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와 롤즈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만 글을 썼었는데, 둘은 생각보다 비슷하며, 그 차이가 매우 미묘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사소한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졌다. 뭐 애초에 말이 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인 법이라 비슷한 답변을 내놓게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가 정말로 독창적인 선택지를 취했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독창적”이라기보다는 무의미한 헛짓일 가능성이 높다.(가능성이라고 말했지만, 필연적인 귀결이다.)
하여간 둘의 공통성을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둘 모두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규범으로서의 정치”이다. 규범으로서의 정치는 사회에 통일적인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역량을 하버마스는 법을 매체로 “사회통합의 기능”으로 서술하는 것이고, 롤즈는 정치 구성을 매체로 “상호적 협동”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문제는 통일적 질서의 형태와 가능성이다. 통일적 질서 자체는 중립적이다. 통일적 질서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나쁜 방식으로 쓴 사례 또한 무수히 많다. 게다가 현대 사회는 그 복잡성에 의해 통일적 질서 추구가 매우 어렵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주어진 조건을 하버마스는 이를 사회조직체의 분화들로 서술하고, 롤즈는 이를 다원주의라는 주어진 현실로 서술한다. 주어진 조건을 고려해볼 때, 추구되어야할 통일적 질서는, 특정한 가치관을 전제하지 않는 질서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하버마스는 “탈형이상학”, “탈종교”로 표현하고, 롤즈는 “특정한 교의에 의존적이지 않는” 것으로서 표현한다. 특정한 가치관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어떠한 입장을 합당하게 요청할 수 있기 위해서는, 특정한 가치관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의 가치추구 영역을 제공할 수 있어야한다. 이 영역을 가능케 하는 매체는 하버마스의 표현에 따르면 “합리적 수락 가능성”이고, 롤즈의 표현에 따르면 “공정한 협동”이다. 이 영역에서 인간은 합당한 근거에 의거한 설득 및 인정을 통해 상호이해를 실현하고, 이와 같은 상호이해에 근거하여 공통의 정당한 규칙을 승인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 영역을 공고하게 확립하는 일이다. 이는 하버마스에 따르면 “실정성” 확립이고, 롤즈에 따르면 “안정성” 확립이다. 단순히 몇몇 개체(인간 및 집단)들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성취되는 상호이해에 근거한 공통 규칙 성립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의 정체를 성립하기 위한 공통 규칙 성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둘 모두 이는 “정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문제는 정치 성립의 원리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의사소통적 권력에 기초한 정치 설립”으로, 롤즈는 이를 “정치적 구성”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둘 모두에게서 핵심적인 것은 토의와 소통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롤즈는 정치적 구성 개념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되는 “객관성”을 통해 도입한다. 이러한 해결책이 가능한 것은 현실과 대비될 수 있는 공통의 영역을 소통이 확보해주는 덕분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상적 조건에서의 수락 가능성”이, 롤즈에 따르면 “원초적 조건에서 검토되는 반성적 평형”이 가상적이면서도 이상적인 타당성을 제공하는 덕분이다. 다만 이것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소통 활동 속에서 그러한 가상/이상적 검토 활동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물론 이를 위해 요구되는 소통은 무제약적이지 않다. 즉, 아무말 대잔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소통은 정치적 구성의 원리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하버마스는 이를 “권리의 체계”와 “법치주의의 원리”로 규제하고, 롤즈는 이를 정치적 구성에서 요구되는 인간관과 사회관 속에서 구체화되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상으로 규제한다. 또한 이러한 한계지점을 통해 구체적인 법적 개입(복지와 같은)을 허용한다는 점도 같다. 다만 이러한 허용은 기존의 복지담론처럼 사회적인 필요나, 감정적인 호소에 기초하지 않고, 정치 구성의 조건이기에 필수적으로 존속이 담보되어야할 기본권에 기초하여 정당화된다. 다만 이에 대한 개입에서 하버마스는 시혜성이 가진 반정치적 성격이 가진 위협에 주목하여, 법적 개입을 시민정치에 대한 보조로 한정 짓고, 롤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추상적으로만 시혜적이고 분배적인 방식이 정치적 정의관에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둘 모두 자율성은 시민들 스스로가 실현해야하며, 이에 대한 강제적 개입은 자기논박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둘 모두 개입 지점에서, 하버마스 용어로는 “주관적 권리”, 롤즈 용어로는 “합리성”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한계 지점이자 구성 지점으로, “공적인 것”을 개념화했다는 데에서 같다. 둘 모두 공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것”과 대비되는, 정치 본연의 영역이자, 시민적 참여가 필수적인 고유 영역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사회적인 것의 전횡, 즉 경제적 타당성만을 기초로 한 정치에 반대한다고 할 수 있으며, 정치에만 속하는 문제 영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할 수 있다.
좀 더 제대로 쓰고 싶은데 어떻게 구조화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전략적으로도 둘은 겹치는 게 많다. 예컨대 도덕과 정치의 분리 따위가 그렇다. 또한 가상적/이상적 장치를 매개로 특유의 공통 세계를 확립하는 것과, 여기에서 요구되는 실천 활동 따위가 매우 비슷하다. 어떤 식으로 해야지 둘을 평행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선형적인 글에서 평행적인 동시 서술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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