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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성과 타당성> - 롤즈와의 비교

하버마스는 사회철학을 추구한다. 하지만 하버마스가 사회철학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회철학을 내재화한 정치철학을 추구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분명 하버마스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성과 타당성>은 정치철학 저서이기도 하다. 이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영역을 구축하며, 정치에 의거한 규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사실, 하버마스가 정치철학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의 근본적인 목적은 “규범으로서의 정치”라는 이상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밝히도록 하겠다.

 

<사실성과 타당성>에 대한 잡설에서부터 시작하자. 이 책을 본 첫 인상은 이랬다. “도대체 반박이란 것을 할 수 없는 책이다!” <사실성과 타당성>은 대단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지금도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의 인지도를 생각한다면, 나의 평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탁월하다. 이러한 탁월함은 물론 하버마스 개인의 역량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책은 대가만이 쓸 수 있다. 이 책은 하버마스가 대가란 것에 대한 최고의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대가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학계가 뒷받침 될 때에만 이런 책을 쓸 수 있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문적인 법적 문제에 관한 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은 나는 내가 원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 깊게 전문적 법적 토론에 관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 학문분야가 이룩한 인상적인 건설적 성과에 대한 존경심도 점점 늘어갔다. 나는 법과 헌법의 패러다임적 배후이해의 해명에 대한 나의 제안을 현재 진행되는 논의에 대한 하나의 기여로 이해한다.”

 

하버마스의 이런 진술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다. <사실성과 타당성>은 법이론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매우 중대한 법적 문제가 다뤄진다. 하버마스가 다루는 “법적 문제”는 미국식 법철학에서 으레 다루는 허접하고 공허한 법철학적 명제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하버마스가 다루는 문제는 법학자로서 반드시 다뤄야하는 법의 미결정 문제이며, 이에 대한 논쟁에 하버마스는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가 참여하는 논쟁은 법에 대한 그저 추상적인 논쟁이 아니다. 이는 법실무에까지 연장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진정으로 법학적 문제일 수 있는 그런 류의 문제이다. 전통 법철학, 즉, 켈젠, 하트, 라드부르흐, 슈미트의 고전적인 법철학 저서들의 전장이자, 성패에 따라 역사의 축이 바뀔만한 법적 이해의 현장이다. 하버마스가 비전문가이지만 해당 문제에 기꺼이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법학자들의 도움이 있은 덕분이었다. 단순히 배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가 서문에서 언급하는 독일학술진흥재단의 라이프니츠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5년간 법학자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철학적 담론이 법학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현대에 많은 나라의 철학계는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동종의 청자만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다른 종의 청자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곤 한다. 하지만 철학이 규범적인 담론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담론이 다른 업계에도 통용될 수 있는 효력을 가져야하며, 이러한 효력은 언제나 해당 업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내부 맥락에서 요구될 필요에 근거할 때만 발생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롤즈에 대한 비판은 그러니 합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롤즈의 책은 철학자만 읽거나, 다른 업계 사람들이 “철학”으로서는 읽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어떤 법학자도 그것을 법학적 규범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설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생각이 아니며, 법학 내부에서 입증이 필요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반면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은 이미 번역이 끝나 있는 책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 법학자들은 이 저작의 주장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해당 업계의 대가들인 로베르트 알렉시, 울프리드 노이만, 드워킨 등의 저작을 다수준으로 분석하며 법학적인 난제들 속에서 자신의 주장의 토대가 될 조직선을 그려내고 있다. 그 누구도 하버마스의 주장이 저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말이다. 복잡한 미로이기에 그의 작업은 더욱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베어버려야 할 문제와, 시시포스의 과업처럼 고통과 인내가 요구되는 문제를 적절하게 구별해낸다. 해당 업계의 대가라면 더욱 이해가 잘 될 것이다. 하버마스는 단순히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만드는 인물이며,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지를 재평가하며 새로운 관점을 창출해내는 인물이란 것을. <사실성과 타당성>의 마지막 장이 “법 패러다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애초부터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만 달성될 혁명을 꿈꾸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렇기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문제와 그에 대한 분위기에 관해 나는 어떤 환상도 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어떤 분위기도, 그 어떤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철학도 민주적 법치국가의 급진적 내용을─나는 이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 복잡한 사회의 상황에 합당하게끔 새롭게 독해하고자 했다─패배주의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문학 장르를 선택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예컨대 쇠락하는 문명의 이행되지 않은 약속을 후세를 위해 기록하고 있는 헬레니즘 시대 문인의 일기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보다 더 힘 있는 말은 없다.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절망의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철학적으로 패배를 정당화할 것이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그 어떤 숙명론과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 어떤 숙명론도 절망과 포기를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선언과 함께. 물론 아무런 근거 없이 하버마스가 희망을 주장하진 않는다. 현재의 문제에 합당한 방식의 응답을 제공함으로써 그는 희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공수표를 남발하지 않는다. 거짓 약속을 남발하지 않는다. 본인이 약속할 수 있는 것만을, 즉 본인 또한 원하는 것이자, 본인이 해낼 수 있는 것만을 말한다. 하버마스에게 있어 철학은 이 과업에 적합한 무기이다.

