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깊이 있는 철학”일 수 있는지에 대한 미독의 물음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들
1.
얼마전 여자친구랑 논문 얘기하다가 한 얘기 비슷한 게 이런 겁니다.
미술사 전공 대학원생들의 문제는 논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판만 잔뜩 가져오고 논리를 전개 못하는 것인데(여친한테 자주 말하는 문제점입니다. 단 하나의 도판을 가지고서도 논문을 쓸 수 있을 때에야 여러 도판을 이용하는 게 의미가 있는 건데, 하나의 도판으로 아무 글도 못 쓰는 상태에서 도판들만 열거한다고요. 일단 분석이 가능해야 비교가 가능한 것이고, 비교가 될 때에야 도판을 여러 개 쓰는 게 유의미한데, 분석도 못하면서 도판을 여러개 가져오니까 사실상 입증은 독자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해줬습니다)
논점이 없는 이유는 맥락화를 안 해서죠.
“이 얘기를 왜 하는가?”를 객관적으로 합당하게 묻고 대답하는 것이 “맥락화”고요.
제가 최근 “할 얘기가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저 “객관적으로 합당해야한다”는 조건 자체가 부재하다는 절망 때문이었고요.
정확히 어떤 문제들을 겨냥하고 그것이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맥락화-사회화-객관화해야 제대로 된 논설문(논문 등 주장을 담은 모든 담론 유형)이 성립할 수 있거든요.
이 물음에서 아렌트에 대해서 얘기해보죠.
“이걸 왜 얘기해야하지?”가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뭐냐 할 때가 있는 것이죠.(참고로 전 현대의 윤리 담론은 “굳이”에 대한 고민이 0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렌트는 저기서 “난 그냥 굳이 얘기할래”란 식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왜 굳이 얘기해야하는 걸까?”에 대해 자신의 답을 내놓거든요.
근데 그 대답이 이론적입니다.
지금 이걸 굳이 얘기하는 게 중장기적인 이점이 있다는 식의 대답이 아니라, 그것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영역을 고찰합니다.
즉, 자신이 지적하는 구체적인 문제들과 이에 수반하는 물음들이 담겨질 공간을 창출해낸다는 소리입니다.
그 공간을 평면들의 맥락 속에서 고민해내고 창출하려고 한다 이거죠.
사실 요거 때문에 제 평가는 좀 이중적인데,
태도 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도 하나의 시도로서는 아렌트의 철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게 지금 여기서 반복할 만한 모범인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입니다.
결국 원점인 거 같네요;;; 태도는 옹호하지만 철학은 옹호 안 하는...
흠 그래도 책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전 생각합니다... 좀 이론적인 저작에 한해서요.(인간의 조건이나 정신의 삶 같은?)
2.
문득 좋은 생각이 나는군요.
아렌트의 철학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런 겁니다.
(최근 서사학 책을 보고 있으니 그 쪽 용어로 풀겠습니다)
이야기narrative는 추상적입니다.
줄거리는 번역 가능한 고유의 대상물이죠.
여기에서 형성되는 가치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로 진입하는 방식(플롯)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로 진입하는 방식도 이야기와 플롯의 구별처럼 이중적입니다.
진입하는 방식을 추상적으로 고려한다고 할 때, 플롯과 서술narrating은 또 다릅니다.
여기서 “이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야할 것은 “굳이 이야기를 꺼내는 동기”입니다.
대체로 허접한 작품들은 그냥 이야기에 부여된 가치만을 옹호합니다.(윤지선이 대표적인 예이죠)
근데 이야기에 부여된 가치도 순전히 자의적입니다.
추리소설로 예를 들죠.
굳이 왜 범인을 잡아야하나요?
굳이 왜 범죄를 추적하나요?
홈즈의 동기는 그저 “재미”일 뿐입니다.
플롯은 있고, 이야기에서 가미될 가치도 좀 있죠(범죄 없는, 합리적 세상 정도?). 이야기 함의 동기는 없습니다. 잘난척이죠. 그러니까 왓슨을 경유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이건 문학자의 분석을 따른 게 아니라 순전히 제 분석입니다...)
고전적 추리소설에서 벗어나면 그래서 좀 달라집니다.
