냐 왜곡이냐, 능력의 부족이냐 양심의 부족이냐의...ㅋㅋㅋ)이라고 일축합니다. 하버마스는 롤즈가 그런 입장이 아니라고 대변해주면서도, 문제적이라고 평가합니다.

 

하버마스의 저런 옹호/비판에서 하버마스가 매우 헤겔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재미나게도 롤즈 또한 그걸 지적하더군요. 물론 이는 하버마스 본인이 헤겔의 도덕과 인륜 구별 이후 통용되(어야하)는 상식을 롤즈가 무시하고 있다고 언급하니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이게 그렇게 사소한 차이가 아니란 게 중요합니다. 하버마스는 헤겔식의 작업이 현대의 기본이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종교에 의해 포괄적 세계관 및 포괄적 행위 규범이 확보되지 못하는 현대 사회에서 헤겔식의 작업, 즉, 사회적인 것들 속에서 형성되는 패턴들을 토대로 구체적인 보편성을 확립하는 작업만이 효력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사회철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철학과 분리된 다른 “사회적” 규범담론은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하버마스의 이 입장에서 롤즈와 하버마스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롤즈 본인이 직접 항변하는 것이지만, 롤즈와 하버마스의 작업은 의도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하버마스가 일반 규범철학을 다루고 있다면, 롤즈는 특수 규범철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버마스가 이 차이를 모르진 않습니다. 하버마스가 롤즈를 비판하는 근거는 일반 규범철학에서 분리된 특수 규범철학은 타당성이 없다는 입장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둘의 차이, 그리고 그 중 어느 쪽을 지지할지(롤즈와 하버마스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둘 모두 인정하듯 둘의 체계는 양립 가능하지 않습니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리는 것이죠.

 

일단 전 딱 저 지점에 대해서는 롤즈의 편을 들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롤즈를 옹호하는 이유는 정치영역에 국한한 정치철학이 가능하다는 이론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하버마스 본인도 저런 건 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다만 저것이 실효성을 가질 만큼, 즉 사실성과 타당성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그 효력을 발휘할 만큼 강한 학문적 성취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하버마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은, 롤즈의 작업이 사회적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는 판단에 동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것이 충분히 강한 학문적 성취일 수 없다는 판단에 동의하지 못해서입니다.

 

제가 롤즈를 읽고서, 방방 뛰며 “이론이 부족해서 문제인 게 아니다!”라고 떠들어댔던 것은, 롤즈의 작업만으로도 거둘 수 있는 성취가 분명하게 인식되어서였습니다. 롤즈의 작업은 꽤나 엄격한 규제력을 갖습니다. 롤즈의 툴은 롤즈 본인이 부르는 것처럼 “분석 장치”입니다.(물론 롤즈는 이걸 자신에게만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버마스와 자신의 차이가 결국 분석 장치의 차이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거든요.) 롤즈의 규제력 발생 전략은 정말 단순합니다. 롤즈는 일종의 동어반복만을 수행합니다. 결국 롤즈의 작업은 동어반복입니다. 입헌 민주주의, 합당한 다원주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결국 동어반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롤즈의 작업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입헌 민주주의, 합당한 다원주의의 이론적인 구성요건에,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정치관에 기초한 정치적 자유주의가 포함된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거든요. 롤즈 본인이 직접 말하듯이, “공정으로서의 정의” 대신에 다른 것을 넣어도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입헌 민주주의와 합당한 다원주의를 주장하면서, 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롤즈의 작업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게 됩니다. 롤즈의 작업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며 가상적이죠.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강력합니다. 반사실적으로 구축된 이상적인 조건에서 겨우겨우 성립하는데, 이상적이지 않은 조건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롤즈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롤즈보다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롤즈보다 말이 되려면 일단 구성조건부터 정확히 규정해야합니다. 롤즈가 비현실적이라면? 애초에 입헌 민주주의와 합당한 다원주의는 이론적으로 불합리한 것이 됩니다. 이상적인 조건에서도 성립 안 하면, 그냥 공상적인 것이고, 그런 걸 주장하면 불합리한 게 되죠. 누군가가 입헌 민주주의, 합당한 다원주의를 떠들면서 롤즈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뇌가 없는 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꼬우면 본인이 제시해야죠. 그것도 아니라면 입헌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말고 그런 거 공상이라고 비판하던가요. 둘 중 하나만 하면 능력이 없는 놈이거나 양심이 없는 놈인 거죠. 결국 롤즈의 작업은 적어도 입헌 민주주의를 떠들기 위해서 지켜야할 기본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버마스 입장에서는 저게 갖는 실효성은 당연히 낮게 보일 수밖에 없어요. 하버마스가 지적하듯이, 롤즈의 작업은 학자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설득력을 가져야지 실효성을 갖는 거거든요. 하지만 롤즈의 작업이 일반 시민에게까지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갖는 실효성이 있습니다. 학자들이 기본을 지키고 않는 게 현실이거든요. 현대의 학자들은 정치적 주장과 비정치적 주장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게 “정치적 문제”라고 규정하려면, 논의영역을 규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그런 노력 자체가 없어요. 그냥 자기 눈에 중요해보이고, 몇몇 사람들이 목소리 높여서 외치고 있으면 사회적 문제이고, 사회적 문제는 모두 정치적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모든 게 정치적이다는 식으로 똘박 같은 소리를 하고 있고, 그걸로 열심히 정치적 권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망치고 있죠. 롤즈는 적어도 저런 오류는 범하지 않고, 저런 오류를 쓸어버릴 성과는 내놓았습니다. 똘빡같은 학자들에게 진짜 설문조사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입헌 민주주의를 혹은 합당한 다원주의를 지지하십니까?” 여기에 “예”라고 대답한 인간들 중에 저런 똘빡 같은 짓을 하고 있는 놈들은 모두 박사학위 박탈시키고 학계에서 퇴출시켜도 되는 거죠. “당신은 성찰이란 걸 전혀 안 하고 살고 있군요? 입헌 민주주의 및 합당한 다원주의를 지지한다고 하시면서 이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전복시키는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라는 말과 함께요.

