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아렌트가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말하고 싶네요. 이를 위해 다르도와 라발을 좀 얘기하고, 이들의 작업과 비교하면서 아렌트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일단 다르도와 라발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계점이 많고, 이들을 제물로 아렌트를 설명하게 되겠지만, 이 책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 얘기들이 있다는 점에서 좋은 책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정상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고요.
다르도와 라발은 적극적인 해결책을 내놓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취해서는 안 되는 전략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둘이 비판하는 대상은 여럿이지만, 아마도 아감벤과 네그리와 하트로 대표될 그런 좌파 정치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의 공통성은 이런 것이죠. 둘 모두 현재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X를 상정한 후, 이 X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희망을 말합니다. X는 정말 뭐든 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민중, 주권, 예술, 사건 등등 뭐든 됩니다. 단지 그것을 실체화하고 그것이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고, 그저 기적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멍청한 것이고, 멍청하다는 점에서 다 같은 것이죠. 다르도와 라발은 적어도 그런 것은 거부되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그걸 위해서 좌파들의 “공통의 적”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고, 적어도 자신들이 밝혀낸 공통의 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주장을 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죠.
다만 이러한 실천전략에서 비롯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범좌파들을 집결시킬 돔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장점이 있죠. 하지만 범좌파를 엮기 위한 장치는 그렇기에 조악하고 한계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게 그들이 기꺼이 지불한 대가였는지, 아니면 그들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여간 그들은 “좌파다움”과 그들의 공통의 적인 “신자유주의”를 통해서 말합니다.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반드시 극복해야할 적이라는 게 전제되어 있고, 그러한 극복 전략에서 좌파다움이 발휘되어야만 하는... 그런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게 만드는 한계는 이런 거죠. 뭐 현대 이후 앞과 뒤, 좌와 우, 위와 아래가 뒤죽박죽 섞이는 것이 기본 조건이 되긴 했지만, 다르도와 라발의 역사 서술은 뒤죽박죽 그 자체입니다. 제 진단은 저의 무능력 때문에 판결된 진단이 아닙니다. 다르도와 라발이 분명하게 서술하고 싶어하는 구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서도, 그들의 서술에서 표출되는 모호함과 뒤죽박죽이 보이기 때문에 내리는 판단이거든요. 근데 이런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게 그들의 좌파다움이 발휘되어야하는 근본적인 적대 구도와 무슨 상관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르도와 라발의 서술에서 꽤나 중요하게 다뤄지며, 다른 인물들에 비해 훨씬 더 상세하고, 설득력 있는 서술이 성취된 것은 두 인물에 대한 분석입니다. 하나는 벤담이고, 다른 하나는 하이에크죠. 다르도와 라발에게 있어 이 둘은 양가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기원이 되는 인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해야하지만, 비판할 것이 없게 만드는 그런 이념 제작자이거든요. 다르도와 라발은 푸코의 입을 빌려 둘을 퉁명스럽게 깍아 내리지만, 사실 저런 비판 자체가 먹히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르도와 라발이 아감벤이나 네그리, 하트를 비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저들의 강력함 덕분이거든요. 다르도와 라발은 아감벤과 네그리, 하트를 자세히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안 되는지 설명하지 않는 거죠. 제가 극혐하는 “사회운동”을 표방하는 멍청한 짓거리들은 세계합리성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귀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르도와 라발은 그런 멍청한 사회운동을 표방하지 않고, 긍정하지도 않죠. 이들의 이런 태도는 적어도 그런 멍청한 사회운동들보다 벤담과 하이에크의 세계가 더 합리적이란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합리성과 구별될, 새로운 공통합리성이 개발될 필요가 있고, 이를 매개할 새로운 통치성이 개발될 필요가 있죠. 하지만 적어도 그런 개발은 저런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하기만 한 헛짓거리랑은 구별되고, 그래서 저게 거부되는 겁니다. 다르도와 라발은 대놓고 얘기하지 않지만요. 결국 벤담과 하이에크는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던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죠. 때문에 다르도와 라발의 서술은 양가적이게 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비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찬양하게 되는... 그런 사태가 연출되는 겁니다. 또한 다르도와 라발이 그들을 극복해야한다는 규범을 전제로 깔아두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고요. 도대체 어떻게 극복 가능하겠습니까? 졸라 어려워요. 그러니까 다른 답지들이 거의 폐쇄되는 겁니다. 다르도와 라발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말하는 쪽 마저도 거부합니다. “정치”가 왜 상실되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말한다는 볼멘소리로 말이죠.(귀환과 상실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다르도와 라발의 기획은 그래서 엄청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저같이 딱히 좌파적이진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하이에크면 좋은 답이란 생각이 들테니까요. 현 시대의 문제는 결국 하이에크가 꿈꾸었던 세상이 되지 않아서, 멍청한 놈들이 하이에크의 사상을 오남용해서 생긴 일이 아닌가 생각해도 이상할 것 없는 서술이기 때문이죠. 결국 이를 극복하는 것은 그래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됩니다. 저 또한 하이에크가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이에크면 말이 통할 사람이고 괜찮은 편이란 생각이 들고, 굳이 저걸 깎아 내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거든요. 외려 깎아 내리는 사람들을 멍청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고요.