 

“철학적 기본개념은 결코 독자적인 고유한 언어를 형성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동화시켜 버리는 체계를 더 이상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적 인식을 재구성적으로 흡수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 철학은 독자적 능력으로는 오직 기본 개념의 투명성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다언어적 성격 덕분에 메타이론적 차원에서 놀라운 정합성을 발굴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철학계의 현장감각 부재를 비판해왔다. 하지만 현장감각이 없다는 것과, 현장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은 다르다. 하버마스는 철학이 직접적인 현장이 없는 특유한 언어이기에, 그것이 기능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철학은 “보편 감축 경로”를 제공한다. 다양한 언어들 사이에서, 언어들의 접촉하는 교역 지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 규칙을 제공할 수 있다. 이성은 이탈 속에서 좌표와 방향을 제공해주는 성좌인 것이다. <사실성과 타당성>은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의 저작을 떠올리게 만든다. 근대법의 효시인 <전쟁과 평화의 법>과 학문적 보편법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법과 국제법>처럼, 하버마스 또한 이성에 근거한 보편 규범철학을 제공한다. 법을 통해. 하지만 하버마스의 작업은 그로티우스나 푸펜도르프의 작업보다 더욱 나아갈 때만 의미 있을 수 있다. 이제 철학은 “고유한 언어를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버마스 본인이 말하듯 이제 철학은 “과학적 인식을 재구성적으로 흡수”해야만 의미를 갖는다. 하버마스의 롤즈 비판은 여기서 합당함을 얻는다. 진정으로 사회적인 담론은 결국 사회철학에 기반해야 한다는 규범은 진실로 타당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철학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어느 정도 사회철학적이지 않다면, 애초에 그것은 맥락 없는 망상이 될 테니 말이다. 롤즈의 책은 의도적으로 바깥을 지우지만, 그의 유의미성은 그가 설정한 안팎의 경계 덕분에 가능한 것도 진실이다.(롤즈를 모범으로 하는 분석철학적 윤리학이 만든 폐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맥락 없는 동어반복은 다다이즘의 절망적 몸짓보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만들어냈다. 누스바움이 그 증거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철학에 흡수되지 않는, 힘 있는 규범을 제공하는 일이다. 사회철학적으로 가다보면 결국 사회학적인 진실에 잡아 먹혀 “체계”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게 될테니 말이다. 이는 하버마스의 진단이자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든지, 아니면 법에 대한 규범적 이해 자체를 포기하든지” 둘 중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한다는 것이다.

