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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과 칸트의 이성철학

“현실성”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하다.

 최근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현실성”, “현실감”을 운운하는 것들이 많다.

하여간 그런 것을 의식하고 있던 찰나, 칸트의 이성철학을 광기랑 엮는 책을 보게 되었고, 그게 비판거리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영화 <인셉션>이 떠올랐다. 둘을 엮는 썰이 떠올라 한번 적어보았다.

 

<인셉션>에서 현실과 꿈의 경계는 모호하게 그려진다.

꿈도 현실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환상적으로, 정말로 꿈과 현실을 다르게 그려낸 <파프리카>나 <더 셀>과 다른 지점도 이것이다.

물론 <인셉션>에서도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도시가 접힌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파프리카>나 <더 셀>과 같이 규칙성이 없는 꿈의 세계와 비교해볼 때, <인셉션>의 세계는 규칙성이 확고하다.

환상적인 꿈의 세계 또한 규칙성을 기반으로, 구상된 것이란 얘기다. 그러니 꿈의 “설계자”가 있는 것이고, 설계자의 재능이 건축학적 재능과 연관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기에 <인셉션> 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어디서부터 꿈인지가 모호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디서부터 꿈인지가 아니라 그것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기준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토템이 그 역할을 한다. 하지만 토템만으로는 부족하다.(마지작 장면에서 토템이 답을 내려주지 않는 것처럼)

 

영화 속 현실을 보자. 이게 현실 같나?

꿈을 공유하고, 침입하는 기계가 있는 게 현실적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코브의 현실이 현실 같냐고 묻는 것이다.

코브는 아내의 함정에 빠져 범죄자가 되었고, 엄청난 권력을 가진 다국적 기업에 쫓기고 있다.

이게 현실적인가?

당연히도 현실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피해망상 아닌가.

실제로 코브의 꿈 속에서 아내는 이 사실을 지적한다.

“이게 정말 현실이라고 생각해? 피해망상적이잖아. 그러니 깨어나야해.”

 

코브는 그럼에도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코브가 현실과 꿈을 판단하는 기준은 부재이다.

아내의 부재, 그리고 아이들의 부재.

아내는 죽었고,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갈 수 없다는 현실, 이것이 코브 스스로가 현실로서 내세우는 상징이다.

실제로 아버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할 때 코브는 저것을 상기시킨다.

아버지는 코브에게 이제 이상한 짓을 그만 두라고 말하면 “꿈에서 깨어나라”고 권한다.

코브는 그런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럼에도 내가 가지 못한다는 현실”을 말하며 제발 도와달라고 말한다.

이처럼 코브에게 있어 현실은 불합리하고, 망상적이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계속해서 현실로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게 왜 중요한지가 중요하다.

코브가 약쟁이를 찾으러 갔을 때, 그 곳에는 매일 꿈을 꾸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아서가 “매일 꿈을 꾸러 찾아온다고?”라고 묻자, 관리인은 “매일 꿈에서 깨기 위해 찾아온다네”라고 답한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다.

현실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고, 그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 정말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꿈이기 때문이다.

관리인은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며,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이라고 말한다.

 

코브에게 있어 현실은 가혹하고, 비현실적이며, 받아들여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현실에서 그가 마주한 문제는 해결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내가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며, 범죄를 삭제하는 것 또한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니 아내가 “지금 당신은 꿈을 꾸고 있어. 우리 아이들을 만나러 현실로 돌아가자”라고 말할 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코브가 현실을 떠나지 않는 것은, “현실”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함이고, 현실의 아이들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코브는 꿈에서 아이들을 만나지 않는다.

꿈에서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하면, 그 꿈을 떠나지 못할 것이고, 그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을 테니.

코브는 그래서 자신의 현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원칙으로 아내는 만나되, 아이들은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죽은 아내가 나타나면 꿈인 게 분명하니 아내는 만나는 것이고, 꿈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그 꿈을 떠나고 싶지 않게 될 것이니 아이들은 만나지 않는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현실에 기반하여 꿈을 제작했을 때, 코브가 난리를 친 것은 이 때문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는 명확해야한다. 

그게 지워지면 그는 현실을 외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셉션의 주체가 피셔가 아니라 코브라는 설은 이래서 설득력이 있다.

코브가 정상인이 아니며 치료가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인셉션>에서는 현실을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 테마였다는 얘기다.

이게 칸트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칸트는 단순히 이성을 찬양하고, 광기를 배제한 철학자가 아니다.

칸트는 자신이 약간 미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하였다.

칸트의 초기 저작에서 다뤄지는 “살아있는 힘”은 망상의 냄새가 나는 개념이다.

칸트는 그것이 망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거나, 적어도 객관적으로 의미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노력했다.

칸트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는 <시령자의 꿈>을 집필한 것 또한 그가 그것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이성 철학은 무엇인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전략을 되짚어보자.

칸트는 감성->지성(이해력)->이성으로 정신의 기능을 구별한다.

이런 분류는 전통적인 구별인데, 칸트는 특이하게도 지성과 이성의 자리를 바꾸어 놓았다.

전통적으로 감성->이성->지성이었기 때문이다.(아퀴나스 참조)

칸트의 순서 바꿈은 꽤나 중요하다.

