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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목소리 K선생님에게 보내는 카톡 “양심의 목소리”에 대해서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제 논문에는 안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이는 추후 설명) 논문 방향과 다른 방식으로 미리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아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양심의 목소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양심 개념을 다룰 필요가 있는데, 양심 개념을 다루기 위해서는 좀 뜬금없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문헌학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양심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conscientia가 유의미한 방식으로 의미를 얻는 것은 자기인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synderesis의 번역어로 여겨지면서인데,(conscientia도 자기인식이란 뜻입니다. 어원적으로) 저 신데레시스의 개념화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죠. 소.. 더보기
철학의 위로 한 사람의 전기는 한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한다. 1592년 3월 28일 보라비아 남부의 한 마을에서 “요한”이란 이름의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한명의 요한, 후스를 마주해야한다. 후스의 육체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에서 불길 속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그 재마저 라인 강 어딘가에 뿌려져 그 누구도 그의 육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육신이 사라진 날 이후 보헤미아 사람들은 둘째 아들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설혹 그것이 강제된 것일지라도, 보헤미아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유골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기억하길 선택한 것이다. 보헤미아 사람들이 요한이란 이름을 선.. 더보기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추언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추언 조금 급조한 감이 있지만 데카르트 성찰에 대해 정리한 글을 쓰게 되었다. 해당 글 안에서 쓰기 뭐해서 넣지 않았지만, 저런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여 글을 추가적으로 남긴다. 일단 이런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어쨌든 글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글은 본인의 글도 아니라, 보통 옛날 사람의 글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서 해당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쉬운 일이라고 여긴다. 글에 이런 문장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주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글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그 글을 읽을 수만 있으면 말이다.(과거의 언어는 오늘날과 다르고, 우리는 그저 시대적.. 더보기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데카르트와 심신이원론 데카르트하면 심신이원론을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표될 데카르트의 철학은 결국 심신이원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중요하다는 통설은, 다른 통설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깃들어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중요하며, 그의 철학은 분명 “심신이원론”을 통해서만 획득될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글 중 괜찮은 것이 참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 소개된 글을 기준으로 생각할 경우 그런 것이지만, 꼭 장소를 국내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데카르트에 대한 좋은 글들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좋은 연구들도 많고, 좋은 글들도 많지만, 데카르트에 대한 수많은 문헌들 속에 감춰.. 더보기
흄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 대한 코멘트 꽤나 예전부터 흄의 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쓰게 된다. 일단 책 자체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유명한 흄 연구자인 스티븐 버클이 인정하듯, 흄에 대해서도, 흄의 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흄 철학의 핵심은 인과를 부정한 것에 있다는 것이나, 흄의 는 그의 를 축약한, 조악하게 축약한 홍보 책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통념이다. 하지만 버클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통념은 근거 없는 것이다. 흄은 분명 회의주의자지만, “실재론적인 회의주의자”이고,(물론 스티븐 버클이 지적하듯, 이런 라벨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회의주의냐이지, 어떤 이름의 회의주의냐가 아니니까 말이다) 는 그 통일성과 완전성에 있어 흄 본인이 평가한 것처.. 더보기
철학 책을 읽을 때 하기 쉬운 실수 게시판에 올린 글 복붙 사실 이 글은 모든 철학자들이 사기꾼이라 주장하신 어떤 회원님을 위해 쓰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 분은 강퇴되어 제 글을 읽지 못할 것 같군요... 제 게으름이 문제입니다. 꼭 그 분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읽으면 좋을 내용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최근의 논쟁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공유해봅니다.(전 최근의 논쟁들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꼭 그 회원분만이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철학자의 책을 읽을 때 공통으로 범하는 실수는, 어떤 철학자의 책을 몇몇 문장이랑 구별하지 않는 것인 듯합니다. 칸트가 “도덕과 행복은 다르다.”라고 주장한 것을 예로 들어보죠.도덕과 행복은 다른가요? 다를 수도 있고,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문장만으로 칸.. 더보기
칸트와 오늘날의 메타윤리학 스캔론의 책에 혹평을 하면서도 구체적인 도식은 제공하지 않은 것 같아 첨언을 한다. 사실 나의 첨언은 거의 모두 칸트의 도식을 반복하는 건데, 이 사실에 약간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내가 칸트를 전공하는 이유는 칸트가 (남들은 갖지 못한) 대단한 통찰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칸트의 통찰을 다른 수많은 사상가들에게서도 발견하고 있고, 그들의 계보만을 엮어도 30세대 정도는 될 것이다. 내가 칸트를 선택한 것은 효율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학문 관념은 19세기 독일 대학의 현대화에 의해 형성되었고, “독일 대학의 현대화”를 이끈 담론들에서 칸트의 언어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칸트를 전공하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지금도 난 칸트가 남들에게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더보기
신화란 무엇인가? 최근 신화에 대한 책을 한권 보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신화에 대해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신화를 다룰 때 어려워지는 면은, 모든 학자들이 신화의 정의를 제각각으로 내리지만, 그러한 정의의 동기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협소한 신화 정의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단점일 수가 없다. 그는 신화의 다른 면모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유에서 의미를 제한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효과를 지향한다고 해서 기만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투명하게, 상호적-대칭적으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일러나 프레이저(사실 프레이저는 이런 입장이 아니다)가 신화를 자연세계에 대한 것으로 한정지은 것은 당시에 그들이 논의하고 싶었던 신화가 자.. 더보기
중세철학에 대한 오해들 학부 2학년 때인가에 중세철학 수업을 들었고, 그 뒤로 나의 중세철학 이해는 매우 크게 달라졌음에도 중세철학에 대한 나의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중세철학은 뛰어나다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린 적이 없으니 바뀔 것도 없었지만, 하여간 중세인들은 멍청하지 않았고, 그들의 고전 텍스트 이해는 탁월하다는 생각은 단한번도 바뀐적이 없다. 다만 중세철학을 논하는 사람들이랑은 딱히 좋은 사이가 된 적이 없었는데, 그들의 관심사랑 나의 관심사가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부차적으로 그들의 얌전함이 나랑 잘 안 어울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항상 얘기하는 바이지만, 중세의 신학자들은 나만큼이나 가볍고 광신적이면서 폭력적인 인물들이었다. 예의범절이 미덕이 되기 이전, 중상모략과 투박함으로 자신의 정신을 세계에 알.. 더보기
칸트의 <판단력 비판> 해석 - 취미판단의 도덕적 효용 허치슨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허치슨이 이러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세속주의자라던가 자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와 독립적인 도덕의 영역을 학문적으로 확립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무신론의 혐의를 받았고, 이러한 혐의는 부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도덕철학은 기독교와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허치슨의 도덕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고,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꽃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흄과 스미스가 허치슨의 후예라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증명 가능한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에 허치슨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고, 나 또한 허치슨이 구체적으로 .. 더보기