 

제가 이전에 정리에서 굉장히 심드렁하게 “롤즈의 해결책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합당한 다원주의여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똘빡들이 설쳐서 그런 것이다.”라고 반응하였죠. 물론 제 반응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합당한 다원주의일 때 생길 문제로 골머리를 썪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롤즈의 작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철학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죠. 철학은 본래 전체에 대한 온전한 앎을 추구하니까요. 포괄적인 정치철학, 즉 하버마스적인 일반 규범철학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분명 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수 규범철학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구축하는 것은 결국 “특수”였으니까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이 특수 형이상학을 지향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칸트가 특수 형이상학을 지향한 것은, 결국 형이상학을 정초하는 것은 특수 형이상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죠.(본인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데카르트의 작업 또한 특수 형이상학이라고 칸트가 생각하는 거거요. 저 또한 동의합니다.) 롤즈의 작업도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롤즈의 작업도 안 읽고서 민주주의를 떠들 수는 있겠지만, 롤즈에 반해서 민주주의를 떠드는 사람은 주리를 틀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관련하여 그래도 롤즈의 핵심 전략을 보충할 게 있으니 그것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롤즈는 자신의 작업이 “정치영역”에 국한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롤즈의 정당화는 당연히도 도덕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롤즈의 정치철학이 도덕의존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롤즈의 정치철학에서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일 수 없습니다. 롤즈가 정치를 성립시키기 위해 요구하는 도덕은 개별적인 도덕관이 아니라 도덕형식입니다. 도덕형식에 기초하여 개별적인 도덕관을 성립하듯이, 도덕형식에 입각해서 정치관을 성립시키는 거죠. 하지만 바로 저 차이에서 도덕과 정치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도덕으로 환원하는 것은 당연히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하버마스가 정치와 도덕을 구별할 때 강조한 차이 지점들로 드러나거든요. 외연도 달라지고, 적용 대상도 달라지며, 적용 대상이 달라지기에 “도덕”에서 이탈합니다. 도덕은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따르는 거죠. 하지만 정치는 따르는 사람이 남이 됩니다. 즉 규칙에 대해 그 자체로 평가하는 자아와 이를 수행하는 자아가 구별되고, 수행하는 자아는 도덕적 평가와 무관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평가가 개입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규칙에 대한 것이죠, 거기에 대해 도덕적으로 검토할지는 열린 문제인 것이고, 그걸 수행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죠. 꼬우면 애초에 그런 규칙을 수행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고요.