매그레 반장의 경우 우리가 흔히 보는 추리소설의 특징이 나오죠.
코난이나 김전일에서 범인 잡으면 범인이 “다 저 새끼 때문이야!!” 식으로 나오면서 하소연하잖아요? 그런 서술은 매그레 반장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인간적인 동기들에 공감하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동기(할 동기 및 들을 동기)가 생기는 거죠.
재미난 것은 현대의 <나이브스 아웃>입니다.
여기서 추리는 정말 쉬운 것으로 나옵니다.
탐정은 보는 순간 범죄 자체는 파악하죠.
하지만 가만히 있습니다.
익명으로 자신을 여기에 오게 만든 놈이 누구이고, 이 죽음 배후에 놓인 인간적인 관계들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요.(죽음이란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명확한 이해가 있지만, 죽음을 둘러싼 인간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소립니다)
즉 말할 이유가 없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죠.
(실제로 탐정이 말을 하게 되는 순간은 결정적인 순간으로 배치됩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가 중요하죠.
아렌트의 이론에 대한 평가랑 관련 있습니다.
아렌트가 말할 이유를 찾기 위해 이론을 탐구한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히 동기나 태도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랑 플롯과 서술이 모두 독립적이라고 했잖아요?
즉 이야기의 가치와 플롯의 가치와 서술의 가치도 독립적이란 소리죠.
중요한 것은 한 쪽이 가치가 있다는 게 아닙니다.
한쪽이 가치가 있어도 다른 게 이어지지 않으면 윤지선처럼 악마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저것들이 잘 순환하며 가치를 창출해내야해요.
아렌트 철학에서는 이야기와 이야기 서술의 동기가 잘 결합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론적으로 탐구해낸 인간성의 맥락에서 발화의 동기가 나오고, 해당 발화의 동기에서 그의 인간성 개념이 나옵니다.
단순히 정의로운 사회 개념화로 끝나면 그 철학은 반쪽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그렇다는 거랑 그런 사회를 창출해내야한다는 것은 독립적이 거덩요.
아렌트의 정치 비전은 인간성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고, 인간성이 이끄는 것이 그의 철학함과 같은 실천이고, 그런 실천들을 통해서만 정의로운 사회가 창출되고, 그런 정의로운 사회가 인간성에 잘 부합하고 뭐 이런 순환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이게 없는 사람이 졸라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피터 싱어죠. 사실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 옹호 논증은 블랙 코메디로서, 공리주의가 그러니 부조리한 쓰레기 같은 것임을 보이는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피터 싱어가 그런 것을 진지하게 떠들고 다닌다는 전기적 사실을 제가 몰랐더라면, 전 싱어의 연구를 공리주의를 비꼬는 최고의 부조리극으로서 극찬했을 겁니다... 사실 피터 싱어의 인생 자체가 조커 그 자체죠. 좀 부조리합니다...ㅋㅋ)
이것들이 온전하게 서로를 강화하는 것은 좋은 철학이죠.
좋은 철학책들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고, 아렌트의 책도 그러합니다.
3.
<인간의 조건>을 정리해보려고 이래저래 머리를 굴렸는데… 역시 답이 안 나오는 책입니다.
그래도 하나 깨달은 것은 있습니다. 이 책을 “인간의 조건”으로 정리하려고 하면 망한다는 것을 말이죠.
이 책에서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조건”이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정치”입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는 고대 그리스에서 성취해낸 것이고… 그 뒤로 사라졌고, 심지어 사회란 놈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다만 아렌트는 매우 고전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이며, 반시대적인 철학자라 저 현실을 어떻게든 뒤집어 보려고 하는 것이죠…(매우 니체적이고 개선비적인…) 다만 아렌트 본인이 보기에도 본인의 이상은 현실성이 적기에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한갓 가능한 것에서 구출해내고, 잠재적인 것으로 만들고, 심지어 현실태로 만들어줄 매체를 열심히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불완전한 후보들이 있는 건데… 아렌트는 이를 서술할 때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그 힘을 강조하지만, 본심, 경멸과 회의를 숨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렌트의 예술론 같은 걸로 예술의 힘 어쩌구 하면 멍청한 짓 하는 거에요… 아렌트는 예술에 경멸과 회의로 일관합니다…(힘을 얘기하지만 저게 정말 정치의 잠재성을 담지하는 매체인지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고, 돌아가는 현실을 보다 보면 경멸을 느끼게 되는 그런… 매우 개선비적인 태도입니다.)