 

당연히도 답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만 한다. 포기는 당연할 수 없다. 하버마스는 길게 포기를 반박하지만, 애초에 포기는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문제가 무엇이며, “설득력 있는 새로운 이해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는 최고의 전략가로서 문제 규정과 합당한 답변을 규정하는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할 차례... 하버마스의 솜씨를 구체적으로 터는 것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진술했듯이 하버마스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내놓고 있다.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문제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는 법의 사회적 통합기능을 강조한다.(2장 3절) 이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다. 루만이 법의 사회적 통합기능을 배제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하버마스가 이를 비판하고, 극복해야한다고 의식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물론 법이 사회적 통합기능을 실현할 수도 있다. 적어도 파슨스가 분석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으며, 법이 사회적 통합기능을 실현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버가 법의 사회적 통합기능을 부차적인 것으로서, 정치에 종속된 것으로서 다룬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언제나 얘기하지만, 베버는 진정한 학자이며,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법은 도덕과 달리 동기와 행위가 분리되기에, 법을 통한 통합은 행위의 일치는 가능할 수 있어도, 규범적 의미에서의 “사회통합”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분석하듯) 베버는 법이 정치적 통합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행위 일치를 실현하는 장치로서 이해하였고, 그 기능은 사회적이지만, 의미는 정치적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문제는 현대에 실제적인 사회통합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정치적인 것이든, 법적인 것이든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부재하며, 기업과 개인들의 실천을 규제하는 데 한계가 생긴 것이다. 때문에 법학자들이 다른 선택지, “법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고, 루만은 이를 현실로서 중립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결국 입증 책임을 져야하는 쪽은 하버마스다. 법이든 정치든 결국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없지 않은가라는 의심을 극복해야하는 쪽도, 사회통합 기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해야하는 쪽도 하버마스다. 다만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후자를 적극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특히 그는 2장 3절에서 루만의 입장을 현대 이론가들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진단이다. 또한 루만은 사회통합이 필요성은 받아들였다. 생태학적 문제에 대한 그의 진단은 결국 사회통합, 심지어는 국제적 통합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단지 필요가 학문적 앎을 보장하지 않을 뿐이다. 루만은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이를 수행할 효과적인 전략은 제공하지 않으며, 이는 사회학이 제공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사회통합 기능을 강조하는 하버마스의 입장은 충분히 의미가 있으며, 전자, 즉 현대사회에서도 사회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또한 적어도 법학 내부에서의 포기는 불합리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직접 증명하니 문제적이라고 할 것은 없다.

 