 

암튼 위에 것은 정말 기초적인 것이고. 핵심 전략으로 바로 들어가자면 이러합니다.

도대체 정치 영역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가 롤즈의 핵심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즈는 협동을 얘기하죠. 그런데 왜 상호성에 기초한 협동으로 문제를 좁히는 것일까요? 정치가 없어도 다른 협동들은 가능해서 그렇습니다. 도덕 공동체도 가능하죠. 종교인들은 정치제도 없이도 내부에서 알아서 법을 만들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거죠. 자신의 이익을 쫓는 사람들은 상호이익에 기초해서 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협회, 좀 더 친숙한 표현으로는 회사가 있을 수 있는 거죠. 회사 안에도 법은 있습니다. 내규 같은 게 그것이죠. 회사 안에서 해당 규칙들을 숙지하고 자신을 규제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 안 그러면 짤리거든요. 이익을 위해서도 결국 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롤즈는 애초에 정치 행위로 상호성에 기초한 협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상호성에 기초한 협동은 도덕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닐 때 수행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협동을 요청하는데, 그게 이득도 되지 않고, 나와 같은 도덕관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에 참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게 상호성에 기초한 협동입니다. 마땅함이 개입하는 거죠. 거부할 이유가 없다면 거부하기 좀 그런 협동 영역이죠.

 

롤즈는 상호성에 기초한 협동을 가지고 정치로 직행하지 않습니다. 이 영역이 굳이 정치체 성립으로 이어질 이유는 없거든요. 그냥 일회적으로 끝날 수도 있죠. 누가 협동을 요청했는데, 마땅함에 끌려 참여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협동이 필요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요. 다른 협동도 그렇지만 상호성에 의한 협동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원리적으로도 영속적일 이유가 없죠.(도덕적 공동체는 영속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요.) 또한 현동의 당사자가 특정한 국가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할 이유도 없고요. 그냥 누가 협동을 요청했을 때, 수락할 수도, 이유가 있을 경우 거부할 수도 있는 거죠. 협동은 활동에 불과한 것이죠. 롤즈는 이 협동의 영역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는 겁니다. 이런 협동으로 영속성을 추구하는 강한 조직체(공동체도 아니고 협회도 아니라는 롤즈의 주장 때문에 용어가 부족해서 그냥 씁니다)를 형성할 수 있는가하는 거죠. 특히, 서로 다른 도덕관을 가진 집단들 사이에서 말이죠.(이 조건이 없으면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되겠죠 뭐...)

 

롤즈는 그래서 상호적 협동에 기초하여 개인들 사이에서 형성될 수 있는 이성적 질서를 분석합니다.(2강) 합당한 것으로 구별한 실천이성을 토대로 상호적 협동의 근거를 제공하고, 상호적 협동에서 관건이 되는 수락 및 거부의 근거가 될 합당한 판단의 차이의 근거로 “판단의 짐” 개념을 제공하죠. 그리고 나서 “판단의 짐” 개념이 충분히 이성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수락과 거부에서 활용 가능한 근거들이 공지성을 갖추어야한다고 조건짓습니다. 공지성이라는 조건을 개념화하면 자연스럽게 정치적 구성의 영역이 보이기 시작합니다.(그리고 정치의 영역에서 공지성에 해당되는 것이 객관성입니다) 결국 어떤 상호적 협동 요청에 대해 수락하거나 거부하기 위해서는, 해당 협동 요청이 합당한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하는데, 가치관이 다른 집단들 사이에서 합당한 것일 수 있는 상호적 협동 요청은 공정한 것이어야만 하거든요. 그러니 관건은 “공정한 협동”인지에 대한 판단이라는 롤즈의 전제가 말이 되는 거고,(사실 저게 왜 공정해야하는지를 설명 안 하고 뜬금없이 선언하죠.) 공정으로서의 정의가 정치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결국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단체들 사이에서의 상호적 협동은 “공정”을 경유할 수밖에 없으니, 정치적 정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소리입니다. 이건 동어반복입니다. 애초에 이 문제 설정에서는 이렇게밖에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롤즈는 자신의 작업이 “분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롤즈의 또 다른 기교는 정치적 구성을 구체적으로 개념화한 것입니다. 이것도 자세히 분석하면 좋은데... 대충 넘어가고, 이 맥락에 필요한 핵심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롤즈는 정치적 구성이 본인이 제시한 맥락에서 정치적 구성을 통해 합당한 요청들과 그렇지 않은 요청들의 경계를 확정 지을 수 있는 공정성을 합의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공정성은 단순히 특정 주장만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수행할 공동체들에 대한 평가까지를 포함하고요. 때문에 그의 작업이 구체적인 정치제도를 포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구성이라는 활동 속에서 알아서 구체적인 정치제도 또한 합의 대상으로 처리됩니다.(본인도 이걸 강조하고요. 정치적 자본 어쩌구 하는 것도 그래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롤즈는 이러한 합의에서 적어도 승인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죠. 물론 이는 이론적인 승인 가능성입니다. 현실에서는 외려 이론적으로 승인되어서는 안 될 것도 승인되죠.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가능성들은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정치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조건과, 정치적 실천 속에서 고려되어야할 요건,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 속에서 당연히 전제되어야할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이론적으로 판별된) 조건들은 확보되니까요. 구체적인 승인에 대한 평가 또한 바로 이러한 조건들 덕분에 가능한 것이 되죠.(이론적으로 불합리했다 따위가 말이죠.)