아렌트의 이런 이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수한 조건 속에서 현실화되었고, 특수한 조건 속에서만 그 가능성이 확보되는 “정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이게 역사 속 고대 그리스를 실제로 이상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닙니다. 설명하자면 좀 복잡합니다. 일단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한계 또한 지적합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에 해당될 수 있는 활동을 믿고 행한 현장으로서만 이상화하는 것이고, 그게 실제로 잘 행해졌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정치”의 적들은 많았습니다. 단지 그에 대항하는 시도들과 믿음들도 있었던 것이죠. “적어도 그것이 가능하다.” 정도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아렌트는 가정과 폴리스, 경제와 정치,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노예와 자유인, 지배와 경쟁, 필연과 자유, 영원성과 불멸성의 대개념을 활용합니다.
영원성과 불명성이 생각보다 매우 흥미롭고 통찰력 있는 독특한 해석 포인트이니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죠. 아렌트에 따르면 영원성은 퓌지스, 불멸성은 노모스를 뜻합니다. 퓌지스에 속하는 것은 영원한데, 그것이 반복적으로 계속 현실을 이룬다는 점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게 “종”입니다. 자연종들은 영원하죠. 그런데 이 영원성은 개체성과 무관합니다. 개체들은 사멸하죠. 하지만 개체들의 사멸 속에서도 종은 존속합니다. 개체들과 구별되는 종의 존속이 아렌트가 말하는 “영원성”입니다. 영원성의 관점에서 개체성은 의미가 없습니다. 개체들은 구별될 이유가 없죠. 소는 소일 뿐이고, 말은 말일 뿐이죠. 지들 역할만 하면 된다는 것이고, 죽어도 대체품이 있으면 됩니다. 노예의 삶처럼 말이죠. 노예들에게는 개체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노예를 떠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있는 것이죠. 아렌트는 노예가 개체성이 부재한, 종적인 인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의 일신교 사상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스의 신들과 페르시아의 신이 다른 것으로 이 차이를 꼽았습니다. 유일신 사상의 신은 영원성의 담지자로 그리스인에게는 “자연(퓌지스)”에 해당할 무엇인 반면, 그리스인들은 (단순히 여러 신을 모셔서 다른 게 아니라) 자연과 구별되는 신을 모셨다는 거죠. 그리스의 신들은 개체적입니다. 기능을 담지하지만 개별적이며, 반복 속에서 지속하는 동일성으로 얘기될 수 없다는 거죠. 그리스의 신들은 개체적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넘어서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반복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 위업이 그들의 특징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아렌트는 그리스의 신들은 그런 업적을 인간과 함께 해야만 하는 존재였고, 결국 위업은 인간과 공동 수행해야하는 존재였다고까지 해석합니다.
여기서 시작한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아렌트에게 정치는 불멸성을 추구하는 영역입니다. 단순히 영원한 무엇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게 분명하지만, 함께 무엇인가를 해냄으로써 성취하는 (마치 영원할 것만 같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일이란 것이죠.
정치는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 필연성이 강요되는 것은 생존이고,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노동이죠. 그런 노동을 노예들에게 맡기고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가 성립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 사이, 타자 사이에서 아렌트가 강조하는 것은 시선입니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 속에서 서로가 되는 무엇이란 것이죠. 여기서 볼 가치가 없는 것들은 지워집니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에서의 실재성이란 것은 타인들 사이에서 다수의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관점에서 보는데도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 시선을 끄는 것, 주목을 끄는 것, 그런 게 실재적인 것이란 거죠. 그러니 현존한다고 해서 다 실재하는 건 아닌 게 됩니다. 노예 같은 것, 자질구리한 것, 그런 건 실재성이 없다는 거죠.