사회통합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하버마스의 작업은 이론적이다. 현실적인 사회통합은 별도의 문제라는 얘기다. 적어도 사회통합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며, 이는 롤즈의 작업과 비교할 만하다. 롤즈는 정치의 영역을 그가 상정하는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분석적으로 접근하였다. 반면 하버마스는 좀 더 역사적으로 접근한다. 이미 주어진 정치맥락, 정치자본, 정치문화로서 정치담론을 다룬다. 하버마스는 이전의 시도들의 한계를 말하며 역사적으로 선택 가능한 제한선을 제시한다. 형이상학과 종교에 호소하지 않는 포괄적인 규범 담론으로 말이다. 하버마스는 이에 합당할 수 있는 답변들을 나열하며, 결국 가능한 선택지는 자신이 제시하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기초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임을 보인다.(사실 이 부분도 중요하다. 하버마스의 대작은 <사실성과 타당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사소통행위이론>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대작이며, 언어철학과 심리철학, 참이론을 모두 아는 이라면 하버마스의 순수이론철학 역량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부터 이쪽 분야 대가였다.) 하버마스는 자신이 제시한 합리성에 기초하여 기존의 정치 담론을 재구성한다. 권리체계로서의 법과 이에 기초한 법치국가를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화 속에서 국가나 정치는 간접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이후의 논의에서 이렇게 추상적으로 제시된 국가-정치-법 체제 이해는 현실화될 잠재성을 지닌 것으로서 청사진을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법과 정치가 만나는 요충지를 찾아야한다. 만약 법이 폐쇄적 완결성을 가진 체계로서 족하다면,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그의 작업은 무의미할 것이며, 법에 대한 정치의 개입은 폭력과 불합리일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법의 한계 지점을 찾는다. 법의 미결정성이 그가 찾은 한계 지점이다. 모든 규칙은 적용을 요구하며, 여기서 미결정성이 발생한다. 롤즈가 “판단의 짐”으로 개념화한 것 또한 바로 이 영역이며, 칸트가 지적했듯이 판단의 적용에 있어 규칙은 성립하지 않기에 이는 천재의 영역으로 남는다. 하버마스는 바로 이 한계를 공략한다. 그 어떤 규칙도 적용까지 모두 포괄할 수 없다. 적용에 대한 규칙은 다시 적용에 대한 규칙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적용에 있어서의 미결정성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학식으로서의 법과 구별될, 제도로서의 법이 가진 객관성에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처럼 직관과 상식에 입각한 법이 아니라, 체계로서의 법을 지향하는 현대 법체제에서 이는 법에 대한 신뢰를 의심스럽게 하며, 법체제를 통해 담보되어야할 사회적 정의에 위협을 가하는 문제가 된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법학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은 모두 이 문제를 경유해서 확립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도적으로 이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드워킨을 삼는다. 오늘날 법학자라면 모두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며, 법학이 가진 미결정성 문제를 끝까지 법학 내부에서 해결하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법학자들의 직업 윤리에 기반하여 미결정성을 통제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슈미트가 초기에 선택한 해결방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슈미트가 이러한 해법이 부족하다고 진단하고, 정치와 법의 교역지점으로 이탈한 것처럼, 드워킨도 해당 해법의 한계를 절감한다. 하지만 드워킨은 정치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한 지도자의 결단이 아니라, 법학 내부에서, 법학자가 내릴 수 있는 결단에 근거하여 법적 미결정성을 해결하려고 한다. 때문에 그의 법학적 이상이 칸트적 천재, 혹은 드워킨 자신의 용어로 “헤라클레스적”이길 요구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해법이 비정상적이고 불합리하다는 식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드워킨이 그러한 답변을 내놓은 것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지혜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드워킨의 답변이 가진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은 법학자들의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법학자들이 짐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법적 미결정성이 난점을 이루는 가치 판단의 영역을 다루며, 이에 대한 미결정성을 극복하는 시도에서 법학자들이 개입하지 않아도 될 경계지점을 보임으로써 말이다. 애초에 문제는 월권의 영역으로 법학자들을 몰려서 생긴 문제이다. 그들은 월권을 행사하고 싶어 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한 결단으로 몰렸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경계지점에서 법학자들이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해야하는지를 밝힘으로써 그들의 짐을 덜어주며, 법학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물론 이는 법학에 한계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며, 법학을 통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이를 통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법학자들은 이미 막중한 책임을 감내하고 있기에, 그러한 한계설정은 그들을 과도한 책임 부여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불필요한 외부와의 싸움, 법학에 대한 부당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법학 내부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 경계지점을 정치와의 교역지점으로 설정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면서 문제를 이끌어 나간다.

 