 

물론 롤즈의 의도는 이론적 조건을 토대로 현실을 지도하는 것이긴 했죠. 이론적으로 정치의 조건이 이러하니 현실에 정치가 있다면 이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게 노력해야만 한다는 그런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니 적어도 존재한다면 그것을 노력해야한다는 것이죠. 뭐 이론적으로는 틀릴 얘기가 아닙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사실 도덕적인,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반대하는 게 아니죠. 세상의 거의 모든 반대가 그렇듯이 합리적 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반대일 뿐이죠.(얘기하니 갑자기 빡침과 함께 떠오르는데... 자유가 소유권 보장이라고 주장하는 놈들은 철학과 무관하게 그걸 주장하고 있는 거란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근거로 삼는 과거의 철학 문헌들은 애초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대충 갖다 붙여놓은 거거든요. 전 부의 재분배 같은 문제가 자유침해란 주장 자체가 이해될 수 없는 이상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에 대한 소극적 정의의 가장 큰 폐해는 자유 개념을 규정 안 하게 되면서 좆도 아무것도 아닌 븅신 짓거리도 자유로 정당화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하여간 역겹습니다.) 결국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가 문제이지 구성 조건은 틀릴 수가 없습니다.

 

암튼 하버마스의 비판 관련해서 언급하자면, 롤즈가 항변하듯 롤즈는 특수한 진리와 합리성에 대한 이해에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롤즈가 개인적으로 보편적 진리를 부정하고, 합리성을 부정하더라도 이는 주장될 수 있단 얘기에요. 반사실적 조건으로서, 입헌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고 입헌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안정적인 것으로서 승인하게 하는 정치관은 이것이란 소리고, 이 때의 참-거짓, 합리성 주장은 저런 반사실적 조건의 구조에 근거하는 것이거든요. 저런 구조의 형이상학적 지위 및 참이론적 지위가 무엇인지는 별도의 문제로 두고서도 할 수 있단 얘기에요. 뭐 그래도 하버마스처럼 포괄적으로, 서로가 맞물려서 일관성 있게 주장될 수 있으면 좋은 것이긴 하죠. 그런 면에서 하버마스와 롤즈는 일치해요. 롤즈가 갖추지 못한 부분을 하버마스 가지고 다 보충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결정적인 부분, 정치 구성 부분에서는 갈라지죠. 뭐 근데 현실적으로는 하버마스가 더 타당합니다. 요즘 정치 문제가 상충하는 도덕 사이에서의 결단 문제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규범으로서의 정치”란 이상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롤즈식의 잘라냄을 가지고 “정치적인 것”을 구축해야만 하는 것도 필연적 진리입니다. 전 사회철학파가 아니라 정치철학파라 롤즈에게 좀 더 호의적인 것일 수도 있겠네요. 물론 전 사회철학을 내재화한 정치철학을 지향하지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