지성은 intellectual로 구체적인 질서체계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지성이 최고의 자리에 놓였던 이유는, 신의 정신이 완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의 정신은 완전하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따라야할 정신의 질서는 구체적으로 완전한 질서체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체성이 없고 모호하며 빈 것은 인간 정신의 한계이지, 신의 한계가 아니란 얘기다.

때문에 인간은 이성이란 내적 근거를 토대로 신이 창조한 질서를 부분적으로나마 따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지성이 오히려 상위에 놓이고, 지성을 쫓기 위한 능력으로 이성이 하위에 놓였다.

칸트는 신적인 질서, 완전한 지성을 망상으로 배제한다.

때문에 이성이 최상위가 된다. 하지만 이성은 구체적이지 않다. 구체적인 질서를 구상해내는 근거는 되지만 구체적인 질서 중 무엇이 답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구체적인 법칙을 제시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질서를 확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확립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그가 객관성, 보편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성, 즉 서로 다른 여러 질서를 가능케 하는 이성의 보편성을 논한 덕분이다.

칸트는 “세계” 개념 등을 제시하며, 서로 다르게 파악할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세계”에 “대한” 것일 수 있을 조건을 제시하는데, 바로 그 조건 덕에 범주가 보편적이게 되고, 서로 다른 것을 말할지라도 하나에 대한 것이고, 이를 판별할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칸트의 시도를 (이렇게) 제대로 이해하면 칸트가 광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칸트는 광기가 단순히 지성의 부재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광기의 종류를 나누는데 이는 넘어가자)

칸트는 피해망상이 지성의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피해망상에 빠진 이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사고하며,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체계를 부여한다.

때문에 이들 또한 지성의 능력은 갖추고 있다.

칸트가 그럼에도 이들에게 “광증”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칸트가 제안한 형식적 기준 덕분이다.

칸트는 다양한 질서를 구상해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합리적인 판단은 대칭적이어야한다는 규범을 구상해낸다.

즉,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대등한 존재로 두어야한다는 규범이다.

피해망상은 피해망상의 주체를 특별한 지위로 놓는다.

세상이 그 주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니 말이다.(박해도 특별취급이다)

칸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등한 존재로 두고, 그것이 교환 가능할 때, 즉 역지사지를 통해 납득 가능할 때만 합리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준은 합리성의 토대를 제공하진 못한다.

해당 기준은 합리적일 수 있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가 “우리 모두가 미친 것이 아닐까?”라고 <최종유고>에서 씨부린 것은, 단순히 각각이 미쳤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미쳐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광기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는 고민 때문이었다.

당연히도 이에 대한 답은 내놓지 못했고…

 

그래서 <인셉션>과 무슨 상관이냐?

칸트는 통설과는 달리 합리성이란 것이 확고하고, 쉽게 전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현실이 중요했는데, 이런 현실은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가까웠다.

코브는 꿈과 현실을 오고가니 사실 자체도 섞이는데, 칸트야 뻔한 삶을 살았으니 사실은 좀 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토대로 칸트가 현실을 구축하고, 의미부여할 때, 그는 코브랑 비슷한 입장이 된다.

의미 있는 현실로 꿈꿀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광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만 볼 때 세상은 의미가 없다. 인간성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물리적 현상일 뿐이며, 동기부여와 가치부여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칸트가 현타에 빠졌고, 멜랑콜리를 호소한 것은 저 사실 때문이었다.

칸트는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동기부여와 가치부여를 체계화하고, 이것이 환상이 아닐 가능성을 검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학술연구는 형식적인 실재성은 확보했으나, 내용까지 고정하는 체계는 아니었다.

때문에 다같이 미쳐있을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꽤나 진지하게 검토될 만한 것이다.(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런 환상이 필요해보이니 당연히도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다)

칸트는 자신이 믿고 싶은 현실(의미 있는 현실)과 받아들여야할 현실(의미 없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다고 할 수 있겠다.

칸트는 의미 있는 현실을 그냥 믿기 보다는 의미 없는 현실 속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을 선택했다.

 

칸트의 선택은 코브의 선택과 흡사하다.

둘 모두 의미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상이 현실인지를 계속해서 분간하려고 노력한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꽤나 중요하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칸트가 광기를 내쫓았다고 하는데, 그는 내쫓은 적이 없다.

칸트는 오히려 광기를 포용하려고 노력했다.

단지 그게 진짜 광기로 날뛰지는 않게 통제하려고 했을 뿐이다.(이걸 비난할 수 있나? 그래서 꼴리는대로 믿는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는 게 옳다고 생각할 수 있나?)

나름 노력했고, 그의 기준은 오늘날에도 현실적으로 쓸모가 있다.

또한 그의 노력, 눈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의미 있지 않은가.

물리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운동가들과 칸트를 비교하면 당연히도 칸트가 합리적인 것 아닌가.

하여간 일단 욕부터 하는 현대 연구가 문제인 것 같고…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현실이야말로 현실이라는 규범은 가치 있는 듯하다.

<인셉션>을 보며 코브가 이해되었던 것은 나 또한 그 규범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어서였다.

하여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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