바로 이 경계지점, 교역지점을 창구로 하여 그는 자신의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는 법을 사회에 잠입시킨다. 그가 선점하려 시도하는 요충지는 사회적 분배라는 정의 실현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에서 분배를 정당화하는 데 실패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국가, 정부, 정치와 대비될 사회적 영역의 울타리가 될 사법(민법)을 이상화하는 법적 전통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법학이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분배는 법학에서 승인하고 싶어하는 실천이다. 분명 현재의 사회상태는 문제적이며 분배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을 법적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실패하고 있다. 법학자들은 법이 실효성을 갖게 되는 맥락, 혹은 법 적용에서 전제되는 사회에 대한 암묵적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즉, 표상으로서의 사회를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법적 기획을 안착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계적인 방책이다. 이는 단순히 그들이 어떤 표상을 가져오든지, 그것은 자의적으로 선택된 특정한 사회학의 산물일 뿐, 객관적으로 합당한 법적 사실일 수 없다는 문제 때문이 아니다.(이 또한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문제는 분배 자체가 법적 이상인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데서 생겨난다.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해법이고, 그것이 사회학적으로는 합당할 지라도, 이는 법학적으로는 불합리한 것, 모순 혹은 역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법 자체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법적 사법적 자율성으로 이해하는 한 그 어떤 분배적 정의도 법적으로 불합리한 것이 된다. 이는 이중으로 자율성을 침해한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특정한 사인 및 법인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재산을 침해하는) 제약을 가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인 및 법인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시혜를 행하는) 제약을 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설혹 비법학적으로 정당하고 타당할지라도, 당사자들이 원할지라도, 이는 법학이 토대로 두고 있는 사인들의 자율성 실현이라는 이상을 언제나 이중으로 침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시민을 어린 백성으로, 다른 말로 신민으로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동일한 것을 동일하게,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지 않게 다루는 형평의 원칙은 무너진다. 어떤 시민은 강자이고, 어떤 시민은 약자가 된다. 강자에게서 무엇인가를 뺏어 약자에게 베푼다. 하지만 약자는 그렇게 약자로서 규정되며 돌봄의 대상이 된다. 이런 분류에서 형평은 성립되지 않는다. 문제가 된 구별법 자체가 법적 근거가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별과 이러한 구별에 기초한 개입은 체계적으로 법적 이상을 전복시킨다. 때문에 법학적으로 난점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 난점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별, 법의 수신자와 법의 저자의 구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문제는 법적으로 담보되어야만 할 요건이 객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발생했다. 이런 객관성을 사회학과 같은 외부에서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이 설혹 학문적으로는 객관적일지라도 그러한 객관성을 법학적으로 전유할 때 자의적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예외적이다. 정치는 권리체계로서의 법을 재현하는 장소이자, 법의 저자로서의 시민이 출현하는 장소이다. 정치는 사회라는 부분들과 다르게 전체를 표상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대표성을 갖는 것이다. 법학이 개입하는 지점에서 그것들이 보호해야할 영역이 정치의 구성, 정치의 발생을 담보하는 조건일 경우 이에 대한 개입은 “공적”이게 된다. 때문에 이는 자의적인 객관성 수용이 아니라, 공적인 객관성을 가지며, 그 타당성을 보존할 수 있다. 법을 통한 사회적 정의 실현은 단순히 법적 야심이 아니라, 정치체의 존재 이유에서 비롯되는 자기보존의 의무 수행인 것이다. 때문에 그 개입은 허용되며, 그 허용은 특수한 정파적 요구가 아니라 정치체의 본질적 존속 조건 보호에서 비롯되는 의무가 된다. 물론 그 개입을 정치가 정당화할 수 있어야하겠지만 말이다. 하버마스의 체계에서 이렇게 법과 정치는 고유한 자율성을 지니면서도 상호적 협동을 통해 사회통합 기능을 실현한다.

 