바로 다르도와 라발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기획, 범좌파적 연합 기획에는 그래서 한계가 생깁니다. 이걸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을지가 중요하고요.
다르도와 라발의 서술은 역사적이고, 그들 자신에 따르면 계보학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작업을 계보학적으로 서술하지 못해서 저런 문제가 생긴 겁니다. 원래부터 서술이란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기원을 폭로하면 도그마가 사라진다고들 생각하고 그래서 역사서술은 언제나 “비판적”일 수 있다고들 착각하기 쉬운데, 이건 진짜 착각입니다. 렌스 보드는 <인문학의 새로운 역사>에서 정말 방대한 인류의 인문학“적” 성취들 속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패턴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서술의 규범화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서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어느 순간부터 규범처럼 받들여진다는 것이죠. 보드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서술적이었습니다. “시”라고 불리는 것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공통 패턴을 기술하고, 그들 사이에서 구별되는 종류들을 목록화하며 그들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는 차이를 기술한 것이었다는 거죠. 근데 이게 후대에는 “시다움”을 의미하게 되었고, 이에 어긋나는 것을 “틀린”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현상, 특정 현상에 대한 서술 성취가 규범으로서 여겨지고, 이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것이 인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패턴 중 하나라고 보드는 주장합니다.(뭐 이 주장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피터 버크의 <지식의 사회사> 같은 것이죠. 주의해야할 일반 현상 같은 것에 불과하고, 일단 흩어진 인문학사 서술들을 종합해서 모아두는 게 보드의 핵심 목적입니다.) 역사 서술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다르도와 라발은 자신들의 서술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밝힘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성공은 우연적인 것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알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서술이 설득력 있으면 설득력 있을수록, 신자유주의는 우연에 의해 확립되었지만, 매력적이고 합리적이며, 딱히 나은 대안이 없는 지배담론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그렇기에 니체는 계보학적 서술에서 절대로 하나의 기원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지 않았던 것이고요. 니체는 투쟁으로, 전혀 다른 현상들을 이원대립구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계보학을 서술했습니다. 즉 내부와 외부 모두 드러나게 했죠. 그러니 양자택일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특정 세력이 장악을 하고 있고, 그것이 역사 전체를 지배했어도, 언제나 반대는 있습니다. 지배세력의 관점에서는 뻘짓이고, 무의미하며, 이해불가능한 짓거리지만,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의미 있는 무엇으로 보일 “활동”인 무엇이 말이죠. 니체에게 있어 계보학은 이념적인 이원대립 구도 속에서 현상들을 재구성해보는 활동입니다. 제 논문에서 설명되었듯이 니체가 도입하는 이념적 이원대립 구도야말로 계보학의 핵심이고, 계보학과 추측적 역사학을 구별케 하며, “실천”이란 것을 가능케 하는, 즉, 행위자가 반시대적일 수 있게 하는 바탕입니다. 이념적인 이원대립 덕분에 그게 가능한 것이죠. 어느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가 무슨 의미이든, 이념적인 이원대립 구도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념적인 이원대립 구도의 적용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행위자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도 중요치 않고, 그것이 역사에 어떤 의미였는지도 중요치 않습니다. 이념적인 이원대립 구도가 중요한 것이고, 그 관점을 통해서 무엇이 보이냐가 중요한 것이고, 거기서 무엇을 선택할지가 중요한 것이죠.