이 실재성을 확보케 하는 활동들은 여럿입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향유하는 일, 불멸적인 폴리스를 이룩하는 일, 영원한 진리를 관조하는 일, 이렇게 셋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활동들의 진정한 의의는 그것이 보여지고, 보여질 수 있다는 현실에 근거해서, 그 활동의 실재성이 담보되기에 오직 공적 영역에서만 의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공적 영역을 구축하는 일이 폴리스를 세우는 일이죠. 아렌트에 따르면 이는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서로의 평등, 서로의 가치를 상호 인정하는 조건 속에서, “자신들”의 “경계”를 확보함으로써 확립된다고 말합니다. 아렌트가 지적하는 것처럼 법이 그 경계역할을 합니다. 이 법은 그들과 그들이 아닌 것들을 구별하는 경계이자, 그들이 그들이기 필요한 윤곽입니다. 이 경계/윤곽 속에서 확립되는 게 소유(권)이고요. 아렌트에 따르면 소유는 단순히 물건을 갖고 향유하는 일과 다릅니다. 그런 것은 “부”일 뿐 소유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소유는 바로 이 정치의 영역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요구되는 무엇이자, 바로 그 일원이기에 보장되는 무엇입니다. 보통 땅인데, 단순히 땅이 아니라, 그 땅과 함께 그 땅을 파먹으며 살아가는 가정의 가장을 한 시민으로 보장해주는 권리이죠. 그래서 가장이 죽기 전까지 아들은 노예이고, 시민이 아니였던 것이고요. 하여간 이렇게 평등하고, 대등하며, 가치 있는 자들로 한정된 집단 안에서 보이고 보여주며 자신을 확립하고, 이런 활동 속에서 불멸의 성취를 이룩하는 일이 정치였다고 아렌트는 말합니다.
때문에 향락을 즐기는 일(예술 활동), 공적 세우기(전쟁 활동), 철학하기(관조 활동) 모두가 정치였고, 입법 따위는 정치가 아니었다고 애기하죠.(아렌트의 지적처럼 정치는 입법활동과 무관했습니다. 이는 건물을 세우는 일처럼 전문가를 불러 시킬 일이었습니다.)
하여간 아렌트는 저런 정치 영역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자신의 필멸성을 극복하는 불멸성을 꿈꾸고 성취해낼 수 있었는데, 그게 이제 안 되게 되었다는 거죠.
재미난 것은 저걸 뒤엎은 사회의 기원과 발흥에 대한 아렌트의 진단입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는 애초에 “지배”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지배는 가정의 영역에 속했다는 거죠.(그 증거로 “지배자”를 칭호로 삼기 꺼려했다는 보고들을 활용합니다.) 가정의 영역에서는 지배가 필요합니다. 생산을 위해 걍 해야하는 일들을 분배하고 강요하며 사이클이 돌아가야하니까요. 그런데 이 영역이 공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등장한 공적인 지배 영역이 사회란 게 아렌트의 주장이죠. 아렌트에 따르면 이건 역사적인 특수성 속에서 실현된 겁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니 생략하겠습니다.(기독교에 대한 아렌트의 굉장히 독창적인 이해와 기독교 국가에서 등장한 근대 국가에 대한 독창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설명되어야합니다.) 하여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결국에는 부를 증대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근대 경제학은 모두 똑같은 게 된다는 것이죠. 아렌트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이런 모든 조류에서 “공산”(공동생산, 공동이익 등)을 전제로 깔고 있고, 그 공산을 추구하는 일이 사회의 유일한 목적이니 당연히도 “지배”일 수밖에 없다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합니다.(이게 아렌트식의 경멸과 회의에서 비롯되는 심드렁함이죠ㅋㅋ)
근데 이런 설명이 제가 보기에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요. 라발과 다르도는 프랜시스 후쿠시마의 홉스 및 고전 경제학 해석이 틀렸다고 방방 뛰는데(2장 뒷부분) 제가 보기엔 후쿠시마가 맞는 얘기를 했고, 그의 그러한 해석은 아렌트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일 거에요. 실제로 제가 보기에도 홉스는 “기개” 즉 “명예”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어요. 현대에는 “믿음+욕구=행위”란 구도를 당연시하고 있고, 그래서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플라톤은 믿음(지성)과 욕구(욕구) 뿐만 아니라 뜬금없이 기개를 말하니 이상하단 것이죠. 