하버마스의 이런 판짜기는 여러모로 롤즈의 판짜기와 흡사하다. 롤즈는 적극적으로 정치의 구성조건을 다루는 방식으로 판을 짜고, 하버마스는 법학과 사회제도에서 발생하는 한계지점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필요를 통해 판을 짜지만, 그들의 판짜기에서 다뤄지는 것은 경계와 구성 조건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결국 구성조건을 통해 존속을 보장하는 방식으로서 평등을 재정의하는 것이고, 이렇게 재정의된 평등을 실효성 있게 추구하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롤즈가 좀 더 추상적인, 반사실적이고, 인공적이며, 가설적인 방식으로 개입지점을 구축했다면,(나는 이런 식의 개입지점을 일종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제도를 운용하는 학식의 영역 속에서 개입지점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구축했다. 인공적 구축이냐 자연적 구축이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둘 모두 “규범으로서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롤즈는 규범으로서의 정치를 실현 가능케 하는 사고법을 제공함으로써, 정치적 현실에 대해 규범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공적 이성 실현을 목적으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현행하는 제도를 현실로서 모두 긍정한 후, 저것이 공적 이성에 합당한지를 판단케 하는 것이다. 반면 하버마스는 이미 있는 제도에 구체적인 변형이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키며, 직접적으로 개혁의 방향을 지시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기에 롤즈가 더욱 현실적이고, 하버마스가 더욱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롤즈는 단지 판단을 요구하지만, 하버마스는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모두 정치라는 규범 조건의 존속을 규범 원리로서 제시하고, 이 규범 원리를 통해 변화에 개입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둘의 전략에서 정치철학이란 것이 출현하는 방식이 다르며, 이것이 내가 지적한 “사회철학적”, “정치철학적”이라는 구별될 수 있는 늬앙스 차이를 만든다. 롤즈는 현대 사회에 발생 가능한 특수한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며, 민주주의를 주어진 현실로서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주장은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 자체로 규범성을 갖는다. 롤즈의 지렛대는 이미 도덕의 영역에서부터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주적 정치체 성립은 역사적으로 특수하면서도 보편성을 갖는 이상이 된다. 반면 하버마스는 이를 철저히 상대화하며, 최대한 보편성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룬다. 그는 언제나 주어진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개입한다. 비록 그의 응답이 “철학”이라는 언어를 통해 초월성을 확보하지만, 그는 이러한 초월성은 형이상학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특수한 문제의 외부와 내부의 교차점을 통해 호소할 뿐이다. 모든 바깥은 “초월적”이라는 진실을 앞세워서 말이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전략 배후에도 이상은 있다. 이상 없는 인간이 이런 위업을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베버의 금언을 철저히 따른다. 그는 자신의 광신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며 철저하게 신념으로서, 자기 자신만을 인도하는 내적 빛으로서 한정 짓는다. 하버마스가 정치라는 궁극적 이상을 피해가는 방향으로 정치철학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숨기면서도,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내가 롤즈에 좀 더 호의를 보인 것은 이 차이 때문이었다. 물론 난 하버마스를 더욱 존경하며, 철학적 역량 및 철학적 업적 평가에서 하버마스와 롤즈는 비교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롤즈의 편에 선 것은, 하버마스가 드워킨이 요구한 외로운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해서이다. 드워킨의 법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판단을 옳다. 모든 것을 혼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는 하버마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버마스는 대가였고, 그는 협업을 하면서도 최종적인 작업은 홀로 수행했다. 그의 작업에서 철학은 철저하게 숨겨지며, 그는 외부 세계의 미로 속에서 숨겨진 탈출구로서만 철학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요구되는 “철학의 윤리”인 것일까? 어쩌면 그의 대가다움, 그의 학자다움, 그리고 그의 영웅다움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 문인”이길 거부했지만, 현실이 요구하는 우리의 임무는 “쇠락해가는 문명의 이행되지 않은 약속을 후대를 위해 기록”하는 일일 수도 있다. 철학자가 철학자이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확신을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의심이 먼저 필요하다. 오히려 아렌트처럼 미로 같은 희망을 그려내는 일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며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철학, 오늘날 가능한 일, 지금 현실에서 가능한 마지막 사유 활동 형태일 수도 있다. 하버마스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꿈꾸며 보존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위협받고 있는 자원, 법적 구조 속에서 보존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쇄신할 필요가 있는 사회적 연대성이라는 자원”이다. 하지만 이 위협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아렌트의 말처럼 사회적 연대는 “특권을 부여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이 되어버렸다. 내가 자주 얘기하는 것이지만, 이제 공동체는 멸종위기종일 뿐만 아니라 희귀종이 되어서, 눈을 부릅뜨고 찾아 나서도 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역사의 종말, 최후의 인간,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사유 활동 형식, 인간의 실존 속에서 그럼에도 행위는 소멸되지 않으며, 사유는 힘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구축하고 사회적 연대를 부활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헤라클레스만이 할 수 있는 아우게이아스의 마구간 청소가 아니다. 하버마스는 헤라클레스적인 위업을 수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인 우리에게 열린 실천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과는 다르기까지 하다. 영웅의 청소는 한번으로 족하다. 그는 단 한번에 문제를 해결했고, 바로 그 일회성에 의해 그의 위업은 찬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청소는 반복적이다. 이는 아렌트의 표현으로 노동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해결책보다는 오이디푸스의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오이디푸스처럼 두 눈을 뽑을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또한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에 시련 속에서도 결국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한다. 어찌 보면 정치철학을 위한 과감한 “절단”은 위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협동을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하버마스에서 아렌트로, 아렌트에서 세넷으로, 함께 하기 위한 물러섬이 나에게는 더욱 중요하게 보인다. 하지만 세넷에게서 더 물러날 곳은 없다. 여기서 결단이 필요하고, 절단을, 보편감축을 시작해야한다. 모든 것을 해결하진 않더라도, 철학의 내부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아직 그 누구도 이를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하여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