다르도와 라발의 서술은 애초에 계보학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실패한 것이란 얘기입니다. “자유주의”란 한정된 틀로 보니까 자꾸 문제들이 섞이고 뒤죽박죽이 되는 거에요. 하이에크는 과거의 귀환인가요? 다르도와 라발에 따르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기도 해요. 하이에크는 과거의 귀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기도 하죠. 다르도와 라발이 분석하려는 작업이 그런 것처럼요. 다르도와 라발은 통치성을 통해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새로운 건가요? 정확히 말하죠. 이거 베버고, 베버가 처음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베버가 법학자 시절부터 당연시했던 주장이죠. 만약 자유주의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학-경제학-사회학-인류학-종교학-문화-공화주의 등 제가 “범사회담론”이라고 부르는 식의 구도로 현상들을 보았다면 절대로 놓치지 못했을 무엇입니다. 애초에 공화주의는 주체를 만드는 사상이고, 고대부터 이상적 주체에 대한 인간의 환상을 통해 끊임없이 귀환한 삶의 형식이거든요. 삶의 형식. 그렇습니다. 문화과학, 역사과학, 생철학 뭐라고 불리든 19세기 범인문학 진영은 다 이런 거 분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울 게 없고, 그러니까 그들의 관점이 (적어도 관점의 관점에서) 우리보다 못하지도 않은 것이죠. 신자유주의만 탄생한 게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에 대적할 수 있는 것들도 다 탄생한 거죠. 무엇들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단지 자유주의로 국한하고, 기원만 서술하는 일원구도로 그려내니 보이지 않게 되어 문제인 것이고요. 애초에 정말로 “계보학적”이었다면, 마크 비버가 불만을 토로한 것처럼 계보학이란 단어를 그저 아무 데나 붙이며, 적당히 푸코의 세례로 퉁치고 넘어가려고 하지 않고, 정말로 “계보학적”이려고 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였단 소리입니다. 언제나 신자유주의가 보일 것이고, 언제나 저항도 보였겠죠. 다르도와 라발은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든 구별하게 하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반복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그렸지만요. 계보학적이었다면, 언제나 신자유주의적이었고, 언제나 저항은 존재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극복이란 것도 좀 더 내려놓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고요.
재미난 것은 아렌트가 “우리의 극복이란 것도 좀 더 내려놓고 말”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렌트는 계보학도 거부합니다. 이원대립 구도의 이념성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그렇죠. 아렌트가 말하는 조건은 이념적 이원대립 구도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는 개념적 분석틀입니다. 노동은 언제나 변천하죠. 우리가 생존을 위해 반복하는 모든 것이 노동입니다. 숨쉬기도 노동이죠. 하지만 고대의 숨쉬기와 현대의 숨쉬기는 다릅니다.(제임스 네스터의 <호흡의 기술>을 보면 뭐가 달랐는지 잘 얘기됩니다. 네스터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개를 느끼죠. 지천에 널려 있음에도,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임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서 통용되지 않은 “잃어버린 기술”로서의 숨쉬기를 그려냅니다. 때문에 분개라지만 희망입니다. 우리 인류가 오랫동안 잘 해왔지만, 지금은 안 해서 문제인 것, 그러나 쉽게 배울 수 있기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갖는다면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문제니까요.) 마찬가지인 것이죠. 농사를 지어도 고대의 농사와 현대의 농사는 다릅니다. 고대 사회를 반복 재생산하는 것과 현대 사회를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요. 아렌트는 그런 차이들 속에서 그것들을 비교할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겁니다. “인간의 조건”은 비어 있는 개념이에요. 어떤 본성론도 전제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수용합니다. 인간이 매트릭스 세계에 갇힌다면, 지금과는 너무 다른 것들이겠지만, 거기서도 발견할 수 있을 무엇을 찾게 하는 무엇이죠. 아렌트는 생명을 유지하고, 시공간 속에 지속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낼 도구로 인간의 조건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규범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 서술이 아니고, 그래서 실천적일 수 있습니다.
아렌트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인간의 조건이 가진 불멸성입니다. 이건 영원성과 다릅니다. 같은 것으로서 계속해서 반복하며 지속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의 삶이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서, 그리고 인간 역사의 븅신성 속에서 지금과는 너무 다르게 바뀔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에도 결국 다른 누군가가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면, 인간의 “행위”란 인간의 조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너무나도 다른 활동이 될 것이고, 다른 의미를 갖겠죠. 하지만 행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면 말이죠. 인간의 조건은 바로 이 점에서 참 고집스럽고, 불멸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불멸성 덕분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희망할 수 있는 것이고요.
아렌트는 모든 것이 바뀌었고, 결국 노동하는 인간이 승리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렌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렌트의 철학이 포기와 절망을 정당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절망은 불가능합니다. 행위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우리가 찾고 싶은 것이 행위라면, 행위는 이미 있습니다. 그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행위들을 어떻게 재배치하고, 어떻게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방식으로 구축할지는 문제겠지만, 적어도 행위가 현존한다는 사실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죠. 아렌트가 자아로의 후퇴 같은 것을 븅신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진실 때문입니다. 눈 앞에 가능성이 있는데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죠.