근데 강성훈 샘이 열심히 반박하고 설명하며 보이듯이, 애초에 지성혼, 기개혼, 욕구혼은 각각 고유한 믿음과 욕구를 지니고 있고, 그 사이에서의 갈등을 플라톤이 말하는 거거든요. 그니까 믿음+욕구로 애초에 설명될 수 없는 거죠. 각 혼마다 갖고 있는 믿음+욕구 차이가 갈등의 근원이거든요. 홉스가 보기에 당대의 문제 원인은 기개-명예였습니다. 홉스는 그걸 최대한 통제하려고 하죠. 그래서 자연법에 명예훼손 금지 같은 게 (뜸금없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근데 푸펜도르프식의 자연법에서 자연법은 도덕-명예와 무관한 것으로 설명되어요. 푸펜도르프는 자연법이 사회의 구성 조건이자 지속 조건일 뿐 다른 게 아니란 입장을 취하거든요. 그래서 근친상간 금지와 일부일처를 자연법에서 빼버립니다.(이걸로 푸펜도르프는 욕을 엄청 먹습니다. 당대인들은 저 둘은 이성에 의해 연역되는 도덕법칙인데 왜 맘대로 빼냐하면서, 푸펜도르프가 근친상간과 간통을 일삼는다고 비방했습니다ㅋㅋ 역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점잖음은 덕성이 아니었죠. ) 푸펜도르프는 저 두 금기는 도덕적으로 합당하며, 사회의 발전에 요구될 수 있는, 그런 제도일 수는 있어도, 구성과 지속에 필수적이진 않단 입장을 취하죠. 그에게 있어 모든 사회는 현존하기만 했다면 자연법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다만 그 수준은 달라질 수 있고, 그게 자연법과 환경에 입각해서 제도를 잘 확립할 이유가 되는 거죠. 하여간 이쪽 조류에서 자연법에 기초한 사회/경제/정치 이론들이 18세기에 쏟아져 나오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정치의 영역이 공정한 분배의 영역 따위가 됩니다. 근데 아렌트가 퉁명스럽게 말하듯 저딴 분배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부의 문제일 뿐이고, 결국 소유권 절대 보장이나 소유권 폐지 모두 부를 증식시키는 효율성을 늘리기 위해 “소유”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죠.(아렌트는 그래서 맑스나 프루동이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보이고 모순을 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도식을 적용해보면 매우 일관적으로 사회의 절대 지배를 옹호하고 있다고 심드렁하게 말합니다ㅋㅋ)
하여간 아렌트가 보기에는 결국 우리가 해내야할 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해야할 일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전횡을 막고 정치의 영역을 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오히려 사회를 잘 이해해서 정치가 나올 수 없게 꽁꽁 묶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일이 되죠. 후자가 은근 중요합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현대에는 모든 이들이 노동자면서 노예입니다. 자유가 불가능해요. 근데 이게 단순히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식으로는 극복될 수가 없어요. 지금 인류의 지속 조건 자체가 노동을 통해 유적 결합(영원한 종의 지속에 상응되겠죠? “유적 존재”, “인류”, “인권”이 나온 것은 이 영원성 숭배에서 비롯되었고, 그건 노동이 다른 모든 것을 잠식하면 일어나는 당연한 일이라고 아렌트는 진단합니다ㅋㅋ)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아렌트는 이게 극복이 안 되니까 허망한 일, 한편으로는 자아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는 일, 그리고 우주로 진출하고 기술로 인간 조건을 완전 새롭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뻘생각이 유행하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뭐 본인도 별 답은 없지만, 적어도 문제 자체를 직시하고, 저런 뻘생각으로 극복 운운하진 말자는 그런 아렌트다운 입장인 거죠ㅋㅋ
하여간 그래서 아렌트는 현대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서로가 서로가 되는 특별한 관계가 가능할지, 보이고 보여지며 상호인정을 할 수 있고, 그 중에서 정말로 주목되는 무엇인가를 누군가가해내고, 그것을 해당 공동체가 기념하여 불멸성을 부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저작이 그런 걸 위한 거죠ㅋㅋ(가능성을 찾고 있거나, 적어도 극복해야할 무엇을 밝히거나…) 마지막 진정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고, 끝까지 반시대적이고, 고전주의적이며, 공화주의적 시민이길 원했던 양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ㅋㅋ
4.