아렌트는 이런 사람입니다. 아렌트는 그래서 다르도와 라발이 비판하는 아감벤과 네그리, 하트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몇몇 활동에 기대를 걸며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멍청이들과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아렌트는 노동의 승리에 경멸을 느끼지만, 아렌트는 노동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으로부터의 절대적 해방 따위를 말하는 멍청이들을 혐오하죠. 노동은 인간의 조건입니다. 많은 것이 바뀌어도, 바로 그 바뀐 현실 속에서 무엇인가는 노동이겠죠. 그게 숨쉬기만 남았을 수도, 아니, 숨쉬기조차 안 남고, 그저 신진대사만 남았을지라도 말이죠. 아렌트는 신자유주의이든, 현대이든 그것이 현실이라면 부정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꿈꾸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양분으로 취할 이유는 없거든요.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현실을 보지 않는다면 결국 미래는 허망한 게 되고, 실천을 정당화하기보다는 실천하지 않고 관조하는 일을 정당화하게 되거든요. 아렌트도 정확히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꿈꾼다면 현실부터 직시하라는 것이고, 미우나 고우나 이것이 바로 현실이고 내가 긍정해야할 무엇이고, 잠재력을 발견할 무엇이란 것이죠. 이것만 없애면 무엇인가가 될 것이라는 허수아비 만들기가 아니라, 바로 이 속에서 이미 있는 것들 사이에서의 이것들과 함께 추구해야할 변화인 것이죠. 아렌트는 그 점에서 다르도와 라발이 비판하는 멍청이들과 다릅니다. 실체화하지 않거든요. 행위는 아렌트가 꿈꾸는 인간의 활동이지만, 사라진 적도 없고, 예수강림과는 다른 무엇입니다. 노동, 작업, 행위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다르게 되었으면 할 무엇이지만요.
아렌트는 그래서 훨씬 희망적입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꿈꾸지 못하게 만드는 어려운 조건들도 있죠. 아렌트는 (저처럼)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 체험할 수 있는 특권적 체험이 된 것에 아쉬움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유의미한 체험이고, 그것이 희소한 것이 되는 게 아쉽다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할 문제가 되지, 포기할 문제가 되진 않거든요. 아렌트는 사유가 그런 것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공동체를 체험하는 일보다는 그래도 흔한 것으로서 말이죠. 아렌트는 적어도 지금 현실에서 가능성을 추구하려면 사유부터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합니다. 뭐 당연한 것이죠. 결국 노동은 작업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고, 작업은 그것의 모델을 따르기에, 결국 “조직화의 힘”은 사유를 원천으로 하거든요. 단지 사유가 힘을 잃고, 찬란하게 빛나는 모델들이 인간의 “세계” 속에서 사라진 것이지, 사유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유가 찬란하게 빛나는 모델들을 세계 속에 던지는 힘을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가능성은 망실되지 않았습니다. 잠재력을 키우고, 현실화를 성취하는 게 문제일 뿐이죠. 아렌트는 그렇기에 “사유”를 다루는 책을 낸 것이고요.
뭐 아렌트가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렌트의 독특한 해법, 미로 같은 대답이지만,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해법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을 너무 강한 것으로 그리지도 않고,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으면사도, 그 무엇이라도 바뀔 수 있을 것만 같은 잠재적인 다수적 현실을 그려내는 “철학태”를 성취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아렌트는 저번에 말했듯이, 반시대적이고, 고전주의적이며 공화주의적인 마지막 철학자입니다. 하지만 아렌트가 마지막일 이유는 없습니다. 열려있고, 언제든 아렌트에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책을 써냈죠. 제가 과거에 말했던 “철학의 깊이”는 이런 것이기도 합니다. 굳이 왜 말해야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면서도 행위 논리 속에 함몰되지 않는, 불멸할 것만 같은 기념비이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도움이 되고 필요 없어질(바로 이 쓸모가 사라지는 것을 기대하는) 구체적인 지침서이기도 한 그런 철학이거든요. 이런 철학에만 깊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니체 말마따나 이걸 “깊이”라기보다는 “높이”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요.
좋은 책이라고 말해놓고선 욕만 한 것 같네요... 좋은 책입니다... 그걸 표현하는 제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인 거죠... 그런데 다르도와 라발을 읽으니 오를레랑의 <가치의 제국>이 더욱 대단하게 보이더라고요. 다르도와 라발 덕에 오를레앙이 다루는 문제가 더욱 잘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다르도와 라발이 주장하듯이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을 표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극단적 자유주의는 오히려 매우 현대에 등장할 뻘소리고, 자유주의의 등장은 언제나 특정한 질서정연한 사회관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죠.(질서정연한 사회에 대한 비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롤즈가 주장하듯 결국 특정한 정의관이 안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질서정연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다르도와 라발은 질서정연한 사회관 자체는 분석하지 않는데, 오를레앙은 이걸 직접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질서정연한 사회상을 그려내게 된 계기입니다. 이 문제도 “서술의 규범화”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효용학파의 아버지(사실 이게 좀 빡센 문제인게... 영프독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주창합니다ㅋㅋ 오를레앙은 레옹 발라 및 파레토를 시조로 삼는데, 독일 쪽 저자들은 카를 멩거를 시조로 삼고, 영미 쪽은 제번스나 에지워스를 시조로 삼습니다ㅋㅋ) 중 한 명인 카를 멩거는 교환에서 최적-안정을 가능케 하는 한계효용적 전제(오를레앙이 정확히 분석합니다. 필요한 전제가 무엇인지 말이죠.)를 경험적 사실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멩거는 한계효용이 심리학적으로 사실인지와 무관하게, 그런 경향성을 경제학적인 사태를 기술하는 구성적 요건으로서 제시한 거였습니다.(본인이 글케 얘기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멩거의 작업은 규범담론이기도 했습니다. 멩거의 의도는 이런 거였죠. 오를레앙이 분석을 통해 밝힌 경제학적인 전제를 멩거는 일반적인 전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전제가 경제학적 행위가 창출되는 조건이고, 그 한계 안에서 자신이 “경제”라고 불리는 최적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였죠. 멩거는 경제 활동이 범역사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바로 그렇기에 자신의 경제학 이론은 보편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멩거의 경제 규칙은 특수한 조건 속에서 필연적 법칙에 의해 창출되는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멩거는 이게 모든 사회 현상에 적용되어야한다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런 것을 의도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경제 현상이라고 불릴 현상이 어떤 것인지를 규정함과 동시에, 그 안에서 추구되는 목적들이 어떨 때 최적화될 수 있는지를 보인 것이죠.
“경제”를 다른 모든 인간 활동의 모범으로 본 것은 다른 인물들이죠. 오를레앙은 발라와 파레토가 그런 입장이라고 주장하는데, 중요한 것은 발라나 파레토가 실제로 그런 입장이었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계에 국한해서 할 얘기를 전체에 대한 모범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것은 당연하지 않았기에 누구는 그렇게 보고 누구는 그렇게 보지 않는 혼란이 있었다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이죠. 오를레앙의 분석이 없다면 이런 혼동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오를레앙은 저런 최적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최적화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변형하려고 했는지, 어떤 식으로 이론을 업그레이드 하여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재구성하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주죠. 결국 서술이 규범화가 되었는지 또한 중요치 않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보았는지, 그게 지금은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거죠.
다르도와 라발은 자세히 안 다루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질서정연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걸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고요. 다르도와 라발이 그려내는 하이에크는 저런 최적화가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짐과 동시에, 저런 최적화를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신자유주의를 발명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최적화가 가능하거나, 대안적 최적화가 가능해야지 하이에크를 넘어설 수 있죠. 이걸 고민하려면 오를레앙의 <가치의 제국>도 필수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를레앙은 저런 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학적 재현-대표-표상 장치를 가르쳐줍니다. 어떤 도구를 가지고 어떤 최적화를 꿈꿀 수 있고, 그것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한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현대적인 재현-대표-표상 장치는 무엇 무엇이 있고,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 그에 대응하게 만드는지를 가르쳐주죠.(그리고 오를레앙은 대안적 최적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하죠.) 다르도와 라발이 주장하는 담론들을 경제학적으로 번역할 때 오를레앙은 참 많은 도움을 주죠. 정말 좋은 책입니다...
암튼 결국 중요한 것은 질서정연한 사회관이란 것이고, 그런 사회를 대충 과거 유토피아 담론처럼 동화 속 도시로 그려내지 않고, 행위들이 창출해내는 패턴을 바탕으로 모델링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전제될 수 있는 몇몇 조건이 정말로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고려해야 “새로운 합리성”이 가능하다는 것... 그런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다르도와 라발 책은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는 책이고 그래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가르쳐주는지와 무관하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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