아렌트… 좀 고독한 사람이었을 거 같더군요ㅋㅋ 함께 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 뿐일 그런…
세넷이 본 아렌트가 제가 본 아렌트랑 비슷할 거 같습니다. 아렌트도 세넷처럼 장인정신 같은 거 중요시하는데… 너무 기준이 높은 거죠ㅋㅋ 세넷은 거기서 좀 더 희망적인 것이고...
아렌트 실제로 굉장히 냉소적입니다. "근대 세계는 필연성에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의 해방, 즉 노동하는 동물이 공적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비록 이것이 그다지 탐탁스럽지는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노동하는 동물이 공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 진정한 공적 영역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활동만이 존재할테니 말이다.”
아렌트는 일단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서… 정확히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헤어질 결심이 떠오르네요ㅋㅋ),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 거죠. 아마 절망은 본인과 함께 무엇을 해나갈 사람을 찾지 못한? 그런 이유 때문일 거고요(이건 그 양반의 까탈스러운 성격도 한 몫 했겠지만ㅋㅋ)
근데 라발과 다르도를 생각해보면 아렌트식의 냉소 또한 중요합니다.
라발과 다르도보다 아렌트가 더 세게 나가는 거거든요. 애초에 노동-생산으로 세상을 보면 기껏해야 부의 문제만 볼 수 있다는 게 되고, 합리성 안에 갇힌 다는 거죠.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라발과 다르도가 지적하는 문제, 요것만 해결하면 된다는 식의 환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나름 니체-들뢰즈랑도 통하는 게, 결국 중요한 것은 영원, 단절이잖아요? 과정주의, 연속, 영원회귀는 조건일 뿐이고, 이를 직시하면 모든 게 무의미하죠. 그런 무의미한 거대한 흐름에서 자신(우리)를 분리시켜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국 사유란 환상을 매개로 기념비를 세워야하고… 이것은 언제나 새로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설립이 그런 것처럼요ㅋㅋ 새롭지 않다면 할 이유가 없는 그런 것이기도 하고요. 수백만 년이라는 지질학적 척도에서 보면 가장 단단한 바위조차도 부드럽게 흐르는 유체가 됩니다… 결국 설립은 저런 수백만 년을 염두에 두고서도 "기념비"를 세울 용기가 있을 때 가능합죠...
암튼 그래서 냉소와 회의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절망은 하지 않는다… 그런 입장입니다ㅋㅋ 그렇게 비관적이진 않습니다. 갠적으로 세넷이나 하마구치 류스케처럼 주변에서 찾아내는 것과 냉철함을 겸비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ㅋㅋ 아렌트는 현대의 사례를 너무 안 쓰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세넷의 사례도 정말 좋죠ㅋㅋ 전 아직도 그 요리 교실 얘기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를 목격해낼 수 있는 힘, 기록할 수 있는 힘이 일단은 필요하겠죠. 해결책은 그 다음이고요ㅋㅋ
사실 세넷도 해결책은 전혀 없습니다. 좀 더 믿고 나아가자는 것이고… 아렌트도 그런 입장입니다. 단지 극복해야할 조건을 좀 더 선명하게 그려낸 것이고요.(넘 센 상대라 문제긴 하죠ㅋㅋㅋ) 그래서 세넷이 아렌트를 비방하진 않는 거고요ㅋㅋ 하이데거만 비방하죠.
암튼 <인간의 조건>은 좋은 책입니다ㅋㅋ 취향만 맞으면 무조건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비관낙관하니까…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생각나는데ㅋㅋ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승리를 자축하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인간이 일구어 나가는 "역사"는 끝났고, 니체 식의 최후의 인간이 최종의 형태가 되었다는 매우매우매우 비관적인 진단이에요ㅋㅋ 후쿠야마는 그 속에서 뭘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정치사상(?)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손가락 빨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후에 신뢰 기반의 사회, 현대 사회의 유동성을 견뎌낼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정치 따위를 얘기하고 있는 거죠ㅋㅋ 적어도 최악은 막기 위해서 말이죠. 반대자들이 약간 색안경을 끼고 봐서 그렇지… 후쿠시마는 원래 이런 입장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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